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로 몽고메리

(버나드 몽고메리에서 넘어옴)

1 소개

Bernard_Law_Montgomery.jpg

사막생쥐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남기는 것은 오로지 파괴와 슬픔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그 의도가 무엇이던,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히틀러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의 망상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에서 수천만 명의 죄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의 작가 후기 중에서

Sir Bernard Law Montgomery,[1] 1st Viscount Montgomery of Alamein, KG, GCB, DSO, PC
(1887년 11월 17일 ~ 1976년 3월 24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활약한 영국 육군 원수. 전후 앨러메인 자작에 봉해졌다. 그의 선조는 스코틀랜드 기사이자 몽고메리 백작으로 프랑스 앙리 2세와 토너먼트 마상창시합을 하다가 실수로 앙리 2세의 오른쪽 눈에 창을 박아 절명하게 한 콩테 드 가브리엘이다. 고의가 아니었기에 가브리엘은 앙리 2세 사망 전 사면을 받을 수 있었지만 왕을 죽였다는 이유로 귀족 사회에서 천대받았다. 이에 개신교로 개종하고 플랑드르로 튀었다가 위그노 전쟁 중에 영국군을 이끌고 고향인 노르망디의 개신교 반란을 획책하려고 돌아왔다 잡혀 처형당했다. 그 후손이 다시 영국군을 이끌고 프랑스로 돌아온 셈이다.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아프리카에서 쫓아낸 덕에 롬멜의 숙명적인 라이벌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람. 사실 둘을 묶어 라이벌이라 하기엔 둘에게 공통점이 별로 없다. 롬멜의 기동전에 말려들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전장에서 아프리카 군단을 격파하는 걸 보면 호적수라기보단 되려 극상성의 인물이다.

작전 수행 전에 최대한의 준비과정을 거쳐나가는 신중한 타입이지만, 실제 전투에 들어서서는 거세게 몰아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장군이 되기 전까지 보병에만 국한된 경험 때문에 기갑전력을 다루는 솜씨는 미숙한 면이 있고, 성격이 지랄맞은 것으로 유명했다.[2]

전후에는 <전쟁의 역사>라는 책을 펴냈는데, 우리나라에도 번역본이 나눠 출판되었다. 근처 도서관에서 찾아보자. 1권으로 된 놈은 1000페이지가 넘는 압박적인 분량에, 가격도 5만원 정도는 되기 때문에 부담없이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은 절대 아니다. 전쟁사에 관심 있으면 읽어보는 게 좋지만 책에 어쩔 수 없이 나오는 백인 우월주의 사상이라든가 몽고메리의 개인적인 편견, 몇몇 부분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도 들어가 있으니 그 부분에선 조심하는게 좋다. 게다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임나일본부설을 정설인양 쓰고 있다. 인종차별은 당시 워낙 보편적이었으니 넘어간다 쳐도, 제2차 세계대전 부분 서술에 크나큰 차이를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분량이 고작 30여 페이지 밖에 안되는데 그중에서 자신이 돋보이는 엘 알라메인 전투는 무려 3페이지 이상을 할애해 기본골격부터 진행상황까지 자세히 서술한 반면, 가장 큰 실수로 지적받는 마켓 가든 작전은 제대로 언급도 안하고 서부전선 독일군 최후의 반격인 아르덴 대공세에 슬쩍 묻어가는 식으로 서술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탱이

2 몽고메리 약사

2.1 2차대전 이전

1887년 런던에서 몽고메리 가의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헨리 몽고메리가 성직자였기에 금욕적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에 엄격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3],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였기에 싸가지버릇없고 건방진 성격이 되었다. 특히 어머니의 무심함은 그에게 두고두고 상처로 남았으며, 훗날 버나드 몽고메리는 자신의 어머니가 손자인 데이비드와 만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우중충한 소년기 및 청소년기를 보낸 후 왕립 군사 학교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1대대의 보병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한다.

1차대전 때 보병 소대장으로 참가하였다. 몽스 전투에서 대대의 절반이 소멸하고, 국경선 전투에서 오른쪽 폐에 총알이 박히고 무릎에도 적탄이 관통하여 사경을 헤매는 경험을 하는 등[4] 여러 지옥도에서 살아남았으며 전간기에는 보병방어전술에 대한 책을 저술하여 영국군 내에서 어느 정도 반향을 이끌어 냈지만 당시 영국 육군의 화두는 전차였기 때문에 그의 저작은 상대적으로 묻혔다.

