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연합국의 주요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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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영국 총리
60대61대6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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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대63대6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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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Man of the Year 1940
1949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Man of the Year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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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1939
윈스턴 처칠
1940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41
해리 S. 트루먼
1948
윈스턴 처칠
1949
미합중국 군인
1950
< 195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
1952 - 프랑수아 모리악윈스턴 처칠1954 - 어니스트 헤밍웨이

1 시작하기 전에 사진 한 장

파일:/image/143/2009/03/29/20090329 seob16.jpg

윈스턴 처칠을 상징하는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인데, 하필 이런 험상궂은 표정으로 찍힌 것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얽혀있다.

사진작가는 유서프 카시(Yousuf Karsh, 1908년~2002년). 터키 출신의(부모는 아르메니아계) 캐나다 사진작가. 20세기 인물사진에서 빠뜨릴 수 없는 사진가로 이 사진을 찍고 난 뒤에 사진계에서 일약 대스타가 된다. 처칠과 사진 찍을 당시 처칠이 말하길, "자네 사람을 괴롭히는 데 소질이 있는데 그럼 욕 먹고 오래 못 살 거야." 그런데 보시다시피 (한 세대 차이는 있지만) 향년 94세로 처칠 나이보다 더 오래 살았다(...) 한국에는 욕 먹으면 오래 산다는 속담이 있답니다 유서프 카시는 이 사진을 찍으면서 전쟁을 치르며 영국을 이끄는 그의 카리스마를 담아내려 했는데, 처칠이 도무지 입에서 시가를 놓질 않자 참다 못한 카시가 처칠이 입에 문 시가를 손으로 잡아빼버렸다. 열받은 처칠이 이 새끼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에 담아낸 것이 바로 위 사진. 안 쳐맞았나 처칠의 폭력성을 시험해보기 위해 처칠의 시가를 빼앗아보았습니다

참고로 이 사진은 2016년 9월 발행된 영국 5파운드 폴리머 신권 뒷면의 처칠 경 사진으로 사용되었다!영란은행 사이트 인증. 3D 지폐 이미지 드래그를 통해 뒷면을 확인할 수 있다. 흠좀무.
처칠은 사진을 찍은 후 잠깐 침묵하다, 웃으며 "한 장 더 찍으시게"라고 했다. 그리고는 촬영 뒤 카시에게 악수를 청하며 "당신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도 가만히 사진 찍게 할 수 있군"이라고 했다고. 이 때문에 이 사진은 사진사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진이 되었다. 처칠도 이 사진을 보고는 마음에 들어했다.

Karsh_Churchill_Smile.jpg

직후에 다시 찍은 사진. 기분이 풀어졌는지 윗 사진과는 달리 후덕한 표정이다. 다만 손에 힘이 꽉 들어가 보이시는 건 기분 탓. 금방이라도 내리치실 것 같다. 손목에 힘 좀 푸시죠.

2 그는 누구인가

영국의 정치가.

전시(戰時) 국가 지도자의 대표격 인물

20세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거물급 정치인 중 한 명

가터 기사에 서훈되었기 때문에 'Sir'이 붙어서 한국에서는 끝에 '경'을 붙인다. 사실 Lord와 Sir은 같은 "경"으로 번역되어도 격이 다르긴 하지만... 영국 귀족임에도 '로드'가 아닌 '서'가 붙은 이유는 당시 윈스턴 처칠은 말보로 공작의 직계와는 좀 떨어져 있었기 때문. 사촌형이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그의 아버지 랜돌프 처칠은 해도 말보로 공작의 셋째 아들이라서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 Lord가 붙었다. 실제로 둘째형은 요절해서 실질적인 둘째였다.

3 출생부터 성장까지

3.1 집안내력

17~18세기의 영국의 명장이었던 초대 말보로 공작 존 처칠의 9대손이다. 존 처칠의 외아들은 자식이 없이 일찍 죽어 큰딸인 헨리에타가 2대로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고 헨리에타 역시 남자 상속자가 없어 3대 공작 작위는 여동생의 아들인 5대 선덜랜드 백작 찰스 스펜서가 계승했다(이후 선덜랜드 백작 작위는 말보로 공작과 합쳐졌다). 참고로 3대 공작의 조카인 존 스펜서 백작은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7대조. 당시의 가문명은 그냥 스펜서였고 성을 스펜서-처칠로 바꾼 건 그 손자인 5대 공작 때부터이다.

처칠의 아버지는 재무장관까지 지냈던 대정치가 랜돌프 처칠이다. 7대 말보로 공작의 3남으로 46살 젊은 나이에 매독 때문에 발작하면서 참혹하게 죽었다. 대학 시절에 뒷골목 사창가 늙은 창녀에게서 옮았다고 한다. 그 발작 증세가 어느 정도냐면 길거리에서 벌거벗고 날뛰고 아내를 죽이려고 늘 총을 가지고 다녀서 하인들이 총알을 죄다 빼두었을 정도였다. 그가 죽을 당시 윈스턴은 21세였는데, 당시만 해도 매독이 유전병이라고 여겨서 그 자신도 매독에 걸려있으리라 믿고 한동안 금욕했었다. 뒤늦게 얻은 아들에게 아버지 이름을 지어주며 아버지를 기렸다. 그런데 그 아들은 더 막장...

어머니는 월 가의 유명한 플레이어자 금융인이였던 레너드 윌터 제롬의 딸 제니 제롬이다.[2] 공식적으로는 제니가 잦은 파티와 사냥 참가로 인해 7달 반에 처칠을 조산한 걸로 되어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속도위반으로 결혼 당시 임신 중이었고 그래서 정상적으로 날을 맞추어 태어난 것으로 본다. 때문에 아버지의 매독과 어머니의 임신 시기는 함께 도시 전설이었는데 의외로 사실로 생각되는 증거가 꽤 많다. 물론 처칠은 매독설을 부정하지만. 영화 《젊은날의 처칠》에서 불경스럽게 어느 기자가 처칠의 어머니에게 매독 이야기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명문가 출신이지만, 아무도 그를 귀족적 이미지로 기억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7대 말보로 공작 부인인 처칠의 할머니조차 "윈스턴 같이 막돼먹은 놈에게 공작위를 줄 수는 없어!"를 외치며 손자 며느리인 9대 말보로 공작 부인이 아들을 낳을 때까지 갈궜다고 한다. 당시 처칠의 사촌형인 9대 말버러 공작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윈스턴이 10대 말보로 공작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가 공작이 되었다면 상원의원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갖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영국이 히틀러에게 점령당했을 수도 있다.

3.2 학창시절

해로 퍼블릭스쿨,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 원래 이튼 스쿨을 들어갔었는데 라틴어에서 계속 낙제했다. 이름만 써놓고 책상 앞에 앉아 대놓고 0점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선생님들은 처칠만 보면 '돌대가리'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다만 문과적 지식과 밀리터리에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문과생 밀덕 선배를 들이받는 등 적응하지 못하다가 해로로 옮겨서 졸업했다. 샌드허스트도 3수 끝에 겨우 들어갔으니 학교에서는 계속 낙제생이었던 듯. 참고로 이 선배인 아메리는 후일 처칠이 수상이 되기 직전 처칠의 지지자가 된다. 문제는 아메리의 아들은 골수 나치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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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3] 보면 알겠지만 스탈린과 함께 연합국 지도자 중에서 젊은 시절 대단한 미남이었다. 하지만...

샌드허스트를 들어갈 때 아버지는 보병대를 원했으나, 처칠은 수학을 하지 않고수포자 입학 커트라인이 낮은 기병대를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병대에서는 관심과 열정을 보여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군인+종군기자 신분으로 인도 토후국과의 전투나 옴더르만 대돌격 등 이런 저런 전쟁에 참전했다. 심지어는 휴가중에 스페인군이 (당시 식민지였던) 쿠바 반란 게릴라와 싸우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끼어 가기도 했다.

3.3 보어 전쟁 종군 기자와 탈출기

제대 후 보어전쟁에서 종군 기자이자 장교로 참전했다. 당시 처참한 전황 등을 생생히 본국에 전달했다. 원래는 민간인 신분으로 종군기자 역할만 했지만 몇몇 모험을 겪은 뒤 군인으로 동시에 복무하기도 한다.

전쟁 도중 보어인 코만도(게릴라 부대)에 붙잡혔으나 기상천외한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자세히 말하자면 지독하게 운이 좋았다. 홀로 탈출은 했지만 남아공 지리를 몰라 당황해하다가 에라이 모르겠다며 어느 집에 들어가 문을 두들기며 "난 영국인인데 좀 도와주시오" 될 대로 되라지 라고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집은 그 지역에서 유일한 영국인 이주자인 존 하워드란 사람이 살고 있었고 하워드는 조용히 처칠을 안으로 들여보내 식사를 대접하고 처칠을 보어인처럼 위장시키고 말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처칠에게 먹을 것이나 물을 싸준 다음에 길도 가르쳐줬다. 처칠은 이렇게 보어군인 척 위장하고 뻔뻔하게 초소를 통과한 후 기차의 대차(바퀴축) 부분에 몸을 동여매고서 그곳을 탈출했고 중립지대인 포르투갈모잠비크까지 무려 480km를 걸어가서 완전히 탈출에 성공했다. 나중에 처칠이 정부 요직을 차지한 뒤에도 그는 이 은혜를 잊지 못하고 남아공을 방문하는 길에 하워드를 만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그 사람의 남아공 농장이 어려움을 겪자 자비로 도와주기도 했다고. 이후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일설에는 그가 귀족의 아들이고 종군기자여서 석방할 것을 보어군이 고려했는데 석방 명령이 내리기 전에 먼저 탈출했다고 한다(...).


2차 보어전쟁 당시 초급 장교였던 처칠.

사실 포로로 잡히고 탈출한 이후에는 민간인에서 군인의 신분으로 전환했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본토로 복귀하지 않고 총사령관인 불러 장군에게 부탁하여 남아프리카 경기병 (South African Light Horse) 연대에 장교 보직을 얻어 직접 레이디스미스 탈환 작전에서 싸웠다. 앞서 올라온 처칠이 보어전쟁에서 군복을 입은 사진도 이때 찍은 것이다. 그 이후에 콜렌조 전투, 스피온 콥 전투, 발 크란츠 전투 등 즉 영국군이 신나게 두들겨 맞은 전투들 아주 치열한 전투에서 직접 싸우면서도 종군기자와 군인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했다.

영국군의 대삽질인 스피온 콥 전투 당시 지휘관인 찰스 워렌 사단장에게 '상황이 막장인데 뭐라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가 끌려나간 적도 있다고 한다. 워렌 사단장은 잭 더 리퍼 사건 당시 경찰 총책임자로 멍청한 행동을 일삼아 그 사건이 영구미제로 남는 데 일조했고, 또한 장군으로서는 영국 왕립군사학교 역사상 최악의 인물로 손꼽힌다. 게다가 처칠이 바른 말을 했다고 체포하는 바람에 악명이 더 높아졌다. 다만 스피온 콥 전투 당시에 처칠은 남아프리카 경기병의 장교로 임관한 후여서 군인의 신분이기도 했으니 워렌 장군은 일개 초급장교가 자기에게 쓴소리를 하는걸 괘씸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니었고 처칠이 이미 국민영웅이었으며 종군기자와 군인 활동을 하면서도 이 전투에서 직접 싸웠던 데다, 일선에서 처참한 상황을 다 목격하고 많은 부하들도 전사한 상태였기 때문에 여론은 처칠을 동정했다. 게다가 총사령관인 레드버스 불러(1839~1908) 장군도 워렌 장군을 아주 싫어했다. 그럼에도 이 작자는 1908년 68세 나이로 정년퇴직하고 편히 살다가 1927년 1월, 87번째 생일을 18일 남겨두고 86살 나이로 죽으면서 장수했다. 참고로 워렌은 편히 살다가 가긴 했지만 살아 생전 지겹게 욕먹은 게 억울한지 자서전에서 보어전쟁 당시 스피온 콥 전투에 대해 변명하다가 곱배기로 욕을 처먹었다.

