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오로 2세

1994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피스메이커[1]
1993
요한 바오로 2세
1994
뉴트 깅리치
1995
교황명성 요한 바오로 2세 (Sanctus Ioannes Paulus II)
본명카롤 유제프 보이티와(Karol Józef Wojtyła)
출생지폴란드 바도비체
사망지바티칸
생몰년도1920년 5월 18일 ~ 2005년 4월 2일 (84세)
재위기간1978년 10월 16일 ~ 2005년 4월 2일 (26년 168일)
즉위미사1978년 10월 22일
장례미사2005년 4월 8일
시복2011년 5월 1일, 베네딕토 16세
시성2014년 4월 27일, 프란치스코
축일10월 22일[2]
라틴어Sanctus Ioannes Paulus PP.
이탈리아어Papa San Giovanni Paolo II
그리스어Πάπας Ιωάννης Παύλος Β΄
폴란드어Papież Jan Paweł II
스페인어San Juan Pablo II
포르투갈어São João Paulo II
프랑스어Saint Jean-Paul II
영어Saint Pope John Paul II
독일어Papst Johannes Paul II.
중국어教宗圣人若望·保祿二世
역대 교황
263대 요한 바오로 1세264대 성 요한 바오로 2세265대 베네딕토 16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64대 교황이자 성인. 사목표어는 'Totus Tuus(온전히 당신의 것)'.


교황 선출 직후 첫 강복을 하는 요한 바오로 2세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문장
교황관열쇠, 그리고 십자가에 M이 걸쳐진 마리아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1 전반적인 생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
- 즉위식 강론에서

1.1 먼치킨

동유럽의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 출신 교황이다. 최초의 동구권, 즉 슬라브 출신 교황이었기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전까지는 모두 서구권, 즉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인데, 요한 바오로 2세 이전까지는 이탈리아 출신들이 무려 400여 년이나 교황직을 독점했다. 온화한 미소로 대중의 사랑을 받은 전임자 요한 바오로 1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지 1달만에 선종하자 세계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비이탈리아계 출신으로 400여 년만에 선출되었을 때의 여파 또한 상당했다. 보이티와라는 낯선 이름을 듣고 불안해하는 군중 앞에서 교황명을 요한 바오로로 정했다는 발표와 더불어, 폴란드 출신의 새 교황이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첫 강복을 하자 사람들은 그제야 안심하며 환호했다. 격동의 20세기 말 ~ 21세기 초를 교황으로서 살다 간 이답게 굵직한 이벤트도 여럿 된다.

역사상 가장 해외 순방을 많이 다닌 교황이자 가장 인기가 많았던 교황이었다. 수석으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젊은 시절 3부 리그이긴 했지만 축구선수로도 활동했을 정도로 운동에는 만능인 데다가, 〈보석 가게〉라는 이름의 희곡까지 썼다. 대인배이고, 여러 권의 신학 서적을 저술했을 정도로 성직자로서도 우수한, 그야말로 다방면으로 유능한 실력자이다. 그 밖에도 미남보정까지 있어 단점을 찾기 힘들 정도의 먼치킨.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회고에 따르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교황에 당선되기 전 추기경이었을 때 바티칸의 어느 회의에서 눈은 회의 주제와 상관없는 책에 가 있으면서 입에서는 회의에서 다루는 안건에 관한 좋은 해결 방책을 쏟아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분은 대체 뭐지? 뭐긴 뭐야 먼치킨이지. 롤링 스톤즈밥 딜런의 공연을 듣고 그와 악수하기도 했다.


이미지가 대인배인지라, 생전에는 정말 못 봐줄 수준의 상황에 저 새끼를 구원해주소서라는 글과 함께 짤방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제 이 짤방을 그런 용도로 사용하면 고인드립에 속한다. 이젠 시성되었으니 성인드립이라고 해야 옳다.

johnpaulII_childhood.jpg
어린 시절 이미지

한때 아버지가 하인리히 히믈러필로 생겼다는 패드립이 나오기도 했다.


1.2 반공과 민주화

젊을 때는 성직과 동시에 폴란드반공 운동에 활약. 당시 폴란드 사람들이 반공 운동과 민주화에서 가장 손꼽는 인물. 사실 교황으로 선출될 때에는 폴란드 신자들이 인질로 잡혀 교황이 휘둘리지나 않을까 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우려가 있었고, 특히 영국은 무례에 가까울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어떤 신문에서는 '콘클라베가 아니라 초등학교 반장 선거같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을 정도.[3] 물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재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유럽과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군사력 경쟁이나 경제 제재 등 위협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 신앙심에 바탕을 둔 용기와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평화적으로 공산독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공헌했다.