2.2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0년 프랑스 전선에 영국원정군 지휘관으로 참가했으며, 패주하는 영국군을 지키기 위해 아라스 전투에서 독일군을 저지하고 됭케르크 철수를 안전히 수행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본토에 소속 되어 영국 육군 재건에 참가했다.

롬멜 원수가 이끄는 독일군 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이 저지른 大삽질을 메꾸기 위해 급파되어, 번개같은 작전으로 오코너 장군을 사로잡고 영국 서부 사막군을 거의 괴멸상태까지 몰아넣었다. 중동 사령관 웨벨은 사임하고 후임이 된 오킨렉은 서부 사막군을 제8군, 일명 '사막의 쥐떼'로 재편하고 재도전, 한때 밀어붙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반격당해 오히려 토브룩이 함락되는 등 참패를 맛보고 물러났다. 이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이 바로 몽고메리 원수로, 그는 우선 사기가 떨어진데다가 장비와 병력 손실이 막심한 제8군을 재건하고 1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침공한 롬멜을 끌어들여 격퇴, 독일군의 이집트 진공 능력을 소모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8군의 전력은 하루가 다르게 증강되어 갔는데, 아프리카 군단을 지원하기위해 투입된 독일 제27전투비행단 소속 정찰기가 시속 300마일의 속도로 8군의 병력 주변을 돌면서 그 시간을 계산해봤더니 무려 10분이나 걸렸다고 한다(...).

2.3 쥐떼들의 승리

결국 이러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2차 알라메인 전투에서 아프리카 군단을 거세게 밀어붙인 결과, 상당한 희생을 치루기는 했지만 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이 사실상 괴멸하여 이집트에서 리비아를 거쳐 튀니지에 이르는 먼 후퇴를 하게 만든다. 몽고메리는 독일군을 추적, 튀니지에 틀어박히기 전에 괴멸시키려 했으나, 기갑 지휘에 서투른 면이 있었던 데다가 롬멜이 몇차례 효과적으로 반격을 했고, 악천후로 공군력이 생각만큼 성과를 내지 못해 실패하였다.

이 무렵 미군이 '토치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륙하여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포위망에 걸려들었고, 독일군은 영웅시되었던 롬멜이 또다시 패장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독일로 불러들였다.

토치 작전으로 모로코에 상륙했던 미군은 카세린 계곡의 참패를 경험하는 등 처음에는 빌빌대어 영국군 장군들 뿐 아니라 아이젠하워조차 자군의 전투력을 의심할 정도였지만, 조지 S. 패튼으로 지휘관이 교체되면서 전력이 급상승, 독일군을 밀어붙이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양 방향에서 영국과 미군의 공격을 받은 아프리카 군단은 독일군이탈리아군 합쳐 거의 30만의 포로를 남기고 소멸했다.