4 정계 입문 초기

초기에는 보수당 소속이었으나, 당의 정책이 자신의 주장과 반대라는 이유로 탈당하여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4.1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연합군 최악의 내부의 적
이런 X맨이 내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의 능력에 감탄해보자
1차대전의 역적은 어떻게 2차대전의 영웅이 되었나? 1차대전의 영웅은 2차대전의 역적이 되었으니까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장관의 지위에 있었는데 1914년 7월 27일, 당시 영국의 동맹국이던 오스만 제국이 영국에 발주해 취역을 준비 중이던 2척의 12인치포 탑재 드레드노트급 전함 술탄 오스만 1세(배수량 3만 톤, 12인치 주포 14문, 후에 HMS 애진코트)와 레샤디(배수량 3만 톤, 13.5인치 주포 10문, 후에 HMS 에린)를 포함한 40척 해군 전투함을 강탈하여 영국 해군에 편입시켰다. 전함 2척 외에는 오스만 제국에 인도되었다고도 한다.

오스만 제국과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에 대항하기 위해 나이팅게일로 유명한 크림 전쟁 이래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칠의 이러한 아전인수격의 행동으로 동맹국 영국에 커다란 배신감을 느낀 오스만 제국은 얼마 뒤 영프 해군을 피해 오스만령으로 피신한 독일의 순양전함 괴벤과 경순양함 브레슬라우가 오스만 제국에 무상인도되는 것을 계기로 중립을 버리고 동맹군 편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아울러 브레슬라우는 훗날 처칠이 골치를 썩이게 한 U보트 지휘관 카를 되니츠 제독이 초급장교 시절 복무한 배. 빌헬름 2세 황제의 선포에 의해 오스만 제국에 공여되었고, 이름도 미딜리로 바뀌었다. 이에 관한 더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다음의 포스팅을 읽어보길 권한다. 오스만의 1차대전 참전 과정.

전함 두 척을 아까워한 이 행동 덕분에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군 3백만, 영국군 250만(전체 동원 병력의 약 28%), 러시아군 100만(전체 동원 병력의 약 8%)이 동원되어 3백만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하고 최대 150만의 아르메니아인, 40만의 쿠르드인, 15만의 시리아인이 학살당하는 중동 전선이라는 블랙홀이 만들어지고, 더 나아가서 수백만의 병력이 빠져나간 만큼 주요 전장인 서부전선의 연합군 전력이 약화되어 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이 더 장기화 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게 바로 나비효과

오스만 제국과의 초기 중동 전역에서 영국군은 이라크 주둔군 사령관이 바그다드에서 포위되어 항복하는 등 연패를 거듭했고, 이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처칠은 다시 갈리폴리 전투를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영-프-식민지군 포함 25만명이라는 병력 피해을 내며 영국군 역사상 최대의 실패를 기록한다. 원래 육군 쪽에서 무리라고 말리던 작전을 해군 단독으로 실행하다가 그렇게 된 것으로 이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역사상 단일 작전 중에서 가장 큰 실패를 본 작전이 되었다. 갈리폴리 실패 후 처칠은 해군장관을 사임하고 예비역 육군 장교로서 군에 다시 복귀하기도 했으며, 나중에 다시 내각에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갈리폴리 작전의 실패와 함께 1차대전 이후 아랍에서 쿠르드인들을 독가스로 다 죽이라고 명령한 일은 죽을 때까지 정적들에게 비난거리였고 그의 앞에서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였다.

한편으로 역사상 최초의 전차인 MK 시리즈의 개발을 지지하기도 했다. 단, 처칠의 주장은 거대한 육상 전함(...)을 만드는 것이라서 결국 이쪽은 기각되었고 다른 안이 나온 결과가 'Tank'라는 암호명을 받은 장갑차였다. 전차에 쓰이는 용어에 해군 용어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당시 육군 장관이었던 키치너는 전차를 장난감 취급하며 "이런 걸로는 전쟁에 이길 수 없다"고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루덴도르프는 "전차에 졌다"고 말했으니 그나마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운 셈이랄까? 근데 따지고 보면 해군 예산으로 육군한테 장난감 사준 꼴. 그래서 당시 몇몇 사람들은 육군 출신이 해군 장관하면서 해군을 엿 먹여댔다고 욕했다

4.2 망했어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가 속해있던 자유당이 몰락하고 노동당이 새롭게 떠오르자, 그는 다시금 보수당으로 복귀한다. 이 때문에 철새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것은 당의 정책이 자신의 주장과 반대될 때만 당을 옮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신에 굉장히 능수능란했던 듯.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독일에 대한 전후배상금 징수를 반대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2차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전후배상금으로 인해서 독일 경제가 피폐해진 것이다. 그러다가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자 태도가 돌변, 평화 무드를 유지하기 위해 네빌 체임벌린 수상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히틀러의 야망을 경고하며, '나중에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자체 의용대를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으나 호전광 취급을 받으며 정치판에서 가라앉기 시작한다. 거기다가 인도의 독립을 인정하는 편으로 기울어지던 영국 의회에서 처칠이 결사적으로 인도의 독립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영국의 나치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오히려 독립을 못한데 불만을 품은 인도인중 일부는 독립을 위한답시고 추축국에 가담해 버린다. 하지만 소련군은 소련군대로 물량으로 압도하면서 전선을 지켜 초기 독일군은 인도까지 전선을 확장하는데 실패했고, 후반기 가장 가까이 온 일본군은 일본군 모 장군모 작전을 제대로 말아먹는 바람에 2차대전 중의 독립은 실패했다(...).

아버지 랜돌프 처칠이 영국 보수당에서 굉장히 현실적이고 훌륭한 정치인으로 대접받았던(양심적인 보수파로 당론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비판한 소수파의 리더격이었다) 데에 비해 2차대전 이전까지 처칠은 그런 훌륭한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하는 이미지에 가까웠다. 전시수상이 되기 이전까지 요직인 해군 장관이나 재무장관을 지냈지만, 강력한 전쟁추진파적 성향과 비타협노선으로 정부 중요 직책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고 정계에서도 그의 성향으로 인해 소외당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적극적인 유화책인 국내외 분위기를 비판하고 적극적인 전쟁 준비를 요구한 게 결국 옳았음이 입증되어 화려하게 정계 메인으로 복귀하게 됐다. 본인 스스로도 그랬고 히틀러도 조롱했듯이 전쟁이 아니었으면 그냥 그저 그런 정치인으로 인생이 마감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당시의 안일한 흐름은 38년 9월의 뮌헨 협정 체결 때 절정에 이른다. 독일과의 전쟁을 두려워하던 영국으로선 뮌헨 협정으로 '우리 시대의 평화'를 얻은 체임벌린 수상을 비판한 처칠을 좋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처칠은 "독재자 히틀러는 권총을 들이대고 1파운드를 빼앗았다. 그리고 2파운드를 내놓으라고 했다. 나중에는 1파운드 반이라도 좋다고 하고, 반 파운드는 나중에 줘도 된다고 했다"라고 연설했다. 이 연설에 영국 정계가 무슨 반응을 보였을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5 전시총리(戰時總理)

We Shall Never Surrender!

우리는 (영국은)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일폴란드 침공을 감행하자 윈스턴 처칠은 하루아침에 잡소리나 해대는 귀찮은 늙은이에서 혜안을 지닌 예언자로 급부상했다.[4]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의 손에 완전히 짓밟힌 직후 곧바로 히틀러가 단치히 문제로 폴란드의 압박을 시작하자 영국 정계의 분위기는 뒤집히기 시작한다. 영국 내각은 프랑스와 함께 폴란드의 영토와 독립 보장을 선언하며 독일을 압박했지만, 히틀러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고 만다. 이것으로 처칠의 말이 옳았음이 입증되었고, 그는 다시금 정계에 복귀했으며 네빌 체임벌린의 전시 내각에 들어가게 된다. 참고로 이 전시내각에는 노동당이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실패로 체임벌린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면서 체임벌린은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결국 이로 인해 노동당영국 자유당, 보수당을 아우르는 초당파 거국내각의 수반으로서 처칠이 총리직에 오른다. 이때 헬리팩스 경에게 돌아간 총리 자리를 헬리팩스 경이 거부했다. 이 관련 떡밥이 What if 2권과 겁스 무한세계에서 수록되었다.[5]

이제 총리가 됨으로서 처칠은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전시내각에 모두 참여한 영국 유일의 정치인이 되었다. 그런데, 곧이어 벌어진 프랑스 전역에서도 프랑스 군의 무능함과 독일군의 빠른 작전에 영국군도 대패하여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사실상 영국은 유럽에서 고립된 채 독일과 홀로 맞서는 상황에 처한다. 애초에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한테는 때렸다가 패배할 것이 확실해서 당장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때 처칠은 국민의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애를 썼다. 처칠은 "만약 내가 죽는다면 독일군은 내 시체를 집무실 의자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한 자신의 말대로 독일군의 공습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런던에 머물렀다. 런던 지하에 대피소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위험하게도 그 위에는 정부 건물이 있었기에 500파운드 폭탄에 직격당하면 그대로 끝장이 나는 위치였다. 이렇게 처칠은 끝까지 영국에 남아 영국 본토 항공전을 지도하며 독일군의 침공 위협에 맞서는 한편, 미국에 접근하여 무기 대여법을 통해 수많은 장비들을 받아냈다. 하지만 이 대가로 영국은 카리브 해 연안의 지배력을 상실하고 거액의 자금을 지불하는 등 많은 대가를 치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쇠락도 여기서 출발한다. 공짜는 없는 법. 전쟁이 끝난 후 독일 장군 룬트슈테트에게 소련인들이 "전쟁의 패배를 결정한 전투가 뭐냐?"고 묻자 그는 영국 본토 항공전을 들었다. 스탈린그라드를 기대하던 소련인들은 크게 실망했다고.

그러나 영국식 정실주의 인사정책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처칠의 군사적 역량은 1차대전때와 별 다를 바가 없어서 기획했던 작전들이 연달아 실패했다. 그리스 전선, 배틀 액스 작전, 크루세이더 작전 등 영국군이 탈탈 털린 작전의 배후에는 언제나 처칠이 있었다. 게다가 별 보람도 없이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된 이탈리아 전선 역시 상당 부분 처칠의 입김이 작용했으며, 동쪽으로는 싱가포르 전투의 처절한 패전도 후퇴불가 명령을 내린 처칠이 반쯤 자처했던 것이었으니..역시 1차대전 내부의 적 그러나 영국군이 추축군을 탈탈 털어먹은 작전의 배후에도 그가 있었다. 게다가 미국 참전을 이끌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 데다가, 독일의 통상파괴에 빠르게 대처하는 데에도 실패하여 영국민의 생활이 피폐해지자 점차 인기가 떨어져 갔다.