1978년 10월 폴란드 출신의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요한 바오로 2세의 본명)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됐을 때 소련의 지도자인 유리 안드로포프 공산당 서기장은 체제에 대한 위협을 직감했다. 안드로포프는 즉각 폴란드에 있는 KGB 책임자에게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의 주민이 교황으로 선출되도록 방임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이어 소련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교황으로 인해 소련에 상당히 어려운 일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한 뒤 KGB에 대해 폴란드 출신 인물이 교황에 선출된 이유를 분석하라고 지시했다.

KGB는 며칠 뒤 폴란드인이 교황으로 선출된 배후에는 당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주도하고 미국과 서독이 합작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KGB는 이 음모는 폴란드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해체를 의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KGB의 분석은 모두 들어맞았다. 또한 미국의 브레진스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이 폴란드 출신 보이티야 추기경이 교황이 되도록 일을 꾸몄다는 분석도 당시의 KGB로서는 의심할 만한 대목이었다. 브레진스키는 1977년 1월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백악관에 들어가기 직전인 1976년 폴란드의 보이티야 추기경이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연설한 적이 있다. 당시 브레진스키는 보이티야 추기경의 연설에 감명을 받고 티 파티에 초대했다. 브레진스키도 폴란드 출신이다. 두 사람은 모국어인 폴란드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렇게 해서 맺어진 두 사람의 친분 관계는 보이티야 추기경이 교황이 된 이후에도 지속됐다.

그러나 브레진스키가 보이티야 추기경이 교황이 되도록 콘클라베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다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미국 카터 행정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의 고위 외교관 출신으로 카터 행정부에서 백악관 안보 관료를 지낸 제임스 렌츨러는 1998년 10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보낸 기고에서 “폴란드인이 교황이 된 데 감동한 카터 대통령이 냉전의 전개 방향을 뒤바꿀 만한 정책을 주도했다”고 회고했다.

그 중의 하나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최측근으로 ‘성직자 옷을 입은 키신저’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무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아고스티노 카사롤리 바티칸 국무장관과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 사이에 구축된 이른바 ‘바티칸 핫라인’. 이 핫라인을 통해 요한 바오로 2세와 독실한 침례교 신자인 카터 미국 대통령 사이에는 중요한 정책토론이나 의견 교환이 있었다는 것.

렌츨러는 두 지도자가 군비축소, 인권, 기아구제, 당시 동유럽에서의 민중 소요사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의 잔학행위, 중국에서의 가톨릭 박해, 아프리카에서의 쿠바의 모험주의적인 행동, 중동 평화, 테러 문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양측이 모두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원칙을 존중하기는 했지만 “양측의 일치되는 견해에서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행동이 나왔으며 이러한 행동들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확실하게 지켰는지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교황이 1979년 6월 조국인 폴란드를 방문한 것을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의 서곡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조국 방문을 ‘순례’라고 표현하며 공산독재에 신음하는 동포에게 “당신들은 인간이다. 존엄성을 갖고 있다. 땅에 배를 깔고 기어다니지 말라”는 유명한 메시지를 낭독했다.

교황의 폴란드 방문을 우려하던 당시의 공산정권은 전국의 교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교황은 우리의 적이다. 그는 모두에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입맞춤하고 사람들 모두와 악수를 나누는 등 군중에 친숙한 행동을 한다. 이는 미국 대통령 선거운동을 보고 하는 짓이다. 우리는 청소년을 무신론자로 만드는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수단이 허용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를 방문한 9일 동안 바르샤바, 크라코프 등 대도시를 돌며 수백만 명의 신자들이 운집한 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은 가는 곳마다 “신념을 잃지말라, 패배하지 말라, 용기를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거듭 전달했다.

폴란드의 국민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다. 교황의 조국 폴란드 방문은 폴란드인의 신앙심을 감동시키는 것이기도 했지만 애국심과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의식을 움트게 하는 매우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후 폴란드의 성직자들은 노동자나 지식인의 공산정권에 대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해나갔다. 결국 다음 해인 1980년 8월 폴란드는 동구권에서는 최초의 독자적인 노동조합인 ‘자유노조(Solidarity)’를 쟁취했다.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는 동구권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였다.