2.4 이탈리아 전역과 D-DAY 후

이후 미군과 함께 시칠리아 상륙 작전을 실시하는데, 여기서 진격방향과 주공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패튼과 사이가 벌어지고,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는데, 항상 과감한 공격을 주장하는 패튼과 가급적이면 방어전을 위주로 적군의 힘을 소진시킨 후 마무리를 가한다는 몽고메리는 사사건건 충돌하기 일쑤였다.[5] 카세린 전투에서 미군의 한심한 꼴을 본 몽고메리는 미군의 전투력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전공 욕심에 불타는 패튼은 자신의 전공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명장 롬멜을 격파한' 명성에 빛나는 몽고메리를 라이벌로 보고 그보다 먼저, 더 많은 전공을 세우기를 원했다. 몽고메리는 처음에는 패튼을 그다지 신경 안 썼지만, 그가 시칠리아에서 쾌진격을 통해 엄청난 전과를 세워 자신의 전공이 가려지자 슬슬 약이 올랐는지 이후 패튼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과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몽고메리는 이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총지휘하여 작전을 성공시켰고, 이후 노르망디에 연합군을 묶어두려는 독일군을 상대로 영연방군을 지휘하며 격전을 치르다가 이후 상륙한 패튼의 3군이 망치역할을 하는 동안 모루 역할을 수행, 패튼의 부대가 진격하는 동안 독일군의 주력을 붙잡아두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두 지휘관의 활약으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개시 이후 예상보다 적은 희생으로 훨씬 빨리 파리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몽고메리와 패튼의 대립은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특히 미군의 빛나는 승리를 취재하길 원하는 미국 기자들이 패튼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몽고메리를 무능한 인물, "답답한 영국놈"으로 포장하면서 이러한 갈등은 극에 달했다. 따라서 지크프리트 선과 라인 강을 넘어 독일영내로 먼저 들어가는 장군이 되길 원했던 두 사람은 라이벌보다 먼저 전과를 거두기 위해 서로 더 많은 보충병력과 보급품을 원했고, 그에 반하여 아이젠하워는 영국군이나 미군 모두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한데다가 어느 한쪽에 물자를 집중하기도 난감하여 양측을 최대한 공평하게 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군과 미군 양부대가 사이좋게 진격속도가 떨어지게 만드는 좋지 않은 결과만 낳았다.

2.5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참패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독일군의 후퇴보다 빠른 진격속도에 기고만장해져 있었고, 비실거리는 독일의 부드러운 아랫배를 걷어차기 위해 획기적인 꼼수를 궁리하게 된다. 그 와중에 노르망디 이후 놀고먹는(?) 공수부대가 눈에 들어왔고 아니 어딜봐서 놀고 먹고 있었다는거냐! 결국 마켓 가든 작전이 몽고메리의 제안으로 기획되게 된다. 이것은 영미 3개 공수사단(영국 제1공수사단, 미 82, 101공수사단에 추가로 폴란드 공수여단)이 네덜란드 일대에 강하해서 교량을 확보하고, 영국 육군의 주력인 30군단이 확보된 교량을 따라 독일군을 정리하여 최종적으로 아른헴을 장악하는 작전이었다. 정체된 전선을 불과 2개 군단급 전력으로 타개한다는 매력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엄청난 떡밥[6]이 걸려 있었다.

독일군은 본토 방어를 위해 지크프리드 선에 전력을 집중하고 네덜란드 방어에는 그다지 힘을 쏟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영국군의 판단이었고[7] 공수부대가 교량을 확보하면 아군 기갑부대의 지원 하에 남은 적군을 소탕하고 적의 방어선을 우회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다. 작전 의도 자체는 매우 훌륭했다. 그러나... 문제는 아른헴 주위에 무장 SS 2개 기갑사단과 정규군 1개 기갑사단, 정규군 보병사단과 그 근처에 무장 SS 대대가 집결하고 있엇던 것이다.[8] [9]

정확하게 마켓 가든 작전을 예상하고 있었다기 보다는 네덜란드 방면이나 독일 본토쪽으로 공세가 올 것을 대비해서 팔리즈 포켓에서 탈출한 제2 SS기갑군단을 후방인 아른헴에서 보충과 휴식을 하고 있었던 것. 그리고 이러한 명령을 내린 사람이 하필이면 '방어의 사자' 발터 모델 원수였다.

B집단군 총사령관 발터 모델은 영국군 공수부대의 강하로부터 단 3시간만에 방어 계획을 수립, SS부대 뿐 아니라 해군, 공군 지상대원들까지 전부 동원하여 방어선을 편성하여 연합군의 공세를 분쇄한다. 반격 작전 내내 모델 자신이 매일 전선에 나아가 전황을 완전히 파악하여 증원 부대 투입이 매우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고, SS 기갑 부대 지휘관 빌헬름 비트리히와 독일군 공수부대 지휘관 쿠르트 슈투덴트의 지휘 역량까지 더해져서 그야말로 연합군은 완패하고 말았다.