그런 큼직큼직할 실책 외에도 소소한(?) 군사적 실책도 많았다. 망해가는 프랑스 전선을 어떻게좀 해보라고 스핏파이어를 포함한 영국공군의 주력전력을 프랑스에 보내려한다든가, 막 개발되어서 양산을 해야할 6파운더 대전차포의 생산을 미루고 시대에 뒤쳐진 2파운더 대전차포를 더 양산시킨다든가,[6] 아직 아군이었던 프랑스 해군이 독일 손에 넘어가는걸 막는답시고 영국 해군으로 공격하게 한다든가...

사실 세계 대전 당시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 실현되는 영역, 즉 군사작전에 직접 개입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전문성의 부족과 정치인과 군인의 입장 차이 등으로 인하여 정치 지도자가 손 댄 작전은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잠깐. 처칠은 사관 학교를 나온 장교 출신에 해군장관에 전쟁장관이었잖아. 전문가여야 하는데?! 결국 몇 번 손 대보고 제때 정신을 차린 처칠이나 스탈린 같은 경우가 그나마 낫고, 끝까지 정신 못 차리고 작전에서 손을 못 뗀 히틀러 같은 경우는 그만큼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이야기. 장제스도 일선 지휘관들에 대한 의심과 군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무리하게 간섭을 하다가 2차 상하이 사변의 참패를 야기했고 이후 버마 전투에서도 탱크 한대 한대에까지 직접 통제를 하여 조지프 스틸웰과 큰 마찰을 빚었다. 아, 물론 아예 군부가 나라를 들어먹고 군 지휘관들도 전문성이 모자랐던 일본군은 예외다. 군사적 측면보다는 정치적 측면이 더 중요한 게릴라전을 직접 수행했던 중국 공산당군도 예외고. 결국 게릴라전만 잘한 마오쩌둥은 나라를 들어먹었지 말입니다

한편 이 당시 미국의 참전이 확실해지자. 영국 국민들의 사기 진작이 필요하다 느껴, 전후에 영국 국민들이 살아갈 국가의 미래를 계획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베버리지 보고서다. 그리하여 처칠은 사회복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결국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유럽 전선 종전 직후 처칠은 총선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때가 1945년 7월이었는데, 포츠담 회담(포츠담 선언)에서 귀국당해야 했다. 해리 S. 트루먼과 스탈린이 다 해먹고 있고, 핵무기 사실을 숨기고 있던 트루먼과 다 알고 있던 스탈린의 밀당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사진 한 방만 찍고 말아야 했던 것. 이로서 전시총리 처칠의 임기는 끝이 났다. 포츠담 선언 뒤의 뒤이은 회담은 애틀리(#)가 마무리했다.

승리의 날(VE Day, 1945년 5월 8일),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
엘리자베스 공주, 엘리자베스 왕비, 윈스턴 처칠, 조지 6세, 마거릿 공주

6 종전부터 죽음까지

6.1 전쟁 이후의 윈스턴 처칠

이후 그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을 했고, 전후 선거에서 밀려나고 전후 공적을 고려하여 공작 작위가 수여하려 했지만 한 번 더 정권을 잡아보려는 본인의 정치적 야심과 아들 랜돌프도 정치인이 되려 했기 때문에 사절한다. 만약에 공작 작위가 수여되면 더 이상 하원 의원을 할 수 없고 총리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더구나 자기 자식도 작위를 물려받으면 역시 정치적으로 고자 출세는 불가능했다. 결국엔 근성으로 꾸준히 재기를 노린 끝에 선거에서 승리,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 내각의 뒤를 이어 다시 보수당 내각을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7]

그리고 처칠은 회고록을 썼는데, 불티나게 팔렸으며 1953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글 자체가 노벨문학상을 탈 만한 것은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히틀러를 물리치고 세계를 구한 인물에게 노벨상을 주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히틀러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물리친 것도 아니기에 노벨문학상을 줬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독일을 혼자 작살낸 것도 아닌데 혼자 받았다 근데 강철의 대원수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잖아 안 될 거야 아마

또한 그는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식에서 가서 훈장도 수여받고 기사작위도 받았으며, 1955년 4월 5일에 은퇴한 후에도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의회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고, 1963년에는 미국 명예시민권도 받았으며,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여겨졌다. 처칠의 80회 생일을 축하하며 날아온 카드의 주소란에는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에게. 런던'이라는 문구만 쓰여져 있었지만, 우체부는 그것을 처칠에게 정확하게 배달했다! 또 그림도 전문가 수준의 실력을 뽐냈는데 그게 다 풍경화 뿐이었다. "인물화는 왜 안 그리시나요?" 하고 누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무는 내 그림을 보고 '난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요'라고 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 담배를 실컷 하면서도 91세까지 살고 죽었다. 인간의 운명은 하늘에

다만 그의 만년은 영광으로만 가득하지 않았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대영제국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20년에 걸쳐서 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탄도 많이 했다고. 처칠은 독일의 항복 후에 잔존독일군과 서방연합군이 연합하여 소련군을 공격,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언싱커블 작전을 벌여 소련의 뒤통수를 치려는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원하지 않았고, 영국 안에서도 지겨운 전쟁 또 하자고? 비난과 반대에 부딪쳤다. 6.25가 터지자 영국을 주축으로 소련을 견제할 기회라고 여겼지만 알다시피 미국이 주축이 된 유엔군에 영국군이 따르는 현실이 되었고 2차 아랍전쟁에서 이스라엘, 프랑스와 연합해 이집트를 뭉개던 영국이 미국과 소련의 협박과 엄포에 물러나야 하는 걸 봐야했다. 그리고, 식민지 나라들이 하나둘 독립하는 것도 보면서 이런 늘그막의 대영제국 모습을 보고 한탄했다고 한다.

처칠의 아들인 랜돌프는 경망스럽고 술 마시고 놀기 좋아해, 대학도 중퇴하고 사교계에서 놀기만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거기다 심각한 낭비벽도 존재. 이후 아버지가 등 떠밀어 24살에 국회의원 선거에 나간 것을 시작으로 총 7번을 출마했으나 6번이나 낙선. 결국 술 때문에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2 장례식

처칠의 장례는 당연히 국장으로 치러졌다. 위의 사진은 장례행렬의 모습이다.

이미 처칠 이전의 총리인 웰링턴 공작, 글래드스턴 등의 장례가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나 처칠의 경우는 국왕이나 왕대비가 죽었을 때의 국장, 즉 왕실급 국장으로, 최고의 국장으로서 왕실급 국장으로 장례가 엄수된 유일한 영국인이다. 영국의 국장은 두 가지로 구분이 가능한데, 왕실급 국장과 일반 국장이다. 일반 국장은 영국의 발전에 영향을 끼친 인사들의 장례식으로서 아이작 뉴턴의 장례식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처칠의 경우는 왕실 사람들의 장례식인 왕실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니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처칠의 국장에 참석한 엘리자베스 2세, 필립 공, 엘리자베스 왕대비, 눈감은 찰스 왕세자

평민의 장례식에 국왕이 참석하는 경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례를 깨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이 참석했으며,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조문사절을 파견했다. 유럽에서는 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장례식을 생중계했다. 영국과 원수지간이었던 아일랜드는 처칠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지 않았지만,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아일랜드는 10년 동안 유럽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미국 역시 조문사절을 파견했다. 처칠이 없었다면 히틀러가 승리했을 것이고, 세계는 암흑시대를 맞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칠 자신도 "우리가 (히틀러에게) 지면 세상은 암흑시대를 맞이한다"고 한 적이 있다.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은 처칠의 죽음을 알고 "이제 영국은 더 이상 대국이 아니다"고 말했으며, 직접 처칠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8] 영국과 프랑스의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시절 처칠 수상의 배려로 영국에서 자유프랑스 운동을 지휘할 수 있었던 드골에게 처칠의 죽음은 옛 전우를 떠나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처칠의 장례식 모습을 담은 영상.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드골(군복을 입고 참석) 프랑스 대통령의 모습도 나타난다. 배경 음악은 영국의 '비공식 애국가'로 불리는 <조국이여, 그대에게 맹세합니다>(I vow to thee, my country).문명했던 위키러라면 들어본 음악일 것이다[9]

그러나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은 이 일로 마구 까이게 된다. 그는 장례식에 직접 오지 않고 대리인을 보냈는데, 문제는 그 대리인이 부통령이나 정부 장관도 아니고 유명인사도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개인 자격으로 런던으로 날아와서 장례식에 참석했기에 그에게 미국 대표를 맡겼다면 해결될 일이었다.[10] 하지만 존슨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설마 존슨 본인은 민주당인데, 아이젠하워는 공화당 출신이라서? 조문사절의 지위를 중시하는 영국은 장례식장에서 미국 대표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미국 시청자들은 "우리 위대한 미국의 대표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외쳤고 실상을 안 후에는 격노했다.

존슨은 "전 감기에 걸려서 못 갔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장례식을 한 번 하지 두 번 하랴?라며 변명했지만, 사람들은 "처칠이라면 감기 정도로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을 거다!"라고 응수했다. 자업자득 이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린든 존슨은 5년 임기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이래 엘리자베스 2세를 만나지 못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11]

이에 존슨의 또다른 변명이 상상을 초월했는데, 평소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존경하던 존슨은 루스벨트의 장례식 때 처칠이 조문하러 오지 않았으므로 자신도 처칠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그런데 루스벨트가 사망했을 땐 한창 전쟁 중이였다. 이런 씨도 안먹히고 되도 않는 변명 때문에 존슨은 더더욱 욕을 먹었다. 대통령이 무슨 유딩도 아니고

처칠 부부의 무덤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국장이 거행된 후 유해는 기관차 윈스턴 처칠 호가 이끄는 기차에 실려 런던을 떠났고, 아버지의 무덤 곁에 묻혔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정문에는 그를 기념하는 석판이 깔려 있다. "윈스턴 처칠을 기억하라"는 문구와 함께.

7 평가

그는 영국을 구한 위대한 정치가이지만 노동 운동을 막았고, 필요하다면 다른 나라를 얼마든지 침공할 수 있는 정치가였고, 실제로도 식민지의 민간인을 학살했으며, 인종주의자였고, 타국을 식민지배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 제국주의자였다. 사실 1~2차 대전의 전간기(1918~1939)에는 파시즘에 대해서도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며 베니토 무솔리니를 "민주주의를 실현할 자격도 없는 이탈리아를 안정시킨 지도자"으로서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1994) 상권이나 마크 마조워의 암흑의 대륙 참조). 그런데 이런 분위기는 사실 소위 자유주의적인 다른 지도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시기 일본에 대해서도 일본은 우리의 동맹국이며 일본과의 전쟁을 고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평가했다. 사실 이 시기 자체에서 민주주의는 영국에서나 성공 가능한 특이 체제로 평가받았고 영국이나 프랑스의 엘리트 지식인이나 대학생들조차 파시즘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있는 혼란의 시대였다. 하지만 히틀러는 너무 막 나간 인물이었기 때문에 등장 초기부터 적대적인 입장을 보였다.

