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전적인 의미
2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
楊沛
생몰년도 미상
풍익 만년 사람으로 초평 연간[3]에 공부의 영사가 되었다가 신정의 장이 되었으며, 흥평[4] 말년에 사람들이 굶주리자 뽕나무의 열매를 따 말리면서 야생의 콩을 거둬들이는 것을 의무화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의 것을 부족한 사람의 것으로 메꿔 천여석을 모아 작은 창고에 넣어 저장했다.
조조가 연주자사로 있을 때 헌제를 영접했는데, 조조의 1천여 명의 병사들이 먹을 것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어 신정 마을을 통과하자 양패가 조조를 만나 마른 뽕나무 열매를 모두 바치자 조조가 기뻐했다. 조조가 조정을 보좌하자 양패는 장사의 현령이 되었으며, 조홍의 빈객이 현 경계 근처에서 세법을 어기고 세금을 거두자 그 사람을 두드려 꺾었다가 죽이자 이 일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강, 동평태수를 역임해 치적을 세우다가 독군과 사사로이 싸운 것으로 머리를 깎는 곤형 5년을 받았으며, 조조가 원정 중에 초에 들어갔지만 업성에서 금지령을 지키지 않는 자가 많은 것을 듣고 유능한 관리를 업령으로 뽑았다. 그러나 엄격함과 능력 면에서 양패 정도의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고 하자 형기가 끝나기 전에 양패가 업의 현령이 되었다.
조조가 임명하면서 어떻게 업을 다스릴 것이냐고 묻자 몸과 마음을 바쳐 완수해 명령을 받들고 법을 집행하겠다고 했으며, 조조가 좋다고 하면서 양패를 만나면 조심하라고 했다. 조조는 그에 대한 격려와 예전에 뽕나무 열매를 준 것에 대한 감사로 노비 10명과 비단 100필을 하사했으며, 양패가 물러나 업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도착하기 전에 조홍과 유훈 등이 양패를 무서워 해 각자 사람을 자기 가족들에게 파견해 가족들의 행동 거지를 점검하면서 단속하게 했으며, 수년 후에는 그 공적에 따라 호강교위가 되었다. 211년에 마초가 공격하자 양패도 이 때 종군해서 맹진에서 병사들이 황하를 건너는 것을 감독했는데, 아직 건너지 못한 사람이 더 있을 때 먼저 건넌 중황문이 행헌을 빠뜨려 다시 북쪽으로 되돌아가려고 해 관리들에게 작은 배를 요구해 혼자서 먼저 건너려고 했다.
관리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아 중황문이 말싸움을 시작했으며, 양패가 중황문에게 도강 허가증을 갔고 있냐고 묻자 양패가 화를 내면서 당신이 탈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믿냐면서 사람을 시켜 중황문의 머리를 붙잡게 하면서 지팡이를 건네 그를 때리게 했다. 중황문이 양패로부터 풀려날 때 이미 옷과 모자가 찣어져 있었으며, 조조에게 가서 호소하자 조조는 당신은 죽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고 했다.
이 때 양패의 이름은 더욱 알려져 마초가 패하자 장기의 후임으로 경조윤이 되었으며, 황초 연간[5]에 유학의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 대거 승진하게 되었지만 본래 사무의 유능함으로 임용되던 양패는 의랑이 되어 한가로이 시골을 거닐었다. 양패는 오랫동안 군현의 장으로 있었지만 개인적인 이득이나 고귀한 사람들을 모시는 것에 관심이 없어 은퇴할 때 재산이 없었으며, 집에서 질병을 치료해도 관사로부터 빌려온 심부름꾼 아이 외에는 노비가 없었다.
나중에 하남의 석양정에 쓸모없는 밭 2경을 사서 과우려를 세워 그 곳에서 생활했으며, 처자는 추위와 굶주림에 괴로워했다. 양패가 병으로 죽자 고향 사람, 친구들, 옛 관리들, 옛 백성들이 찾아와 장례를 치뤘다.
창천항로에서 정비와 함께 죄수로 등장해서 곤형에 처해진 것으로 나왔으며, 융퉁성이 전혀 없어서 징세의 직무를 엄격히 수행한 나머지 황궁군 고관의 다리를 부러뜨렸다고 한다. 누규, 정비와 함께 관중을 원정할 인원으로 파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