1.3 암살 미수 사건

저격 순간암살범을 용서하는 요한 바오로 2세

1981년 5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무개차를 타고 일반 알현을 하던 교황을 향해 총성이 울렸다. 교황은 터키인 메흐메트 알리 아으자(Mehmet Ali Ağca)가 쏜 4발의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아으자는 이슬람 광신자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회색 늑대' 의 회원이며 이미 터키에서도 1979년 겨우 19살 나이에 기자를 살해하여 지명수배를 받던 인물이었다. 나중에 요한 바오로 2세가 수감된 교도소로 직접 가서 용서해주었고 그는 울었다고 한다. 진심으로 후회하고 뉘우치는 기색을 보였던 아으자는 2000년 19년 만에 이탈리아에서 석방되어 고국인 터키로 돌아갔으나, 교황 암살 이전에 벌인 기자 살해죄로 터키에서 재수감되었다가 2011년 1월 감옥 생활 19년+11년을 채우고 석방되었다. 암살 미수 사건 당시 미국에서 아으자의 배후에 KGB가 있고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이 교황을 암살하려 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지만 아으자는 이를 부인했다. 톰 클랜시는 이 가설을 바탕으로 '레드 래빗'이라는 소설을 썼다. 모사드의 첩보 활동을 담은 책 '기드온의 스파이'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가 이란호메이니라고 적시했다. 모사드가 교황청의 호감을 사기 위해 아으자[4]의 배후를 밝혀서 정보를 넘겼다고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때 맞았던 총알을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여 자신을 구해준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참고로, 이것이 바로 파티마의 성모가 전한 3번째 예언의 내용[5]이며 오상의 성 비오 신부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제 시절에 귀띔해준 예언의 실현이다. 물론 음모론 좋아하는 사람들은 겨우 교황 저격(?)같은 작은 사건이[6] 3번째 예언일리가 있냐면서 안 믿는다.

2 상반된 평가

몇 가지 관점에 대해서 이견이 갈리는 편이다.


2.1 보수주의

온건하고 유화, 화합적인 교황이기는 했지만 콘돔이나 여성 사제 반대 등으로 보수적인 면으로는 엄격한 교황이었기에 비판받는 대상이기도 한다. 어느 정도냐면, 차라리 차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사회적 보수 정책이 훨씬 더 진보적일 정도다. 폴란드인에게는 최고의 위인이고 영웅이지만, 피임을 엄격하게 거부하였다는 점에서만은 비판받는 경우도 잦다.

정치적으로 해방신학의 활동을 막으면서도 자신은 정치활동인 반공활동에 나섰다는 비판이 있는데, 해방신학의 경우 가톨릭의 '보수적' 성격을 생각하면 공박 전에 생각해 볼만한 거리고[7], 공산주의와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니 딱히 언급할 것도 없다. 남의 활동을 막으면서 자신은 교단을 이끌었다는 것은 가톨릭 교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혹은 종교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물론 가톨릭이 본질적으로 보수적일수밖에 없는 교단이기에 이러한 행보는 필연적이라고 볼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 보수적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기 힘든 한계가 있지 않은가 하는 지적도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인들과 다른 교단이나 종교의 교인들, 무신론자, 세속적 보수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여러 집단의 입장에서 상호간에 논쟁이 진행중이다.

2.2 종교 간의 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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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이후 타 종교와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점이 매우 훌륭하다. 이슬람 학자들이나 그리스 정교회의 지도자들과도 교류하여 직접 사원을 참배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대희년(2000년) 새해 첫 성사에서 그리스도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조장하거나 방조해 온 각종 범죄 및 사건들에 대한 시인과 반성을 발표하여 세간에 크나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이건 시초를 따지자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연장선상. 당시 아랍권에선 여러 의미로 대환호했다.[8]

이 행위는 종교를 떠나 굉장히 용기있고 올바른 행위였으며, 충분히 찬사를 받아 마땅한 행동이였다. 범세계권의 거대 종교의 수장이 자신의 종교가 저지른 범죄와 사건에 대해 미화하거나 숨기지 않고,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건 그것이 올바르다는건 알아도 실행하기엔 결코 쉽지 않은 행동이다. 대부분의 독재국가와 독재자들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미화하거나 숨기려는 태도를 보이는걸 본다면 평범한 이들로선 결코 하기 힘든 일이다.

다만 일부 사람들은 이걸 빌미로 꼬투리 잡아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요한 바오로 2세를 사탄 취급했다. 애초에 교황이란 직위 자체에 디스 거는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가톨릭의 이름으로 모든 종교를 통합해 세계교회를 만드려는 음모라나 뭐라나. 대놓고 이런 내용을 담은 책도 많으나 정신건강을 생각한다면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말 그대로 가 거꾸로 솟는다.