다만 그의 그런 성격도 부분적으론 시대 탓도 있다. 그가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청장년기를 보낸 귀족 출신이란 걸 상기하자. 결국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 한 인물일 뿐. 그렇기 때문에 그의 능력이나 공적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사상에 보편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 버트런드 러셀, E. H. 카 같은 현대적 기준에서 보아도 급진적인 사람들 예를 들며 빅토리아 시대가 생각 외로 꽉 막힌 시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어디에서나 급진적인 사람들은 있었다. 단지 그런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및 역량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이지... 이런 사람들도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빅토리아 시대가 꽉 막힌 시대는 아니었다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예를 들어 빅토리아 시대가 보수적인 시대라는 걸 부정하는 것은 또 힘들다. 성적인 것이 철저히 금기되어 숙녀가 다리란 단어를 말했다간 대번에 문란한 여자로 몰리는 건 기본이고, 피아노 다리도 상스럽다고 아예 커튼으로 가렸던 시대였다!!! 그러면서도 가구에 양말을 신기고 곡선미를 주어 가구 다리를 깎은 그 시대의 취향이 더 궁금해 더불어 청소년들의 자위를 막고자 정조대를 채우고 잘 때 반드시 손을 이불 위에 올리고 자도록 강요했던 던 사례 등을 보면 지금의 기준에선 빅토리아 시대는 보수 그 자체였던 시대였다. 더욱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선 보수적인 것이 유리한 상류층 그것도 명문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태어난 환경 자체가 처칠이 보수주의자가 된 큰 원인을 제공했다고 봐야 한다.

여하간 처칠의 업적은 전시중에 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했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침략을 물리치고 나치 독일로부터 세계를 구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지도자는 처칠 한 명이 아니라,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도 있었다. 그럼에도 처칠이 세계를 구했다고 칭송받는 이유는

  • 루스벨트의 미국은 진주만 공습 이전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미국 참전 이전에 나치 독일을 혼자서 저지한 나라는 영국이고, 그 영국의 지도자는 처칠이다. 게다가 루스벨트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죽었다. 그런데 처칠은 실각했잖아
  • 스탈린은 개전 초에 히틀러와 손을 잡고 사이좋게 세계를 침략했으며, 히틀러가 독소전쟁을 일으켜 소련을 침략한 후에야 연합국측에 가담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방진영과 공산진영 사이에는 냉전이 발발함으로서 만악의 근원 취급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독소전쟁에서의 막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1등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처칠은 스탈린에게 "히틀러가 당신네 나라에 쳐들어갈 테니 조심하시오"라고 경고했지만, 스탈린은 그 말을 무시했고 결국 독소전쟁이 벌어진 후에야 처칠에게 Help me를 외쳤다.
  • 중화민국은 일본에 처절하게 저항하고 나름의 전과를 남기기도 했지만 중공과의 내전이나 기타 상황상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고, 애초에 2차대전 종전 협상에서 아시아가 별 관심을 못받은지라..

피델 카스트로가 처칠을 칭찬하자, "당신 같은 공산주의자가 왜 처칠 같은 반공주의자를 칭찬하는가?"라는 질문이 날아왔고 이에 그는 "만약 히틀러가 승리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겠는가?"라고 답했다. 유럽 전체, 아니, 세계가 게르만인으로 넘치겠지

독불장군 기질도 엄청나서 차마 처칠이 말한 것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점이 오히려 전시에는 적절했던 듯. 글자 그대로 '전시 수상'의 전형이다. 감투 정신이 투철했다는 평도.

7.1 긍정적인 평가

유명한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수상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였다. 확실히 둘은 많이 닮은 면이 있다. 처칠은 정치적으로는 리버태리언에 가까운 우파였으며, 대처 내각은 1970년대 말의 오일쇼크 이후 등장한 영국의 첫 번째 신자유주의 정권이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평판은 정반대이다. 처칠은 영국에서 많은 이들이 존경하는 반면 대처는 대처의 장례식 당일날 대처의 장례식장 바로 옆에서 대처 사망 축하 파티와 장례식 반대 시위가 동시에 일어날 정도로 존경을 못받았다.

처칠이 죽었을 때 수상이었던 해럴드 윌슨은 "윈스턴 경은 스스로 역사를 만들고 스스로 역사를 썼다"고 말했다. [12]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처칠은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처칠이 뮌헨 협정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처칠을 높이 평가하는 나라는 많다.

노르웨이의 트론헤임과 트롬쇠에는 윈스턴 처칠 거리가 있다. 이런 거.

영국의 BBC에서 2002년에 행한 설문조사에서, 처칠은 가장 위대한 영국인 1위로 뽑혔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나는 그보다 더 위대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평했다.

1995년 11월 29일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에 상하원 양원 연설에서 새로이 건조하는 군함에 처칠의 이름을 붙이기로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2001년 3월 10일에 취역한 미 해군의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의 제31번함에 그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는 영국인으로서는 구축함에는 처음으로, 그리고 역대 미국 군함에 4번째로 이름을 올린 사례이다. 게다가 20세기의 영국인 중에서는 미국 군함에 이름이 남겨진 유일한 인물이다. 처칠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역사적으로 알고보면 여기에 굉장한 의미가 한 가지 더 있는데, 다른 세 이름은 전부 원래 영국배였다가 미 독립전쟁과 미영전쟁을 거치면서 미해군에 나포된 함선들이다! 그 밖에도 엔터프라이즈역시 원래 영국상선 이던것을 미해군이 나포한 뒤에 자국 함선명으로 사용. 반면에 윈스턴 처칠은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영국인의 이름을 자신들의 함선명에 붙여준 것이다.

조지 워커 부시가 "나도 처칠 존경한다. 나도 처칠처럼 존경받았으면 한다"고 현역 대통령 시절 말했다가 영국에서 "어림도 없는 소리하네, 히틀러 같은 존경이나 받으면 가능하겠지"라는 비아냥을 잔뜩 받은 바 있다.

처칠에게 훈장을 수여한 나라는 많다.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honours of winston churchill을 보자.

7.2 부정적인 평가

윈스턴 저질
연합국가들조차 처칠에게 묘하게 부정적인 평가를 주기도 하는데 추축국이었던 일본의 경우 더 묘한 평가를 준다. 일단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영미 귀축(혹은 귀축영미.)으로 영국과 미국을 하나로 묶어 인간이 아닌 귀신(오니)이나 짐승 따위로 묘사했다.

일본군태평양으로 진격하면서 당시 태평양 지역에 식민지가 있던 영국군과도 싸웠으나 영국군은 몇 번의 패전 이후 독일군을 상대하느라 이 지역을 많이 신경 못 썼고, 심지어 진주만 공습 당시에도 미국에 선전포고가 늦어졌어도 하기는 했으나 영국에는 선전포고조차 없었다(...) 당시 식민지였던 한국의 소학생들이 부르는 노래에서도 스탈린, 짜찌루(처칠), 루주베르도(루즈벨트)가 3대 귀축으로 등장했다는 점을 박완서가 소개한 바 있다. 당연하지만 현대에도 처칠에 대한 일본 우파들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나카니시 테루마사[13] 의 《대영제국 쇠망사》에서는 나치독일을 물리치는 데 집착해서 대영제국을 약체화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아일랜드에서는 평가가 별로 좋지 않다. 처칠이 영국의 대정치가이기에 아일랜드의 독립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악연을 맺을 수밖에 없긴 하지만...

1930년대까지는 처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에서는 거만한 제국주의자로서 욕을 무지 먹었다. 중립을 지키려던 노르웨이를 불바다로 만든다고 협박한 탓에 노르웨이에선 나치와 손 잡자는 소리까지 나왔다. 물론 나치가 노르웨이를 침공하면서 영국과 손을 잡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긍정적인 평가 항목으로 이동한다. 부정적인 평가를 유지했다면 훈장을 줄 리가 없다

1920년에 있었던 이라크 봉기 와중에 전쟁장관으로 쿠르드족에게 독가스를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겨자 가스가 현지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비록 처칠이 사용을 명령했음에도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 대신 주민 소개와 마을 파괴처럼 보어 전쟁 때 사용되었던 대게릴라 전술을 충실히 따르고, 영국 공군이 수천 소티나 출격하는 등 열심히 굴렀다. 단, 최루탄은 상당량 사용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 당시 적어도 수만에서 20만 정도 되는 쿠르드족 학살이 벌어졌으며 이 학살은 처칠이 책임자이기에 욕을 먹고도 남는다. 더불어 독가스를 쓰지 않았다 해도 그걸 찬성한 점만으로도 역시 비난 받을 일. 이때문에 나중에 사담 후세인이 쿠르드족 독가스 학살을 비난하던 영국에게 처칠을 거론하며 '쿠르드족 학살을 또 누가 했지?'라고 비웃을 때 영국은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당연하지만 쿠르드인들은 '처칠 그 짐승색히가 히틀러랑 차이가 뭐냐'며 무척이나 증오한다. 오죽하면 터키에서도 당시 터키이라크에서 터키인 학살(쿠르드족 항목에서도 나오듯이 터키에서는 쿠르드족을 터키인으로 여긴다)이라고 아르메니아 학살을 두고 터키 비난하는 영국에게 가소롭다는 듯이 따져들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무려 "수백만 명의 인도인을 굶겨죽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14] 마드후수리 무케르지의 저서 '처칠의 비밀 전쟁'이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서프라이즈'에 방영된 내용이라 신빙성을 의심하기 쉽지만, 저명한 영국 사학자 맥스 헤이스팅스도 인정한 책이다. 네이버 기사. 그러나 기근이 발생한 벵골 지방 자체가 식량 자급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는데 그 식량 공급의 상당량을 담당하는 버마가 일본군 손에 떨어진 데다 홍수와 병충해까지 있었으며 피난민으로 인해 식량 수요까지 증가한 상황에서는 기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며, 사태 자체도 실제 식량 공급량의 급감이 원인이 아니라 식량 가격 폭등으로 빈민들이 식량을 구할수 없었던게 더 컸다. 게다가 무능한 지방 정부는 기근이 최고조에 달할 때까지 기근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이를 부정했기 때문에 본국에서 취하는 조치가 없는 게 당연하며 수상의 직접 책임도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처칠은 인종주의자였다. 대다수의 처칠에 대한 긍정적으로 묘사한 평전들과 역사서는 이러한 점이 처칠의 명예를 훼손할까봐 의도적으로 생략하는 경우가 많으며, 국내에 번역되어 출간된 책들(폴 존슨의 <윈스턴 처칠의 뜨거운 승리>와 <모던 타임스> 외 어린이용 위인전 등)은 이러한 경향이 짙게 드러난다. 그의 인종차별적인 성향과 사상, 그리고 당대의 서양의 교양인들이 신봉한 주류 사회과학의 야만성(사회다윈주의와 우생학)에 대해서 더 정확히 알고 싶다면, 그레첸 루빈의 <처칠을 읽는 40가지 방법>과 클라이브 폰팅의 <진보와 야만>을 참고.

물론 그때의 시각은 지금과 많이 달랐으며 당대에는 진보적인 시각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H.G. 웰즈조차도 이상국가에는 '미개한' 유색인종이 적당하지 않다는 글을 쓰는 등 21세기 초의 시각으로 보면 처칠만이 문제가 아니라 20세기 초반에는 거의 모두가 인종주의자 내지는 인종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인종주의는 당시 제국주의와 서구중심주의의 지배적 사상이었으며 엄연히 가해집단, 민족, 국가만의 지배사상이었다. 가해와 피해,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에서 당시 가해착취 쪽의 지배적인 사상이었다는 건 현상으로선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게 잘한건 아니다. 그냥 쿠르드인들이나 현재 인도에서 처칠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당연히 좋은 소리 못 듣는다.

처칠의 유색인종에 대한 멸시는 결코 옹호될 수 없다. 백인에 비하면 눈이 위로 치켜세워진 듯한 황인들의 눈을 가지고 '뱁새눈'이라고 비하하거나, 흑인에 대해서는 거의 히틀러와 같은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정도로 업신여겼다. 또한 당시 지식인들과 교양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주류 사상인 우생학을 신봉하며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장애인들을 격리조치까지 시키자는 정책안까지 국회에 제안했다. 그리고 바다 건너 나치는 이걸 진짜로 했다. 더 심한 버전으로.

