로마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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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 본명 알렉시아누스 바시아누스(Alexianus Bassianus : 208?~235) 제위 기간 222~235
1 소개
전 황제 엘라가발루스의 이종 사촌 동생.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의 권고로 엘라가발루스에 의해 카이사르로 임명되었고 양자가 되었다. 이후 무책임한 엘라가발루스에 대한 반동으로 인망이 동생에게 쏠리자 위기감을 느낀 엘라가발루스가 근위대에게 알렉산데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엘라가발루스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근위대가 도리어 엘라가발루스를 죽이고 알렉산데르를 옹립했다.
2 마마보이 군주
즉위 했을 때는 나이가 14살에 불과해서 실질적인 통치자는 여전히 율리아 마이사였지만, 율리아 마이사가 꽤나 통치에 능했고 그 자신도 대단히 차분하고 얌전하며 예의바른, 말하자면 상식적인 성격이어서 제국은 이후 안정을 찾아갔다. 유명했던 법학자였던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와 파울루스를 근위대장에 앉혔고, 원로원과도 원활히 소통하여 문치를 펼쳤다.[1] 또한, 호민관 및 평민 안찰관 공직이 폐지된 것이 바로 이 황제 치세 때다.
늘 공직자 명단을 항상 끼고 다니며 거기에 나와있는 수천명의 공직자와 장군의 이름을 일일히 다 외웠고, 역사를 익히는 것도 열심이었다. 하지만 여걸이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사망한 후에 섭정 자리를 물려받은 어머니 율리아 마메아는 그 능력이 율리아 마이사에게 미치지 못한데다가, 어머니가 지나치게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지 못했고, 기껏해야 불만을 터뜨리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전형적인 "마마보이"의 증상을 보이며 불운의 싹이 트게 된다.
이 문제 많은 어머니 율리아 마메아는 생전의 율리아 마이사와는 달리 나서지 않을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딸을 제어할 수 있었던 그가 죽자 그녀는 통제력을 잃고 폭주하게 된다.
마마보이 황제는 어머니의 간섭 아래에 유약한 성격 탓에 근위대를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고, 결국에 근위대장 중 하나인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는 율리아 마메아의 명으로 그의 눈 앞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런 때에도 율리아 마메아는 아들이 성인이 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늘 간섭을 일삼았으며, 일껏 들인 명문가 출신의 며느리마저도 심한 질투심에 내쫓고 만다. 물론 황제는 여기에 대해 큰 불만을 느꼈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마마보이들이 다 그렇듯이 어머니의 의사를 거역하지 못했다.
3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이런 와중에 강력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아르다시르 1세와 맞붙게 되는데, 로마 황제로서 군사적인 재능을 시험 받게 된다. 이는 로마 원수정 체제의 고질적 문제점이었다. 물론 황제가 나름 정상적인 성장을 하면서 경력을 쌓았다면 상관이 없겠으나 어머니의 치마폭에 휘둘려온 황제이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마크리누스 이후로 주둔지를 잃고 방치되어 있던 동방 군단들의 문제점은 심각했다
그가 파르티아에 넘겨준 탓에 주둔지도 없던 2개 군단의 병사들은 황제의 소집에도 늦장을 부리는 태업을 하고 있었고, 군율을 잡겠다고 이를 엄하게 처벌했다가 분노한 병사들은 파업을 일으켰다. 수습한답시고 병사들을 전우(콤밀리테스)라 부르면서 "군단병 노릇을 하기 싫으면 그만둬라" 라고 했더니 병사들이 자진 해산해서 2개 군단이 흩어지고 깨어졌다가 뒤늦게 달래서 가까스로 복구된 사건이 일어났다.[2]
로마군의 물량은 이렇게 동방 군단 2개가 잠시 해체되었다고 해서 바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과정이 어떻게 되었든 사산조 페르시아는 막대한 인적, 재산적인 타격을 받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3로로 진격한 나눠서 진격한 로마군 중 이렇다할 성공적인 작전을 벌인 분견대는 하나도 없었다. 위의 2개 군단이 해체되는 등 로마군 쪽의 병크가 상당했지만, 유리한 상황이 되어서도 사산조 페르시아도 생각보다 그렇게 잘 싸운 건 아니었고, 여러모로 로마 못지 않은 쪽팔린 모습을 보여주었다. 병림픽 때문에 사산조는 그후로 오랫동안 로마 제국의 국경을 넘보지 못했고,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국경은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안정되었다. 그래서, 어느정도 명분이 있던 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는 서로의 승리를 선전/주장했다.
로마측은 페르시아에게 큰 타격을 주어 국경을 안정화시킨다는 목표를 달성했고, 페르시아 또한 침공해 들어온 로마측을 어떻게든 격퇴해서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는 명분으로.
4 부하들에게 살해 당하다
문제는 게르만족 침입을 막으러 갔을 때 일어났다.
황제가 무작정 가서는 그 게르만족들에게 돈을 주면서 회유하려 들었다가 평소에 불만을 가진 부하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된 것이다. 바로 어제까지 싸우던 야만족들에게 자기네들이 응당 받을 수도 있었던 대가(=하사금)를 상납금으로 주어지고 무사 통과시켜야 한다면 어느 누가 좋다고 명령을 따르겠는가? 게다가 이번에도 황제 스스로의 의사가 아닌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다만 이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만의 오판이라고 할 수는 없다.황제의 회유책은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 부분 현실적인 판단을 기반으로 했다. 문제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어머니 말을 따라 정책을 결정하는 예의 고질적인 마마보이 근성을 또 다시 드러낸 것과 현지 군단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상황과 맞물려 크나큰 파국으로 치닫았다. 하지만 무턱대고 협상의 대상이 야만족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이미 수 백년 동안의 시간을 걸쳐 로마와 가까운 게르만 족과 먼 게르만족들은 꾸준히 “로마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저서 불쏘시개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로마 제국의 매력"또한 적어도 4세기까진 여전했다. 제일 문명화가 뒤떨어진 프랑크족 출신의 로마 군인들도, 오늘날의 관념으로는 같은 민족일 다른 프랑크 야만족들을 제국군 측에서 사정없이 쳐죽였으며 그들은 오히려 이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프랑크인인 자신을 자랑스러워했으나 어디까지나 로마 군인임을 먼저 내세운 묘비에서도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3]
- ↑ 단, 황제가 담당하던 로마 시민 상고심이 사라진 건 이 황제 때였고, 카라칼라의 로마 시민권 확대 탓에 로마 시민이 너무 많아진 게 이유였다고 한다. 물론 로마 시민은 카라칼라의 개혁 이전에도 이미 그 수가 급속도로 불어나는 추세였던지라 어차피 없어질 운명이긴 했다.
- ↑ 이 해프닝은 공화정 말기의 내전때 카이사르의 심복 군단이 10 군단병들이 임금 인상을 목적으로 파업을 일으켰을 때 카이사르가 "전우(콤밀리테스)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그렇게 원하면 제대시켜 주겠다"라고 한 방 먹여서 다들 데꿀멍해서 알아서 기어들어온 에피소드를 멋도 모르고 그대로 따라했다가 피 본 케이스다. 카이사르야 전장에서 10여년동안 같이 구르면서 끈끈해질 때로 끈끈해진 사이라 병사들이 데꿀멍했지만, 얘는...
- ↑ 3~5세기 동안의 변화가 일순간에 일어났으며 그 모든 게 부정적이기만 했다고 하는 건 아주 예전의 사관에 불과하다. 로마인 이야기는 이런 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때문에 바로 이런 부분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