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훈

1 遺訓

사전적인 의미로는 죽기 전에 남긴 가르침. 일반적으로는 왕이 임종시에 왕자나 대신들에게 최후로 남기는 말을 의미한다. 유명(遺命), 혹은 유조(遺詔)라고 하기도 한다.

유언과는 보다 격이 높게, 권력자의 사후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종합적인 지시에 해당한다. 작게는 후사 문제나 장례 문제 등을 언급하기도 하고, 크게는 내정이나 대외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는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에 이 유훈을 받은 대신(따로 고명대신이라 부른다)이나 후계자가 전적으로 이 유훈에 대한 해석을 좌지우지한다는 점에서 믿어야 하는 거짓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윗동네의 경우 김정일이 김일성을 팔아서 자신의 통치를 '유훈통치'라고 규정할 정도.

1.1 유훈을 남긴 통치자

  • 고려 태조 왕건 : 훈요 10조 참조.
  • 신라 문무왕 : 유훈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알려져 있다. 흔히 유언으로 통용되는 동해에 장사시키라는 부탁은 이 유훈의 일부.
  • 한고제 유방 : 후대 재상에 대한 유훈을 남겼다. 해당 항목 참조.
  • 소열제 유비 : 제갈량이엄에 국정을 일임하였다.(원 항목에는 조운이 있었지만 조운은 그럴 위치도 권한도 없었다.)
  • 송 태조 조광윤 : 유훈을 돌에 새겼는데("석각유훈") 선양을 한 시씨 일족을 보호할 것과 간언하는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내용이다.
  • 김일성 : 김정일을 민족의 태양으로 모시라는 유훈을 남겼다 카더라

2 후한 말의 여강태수

劉勳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여강태수. 자는 자대(子臺).

서주 낭야국 사람으로 조조와 친분이 있었다고 하며, 그에게 헌정된 독립된 열전은 없지만 여러 열전에서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등장한다.

손책육강을 무찌르고 난 뒤, 원술손책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손책이 아닌 유훈을 여강태수로 삼는 것이 그의 첫 등장이며, 이는. 연의와 정사에서 공통적으로 그려진 그의 모습이다.

그러나 199년에 원술이 죽자, 원술의 동생 원윤과 사위 황의는 원술의 처자와 부곡을 거느리고 유훈에게 의탁하러 왔으며,[1] 더불어 유엽이 정보를 죽이고 그 세력을 이끌고 유훈에게 의탁하러 오자 세력이 거대해졌다.

세력이 거대해진 것은 유훈에게는 좋았지만, 비대해진 세력을 먹일 곡식이 부족해져서 화흠한테 도움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화흠 또한 물자가 풍족한 편이 못 되어서 곤란해하던 마당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손책이 우리가 곡식과 말먹이를 지원해줄 것이니 상료를 점령해서 나눠가지자는 달콤한 제안을 했다. 유엽은 만류하였으나, 유훈은 손책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료에 갔다. 그러나 이미 상료의 정수는 도망치고 난 뒤라 유훈이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 동안 본진인 환성이 손책군에게 넘어갔고[2], 상료를 공격하러 갔던 본군은 손분손보에게 당하였고, 끝내 유훈은 황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황조의 구원군인 황역이 오기 전에 유훈의 남은 군세는 손책이 이끌던 본군에게 궤멸되었다.

그 후 유훈은 조조와의 친분을 활용하여 조조에게 귀순하였고, 그는 열후에 임명되었으며 더불어 정로장군까지 지냈다. 그러나 그는 조조와의 그리고 사마지와의 친분만을 믿고 법을 어기면서 권세를 함부로 하였고 방탕하게 생활하였으므로 법도에 따라 처형되었다. 그가 방탕하게 생활할 때 두기에게 대추나무를 구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두기가 그것을 못 하겠다고 유훈이 납득할 정도로 설명을 해 이에 대해 조조가 놀랐다는 표현이 있다. 이건 두기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이 정도로 깐깐했다고 사료에 남을 정도의 유훈이 대단한건지

2.1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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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는 그냥 전형적인 원술의 부장으로 등장. 물론 능력치도 좋지 않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48/63/35/25..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51/64/50/47/54에 특기는 기술, 일제뿐. .

삼국전투기에는 아따맘마아빠로 나온다.

화봉요원에서는 손책이 강하군 사이현에서 유표군을 물리치면서 수 만의 시체가 강을 통해 팽택으로 떠내려오자 역병을 우려해 팽택을 포기하기로 한다.

유해에게 상료에게 양식을 받아오라면서 안된다면 상료를 공격해서라도 얻어오라고 하는데, 상료의 군사가 손책군과 결탁한 상황이라 불리하게 된다. 손책군의 여몽이 이끄는 수 천의 군사에게 3만 명의 군사가 격파당하자 여강을 포기하고 조조에게 달아난다.

3 후한 말의 호아도위

劉勳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로 원소의 부하였으며, 원술의 수하에 있던 유훈과는 한자까지 동일한 동명이인이었다.

호아도위를 지내다가 장양을 항복시키는 공을 세웠지만, 이를 시기하였던 원소가 그의 공을 가로채고자 트집을 잡아 유훈을 죽였다고 한다.

공손찬이 원소와 전쟁을 벌일 때, 그의 죄상에 관한 표를 조정에 상주문으로 올려 원소가 부하들이나 지방관들에게 한 행위에 대해 10가지 죄상으로써 이를 논했는데, 그 중에서 유훈은 일곱번째의 죄상에 해당되었는데, 원소와 유훈은 처음에는 합심하여 군사를 양성하여 유훈은 적잖은 공적을 세웠지만, 그는 사소한 일에 분노하여 억울하게 많은 사람을 죽였고 더 나아가 유훈은 이에 대해 참소하는 사특한 자를 신용하였고 이에 대해 항소를 하는 공이 있는 자를 살해했다고 논했다.

장양이 항복한 때는 191년이었고, 공손찬이 헌제에게 상주문을 올린 것은 192년이었기 때문에 유훈은 191년 또는 192년에 죽은 것으로 생각된다.

배송지의 주석에 따르면 유훈의 자가 자황(子璜)으로 유자황과 동일인물로 추측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 반면, 원술의 잔존 세력을 이끌고 손책에게 귀의하러 가던 원술의 부하 장훈양홍을 모조리 사로잡고 그 보물들을 취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유훈에게 의탁하는 내용과는 상충된다. 이 기록은 손책전에서만 보이며, 후한서와 삼국지 원술전에서는 이러한 서술이 없다. 손책이 원술과는 결별한 사이임을 고려하면, 손책에게 원술의 잔존세력이 제발로 들어갈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다.
  2. 이는 손책과 주유가 이교가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