여기서 우생학은 히틀러와 나치스의 이데올로기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상이다. 당대의 서양의 백인들(미국과 영국, 프랑스 포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수용하였으며, 처칠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는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정작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를 신봉했었다. 그의 시대에 사회다윈주의는 탄생하지도 않았다. 마르크스가 극찬한 것은 다윈의 '종의 기원' 자체였고, 그 진화론을 사회 구조에 적용해서 진화한 선진사회와 진화 못한 후진사회를 가르는 소위 사회다윈주의가 탄생한 것은 마르크스 사후의 일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 자체가 19세기의 근대적 유럽중심사관의 산물이고, 20세기 초반 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다윈주의의 영향을 받아 미개한 후진사회의 개화를 주장한 것도 사실이긴 한데, 마르크스가 다윈을 격찬한 것을 사회다윈주의를 격찬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이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말을 한 적 한 번도 없으며 사회진화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또한 군략에 있어서는 갈리폴리 전투와 같은 삽질 등 문제 요소가 있는 편이었고 흔히 정치인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인 숟가락 얹기와 내로남불 기질이 매우 심해 정적들에게 비판을 받아 왔다. 요컨대 정치인으로서 계략을 짜거나 상대방을 비난하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일에는 재주가 있었으나 군사적인 무능과 인종차별적인 사고방식 히틀러랑 닮았다?, 그리고 지나치게 계산적인 면모 등으로 영국 내에서도 정치인 처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상당 부분 존재하는 편.

7.3 처칠 자신의 평가

처칠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1953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말에 기뻐하면서 "노벨평화상이겠지?" 말했다가 측근들이 "아뇨,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한 말에 엄청 실망한 얼굴을 하고 말 없이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어쨌든 사람들을 (꽤 많이) 죽이긴 했으니까

처칠의 저택에서 근무하던 요리사의 손자가 집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처칠의 방에 들어갔는데, 꼬마가 대뜸 "할아버지가 정말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에요?"라고 묻자 처칠은 "물론이지. 이제 그만 나가거라"라고 대답했다.

7.4 처칠이어서 가능했는가

본문에서 여러 번 언급되지만, 처칠의 의미는 히틀러를 막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처칠이 히틀러를 막았는가, 아니면 히틀러를 막은 사람이 우연히 처칠이었는가이다. 일반적인 당시 영국 수상이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는 처칠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당시 독일에겐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을 칠 군사적 역량이 없었다. 오히려 개전 초기 저지대 방어를 위한 프랑스와의 연합 작전에서 가용 육군 병력의 상당부분을 상실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히틀러의 침략 야욕으로부터 '영국 본토만을' 방어하는 데에는 더 유리했을 수도 있다.

또 본격적인 미국의 개입이 있기 이전에도 소련의 공업생산력은 독일을 능가하고 있었으므로, 히틀러는 미국을 배제하더라도 유럽조차 정복하기 힘든 처지였다. 더구나 루즈벨트 행정부는 개전 초기부터 공공연하게 반 독일 성향으로 전쟁에 개입하려는 의사를 드러냈기에 대독평화협상이 이뤄지는 정도가 아니라면 전쟁에 개입을 안했을 가능성이 낮다.

처칠이 2차대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지만, 처칠이 아니면 독일이 유럽을 정복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영웅주의의 요소가 있다.

물론 다른 입장은 처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총리로 있었다면 역사가 변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What if에서 체임벌린의 후계자로 처칠 대신에 핼리펙스가 총리가 되는 대체역사를 서술한 앤드루 로버츠가 대표적이다. 로버츠의 대체역사에서도 히틀러가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처칠보다 온건파였던 핼리팩스가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벌이는 대신에 독일과 협상해서 발을 빼버림으로써 영국이 전쟁에서 빠지고, 대신 독소전이 보다 이른 시기에 본격화 된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이다. 왜냐하면 당시 영국에서 처칠을 대신해서 대독 강경파의 수장직을 담당할 만한 인물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끽해야 앤서니 이든 정도가 대체했을 것이다.

과거의 역사에서 대체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경우가 존재한다. 라이트 형제가 없었더라도 비행기는 발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한글은 창제되지 않았을 것이다.[15] 마찬가지로 2차대전을 전후한 인물 중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없었다면 볼세비키의 조직화와 완성은 예측하기 어렵다.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아니라면 구 프로이센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폴란드와의 전쟁[16] 정도라면 몰라도 유럽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 수백만 유태인, 집시, 장애인, 반정부인사들을 가스실로 집어넣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즉 윈스턴 처칠과 마찬가지로 워낙에 독특한 행동을 보인 인물들이어서, 이들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역사는 현재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이 없었더라도 역사가 지금같이 흘러왔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운명주의에 가깝다. 역사의 보편성은 인정되더라도 그건 몇 세기 단위로 그렇다는 거다. 100년도 전의 역사에서 그 정도 인물이 변한다면 그건 현 시대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

8 평생을 안고 산 검은 개, 우울증

전황이 어떻든지 항상 V자를 그리며 용기를 북돋고, 재밌는 농담과 유쾌한 입담을 쉴 새 없이 놀리는 처칠의 모습을 보자면 늘 유쾌하고 행복한 사람처럼 보인다만, 그런 겉모습과는 반대로 그의 속은 지옥과도 같았다. 평생 중증 우울증을 안고 살았기 때문이다. 처칠은 자신의 우울증을 '검은 개(black dog)'라 불렀으며, 이 우울증을 완화하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바로 그림. 천국에 가서 첫 백만 년 동안은 그림만 그리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그림은 그의 우울증의 짐을 덜어주는 데 아주 큰 기여를 했지만,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극심한 우울증은 가시지 않았다. 처칠이 괜히 글이나 그림에 집착하다시피 집중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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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에도 시가를 입에서 떼지 않는다.

이러한 극심한 우울증에는 그의 순탄치 못한 유년기 시절의 영향도 있지만 유전적인 요소가 더 컸으며, 때문에 그의 자식들도 대부분 알코올 중독으로 죽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울증을 가볍게나마 한 번이라도 앓아본 이라면 알겠지만 정말 사는 한순간 한순간이 생지옥과도 같은데, 스스로도 극심한 중증 우울증을 안고 주변의 자식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끝끝내 절망하지 않고 순간순간을 이겨내고 한 국가의 수장이 되어 패색이 짙어진 거대한 전쟁을 끝끝내 승리로 이끌고, 자살이 아닌 노환으로 천수를 다할 때까지 끝까지 살아낸 것을 보자면 정말이지 초인이라 불리지 않을 수가 없다.

9 남긴 책

처칠은 정치인이었지만 작가이기도 했고, 글로 먹고 산 사람답게 상당히 많은 회고록을 남겼고 1953년 이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위인전 보정으로 자기 변명이 좀 많다. 젊은 날부터 정치 투신까지를 그린 《나의 전반생》은 한국에도 꽤 많이 번역되었다. 1차 대전 회고록인 《세계의 위기》는 잘 안 알려졌고 야인 시절에 여러 이야기를 쓴 수필집은 한국에서 번역이 되었다. 처칠의 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나의 전반생》과 《2차 대전 회고록》.

이 밖에도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 전기와 조상인 제1대 말보로 공작 전기도 썼었다. 초대 말보로 공작 존 처칠은 어마어마한 전공을 올려서 공작위에 서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이나 되어서야 자손인 처칠에 의해서 평전이 나오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공작이 앤 여왕의 총애를 받는 자신의 아내를 배경으로 영국 정계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유도한 것과 함께 부정부패로 재산을 모았다는 대중적 의심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권력 남용이 의심되는 여왕과 아내와의 관계에다가 부정부패 의혹까지 겹치면서, 당대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저평가되었다. 자손인 윈스턴 처칠이 초대 공작을 옹호하는 전기를 쓰지 않았다면 지금도 악평이 학계의 주류적 의견이 되었을 것이다.

10 명언과 명연설 (어록)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 다만 실제로 처칠이 한 말인지는 확실하지않은 상황이다. 항목 참조.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오. 절대로 포기 하지 마시오. 절대, 절대, 절대, 절대로! 엄청난 일이건 작은 일이건, 크건 하찮건 상관 말고, 명예로움과 분별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는 경우들이 아니라면, 절대 포기하지 마시오.

(Never give in. Never give in. Never, never, never, never! — in nothing, great or small, large or petty — never give in, except to convictions of honor and good sense.)
- 1941년 영국 해로우 고등학교 졸업식 연설 전문.[17]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정부 관료들에게 말하였듯이, 의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이라고. 우리의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앞에는 투쟁과 고통으로 점철될 수많은 세월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 육, 해, 공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힘을 가지고, 이제껏 인류가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 목록 속에서도 유례없었던 극악무도한 폭정에 맞써 싸우는 것이라고. 그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한 단어로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어떠한 공포가 닥쳐와도, 갈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 연설 원문전문 번역
- 수상 취임 직후 하원에서의 연설, 1940년 5월 13일.
영국은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We shall not flag or fail. We shall go on to the end.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 원문
- 처칠의 가장 유명한 연설중 하나로 특히 굵은 표시로 된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가 특히 유명하며 보통 이 부분으로 연설 전체를 지칭한다.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임과 함께 섬나라 영국의 대륙의 적에 대한 왠지 병맛스러운 적대적 표현이기도 해서 서양의 각종 매체나 방송 등에서 엄청나게 많이 패러디되었다. 예를 들어, 그룹 아이언 메이든의 곡 'Aces High'의 앞부분에도 나오며 영화 《로빈 후드》의 해변전투 장면은 대놓고 이 연설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18]