예컨대 <바티칸 암살단>이라는 책은 가톨릭이 암살단을 조직하여 개신교 및 불교힌두교, 전세계 종교인을 암살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아싸신이 천주교 조직이라는 새빨간 거짓말까지 써댔다. 어쌔신이 아니라 템플러가 배후에 있다

평신도들의 수도단체인 오푸스 데이(Opus Dei, 하느님의 일)와의 연계, 특히 친위대나 싸고 돈다는 식의 비판을 많이 받기도 했다. 실제로 교황 직속의 성직자치단이 된 것이 1982년이요,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몬시뇰시성한 것도 요한 바오로 2세 때인 2002년.


3 한국과의 인연

한국에는 2차례 방문했다. 또한 1989년에는 천주교 군종교구를 설정했고, 2004년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경기도 북부를 분리하여 천주교 의정부교구를 설정하였다.

3.1 1984년 방한

한국을 2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1984년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조선 시대의 순교복자 103위를 시성하였다. 군사독재 시기인 1984년의 방한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당시 전두환 정권이 소위 유화조치를 취하게 만든 계기 중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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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한국 방문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과 접견하는 사진

정통성이 부족한 전두환 정권은 대내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교황 방한을 적극 추진했으나, 자칫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한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고민에 교황청은 망설였다. 한편 교황 방한 직전인 1983년 12월 유화조치가 취해진다. 대학구내에 상주하던 전투경찰병력 철수, 민주화운동관련 제적학생 복교, 해직교수 복직, 일부 정치범 석방, 몇몇 민주인사 정치활동금지해제 등 일명 1984년 유화국면의 도래이다.

반대로 이 유화적인 태도는 정권의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긴 기간 동안 반독재민주화세력의 씨를 말렸기 때문에 약간 풀어줘도 별 문제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는 것.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을 위한 1984년 방한 당시 5.18 민주화운동을 겪은 전라남도 광주시를 방문하여 공식 일정으로 무등경기장에서 미사를 집전 하기에 앞서 도청과 금남로를 방문하였는데 도청앞과 금남로에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모인 것은 1980년 5월 이후 처음이었다고 한다. 했고, 광주 방문 기념비가 광주-KIA 챔피언스 필드에 설치되어 있다.

또한 교황은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곳을 보여달라”며 한국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록도를 방문하여 한센병 환자들의 머리에 일일이 손을 얹고 “친히 고통을 겪으셨던 예수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라고 격려하고 축복했다.

1984년 방한 때 교황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한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식은 여러 가지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우선 복자성인품에 올리기 위해 필요한 2번째 기적 심사를 면제해 주었는데, 조선 시대 순교자들이 복자로 시복될 때도 기적 심사가 면제되었지만 이러한 면제는 보통 한 번만 인정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9] 또한, 한국 천주교의 요청에 따라 성인명을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로 변경했다. 원 명칭에는 조선으로 파견되었다가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10], 모방 나 베드로 신부[11],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의 이름이 앞에 있었지만, 한국의 성인이 아니라 프랑스의 성인을 기념하는 것 같다는 한국 천주교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파격적인 것은 시성식을 바티칸이 아닌 곳에서 거행했다는 것이다. 시성식은 교황이 직접 주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만 거행하는 것이 수 세기 동안 굳어진 원칙이었지만, 당시 한국 천주교에서는 한국 천주교의 첫 성인 탄생이라는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교황 방한에 맞춰 시성식을 한국에서 열 수 없겠느냐고 교황청 시성성에 문의했다. 한국 순교복자 103위 시성을 위해 매우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시성성이었지만, 시성식에 대해서만큼은 '바티칸 아닌 곳에서 열리면 다른 지역 교회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그 상징성이 퇴색할 수 있다'며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시성성의 입장과 상관없이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방한 때 시성식을 주재하겠다고 친히 결정하면서, ‘한국에서 거행된 시성식은 어디까지나 1984년 교황 방한 때의 부대 행사이지 주된 행사가 아니고, 시성성의 동의 없이 교황의 의지로 관철한 극히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이는 시성식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변경이 아니며, 다른 교회가 한국 천주교를 전례로 들어 자국에서 시성식을 거행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구조가 정립되었다. 실제로 시성성 장관과 차관, 차관보는 한국에서의 시성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몇몇 시성 청원인이 바티칸 이외의 지역에서도 시성식이 가능한지 문의했을 때 시성성에서는 '예외는 한 번뿐이며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2015년 스리랑카에서 시성식이 주재되었다고 한다. 자세한 설명은 추가바람.

