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싱커블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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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에 독일 영내에 전개한 각국의 야전군 단위 부대들. 소련군 및 친소국 동맹국 (폴란드군+유고군+루마니아군)이 영미캐나다 군을 수로 압도함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처칠의 언씽커플 작전은 실행이 불가능했다.

윈스턴 처칠이 계획한 이오시프 스탈린뒤통수 치기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전선 종료 직후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 구상하고, 영국군이 실행 가능성을 연구했던 작전. 원래 계획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처칠답게 독일에 주둔한 소련을 공격,궁극적으로 동유럽에 전개한 소련군을 소련 영내로 몰아내기 위한 작전이었다.

당연히 현실성은 없었다. 일단 영국이나 미국의 국민들은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당장 일본에 핵폭탄이 투하된 원인도 몰락작전으로 막대한 희생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멀쩡히 있는 소련을 쳐서 새로운 전쟁을 만드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인 영미에서는 정권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영국군 수뇌부도 하나같이 반대했다. 영국 육군 원수였던 버나드 몽고메리가 "군사학의 제1법칙은 모스크바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결사반대했다. 영국 육군 참모본부 유럽에 전개한 영미군의 병력이 소련군의 1/3이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없다"며 말렸다. 더욱이 일본인의 자살공격에 수많은 희생이 많이 따를 것 같은 대일전에 소련을 참전시키려던 미국이 소련을 적으로 돌리는 이런 계획에 찬동할리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처칠의 아이디어는 폐기되었다. 어쨌든 소련은 스파이망을 통해 어느정도 이런 움직임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며, 이때문에 냉전은 더욱 앞당겨졌다.

이후 냉전이 본격화된 1950년대에 한국전쟁으로 위기감을 느낀 나토 사령부에서 소련군이 나토에 선전포고 했을 경우에 대비한 방어작전에 이 이름이 붙었다. 이후 소련이 해체된 지 한참 후인 1998년에 기밀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