  • (전략) 만약 대영제국과 그 연방이 천년을 이어간다면, 후대의 인류는 '바로 지금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their finest hour)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 하원에서 영국의 위기를 극복해내고자 한 연설에서. 같은 이름의 영국 본토 항공전을 다룬 게임의 제목 their finest hour과 Hearts of Iron III의 DLC인 their finest hour가 여기서 유래한다. 또한 『문명 5의 평등 계열 사회 제도에서 도시의 방어력을 올려주는 사회 제도와 엑스컴: 롱 워의 공중전에 보너스를 주는 영국 스타팅 보너스가 여기서 이름을 따 왔다.
  • “이 전쟁은 독일과의 전쟁(War with Germany)이 아니라, 독일에 맞선 전쟁(War against Germany)이다!"
- "War with Germany" 라고 표현한 의원에게 한 말.
  • 인류의 분쟁의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have so many owed so much to so few).
- 영국 본토항공전 승리 이후 영국 왕립공군 조종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조종사들의 반응은 "드디어 우리 월급을 올려주실 셈이군"이었다고.
  •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끝의 시작조차도 아닙니다. 차라리 시작의 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Now this is not the end. It is not even the beginning of the end. But it is, perhaps, the end of the beginning.)
-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 후.
  • 발트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안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에 걸쳐 철의 장막이 내려졌습니다(From Stettin in the Baltic to Trieste in the Adriatic, an iron curtain has descended across the Continent).
- 1946년 5월 3일 미국 미주리에서 냉전과 공산주의에 관해 언급한 내용.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를 대중화시켰다.
  • 전쟁에는 결단. 패배에는 도전. 승리에는 관대. 평화에는 친선을.
  • 한 국가의 앞날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투자는 어린이들에게 우유를 먹여두는 일이다.
- 그와 반대로 마가렛 대처영국병을 해소하기 위해, 재정감축계획으로 인하여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우유를 보급하는 지원을 끊어버렸고, 결국 노동당으로부터 "우유 도둑"이란 비판을 받았다.
  • 연설과 여자의 치마는 짧을수록 좋다.(...)
  • 정치라는 것은 전쟁 못지않게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며, 똑같이 위험하기도 한 것이다. 전쟁에서는 단 한 번 죽으면 되지만, 정치에서는 여러 번 희생당해야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해서 독소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발언이다.
  • 대영제국은 전세계에 여러 가지 먹을거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단지 조리 전(Before cooking)으로 말이죠.
처칠도 인정한 영국 요리
  • 적이 나를 노리고 쏜 총알이 맞지 않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다.
- 젊은 시절 처칠이 인도에서 군 생활을 할 때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적군이 처칠 한 명을 노리고 집중사격을 했지만 한 발도 안 맞고 빠져나온 적이 있다. 그 후에 한 말.
  • 수상이 되는 것보다 경마 더비 대상경주에서 우승하는 말의 마주가 되고 싶다.
  • 평화는 강자의 특권이다. 약자에게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다.
  • 당신이 직접 조작한 통계가 아니라면, 어떤 통계도 믿지 말라.
  •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실패를 거듭할 수 있는 능력이다.
  • 성공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며, 실패는 치명적인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하고자 하는 용기다.(Success if not final, failure is not fatal: it is the courage to continue that counts.)
  • 지옥을 걷고 있다면 계속해서 걸어가라.
  •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 예전에 써본 다른 체제들을 제외하면.(Indeed, it has been said that 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
- 민주주의 체제가 숱한 약점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정치체제'로 평가받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 배가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 (Without ships, we cannot live.)
- 2차대전 당시 대서양의 제해권 장악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발언.

11 처칠의 기행/일화 일람

아래의 내용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 밖에도 그의 흔한 영국인다운 괴상한 품행과 배짱을 보여주는 기행은 무수히 많다.

