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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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로마 제국의 왕조. 내란기를 끝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서 시작하여, 그 아들인 카라칼라로 이어졌다가, 중간에 마크리누스가 끼어들어서 잠시 끊긴다. 이후 카라칼라의 이종사촌 엘라가발루스가 뒤를 잇고, 엘라가발루스가 암살된 후에는 그 사촌 동생인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뒤를 이었다가 알렉산데르가 암살되어 최종적으로 단절된다. 세베루스 왕조의 단절 이후 로마는 '위기의 3세기'라고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로 접어들면서 빠르게 쇠락해가기 시작한다. 볼드모트가 나타났나 보다 세베루스 스네이프 지못미
2 역사
- 자세한 내용은 각 황제의 개별 항목 참조.
2.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
오늘날의 리비아 지역인 북아프리카 속주의 기사계급 출신. 페르티낙스의 암살 이후 로마가 내란에 빠진 틈에 황제를 자임하기 시작하여 황제에 등극한지 4년만인 197년 마침내 로마 전역을 장악한다.[2] 내란기 당시 자신을 반대한 자들을 모조리 숙청해버린데다가, 원로원의 권위를 무시한 채 콤모두스에게 내려진 기록말살형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던 탓에 원로원과의 관계는 재위 기간 내내 냉랭했지만[3] 다시금 로마에 평화와 경제적 안정[4]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대중들에게는 꽤나 지지를 받았다.[5]
다시금 적극적인 영토 확장을 시도하기도 한 황제여서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하기도 했고[6], 스코틀랜드 원정도 진행하여서 하드리아누스가 세워놓은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보수하기도 했다.
2.2 카라칼라(211~217)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병사한 이후 그 뒤를 계승했다. 로마 제국 내 모든 자유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것이 카라칼라 시기의 일이다. 군사적으로는 비교적 재능이 있어서 게르마니아 원정 과정에서 꽤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동생이자 공동 통치자로 지명된 게타를 직접 칼로 찔러 죽여버린 것에서 보이듯이 성격이 난폭했고, 이로 인하여 많은 정적들을 만들고 수없이 많은 암살시도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자신의 근위대에게 암살. 카라칼라의 뒤를 이어 마크리누스가 등극하면서 잠시동안 세베루스 왕조는 단절되게 된다. 전한과 왕망?
2.3 엘라가발루스(218~222)
카라칼라의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동생인 율리아 마이사에 의하여 마크리누스를 제거하고 황제로 추대됐다. 황제로의 자질을 빵점에 가깝다. 애초에 엘라가발루스 자체가 희대의 돌아이로 요약가능(...) 애초에 전해지는 사료도 별로 없는데다가, 고대 사료 특유의 과장성을 생각하면 어디까지 진실인지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지만, 거리낌없이 동성애를 자행하고[7] 심지어 베스타 여사제를 강간하기도 했다.[8] 심지어 엘라가발루스가 트렌스젠더 수술을 받았다는 말조차 나올 정도(...)
다행히 통치 자체는 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배후에서 처리했기 때문의 콤모두스 시대와 같은 개판의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라가발루스에게 실망한 율리아 마이사는 대체자로 사촌 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선택하고, 그를 양자로 삼을 것을 엘라가발루스에게 요구했다. 처음에는 이 요구를 별다른 생각없이 받아들였던 엘라가발루스이지만, 알렉산데르가 대중과 병사들에게 인기를 끌자 갑자기 질투심이 발동했는지 자신의 근위대에게 알렉산데르를 암살할 것을 명령(...)한다. 애초에 암살 명령 자체가 정신이 나간 짓인데, 암살 명령을 은밀히 킬러를 고용한 것도 아니고 로마의 공적인 군대, 그것도 로마군의 꽃이라고 불리는 근위대에게 명령했으니 엘라가발루스가 얼마나 미친놈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어쨌든 엘라가발루스의 명령을 들은 근위대장은 그 명령을 고스란히 반대로 실행하였고 엘라가발루스는 조리돌림을 당하다가 끔살.
2.4 알렉산데르 세베루스(222~235)
엘라가발루스의 뒤를 이어 열 네 살의 나이에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된다.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로 돌아가자'라는 모토 하에 어느 정도는 로마 사회를 재건하는데 성공하지만 마마보이여서 어머니의 전횡을 막지 못한데다가 게르만 족과의 전쟁에서 전쟁 대신 협상을 하다가 이에 불만을 가진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세베루스 왕조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로마는 위기의 3세기라고 불리는 군인 황제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3 세베루스 가문의 여성들
다른 왕조와 비교해서 가장 특이한 점은 처가인 율리아 가문 여자들의 힘이 강했다는 것이다.