3.2 1989년 방한

1989년에는 성체대회를 집전하기 위해 재차 방문했는데, 직접 약간의 한국어를 배워 쓰기도 하였다. 이 때 대표적으로 한 말이 "멀리서 벗이 왔는데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논어》 학이(學而) 편의 구절이었다. 또한, 한국 방문 당시 어떤 할머니에게 교황이 직접 준 물건이 그 할머니 사후 손녀의 손으로 옥션에 올라갔는데, 물건은 결국 사람들이 안 믿어서 욕만 줄창 받고 내려갔다. 그 증거가 한국에 교황이 온 적이 없다(…)는 것. 아는 사람들은 바닥을 구르며 웃었다. 진짜면 왜 팔겠냐는 의견도 대세. 그 외에도 2~3개 정도 한국에 두고 간 것이 있다. 십자가 달린 목걸이, 묵주 등등. 생전에 북한 문제와 연계되어 한국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한다.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김대중이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집행날짜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을 때 김대중에 대한 대대적인 구명활동을 벌여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게 조치하도록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대한민국 정부에 입김을 불어넣어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은 지 2년만에 국외추방으로 일단락시켰다. 요한 바오로 2세 덕분에 목숨을 건진 김대중은 미국에서 살다가 귀국 후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그 말고도 미국이나 국내에서 그의 구명을 위해 힘쓴 내외국인은 많았다. 결정적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큰 도움은 되었다.

너무나도 알현하고 싶었던 한국인[12] 둘이 알현 시간 후에 몰래 만나 뵙자, 위트 있게 '쉿, 혼나'라고 한국어로 말한 일화도 있다. 한국인 순례자를 만났을 때 항상 건네는 인삿말은 찬미 예수이었다고 한다.

유해의 일부인 모발혈액이 우리나라에 [안치되어 있다]. 시성되면서 새로운 성유물이 되었다.