  • 윈스턴 처칠 사진을 검색해보면 그중 반 이상은 시가를 물고 있거나 들고 있다. 처칠 본인도 평생동안 30만개에 가까운 시가를 태웠다고 스스로 이야기 할 정도로 시가에 푹 빠져 산 애연가다. 그래서인지 시가와 관련된 이야기도 제법 전해지는 편.
  • 1차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에 인도하기로 되어있던 전함 두 척(HMS 애진코트, HMS Erin)을 그냥 압류해버린다. 이유는 당장 전함이 필요하고, 오스만 제국은 독일에 붙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결국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탓에 독일 쪽으로 붙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 흠좀무.
  • 젊은 장교 시절 에 타다가 난간을 잡았는데 마침 풍랑으로 배가 흔들려 오른쪽 어깨탈구되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에 치료가 시원찮았는지 오른쪽 어깨의 습관성 탈구와 통증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그렇게 반불구가 됐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중에 연설을 할 때도 제스처를 주로 왼팔로 했다고 한다. 어깨의 부상 때문에 기병임에도 랜스나 세이버 같은 무기를 쓸 수 없어 최신형 자동권총인 마우저 C96을 구매해 썼다. 그 덕분에 수단에서 소속부대가 포위당해 주변 동료들이 떼로 전사하는 아수라장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19]
  • 미국이 2차대전에 공식 참전하기 전 미국의 협력을 얻기 위해 윈스터 처칠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미국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벌거벗고 샤워장에서 나오다가 갑작스럽게 들른 루스벨트와 마주쳤다. 당황한 루즈벨트가 몸을 피하려 하자, "대영제국 총리는 미 합중국 대통령에게 아무것도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고. 다만 이 사건의 경우 당시 처칠은 미국의 협력과 루즈벨트의 신뢰를 얻어내기 위해 매우 큰 공을 들이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서,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민망한 순간에 정치적 기지를 발휘한 일종의 시의적절한 재담(才談)으로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다.
  • 1920년대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갔다가 분노한 노동자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러자 당당히 시가 하나 빼물고 노동자들 사이를 걸어서 유유히 걸어나갔다고. 가장 인상 험악하게 생긴 노동자에게 담뱃불을 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는 모두 그 지역에 이해관계, 목표, 그리고 하수인들을 갖고 있습니다. 쪼잔한 건수로 서로 맞서지 맙시다. 대영제국과 러시아가 관심이 있는 만큼 당신이 루마니아의 90%를 먹고, 우리가 그리스의 90%를 먹으며, 유고슬라비아는 50:50로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We have interests, missions, and agents there. Don't let us get at cross-purposes in small ways. So far as Britain and Russia are concerned, how would it do for you to have ninety percent dominance in Rumania, for us to have ninety percent of the say in Greece, and go fifty-fifty about Yugoslavia?")
여기서 빠졌지만 불가리아는 75:25였고 결국 80:20으로 결정이 났고, 결국 이것으로 각국의 운명은 결정되었다(유고슬라비아는 티토의 반 중립국화). 이게 왜 대인배냐면 외교 석상에서 저런 국가들의 존망을 푼돈 거래하듯 해버렸고 그대로 그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원래 그런게 국제정치의 속성이라지만 유독 두드러지는 장면. 이걸로 전쟁이 난 ...것?보다는... 낫나?
  • 하루는 의회에 늦게 출근해서, 상대편 의원이 "아니, 의회에도 늦는 사람이 무슨 중대한 일을 할 수 있는가?"라고 깠는데, "너도 나처럼 이쁜 마누라 집에 있어봐라,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겠냐?" 라고 하여 주위를 웃음바다에 빠뜨린 뒤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 영국 최초의 여성 의원으로, 미국 출신인 여성 하원 의원 낸시 애스터가 있었다. 남편인 월도프 애스터 하원의원이 자작 귀족 지위를 물려받음으로서 하원의원에서 물러났을 때, 남편이 권유해서 하원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었고, 26년간 하원의원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1923년 술 허용 연령대를 18세 이상으로 올리고 1928년 공무원 남녀 동등권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많은 족적을 남겼다(출처 : 세계사 산책). 이 낸시 애스터가 의회에 출석한 처칠에게 "내가 당신 부인이었다면, 당신의 찻잔에다 독을 탔을 겁니다(Sir, if you were my husband, I would poison your drink)"하고 독설을 하자, 처칠은 "애스터 부인, 당신이 내 부인이었다면, 난 당신 남편으로 사느니 차라리 그 (독이 든) 찻잔을 마셨을 거요(Madam, if you were my wife, I would drink it.)"라고 대꾸했다고 한다.[20] 생략된 부분이 있다보니 '당신 같은 분이 타주는 독이라면 기꺼이 마시겠다' 라는 해석이 퍼진 적이 있었다.
  • 어느 날 여왕 앞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술을 많이 마신 처칠은 취해있었다. 노동당의 베시 브래드록(Bessie Braddock)이라는 여성 국회의원이 있었다. 영국 노동당 하원의원이며, 여성, 어린이, 복지, 청소년 범죄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맹렬한 운동가로 "투쟁하는 베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 브래드록이 처칠을 망신을 주려고 처칠에게 다가가서 모두에게 들리도록 "총리 각하, 당신은 완전히 술에 취하셨군요! 게다가 한술 더해, 당신은 역겹도록 취했어요"(Winston, you are drunk, and what's more you are disgustingly drunk.)라고 외쳤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처칠은 "베시 부인, 당신은 못생겼어요. 게다가 한술 더해, 당신은 역겹도록 못생겼지요. 그래도 난 내일 아침이 되면 술이 깨겠지만, 당신은 여전히 역겹도록 못생긴 그 얼굴 그대로일 거요("Bessie, my dear, you are ugly, and what's more, you are disgustingly ugly. But tomorrow I shall be sober and you will still be disgustingly ugly.")"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 팔불출였는지 사위를 굉장히 맘에 안 들어했다. 이 때문에 사위는 호감도 올리려고 '파파' 라고 부르며 애교를 많이 부렸다. 어느날 사위가 묻기를,
사위 : 파파는 어느 정치인을 가장 존경하죠?
처칠 : 무솔리니.
사위 : 그 사람 파시스트잖아요?
처칠 : 근데 지 사위[21]도 총살시킨 놈이었거든.
  • 사후이긴 하지만, 그가 2차대전 당시 연설 때 사용하던 틀니가 경매에 나왔는데 한국 기준으로 2800만원에 달하는 가격에 낙찰됐다.세계를 구한 이(齒)
  • 시가 같이 매우 좋아하던 기호품들에는 아주 환장을 해서, 2차대전 중에 처칠에게 보내는 물품에 대해 '독살 위험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독검출 과정은 무시해도 좋으니 빨리 시가를 내 앞에 내놓으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처칠의 식품담당 검사원은 많이 고생했다(...) 오죽하면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그 급박한 상황에도, 단골 가게의 주인이 폭격 후에 "총리께서 항상 즐기시는 물건은 안전하다."라고 연락해줄 지경.
  • 전람회에 작품을 냈다가 낙선한 화가가 어느 날 윈스턴 처칠을 만나 불평했다. 심사위원들이 작품을 제대로 볼 줄 모른다는 불평이었다. 화가는 "그림 한 장 그려본 적 없는 사람이 심사위원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처칠이 대답했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달걀을 낳아본 적이 없네. 그래도 달걀이 싱싱한 것인지 상한 것인지 가려낼 능력은 있네. 평생 그림 한 장 그려본 적 없어도 심사위원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말을 먼저 꺼낸 화가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처칠이 덧붙였다. "어떤 심사위원이 보더라도 뽑힐 수 있는 그림을 그리도록 노력해보게나"라고...참고로 처칠은 전문 화가 수준의 풍경화를 그릴 정도로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인물화는 그리지 않았는데, 인물화도 그려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나무는 "나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 제 3제국에 대한 독일의 관심 증가의 영향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이 최근 들어서 경매에서 가치가 급증하는 추세이긴 하지만, 처칠의 그림은 여전히 현재까지 경매에서 히틀러의 그림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 예술성에서도 피카소가 평생 그림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게 처칠의 그림인 반면, 히틀러의 그림은 예술성에 있어서 평가가 영 좋지 않다.
  • 종군기자 시절 대한제국의 한성에 방문해 손탁호텔에 머무른 적이 있다는 도시전설이 있지만, 손탁호텔은 1902년 만들어졌고 처칠은 1900년에 이미 하원의원이었다.
  • 그는 W.C를 매우 싫어했다. 화장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머릿글자가 W.C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적들이 이걸 가지고 비아냥거린 게 많았다.
  • 2차대전 직후 등장한 영국 노동당의 애틀리 내각이 대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자 처칠과 보수당은 여기에 반대하면서 의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다 휴식시간이 되자 의원들은 화장실로 몰렸는데, 애틀리 총리의 옆 변기에 자리가 있는데도 처칠은 굳이 다른 줄을 서서 볼일을 보았다. 그러자 애틀리가 처칠에게 물었다.
"제 옆자리가 비었는데도 다른 줄을 서셨는데, 제 옆에 있기도 싫을 정도로 제가 싫으신 겁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왜 빈 자리를 두고 굳이 줄을 서신 거죠?"
"그야 당신은 뭐든 큰 거만 보면 국유화하자고 달려드니까요."
이게 나중에는 신자유주의시대에는 민영화로 바뀌어서 개그가 된다.
  • 2차대전 중에 처칠이 이라크 대사를 만났는데, 그때 그는 대사에게 술을 권했다고 한다. 이에 대사가 자신이 이슬람교를 믿으므로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하자 "세상에 이럴 수가. 오 하느님, 예수님, 아니 알라여!"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 처칠이 연설 문제로 택시를 타려고 했더니 택시기사가 승차를 거부했다. 불쾌해진 처칠이 이유를 묻자, 기사는 "이제 곧 처칠 총리의 라디오 연설이 있어서요. 그걸 들으려고 하거든요"라고 답했다. 처칠은 기분이 좋아져서 1파운드를 그냥 건네줬는데, 기사가 힘껏 소리쳤다. "손님, 그냥 타세요. 처칠인지 뭔 놈인지 몰라도 역시 돈이 먼저네요." 이미 준 돈을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 꼴로 우거지상이 된 처칠은 그 택시를 타고 의회에서 내리면서 택시기사에게 "라디오만 듣지말고 처칠 얼굴이나 좀 알아두시오!" 라고 불쾌하게 소리쳤다고 한다.
  • 2차대전 말기, 독일이 패전 직전까지 내몰리며 대서양 전투가 끝나가고 해군력에 여유가 생기자, 처칠은 일본에게 아시아 함대가 탈탈 털리고 홍콩싱가포르를 손쉽게 내주며 무너진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찾기 위해 태평양에 해군 함대를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4년 내내 홀로 일본과 싸운 미 해군 태평양 함대 입장에선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히려는 꼴이라 눈총을 받았고 어니스트 킹을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합군 수뇌부가 모여 앞으로의 전쟁 수행계획을 논의할 때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킹 제독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영국 함대의 파견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처칠이 갑자기 다짜고짜 루스벨트에게 "대통령 각하! 영국 함대를 태평양으로 보내고자 하는데 찬성하시지요?" 라고 몰아붙였고 루스벨트가 그 자리에서 OK! 해버림으로서(...)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 파견될 수 있었다.
윈저 패밀리의 빅보스. 윈스턴 처칠
2차 대전 중에 처칠이 군부대를 방문하여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중절모를 쓴 뒤 시가를 물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그러자 독일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이 사진을 현상범 수배지 같이 만들어 살인마 전범 처칠 공개수배라며 선전 삐라를 대량으로 유포했는데, 막상 영국에선 "헐, 우리 총리 각하 간지폭풍!", "독일군들을 싹 쓸어버릴 것 같은 카리스마 총리 각하다!", "딱 처칠 총리네요!" "훗 이래야 우리 총리답지!"(...) 등의 반응을 보이며 선전 효과는 고사하고 되려 영국인들의 사기 증진 효과가 나는 바람에 스스로 선전을 중단했다고 한다. 선전선동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괴벨스가 실패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 사실 처칠의 갱 컨셉은 강인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위해 일부러 저렇게 입고 다녔다고도 한다. 부정적인 이미지인 갱을 컨셉으로 잡은 건 괴팍해서 그런 걸지도. 그래도 처칠 본인은 갱단 두목처럼 보이는 저 사진을 죽도록 싫어했다고 하는데, 처칠이 말하길 "손에 술이나 총을 든 모습을 찍히지 않도록 주의하게나. 난 술은 피했는데 그 몹쓸 사진, 손에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찍힌 사진 때문에 여태까지 곤욕을 치르고 있지. 다른 것도 있지만 그 사진이 나한테 입힌 손해가 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여튼 이 사진 때문에 노동당과 소련에 엄청 까였다고 한다. 젊었을 적을 보면 지금의 관점에서도 엄청난 꽃미남이다. 또한 처칠은 2차 대전 연합국 지도자들 중에서 젊었을 시절이 가장 잘생긴 지도자로 꼽혔었다. 참고로 2위는 스탈린.
  • 처칠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글에 상당히 민감했다. 본래 종군기자 출신이었던 처칠은 문법규칙에 까다로웠고, 자기 글에 편집자들이 손대는 꼴을 못 봤다. 앞에서 언급된 명언들은 대부분 연설문에 포함되어 있는데, 처칠은 이 연설문을 완성하기 위해서 몇 주나 투자하면서 교정을 봤다. 그래서 어느 편집자가 처칠의 문장에서 전치사로 끝나는 부분을 발견하고는 바꿔놓은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처칠은 그 즉시 'This is the kind of impertinence up with which I shall not put.'이라는 항의서한을 보내 질책했다고 한다. 가끔 치사(preposition)의 의미를 과잉해석하여 전치사로 문장을 끝내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22], 이것을 희화화 하는 문장을 답신으로 보낸 것. 설명하자면 원래 문장은 '(생략) impertinence which I shall not put up with.'(참을 수 없는 무례)인데 여기서 억지로 전치사 두 개(up with)를 통째로 which 앞로 보내서 '~ up with which ~' 를 만든 것. 전치사 두 개를 통째로 관계대명사 앞으로 보내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영어권 화자에게는 상당히 어색하게 들린다. 이는 내용상으로 편집자를 디스하는(...) 동시에 문장 구조적으로 무조건 문장 말미의 전치사를 제거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전쟁 중에 정보국장이 단어 하나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지적을 한 사례가 존재하는데, 사실 이건 지적할 만한 사례였다.
왜냐하면 문제의 단어가 'intense'를 사용할 자리에 'intensive'를 사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intense는 원래 크거나 강대하고 혹독하다는 의미이고, intensive는 작정해서 끌어모아서 세졌다는 의미이다. 어느 지역의 적 부대가 intense하면 강병이 배치되어 있다는 거고, intensive하면 적이 병력을 집중시켰다는 의미가 되어서 전시 기준으로는 의미가 천양지차이다. 군 정보국장이 이런 식으로 단어 섞어 쓰면 까이는 게 당연하다. 다만 그걸 발견한 처칠이 흠좀무한 것은 별 수 없지만.
  •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기에 처칠과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오래 살았고 집도 부유한 편이라서 여러 마리를 키웠는데 넬슨, (이 고양인 이름을 안 지어줘서 그냥 캣으로 부름), 벤저민, 스튜어트 같은 이름을 지어주면서 모두 아꼈다. 늘그막에도 조크라는 고양이를 아꼈는데 죽기 얼마 전 찍은 사진에 같이 나온 고양이가 바로 조크이다. 조크는 처칠이 죽은 뒤에 처칠 유족들이 키우면서 1974년까지 살았는데 지금도 조크의 후손들이 조크 2, 3, 4세로 불리면서 계속 처칠의 집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다고 한다.
  • 윈스턴 처칠 총리가 전용차를 타고 의사당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교통은 막히고 회의시간은 임박했다. 처칠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운전사를 재촉했다. "여보게, 회의에 늦겠는데, 좀 더 빨리 달릴 수 없겠나?" "예. 저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요." 운전사도 마음이 급해졌다. 순간 교통경찰이 처칠이 탄 차를 정지시켰다. 다급한 나머지 운전사가 신호를 위반하고 달렸기 때문이다. 교통경찰이 딱지를 떼려 하자 운전사가 "지금 이 차에는 총리 각하가 타고 계시다네. 회의시간이 임박해서 그러니, 어서 보내주게나!" 라고 말했다. 그러자 교통경찰은 "총리 각하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총리 각하와 비슷하지는 않군요.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이 나라의 법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 각하의 차가 교통 신호를 어겼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총리 각하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다니, 당신에게는 위증죄까지 추가해야겠군요. 그리고 아무리 총리 각하가 타고 있는 차라고 해도, 교통신호를 위반했다면 당연히 딱지를 떼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서 면허증을 내놓고, 내일 당장 경찰서로 출두하시오!" 그렇게 운전사는 교통신호 위반 딱지를 떼였으나 처칠은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저런 꿋꿋한 경찰관이 영국의 민주주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처칠은 런던 경시청장에게 유쾌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경시청장인가? 나 처칠인데, 오늘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으니, 그 모범적인 교통경찰을 1계급 특진시켜 주게나!" 수화기를 통해 전해들은 런던 경시청장의 대답은 "죄송합니다, 총리 각하. 런던 경시청의 내규에는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에게 딱지를 뗀 교통경찰을 1계급 특진시켜주라는 조항은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처칠은 그날 런던의 경찰들에게 두 번 당했지만 자신이 영국의 총리임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 당시나 지금도 있는 집 사람들은 아이를 유모에게 맡겨 기르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처칠도 마찬가지로 유모에게 양육되었다. 그래서 다른 집도 그렇듯 친부모보다 유모를 더 가깝게 느끼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는데, 처칠 역시 비슷했는지 어머니의 죽음보다 유모의 죽음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 전후 2차 대전 승리의 원인에 어떤 것이 있냐는 질문에 앨런 튜링을 지목하기도 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도 나오는 일화지만 당시 암호병학교에서 이니그마 해독방식의 견해가 달라 동료들과 융합되지 못하던 앨런 튜링에게 편지를 받은 뒤 그를 팀장으로 지목해 해독연구를 지원해주었다. 근데 네이버 캐스트에 의하면 자서전엔 튜링에 대해서 언급도 안했다고(...) 말년 불우했던 앨런 튜링의 행적 때문인 듯.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처칠은 상륙부대와 함께 작전에 참가하려 했다. 주위 사람들이 일국의 총리가 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만류하려했지만 처칠은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았다. 결국 처칠의 고집을 꺾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국왕인 조지 6세. 그런데 꺾은 방법이란게 기상천외하다. "처칠 총리가 상륙전에 참가하겠다는데, 대신 짐이 국왕으로서 상륙하겠소. 공격 당일 가장 먼저 상륙하는 부대의 장병들과 짐이 함께할 것이오."라고 말해 버린것. 처칠이 말도 안된다며 만류하자 "짐이 전사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지만, 처칠 총리는 그렇지 못하오."라고 말한다. 결국 처칠은 상륙전 참가를 없던 일로 했다는 이야기.