세베루스의 아내인 율리아 돔나는 철학과 교양이 깊었고, 카라칼라가 외정에 주력하는 사이 내정을 사실상 주관할 정도로 정치적 자질이 빼어났다. 마찬가지로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인 율리아 마이사 또한 카라칼라 사후에 정략으로 마크리누스를 축출하고 자신의 손자인 엘라가발루스를 제위에 올리고, 엘라가발루스의 후계를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로 정하는 등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율리아 마이사가 죽은 후에도 그 딸인 율리아 마이아가 자신의 아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통해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4 평가
세베루스 왕조는 군사적으로는 강력했으며 내정에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정치는 어지러웠고 황제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다. 로마 제국의 쇠퇴기를 연 왕조라고 할 수 있다....지만 이건 그냥 통사적으로 간추릴 때 하는 얘기지 액면 그대로 전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로마군의 기병 전환, 종심 방어 전략 계획의 도입 진행, 화폐 절하, 본국 이탈리아와 속주 간의 차별 철폐의 시초 모두, 이 왕조 아래에서 이뤄졌다.
세베루스 왕조에서 후계자들이 다들 어린 나이였던 데다 정치력도 초대 황제 셉티미우스 외엔 뛰어난 인물이 없어서 이런 조치들을 매끄럽게 해내질 못한 건 정말 큰 안타까움이지만, 여하튼 후기 로마 제국에서 보이는 변화들의 선구 역할을 하였다.[9]
5 역대 황제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1대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193년 4월 14일 ~ 211년 2월 4일 |
2대 | 카라칼라 | 211년 2월 4일 ~ 217년 4월 8일 |
3대 | 엘라가발루스 | 218년 6월 8일 ~ 222년 3월 11일 |
4대 |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 222년 3월 11일 ~ 235년 3월 18일 또는 19일 |
- ↑ 세베루스 왕조의 가계도. 보라색 네모안에 들어간 인물들이 황제 자리를 지낸 인물이다.
-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을 적대한 자들의 목숨을 남겨놓지 않는 비정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심지어 경쟁자의 시체를 말발굽으로 짓밟기까지... 인과응보인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뒤를 이은 왕조의 모든 황제가 암살당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 ↑ 그렇다고 해서 세베루스와 콤모두스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도 결코 아니었다. 세베루스는 콤모두스의 현역 황제시절에 군단장이었는데, 콤모두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고 그걸 결코 잊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세베루스가 왜 콤모두스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철회를 명령했냐 하면 정치적인 명분을 쌓고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 ↑ 물론 오늘날의 연구를 통해서 실제로는 이 시기 로마의 경제가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졌다. 가장 확실한 근거는 바로 평가절하를 통하여 금화와 은화의 순도가 슬금슬금 떨어지고 있었다는 것. 물론 데나리우스가 은화에서 은도금한 동화 수준으로 떨어지려면 세베루스 사후 50년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후임 황제인 카라칼라가 따로이 안토니누스 은화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평가절하 및 인플레이션은 당대에도 사회문제화 되었다.
- ↑ 군대 역시 세베루스를 지지했는데,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돈으로 꼬득였다. 월급 인상 + 보너스
- ↑ 전쟁 자체는 완승으로 끝났지만 최악의 오판으로 평가받는 원정이기도 하다. 파르티아는 로마에게 가상 적국이기는 해도 최소한 공존과 협상의 여지는 있던 국가였던만큼 그냥 내버려두는게 상책이었다. 세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비유하자면, 안그래도 날이 갈수록 망해가는 파르티아를 완전히 관에 가두고는 못까지 박아버렸던 행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파르티아는 사산 왕조에게 멸망당했고 새로 아라비아의 패권자가 된 사산 왕조는 신나게 로마를 침공하게 된다.
- ↑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야 전혀 문제가 아니겠지만, 고대 로마에서 동성애는 그리 썩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닌 것으로 인식됐다.
- ↑ 약간 과장 보태서 현대적인 관점으로 설명하자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카톨릭 수녀를 성폭행했다고 생각해보라...
- ↑ 이 때문에 로마 제정 중기와 후기의 구분을 오현제 시대가 끝나는 서기 180년 보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죽는 211년 또는 알렉산데르가 암살당하는 235년에 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