4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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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국에 방문할 때마다 그 땅에 엎드려서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3] 병환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게 된 후로는 상자에 흙을 담아 입을 맞췄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외국 순방을 자주 해서 교황청의 재정난을 불러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실제로 2002년 교황청은 돈이 없어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미술품들을 보수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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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체 분석에 의하면, 사려가 깊고 사람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특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필체는 다른 사람에 대해 따뜻한 온정을 표현한다고 한다. 'i'를 쓸 때 글자 가까이에 점을 찍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세밀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 60세도 안 되어 교황에 선출된 탓에 엄청나게 장기간 동안 교황직에 있었다. 1등인 성 베드로를 제외하면 비오 9세가 역대 교황 중 최장 기록이고, 요한 바오로 2세는 3번째로 길다. 그래서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장기간의 교황을 피하기 위한 나이 많은 징검다리 교황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 교황 재위기간 중 3차례에 걸쳐 악마를 쫓는 구마의식(驅魔儀式)을 시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 교회의 대표적 구마사제 가블리엘레 아모스 신부는 "교황이 처음 구마의식을 행한 것은 1982년"이라며 "당시 교황은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한 소녀를 위해 악마를 쫓아내는 의식을 시행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교황은 이후 지난해 9월 구마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20세 여성을 사로잡고 있는 악마를 쫓는 의식에 참석하는 등 2차례 더 구마의식에 참여했다"고 덧붙였다.
  • 생전에 4권의 단행본을 비롯하여 500여 편의 논문과 수필집을 펴냈다. 또 1960년에는 '안드레이 자비엔'이라는 필명으로 <보석 가게>라는 제목의 희곡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결혼을 소재로 한 3부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라디오극으로 방송되었고, 런던에서는 연극 무대로 올려졌으며, 배우 버트랑카스타가 출연하는 텔레비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 전세계적인 인기 때문에 기자들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 때 찍힌 사진은 수영하는 사진. 고작 이 사진이 당시로서 역대 5위 안에 드는 가격으로 팔렸다고 한다. 실제로도 운동을 좋아해서, 노령으로 건강을 해치기 전까진 휴가 때마다 스키등산 등을 즐겼다고 한다. 또다른 에피소드는 스키 타는 사진. 교황이 타던 스키가 날개 돋힌 듯 팔리자 스키, 스노보드 업체들이 이거 좀 써보라고 큰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물품을 보내왔다. 그러나 파파라치에 의한 스키 사진 공개 이후 교황이 스키를 타는 일은 없었다. 해당 에피소드에, 막 교황으로 선출되었던 시절, 너무나도 스키를 타고 싶어 몰래 스위스로 친구들과 함께 스키를 타러 갔는데, 한 소녀가 "교황님을 닮으셨네요?!"라고 하는 바람에 친구들은 "아니야, 설마 그렇겠니"라며 교황을 피신시키고(…) 얼버무렸다고 한다.
  • 역사상 최초로 음반을 취입한 교황이자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교황이기도 하다. 1999년 3월 22일 자신의 재임 20주년에 맞춰서 'Abba pater(아빠, 아버지)'라는 음반을 취입하였다. 작곡가인 레오나르도 데 아미치스와 스테파노 마이티니의 음악에 음악의 앞에는 이사야 49장 14-15절의 성경구절을 기반으로 그동안의 기도와 강론 등을 합쳐서 '갈데아 우르'라는 나레이션을 만들어 붙였다. 그리고 음악의 뒷구절에는 교황이 직접 Pater noster(주님의 기도)를 부른다. 오오… 교황이 선종했을 때 평화방송에서 이것을 자주 틀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이 음반에서 나온 수입금은 전액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여졌다고 한다.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
  • 1981년 방일 때 히로히토를 만나 태평양 전쟁에 대한 사과를 권했지만 히로히토가 그 전쟁은 정의로웠으며 사과는 자신들이 받아야 한다고 정신승리를 시전하자 "주여,저 새끼를 구원해주소서 불쌍한 일본의 지도층을 가엾게 여기어 주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하는 낭설이 한국 인터넷에 떠돌고 있지만, 구글링 결과 이와 관련된 내용이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교황은 가톨릭 신자의 수가 매우 적은 일본을 처음으로 방문해 보았는데 비록 타국에 비해 수는 적지만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을 멋지게 맞이해주었고 무엇보다도 일본 황실 측에서도 그 어떤 방문객보다도 더 성대하게 맞이해 준 덕분에 상당히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었다. 위의 내용은 국내 인터넷상에서만 떠돌아다니는 내용으로 사실 출처도 불명확하다. 애초에 공식적인 인터뷰에서 '내 생애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은 두 말할 것 없이 태평양 전쟁을 허가한 일이였다.'라고 말한데다가 미국과 영국의 눈치도 안볼래야 안볼 수가 없었던 히로히토가 교황과의 대화에서 저런 말을 했다는것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 종종 한국에서 '교황이 바로 옆나라인 일본 방문은 별로 안하면서 한국에만 꾸준히 오는 이유는 히로히토의 망언 때문에 빡쳐서이다'라는 얘기가 위의 내용과 함께 나오는데, 교황이 일본 방문을 별로 안한 것은 상술했듯이 그냥 일본에 가톨릭 신자의 수가 너무 적어서이다. 게다가 참전 용사들이 아직 창창하던 80년대에 그딴 궤변을 지껄였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지금이야 수그러들었어도 불과 7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과 북미에선 일본군의 침략을 잊지 않고 이를 가는 노병과 그 가족들이 두눈 부릅뜨고 살아 있었고 유럽을 방문한 히로히토 일왕과 나가코 왕후 내외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항의시위를 하는 노병과 그 가족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아직 젊은 카롤 보이티와 신부로서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을 때, 오상의 성 비오 신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때 비오 신부는 보이티와 신부가 장차 교황이 될 것이라 예언하며 '그대가 앞으로 수행할 교황의 자리에 가 보이는구나'라고 덧붙였다. 비오 신부는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99년 복자품에 오르고, 다시 2002년 성인품에 올랐다.
  • 1988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연합 의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려 했는데, 북아일랜드 출신인 골수 반가톨릭 성향의 이언 패이즐리 의원이 교황은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하는 선언문을 읽는 소동이 벌어졌다. 교황은 침착하게 대응하여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고, 이언 패이즐리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전 황태자오토 폰 합스부르크 의원에게 두들겨 맞고 회의장에서 쫓겨났다.
  • 할리나 크비아토프스카(Halina Kwiatkowska)란 폴란드 여배우와 매우 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학 동문이었다고.
  • 배틀 포프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로 나온다. 물론 픽션이므로 믿으면 곤란하다. 작품 세계관 자체가 막장이긴 하지만….
  • 후지키 린의 소설 바티칸 기적 조사관에서는 작중 시대에 재위중인 교황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작품의 도입부가 교황이 대희년을 기념해 성 베드로 대성당성문을 여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나타냈다든지, 지금의 교황께서는 기적 인가에 적극적인 분이라는 시성성 장관 사울 대주교의 언급, 교황이 아우슈비츠를 방문해 유대인에게 우호적인 발언을 했다는 것을 로베르토 니콜라스 신부가 언급하거나, 전임 교황이 급사한 이유가 바티칸 은행을 개혁하려다가 독살당했다는 음모론이 있다고 나오는 등으로 미루어 보아 요한 바오로 2세가 확실하다.