12 미디어매체의 처칠

  • HBO에서 BBC와 공동제작하여 2002년에 Gathering Storm을, 2009년에는 속편격인 Into the Storm: Churchill at War(2009)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처칠의 2차대전 회고록의 1권 제목이기도 한 Gathering Storm에서는 본 얼티메이텀, 스카이폴 등에 출연한 앨버트 피니와 인권운동가로도 유명한 바버네사 레드그레이브라는 두 명배우가 각각 처칠과 그의 아내 클레멘타인 처칠 역을 맡았다. 두 사람은 1974년 애거서 크리스티의 원작을 기반으로 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살인》에 같이 출연한 경험이 있기도하다. 이 작품은 톰 윌킨슨, 짐 브로드벤트 등 영국 출신의 대배우들이 조연으로 출연하는 등 여러모로 수작으로 꼽힌다. 피니의 연기가 싱크로가 상당히 잘 맞아서 감상을 권한다. KBS에서 2010년 6월 19일 성우 더빙을 통해 《윈스턴 처칠의 폭풍전야》라는 제목으로 방영했었다. 처칠은 유강진, 클레멘타인 처칠은 이선영 성우가 맡았다. 특히 유강진 성우는 알버트 피니의 목소리 역을 자주하는 편. 그 외 박상일, 이규화, 강희선, 탁원제, 이장원, 원호섭 등 영화만큼이나 성우진 캐스팅도 엄청나다. 2009년에 나온 후속편인 Into the Storm에서는 시기의 차이등을 고려하여 배역도 전면 교체되었다. 2002년작이 윈스턴 처칠이 하원의원에서 해군장관으로 복귀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면, 2009년작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윈스턴 처칠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모즐리와 같이 영국을 파시즘 국가로 만드는 극우정치가로 나온다. 심지어 스페인 내전에 자국 의용병을 보낼 정도.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이쪽 대체역사 세계에서는 1차 대전에서 영국이 패배한 후 막장 파쇼국가로 치달으며 2차 대전을 일으켰다가 패망한다. 처칠은 핵을 맞는다(...)
  • 리처드 버턴이 처칠로 나온 미니시리즈가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문제는 버턴은 처칠을 아주 싫어했고 그런 생각을 공개장소에서 이야기 하는 바람에 한동안 BBC 출연을 금지 당했다.
드라마에 등장한 것은 11대 닥터의 뉴 시즌 5부터다. KBS 더빙판 성우는 노민. 고집 센 강골인 처칠이 제대로 표현됐다. 1940~1941년 사이의 겨울, 처칠은 닥터에게 전화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와 달라고 요청한다. 닥터는 한 달씩이나 늦게 도착했고, 닥터는 '타디스를 아직 덜 길들였다'고 사과한다. 영국은 히틀러의 침략을 받고 있었고, 처칠은 닥터에게 에드윈 브레이스웰 교수가 만들어낸, 영국을 구원할 신무기 '아이언사이드(철기병)'가 독일군 전투기를 레이저로 격추하는 것을 보여준다.
닥터는 그것이 사악한 외계인달렉이라며 처칠을 설득하려 하지만, 처칠은 '히틀러를 몰아낼 수 있다면 악마라도 부르겠다'고 그의 말을 무시한다. 결국 교수가 달렉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라는 것과 달렉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연기하던 것이란 게 밝혀지자, 닥터가 타디스로 달렉의 우주선으로 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달렉이 우주선으로 밤중에 온 런던의 불을 켜자, 공습을 막기 위해 닥터의 동행인 에이미 폰드의 아이디어로 절망에 빠진 교수를 설득하여, 교수의 기술로 반중력 버블과 레이저를 장착한 스핏파이어를 우주로 보내 우주선의 에너지 파장을 보내는 부분을 파괴한다. 그리고 교수가 폭발할 위험에 빠졌다가 구해진 것을 지켜본다. 영국은 위험에서 구해졌고, 닥터는 역사에 안 어울리는 교수의 기술을 폐기한 뒤 처칠에게 잘 해내리라는 충고를 한 뒤 그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정치인의 입장에서 닥터의 타디스에 유독 많은 관심을 보였다. 타디스를 자가용 삼으려고 한 듯 이 양반 성깔이면 못할 것도 없는데...
이후 뉴 시즌 6 파이널 에피소드에서 2011년 4월 22일 오후 5시 2분에 11대 닥터가 죽지 않게 되자 시간이 멈추면서 역사가 이 시점을 중심으로 꼬이게 되는데, 이때 그는 신성 로마 제국황제로 영국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묘하게나마 '시간축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인물. 하기사 영국 수상일 텐데 황제까지 하라고 하면 당연히 이상하겠지 예언자를 부르라고 한 뒤, 예언자에게 '시간이 대체 어떻게 된 거냐'라며 말하라고 다그친다. 그런데 사실 그 예언자는... 그리고 에이미 폰드에게 웨블리 리볼버를 겨눴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다시 6대 닥터와 만난다.
  •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템플러로 등장한다. 미국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함께 히틀러에 맞서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했지만 실상 네 사람 모두 짜고 한 짓으로 그 목적은 세계를 더욱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데 기인한 것이였다. 허나 암살단으로 인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그의 이니셜이 에덴의 조각을 갖고 만나기로 한 히틀러가 나오지 않았다는 내용의 편지에서 언급만 된다.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에서 1차 대전 시기 미션 때 직접 등장하는데, 이 시절에는 아직 템플러가 아니었는지 영국 암살단의 리디아 프라이(제이콥 프라이의 증손녀) 에게 기사단 소속 독일 스파이의 암살을 의뢰했다. 대충 1차대전 끝나고 쿠르드 학살을 기점으로 템플러로 타락했다고 보면 되려나
  • 헬싱에서는 직접 등장은 하지 않지만 그가 쓰던 전시 내각실(캐비넷 워 룸즈)를 언급한다. 소좌가 런던을 박살내는 지시를 내리는 과정에서 여러 랜드마크들을 언급하는데, 2차대전 때 자신들과 가장 연관이 깊은 건물이라 그런지 기분 나쁘니 파편도 남기지 말고 부숴버리라는 말을 한다.
  • 바이오쇼크 2DLC인 미네르바의 동굴 최후반부 잠수정으로 가는 통로의 벽에 걸린 게시판에 처칠이 주인공의 부인이 런던 공습 때 죽은것에 대한 조문 편지를 보낸 것을 읽어 볼수 있다.
  • 미스터 피바디와 셔먼쇼에선 무려 아기(..)처럼 행동한다. 고인능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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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관련 링크

처칠과 관련된 항목은 너무 많으므로, 나무위키의 여백이 부족해서 기재할 수가 없다. 20세기 초중반의 역사는 처칠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요르단의 국경이 이상하게 삐뚤어진 게 처칠이 국경선을 긋다가 딸꾹질을 해버리는 통에 구부러진 거라는 농담도 있을 정도다. 그래서 저 국경선에 붙은 별명이 '윈스턴의 딸꾹질(Winston's hiccup)'(...) 이럴 땐 역링크를 애용하자

  1. 이게 다 처칠이 받은 대영제국 훈장이다. 흠좀무. 위키백과에서 같이 주로 KG, OM, CH까지 표기한다. 보통 더 유력한 가문명인 Churchill로 통하지만 정식 가문명은 Spencer-Churchill이다.
  2. 당시 서양에서는 미국의 신흥 부자와 유럽 (특히 영국) 귀족 간의 결혼이 많았다고 한다. 문제는 돈 많은 미국 집안에서 자유스럽게 자란 귀한 따님을 알고 보니까 찢어지게 가난한 영국 귀족의 아드님이 모셔가서 온갖 생고생시키는 일도 제법 일어났던 편. 크림슨 피크는 그런 시대적 흐름과 관련 있는 영화다.
  3. 그러나 처칠은 아주 젊어서부터 탈모가 시작되어서 20대 중반의 사진에도 탈모가 진행되는것이 보이며 그가 서른 살 때에는 정도로 탈모가 심했다.
  4. 볼프 슈나이더, 박종대 역, 『위대한 패배자』, 서울: 을유문화사, 2006.
  5. 그런데 사실 노르웨이 전역은 처칠이 계획한 것이었다. orz. 당시 노르웨이는 중립국이었으나, 노르웨이의 나르빅 항이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면 스웨덴과 독일의 물자 운송을 손쉽게 끊을 수 있는 경로로서 주목받았다.
  6. 당장 독일군이 상륙할것 같으니 기왕 생산중인 2파운더를 계속 생산하고 6파운도 생산은 미루자는 것이었지만, 결과는 다들 알듯이 독일군은 포로들을 제외하면 영국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고, 영국전차는 만성적인 화력부족을 겪어야 했다.
  7. 마거릿 대처도 10년 넘게 집권하면서도 인두세 문제에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당 내부의 지지 철회로 1990년 권좌에서 내려오자 다시는 나오지 말라는 뜻에서 남작 작위(세습불가능한 명예직)가 수여되었다. 남편에겐 준남작이 수여... 영국에선 총리를 좀 오래하고 은퇴하면 예우상 다시 나오지 말라는 뜻도 넌지시 포함해서 작위가 나온다. 빅토리아 시기에 글래드스턴의 경우 위대한 평민으로 남겠다며 거부한 경우도 있다.
  8. 처칠은 "내가 져야 할 가장 무거운 십자가는 로렌의 십자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십자가는 2차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의 상징이었고 그 지도자는 드골이었다(...)
  9. 구스타프 홀스트의 관현악곡 <행성>(Planets) 중 목성의 일부분에서 유래한 곡.
  10. 아이젠하워는 전직 미국 대통령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을 지냈으므로, 2차대전 때 전시 총리인 처칠의 장례식에 미국 대표로 참석한다면 충분한 상징성이 있었다.
  11. 사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낀다. 우선 존슨의 초기 임기는 전임 존 F. 케네디의 암살 수습과 선거 준비로 엄청 바빴고, 그 기간 앞뒤로는 여왕의 임신 등이 있어 여왕 스스로도 1957년부터 무려 1976년까지 미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캐나다는 2차례 방문했으나 이번엔 존슨이 시간이 없었다. #
  12. 영국의 펀치지에서도 1920년대에 이런 소재로 처칠을 조롱하는 만화를 그린 적이 있다. 처칠이 '감히'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나도 당신도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썼으니, 모자를 바꿔쓰자"고 말하는 내용인데, 2차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감히'가 '당연히'로 바뀌었다(...)
  13.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인사로, 극우사관 정립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다.
  14. 참고로 나치 독일에서는 이를 근거로 처칠을 전범으로 선포한적이 있다. 물론 프로파간다적인 차원의 일환이었다.
  15. 한글은 아니더라도 고유의 문자가 생겼을 가능성은 있다. 500년전에 문자가 없던 나라는 한국만이 아니지만 다들 어떤 식으로든 문자를 창조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다. 한국만이 문자없는 상태로 계속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16. 이 정도는 히틀러가 없었더라도 프로이센 군부나 독일 국민들의 반 폴란드 감정이 높아서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17.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당시 수상이던 그는 이튼과 함께 영국의 2대 명문고등학교인 해로우 고교 졸업식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어 연설문을 준비해 왔으나, 전시인 상황이다 보니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 금방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 연설할 시간이 없다는 보좌관들의 전언이 왔었다. 그러자 처칠은 연단에 올라 이 말만을 남기고 떠났다. 이는 후일 사람들에게, 처칠 자신이 2차대전의 승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비춰지기도 한다. 처음엔 학생들이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그의 뜻을 이해한 청중들의 박수갈채와 함성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가 떠난 뒤에도 그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인생에 꼭 필요한 교훈은 길 필요가, 혹은 길 수가 없다는 걸 잘 보여주는 절대적인 명언.
  18. 야사에 따르면 이 연설 뒤에 처칠이 "그리고 우리들은 맥주병으로 그놈들의 대가리를 후려 칠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는 그것밖에 없으니까"(...)라고 덧붙였으나 방송에는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처칠의 성깔을 잘 알려주는 이야기.
  19. 맥심 기관총이 맹위를 떨쳐 일방적인 학살이 일어난 것으로만 회자되는 1898년 옴두르만 전투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처칠은 21창기병 연대 소속 중위이자 종군기자(요즘으로 치면 특파원)로 참전했다. 21창기병 연대는 언덕 위에 있는 소규모 부대를 발견하고 공격했다가 그 뒤에서 대기하던 부대에 포위당해 연대원 약 400명 가운데 20여 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말은 100필이 넘게 손실했다고 한다.
  20. 이러면 모두 궁금해 할 낸시 애스터의 외모는 LadyAstor1909.jpg 젊은 시절. Vizconde%26VizcondesaAstor1935.jpg 1935년의 남편과 함께. NancyAstor1949.jpg 1949년.
  21. 무솔리니의 사위인 치아노 백작은 무솔리니가 실각할 때 가담했다가, 나치의 지원으로 복귀한 무솔리니에게 총살당했다.
  22. 일례로 Where are you from?을 From where are you?로 바꾼다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