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세르 아라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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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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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
1992
피스메이커(평화이식자)[1]
1993
요한 바오로 2세
1994
< 199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93 -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이츠하크 라빈
야세르 아라파트
시몬 페레스
1995 - 조지프 로트블랫
퍼그워시 회의

ياسر عرفات / Yasser Arafat (1929년 8월 4일 ~ 2004년 11월 11일)

"나는 한 손에 올리브 가지를 다른 한 손에는 자유를 위한 전사의 무기를 들고 여기에 왔습니다. 내 손의 올리브 가지를 던져 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에 전쟁이 벌어졌지만 그곳에서 평화가 다시 살아날 날이 올 것입니다. -1974년 11월 13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아라파트가 한 연설中 -

팔레스타인의 독립투사이자 팔레스타인국부

목차

생애

1929년 이집트 카이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카이로 대학에서 교육 받고 토목기사로 일했다고 한다. 1956년 이집트군 장교로 수에즈 전쟁에 참가한 경력도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48년 1차 중동전에 참가하면서 부터였다. 학창시절 팔레스타인 학생동맹을 주도한데 이어, 1959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의 모태가 된 대 이스라엘 투쟁단체인 '알 파타'를 창설했다.

69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즉 PLO를 창설하면서 의장이 되었다. 60-70년대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을 떠돌며 잇단 항공기 납치와 주요 시설 파괴 등 수십차례에 걸쳐 대이스라엘 무장투쟁을 하였다. 이러한 무장활동은 아라파트에게 팔레스타인의 대표라는 위상을 주기도 했지만 테러리스트라는 악명도 안겼다. 과정에서 그는 체포위기에 몰렸을 때마다 뛰어난 변장술로 위기를 넘겨 중동의 오뚝이, 9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이스라엘의 암살시도를 40차례나 받았는데도 그때마다 잘빠져나가 이스라엘한테 골치아픈 인물이었다.

1972년에 PLO 산하 과격단체 '검은 9월단'의 이스라엘 선수단 살해 사건으로 국제 여론이 악화되자 아라파트는 국제 테러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뒤 1988년 팔레스타인 독립선언 이후 협상전략으로 돌아섰고 1993년과 1994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를 인정하는 오슬로 협정과 카이로 협약을 각각 체결해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중동평화 정착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1995년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을 3단계[2]로 나눈 제2차 오슬로 협약을 마련하여 독립국가의 길이 형성되나 싶더니만...

제2차 오슬로 협약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995년 11월 14일에 라빈 총리가 암살당하고 강경파들이 들어서면서 오슬로 협정이 사실상 폐기되고, 1997년에 백악관에서 열린 이-팔 정상회담과 2000년 캠프 데이비드 중동평화협상이 결렬된 이후 미국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박탈하면서 그동안 이루어낸 노력이 허사가 되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라말라를 공격하여 이스라엘 공군의 공습에 부서진 라말라의 자치정부 청사에 사실상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3] 2004년에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토하고 쓰러지자 프랑스 군병원으로 옯겨졌으나 75세로 사망한다. 사후 독살 의혹이 있었으나 프랑스 연구진의 결과로는 유언비어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사실 이 의혹이 도는 이유가 아라파트가 청사에 갇혀살며 이스라엘 정부의 검사를 거친 음식만 먹었기에 팔레스타인인들이 제기하는 것이다.[4] 끝내 아라파트의 사인을 밝혀내는데 실패했으나 아라파트 가족들과 팔레스타인에서는 아라파트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의 사인을 밝히려는데 애쓰고 있다. 본인은 예루살렘에 묻히길 원했으나 이스라엘 정부의 결사반대로 못하고 이집트에서 장례식을 치룬다음 서안지구 라말라에 묻혔다. 가족으로는 아내 수하 알타윌과[5] 딸 자흐와가 있다.

그의 후계자들인 파타당은 아라파트의 상징과도 같던 캐피예를 여전히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하는[6] 팔레스타인 온건파 정당으로, 지금도 이스라엘과의 공존 방안을 모색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개막장 짓거리 때문에 지지율을 크게 잃어, 결국 하마스에게 밀려난다.
  1. 분란의 땅에 평화를 이식한 협약의 체결자들을 말한다. 93년, 94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와 더불어 야세르 아라파트, 이츠하크 라빈 총리, 남아공 대통령 클레르크가 공동 선정되었다. 그만큼 중요한 협약들이 같은 해에 체결되었다는 이야기. 물론 둘 다 다른 의미의 헬게이트를 불러왔지만
  2. A지역은 안전 지역으로써 팔레스타인 완전 자치 구역, B지역은 위험한 지역으로 팔레스타인 부분 자치 지역, C지역은 극히 위험한 지역으로 이스라엘 완전 지배 지역. 이 3개로 나누어 점차 C지역을 B-A로 바꾼다는 협정이었다.
  3. 이 당시 이스라엘 총리인 아리엘 샤론은 아라파트가 자치정부 청사에서 나온다면 생명을 보장못한다는 선언을 하여 사실상 나오기만 하면 죽는다고 협박했다.
  4. 실제로 이스라엘 정부는 1997년에 하마스 지도자들을 독살하려고 하다가 들켜서 실패했다.
  5. 근데 아내와의 나이차가 34세나 난다.
  6. 단, 캐피예를 매는 방식만큼은 아라파트의 유일한 상징으로 아무도 흉내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