5 선종과 장례식

말년에는 파킨슨병을 심하게 앓은 데다가, 온갖 합병증이 겹쳐 선종하지 않은 것이 신기했을 정도다. 한때 교황이 건강 악화를 이유로 퇴위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기도 했지만 교황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도좌를 지켰다. 2005년 3월 31일, 선종하기 3일전에 했던 마지막 강복에서는 건강악화로 아멘이라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당시 강복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4월 2일에는 이미 7만 명이 넘는 군중이 성 베드로 광장에 몰려들어 교황을 위한 기도회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회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이날 저녁 비티칸에 모인 많은 신자들의 기도 속에서 84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만성 심부전 및 패혈성 쇼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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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3월 31일, 공식석상에 나온 마지막 모습교황의 시신

2005년 4월 2일 선종 당시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이 바티칸 시국에 모여 성 베드로 광장을 가득 메우고도 넘쳐나 로마 시내에까지 늘어섰는데 그 추모 인파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영상]). 4월 8일에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인원이 너무 많아 숙박시설이 모자라게 되자 일반인 참석자를 위해 로마 시에서 텐트를 대여하고 대형 디스플레이를 설치할 정도였다. 이렇게 텐트와 돗자리를 깔고 앉은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워 경건하고 엄숙하게 추모하였다. 이렇게까지 그 죽음을 추모받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세계 각국에서도 4월 8일에 거행된 교황의 장례식에 조문사절을 파견해 70개국 이상의 대통령총리, 5개국의 국왕왕비, 14개 종교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했는데, 그 참석면면만 보아도 코피 아난 당시 UN 사무총장, 영국 찰스 왕세자,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 등 화려하기 그지없다. 당시 교황의 시신 앞에 무릎 꿇는 세계적인 면면을 TV 중계로 본 많은 이들이 교황의 영향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관이 대성당 안으로 운구되기 직전 광장의 인파를 향해 잠시 멈추었을 때, 사람들은 눈물과 박수[17]로 교황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영상]).

장례식 후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 그중에서도 요한 23세1963년 매장되었다가 2000년 시복되면서 대성당 내의 성 예로니모 경당으로 이장됨에 따라 비게 된 자리에 안장되었다.[사진] 다만, 교황 생전의 유서에서는 고향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로마에 묻은 교황청을 비난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판단도 이해의 여지는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을 다른 땅에 묻는다는 것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후, 복자로 선언된 교황에 대해 일반 대중과 순례객들이 가까이에서 참배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2011년 5월 3일 유해가 대성당 지하 묘지에서 이장되어 대성당 내의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에 새로 마련한 대리석 석관에 모셔졌다. 대신 이 자리에 안장되어 있었던 교황 복자 인노첸시오 11세의 유해는 변용 제대로 이장되었다.[18]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는 멋진 유언도 남겼다. 가장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다폴란드어였다고 한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 일부는 한국에도 안치돼 있다. 천주교 사도회(팔로티회)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 일부를 경기 성남시 분당구 본원과 강원도 홍천군 남면 신대리 '하느님 자비의 피정의 집'에 모셔놓고 신자들이 입을 맞추는 친구(親口) 예배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사진] 분당 본원에는 머리카락, '하느님 자비의 피정의 집'에는 혈액이 안치돼 있다. 교황의 유해가 국내로 들어온 것은 2011년 7월 초다.

팔로티회 안동억 신부는 "로마 교황청과 요한 바오로 2세의 비서 출신으로 폴란드 크라코프 대교구장인 스타니슬라프 드지비츠 추기경의 배려로 유해를 모실 수 있었다"고 밝혔다. 팔로티회는 분당 본원에서는 금요일 오후 4시 미사에서 친구 예배를 열고, 피정의 집에서는 매월 첫 토요일 밤샘 기도와 셋째 목요일 오후 12시부터 4시반까지 기도에서 역시 친구 예절을 한다.

