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일요일 사건

Bloody Sunday

1 개요

역사에 기록될 만큼 유혈이 낭자했던 일요일을 칭한다. 특히 유명하여 역사에 굵직하게 남은 사건으로는 러시아북아일랜드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들 수 있다. 피의 ~사건은 이 사건들에서 유래하였다.

이슬람권에서는 일요일 대신 금요일이 휴일이라서 그런지 금요일 때 일어나는 유혈시위를 피의 금요일로 비유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아랍의 봄 당시에 일어났던 내전이나 유혈사태 등등..)

2 1905년 1월 22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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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

"이제 차르는 없다. 하느님도 없다."

러시아 정교사제였던 가폰 신부

20세기 초 벌어진 러시아 제국병크. 로마노프 왕조의 멸망과 러시아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2.1 발단

우린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억압받았고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해오고 노예 취급을 받았습니다. 우린 힘이 없습니다. 황제 폐하, 우리는 삶 대신 죽음이라는 끔찍한 결정을 내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 당시 러시아 노동자의 탄원

농업국가였던 러시아 제국은 뒤처진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노동력이 태부족이었다. 선왕 알렉산드르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1861년에 농노 해방령을 선포하였다. 농지에서 '해방된' 농민들은 이제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땅을 사들여야 했고 봉건적 종속이 아니라 경제적 종속에 시달리게 되었다. 땅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다수의 농민들은 농업을 포기하고 도시로 몰려가서 저임금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차르와 고위관료들은 중대한 사실을 간과했다. 농사 지을 땅을 얻기 위해 농민들은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원치 않은 도시행을 선택한 농민 출신 노동자들도 저임금과 향수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국은 산업화의 자본을 얻기 위해 과격한 수출장려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러시아 국내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물가가 폭등하였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수출 정책은 기근 중에도 계속되어서 대중의 고통을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민중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특히 도시로 진출한 노동자들은 공산주의 이념과 결합하여 강력한 반정부세력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경찰 당국은 이들을 '보다 덜 위협적인' 존재로 관리할 필요성을 느끼고 여러가지 비밀스런 조치를 취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조치는 '어용 노동단체' 를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분노는 갈수록 과격해져서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로 치닫게 되었다.

2.2 성당 대신 황궁으로

1905년 1월 22일[1] 일요일, 여느 때라면 성당에 갈 시간이었으나 굶주림에 지친 노동자들은 니콜라이 2세에게 급료를 올려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차르의 만수무강과 왕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성가를 부르며 눈길을 걸어 황제의 겨울 궁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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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30만명[2]을 넘어섰다. 이 행렬 앞에는 이콘과 황제의 초상이 게양되어 있었다. 그 행렬 선두에는 러시아 정교회가폰 신부가 있었다. 훗날 알려지게 되지만 그는 비밀경찰의 스파이였다. 분노한 민심을 조금이라도 덜 위협적인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가폰 스스로도 과격한 혁명보다는 그것이 노동자들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믿고 첩자가 되었다. 노동자의 진정한 이익과 당국의 선한 의지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결국 신부라는 직위와 고결한 이상을 내세워서 노동세력의 민심을 수습하고 우두머리 격인 존재로 올라설 수 있었다.

브치로프의 공장에서 노동자 3명이 부당해고를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폭동이 일어날 기세가 되자, 가폰 신부는 이들을 다독여서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도록 만들었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비상수단이었던 것이다.

2.3 인민을 쏘지 말아라

파일:Расстрел на Дворцовой площади 9 января 1905 года.jpg

청원서 행렬은 오후 2시, 광장에 집결했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들이여, 인민들을 쏘지 말아라'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들려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막아선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대포도 여러 발 발사되었다. 이 일제사격으로 1천 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행렬에 대해 마지막으로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하여 을 휘둘렀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대중을 속여서[3] 인민들을 범의 아가리로 행진하도록 만든 장본인인 가폰 신부는, 루텐버그라는 동료의 도움을 받아 살아서 도망쳤다. 혁명으로 사태가 악화되자 그 동료와 함께 런던으로 망명하고, 사회혁명당(Socialist Revolutionary Party)에 가입한다.

