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콥 페트로비치 파블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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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이 바로 스탈린그라드의 "파블로프의 집". 전쟁 직후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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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이렇게 이 곳에 "파블로프의 집"이 있었다는 뜻의 벽돌기둥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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Я́ков Федо́тович Па́влов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써, 1개 소대[1]를 이끌며 위 사진과 같이 폐허에 지나지 않은 4층짜리 건물로 독일군을 무려 두 달가량(!)에 걸친 전투로 격퇴시킨 소련의 전쟁 영웅.

1 생애

1917년에 소련의 노브고로드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1938년에 붉은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독소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그는 제3우크라이나전선군 및 제2벨로루스전선군에 배속되어 스탈린그라드로 이동하게된다.

그 후 1942년 9월에, 독일군이 보병대를 이끌고 이 건물을 공격해오자[2] 파블로프는 부상당한 선임병을 대신하여 소대를 지휘, 고작 13명을 이 건물에 배치하여 독일군을 막기 시작했다.

13명의 특공대는 소수의 인원이지만 힘겹게 싸웠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투때문에 수면부족에 시달렸고, 가끔씩 3호 전차가 공격해오면 지붕에서부터 지하실까지 활용하며 집중사격을 가하여 쫒아냈다. 적들에게 포위 되었지만 얼어붙은 강이 확보되어 있어 이를 통해 보급품이 넘어왔기 때문에 보급문제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이들은 이런 투지로 버텨가며 결국 이후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기관총, 대전차 소총 및 박격포 등으로 이 건물 전체를 무장시키는데 성공했고, 무려 58일동안이나 방어에 성공하며 11월 25일에 독일군을 후퇴시킴으로써 이 방어전의 승리자가 된다[3]. 이 방어전은 나중에 소련의 선전용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독일군은 파리 함락보다 이 건물 하나 앞에서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 한다.

이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서의 전투에도 동원되며 공적을 쌓았다.

2 전후

파블로프는 이 대 방어전에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1945년 6월 27일, 소련 영웅칭호와 레닌 훈장을 포함한 많은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공산당 위원으로 3차례나 당선되어 정치활동을 하다 1981년 자신의 고향인 노브고로트에서 향년 63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고향땅에 묻혔다.
  1. 정확히는 25명이다.
  2. 왜냐하면 이 건물은 볼가 강이 내려다보이고, '1월 9일 거리'(러시아의 피의 일요일 사건을 기념한 거리이다.)를 관측하기에 용이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였다.
  3. 후에 독일군은 지도에 이 건물을 "1월 9일거리의 요새"로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