교황과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교황과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 2001년 2월 21일

6 Santo Subito!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 교황 베네딕토 16세 거행, 2011년 5월 1일
요한 23세와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식, 교황 프란치스코 거행, 2014년 4월 27일

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시성 절차를 밟았다. 원래 시복 절차는 객관적인 심사를 위해 사후 5년이 경과해야 가능하게 되어 있는데,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는 베네딕토 16세가 바로 심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함으로써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2011년 5월 1일에는 수십만 명의 순례자와 군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역대 최단 기간만에 복자가 되었다. 축일은 10월 22일.

시복 시에는 대상자가 일으켰다고 인정할 수 있는 기적이 필요한데,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는 프랑스의 한 수녀가 그에게 기도한 후 앓고 있던 파킨슨병이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완치된 것이 기적으로 인정되었다. [시복식 영상] 2013년 6월 20일, 교황청 시성성 신학자위원회가 [교황의 시성에 필요한 두 번째 기적을 승인]하고 7월 2일 가톨릭 평가위원회에서 [교황의 시성을 승인] 하였으며, 7월 5일 교황청에서 요한 23세와 함께 [성인으로 공식 승인]되었다. 시성식은 [2014년 4월 27일]에 거행되었으며 세계 청년 대회, 청년 가톨릭교도의 수호성인이다. 시성과 더불어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에 있던 요한 바오로 2세의 석관에 새겨진 묘표도 복자(Beatus)에서 성인(Sanctus)으로 [바뀌었다].[사진]


시복식 전야기도, 시복식 당시에 불렸던 Aprite le porte a Cristo(그리스도께 문을 열어라). [#]
시성식 식순에도 포함되어 있다. [#]


사실 장례 미사 후, 로마 시내에 모여있던 일반인 추모객들 사이에서는 곧바로 Santo Subito라는 외침이 나왔다고 한다. Santo Subito란 너는 이미 성인이다 '즉시 성인', 즉 요한 바오로 2세를 즉시 시성하라는 뜻이다. 그만큼 생전부터 존경받았다는 이야기다.
  1. 그해 체결된 평화협정의 대표자들을 말함. 야세르 아라파트, 이츠하크 라빈, 넬슨 만델라, 프레데릭 빌렘 데 클라크가 대표.
  2. 10월 22일은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좌에 착좌한 날이다.
  3. 당시 이탈리아에 대한 칼럼을 쓰던 시오노 나나미는 영국의 이러한 반응을 인용해서 교회가 공산 진영에 대해 카드를 잘못 뽑았다고 디스했다. 참고로 요한 바오로 1세의 선출에 대해서는 '보수파의 얼굴마담'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4. 책에서는 '아카'라고 표기
  5. 단 이 예언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파티마의 성모 참조.
  6. 확실히 1,2차 세계대전보다야 임팩트가... 적으려나?
  7. 이단적인 측면이 있는게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정의구현사제단이라고 해도 공식적으로는 해방신학과 관계 없다.
  8. 다만 이집트를 방문할 때는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만 환영했고, 콥트 기독교 신자들은 "우리들에게 개종을 강요하러 온 것뿐!!"이라며 야유했다고 한다.
  9. 이때 기적심사의 면제 사유로 선교사가 해당 지역으로 들어가 전파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앙을 수용하여 교회를 만든 것을 통해서 면제하였다고 한다.
  10.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11.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신학생으로 뽑아 양성했다. 최방제는 유학 도중 병으로 죽었으나, 김대건최양업은 무사히 신부가 되었다.
  12. 관광객은 아니었다고 한다.
  13. 이에 관련된 유머가 있다. 알리탈리아 문서 참고.
  14. 포지션은 골키퍼셨다.
  15.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라치오는 오래전부터 파시스트 팀(...)이라는 디스를 당할 정도로 극우 성향이 강한 울트라스가 존재하는 팀이라는 것이다.
  16. 아일랜드 공화국은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이며 가톨릭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오는 각종 부패와 사건이 만연해있다.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이 공공연하게 형성되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가 조계종의 땡중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슷한 것이다. 아일랜드 가톨릭의 문제점을 지적한 영화로 The Magdalene Sisters 를 참고하면 좋다.
  17. 이탈리아에서는 장례식 때 박수를 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18. 인노첸시오 11세도 시복되면서 유해가 성 세바스티아노 경당에 안장된 사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