1년 뒤인 1906년 러시아로 돌아왔는데, 자신을 살려 준 동료에게 스스로가 경찰과 연락하는 첩자임을 스스로 밝혔고, 분노한 당원들에게 빨랫줄에 목메달려 죽음을 당한다. 여담으로 가폰 신부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인물이다. 혁명의 기로에서 반드시 출현하는 유형의 인물이기 때문이다.이중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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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가폰 신부도 사전에 차르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의 노력은 기울였다. 이 편지에서 가폰은 "차르께서 노동자들을 만나서 청원을 들어 주면 노동자들은 차르에 대한 충성심을 계속 가질 것이며, 차르의 권위는 불가침으로 남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이 편지를 받지 못했거나 무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가폰 신부도 니콜라이 2세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을 가졌던 듯, 외국으로 도피한 후 차르 앞으로 모든 존칭을 생략한 저주에 찬 편지를 보냈다.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순결한 피는, 오! 영혼의 파괴자인 그대와 러시아 민중 사이에 영원히 놓여 있을 것이다. 그대와 그들 사이의 도덕적인 결속은 다시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흘러야 할 그 모든 피가, 살인자여, 그대와 그대의 가족에게 흘러 떨어지리라." 그러나 나중에 다시 경찰의 첩자가 된 것을 보면, 개인적인 배신감과는 별개로 그와 다른 정치적인 입장을 선택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모스크바, 사라토프, 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44만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이때까지 니콜라이 2세가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장을 가져올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사이[4] 10월에는 대규모의 파업이 발생하여 러시아 경제는 파탄에 빠지게 되었다.

2.4 차르 체제의 또다른 일면

제정 러시아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시민의식의 발달이 뒤져 있었고, 사건이 벌어진 당시까지도 차르는 하느님의 대리자라는 황제 숭배 신앙이 뿌리깊게 박혀있던 나라였다. 가폰 신부의 행진도, 차르에게 직접 탄원하면 국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리라는 순진한 기대감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느님과 같이 섬겨오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수많은 시위대를 상대로 무차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민중의 황제 숭배 관념은 일시에 무너지고 사람들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으며, 결국 차르 체제를 적대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제국전쟁을 하던 러시아 정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은 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츠머스 회의에 전권대사로 파견된 비테는 의회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으로 국민을 설득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진정시켰으나 제국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이 무너짐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결국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훗날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어 '러시아 1차 혁명' 또는 '1905년 혁명'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마침 이 사건이 일어난 1905년은 러시아 혁명의 시초로 평가받는 포템킨 반란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 비극의 업보 때문인지 훗날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은 혁명군에게 처형되는 비극을 당한다.

참고로 사건 자체는 매우 우발적인 상황에 가까웠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기록한 영상이나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후대에 재현한 기록화나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의 컷신으로 남아있다.

3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 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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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hnach na Fola(아일랜드어) 혹은 Bogside Massacre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의 런던데리(혹은 데리)[5]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이자 영국영국군의 매우 큰 과오. 영국군이 시위 중이던 비무장 시민에게 발포하여 14명이 죽고 13명이 다친 사건이다.

무차별 사격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살상한 영국군 부대는 마켓 가든 작전 등으로 유명한 영국 공수연대 제1대대(1 PARA)다. 나치 독일군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레드 데블스가, 이젠 북아일랜드인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셈

당시 투입되었던 영국군.

3.1 영향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당시 인기를 잃어가던 IRA 과격파에게 명분을 제공하여 이들의 활동이 왕성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분노한 IRA는 필립 마운트배튼의 외숙부[6]인 마운트배튼 백작[7](1900년 ~ 1979년)을 1979년 8월 27일에 암살하면서 '여왕이여, 너의 숙부가 피투성이로[8] 죽은 모습이 7년 전 북아일랜드의 민간인들 모습이다!!'라는 글귀를 남겼다. 카더라 이야기로는, "영국 왕족도 바다에서 폭탄으로 터지니 그 잔해는 똑같이 물고기 밥이 되었다"고 북아일랜드 사람들이 비웃는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3.2 영국의 대응

사건 10주 후 영국 정부의 조사 보고서는 '무장한 군중들이 섞여 있었으며 이들의 집을 수색해보니 실제로 무기와 폭발물이 나왔으므로 발포는 정당한 것'이라는 식이었다. 물론 이는 조작된 것이었다. 발포 관련자들은 영국 법정에서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고 당시 진압군 지휘관은 엘리자베스 2세에게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또한 영국 정부는 오랜 시간 이 사건을 은폐해 왔고 정당화해 왔다.

그러던 것이 1998년 당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 의해 당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이른바 '새빌 보고서[9]' 작성을 통해 12년간에 걸쳐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2010년 6월 15일에 이르러서야 영국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 의해 이 사건이 비무장 시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임이 공식 인정되었고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하게 된다.## 이후 영국 정부는 유가족들과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주기로 하였으나, 액수 자체가 유가족들이 겪은 슬픔과 피해자들이 겪은 피에 비해 적어 논란이 되고 있다. 한편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당시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단일 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해 만들어진 새빌 보고서는 무려 1억 9,500만 파운드(한화로 약 3,600억 원)를 투입해 장장 12년간 900여 명의 증언과 정부·군 문서를 검토해 만들어졌다.

3.3 대중매체

존 레논[10]U2의 노래 'Sunday Bloody Sunday(1972/1983)'가 이 사건을 다룬 곡이다. 같은 제목의 다른 곡이니 오해 말자. 또한 존 레논은 'The Luck Of The Irish(1972)'라는 노래도 발표했다. 폴 매카트니[11]도 이 사건을 보고 흥분해 'Give Ireland Back To The Irish(1972)'라는 곡을 만든다. 엘튼 존도 벨파스트 지명과 이 사건에 대해서 언급한 Belfast (1994)를 작곡했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2002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 를 제작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도 U2의 'Sunday Bloody Sunday' 가 나온다. 또한 크랜베리스의 Zombie(1995) 역시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노래이다.[12]

  1. 그레고리력 기준.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월 9일이었다.
  2. 가폰 신부의 주장. 실제로는 대략 5만에서 6만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3. 사실 가폰 신부의 행적을 보면 속인게 아니라 (부정적 의미에서의) 순진한 평화주의자에 더 가깝다.
  4. 니콜라이 2세는 수도에서 파업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도 가족과 같이 왕실 전용 휴가지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후에도 별다른 대책 없이 주위에서 발포하면 된다고 하니까 그저 발포했다. 답이 없다. 그 날 그의 일기장에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다행히 충직스러운 군인들이 이들을 물리쳤다. 신이시여, 이들을 보우하소서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 정도면 개념을 잃어도 아주 잃은 듯.
  5. 원래는 데리라는 게일어에서 비롯된 현지 지명이다. 그런데 북아일랜드영국이 지배하면서 멀쩡한 아일랜드 지명 앞에 런던을 붙인 것.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 앞에 도쿄를 붙여서 '도쿄부산'이라고 만든 거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현지인 중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은 런던데리라고 부르지 않고 데리라고만 부른다. 요즘은 잉글랜드를 위시한 영국 내 타 지역에서도 이곳을 Derry / Londonderry라고 병기하여 "데리런던데리"라고 아예 한 덩어리로 읽고 쓰는 경우가 많다.
  6. 필립은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사망하자 외삼촌의 양자가 되었다.
  7. 참고로 이 사람은 하버쿡을 지원해주었던 그 왕실 귀족 백작이시다!풀 네임은 루이스 마운트배튼.
  8. 폭탄 테러로 요트 및 수행원들과 끔살당했다.
  9. 대법관 출신의 새빌 경이 총지휘를 맡아 그의 이름이 붙었다.
  10. 부계가 아일랜드계다.
  11. 존 레논과 마찬가지로 조상이 아일랜드계다.
  12. 또한 영화 데블스 오운의 ost인 God be with you ireland 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이 역시 북아일랜드 분쟁을 다룬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