특히 이 작전의 실패가 더 뼈 아픈 이유는, 연합군에서 고급 인력으로 꼽히는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다 말아먹은 주제에 막상 그 상대는 독일군 최정예도 아닌, 2선급 예비부대나 교도대라는 점에서 전투에도 지고 전쟁에도 진 결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델 장군과 그 참모들에게 진 셈이었다. 독일군이 존나 세서 질 수밖에 없었어요라고 징징대지도 못한다. 그런 주제에 용맹을 떨친 망명 장군에게 패배의 책임을 전가하다니 더욱 용서가 안 된다[10]

마켓 가든 작전은 목표를 전혀 달성못했을 뿐더러 영국 제1공수사단은 사실상 전멸하고[11] 미 제82공수사단도 노르망디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등 큰 타격을 입고 쓸모없는 수십 km의 둑길만 차지하는 참패로[12] 끝난다. 이 기간 동안 서부전선의 전 부대의 진격이 중지되었고[13] 이에 작전 실패와 더불어 미국 언론들에게 맹렬하게 씹히게 된다.[14] 하지만 아이젠하워가 불똥튈 것을 염려했는지 맹렬하게 몽고메리를 옹호해주기도 했고 기껏해야 사단급 출혈[15]이었기 때문에 넘어가게 된다. 결국 라인강 도하라는 작전 목적이 달성된 것은 작전 6개월 이상이 지난 45년 3월, 그것도 패튼의 손에 이루어진다. 이후 연합군은 망명정부 요청에 따라 보급에 중요한 항구인 앤트워프 해방에 진력했고 캐나다군 13,000명의 사상자를 낸 스헬데 전투를 통해 강 저편의 독일군을 몰아내며 앤트워프 항 사용이 가능해지며 겨우 보급에 숨통이 트인다. 아른헴이 해방된 것은 독일이 항복하고 나서였다.

2.6 전쟁의 막바지

이후 1944년 겨울의 악천후를 이용, 독일군이 1940년 프랑스 정복을 재현하려고 시도한 아르덴 대공세에서 미군이 초반에 대패하다가 반격에 성공 승승장구 하는 동안 몽고메리의 영국군은 네덜란드 지역의 독일군을 소탕하면서 미군 진영이 뚫리게 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으나 전투 종료후 "몽고메리가 승리를 자신의 덕으로 돌린다"는 기사가 미국쪽 기자들에 의해 나돌게 된다. 원래 당시 몽고메리의 발언은 "우리도 승리에 일조했다" 정도였지만, "미군의 대승을 질투하는 영국놈"을 만들려는 미 언론에 의해 과장된 것이다. 아무튼 이후 미국쪽의 몽고메리에 대한 평가는 급락한다.

사실 이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몽고메리의 잘못도 있고 그와 동시에 몽고메리의 말이 맞는 점도 있었다. 우선 몽고메리 자신이 자존심+영국의 자부심이 센지라 어느정도 "미국이 나 없으면 못 이겼다." 라는 뉘앙스를 풍긴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해 아이젠하워와 조지 마셜은 격분하였고 몽고메리는 해임의 위기에까지 몰렸고 사과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뿐만 아니라 아르덴 대공세가 막 시작되었을 때에는 브래들리에게 "내가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도 안그러더니 꼴이 뭐냐?"라는 식의 모욕을 줘서 이때부터 패튼뿐만 아니라 다른 미군 장성들과도 거의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라서, 아르덴 대공세는 미군의 너무나 상황을 낙관한 사단 배치가 원인 중의 하나였으며 몽고메리 말대로 영국군이 쓰고 있던 팬텀 통신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아 초기에는 지휘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여기에는 일부 미군 장성의 나태한 상황대처에 뿔이 난 몽고메리의 반응도 있다. 오히려 몽고메리는 자신의 연락장교들을 이용해 연락이 엉킨 미군에 비해 초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야전군을 지휘하는 자신과 거의 동급인 연합군 장군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은 분명히 정치적, 외교적인 잘못이었다. 하여간 이 성질은...

아르덴 전투 이후 사실상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망했어요 상태가 되었고, 이 때문에 몽고메리와 패튼은 손쉬운 먹이가 된 라인 도하작전을 먼저 벌이려고 노력했으며, 아이젠하워는 미군의 손실을 우려하여 영국군이 먼저 라인강 돌파를 하도록 허가했으나 패튼이 몰래 먼저 도하해 버려 또다시 영광을 빼앗긴다.

1945년 5월에 독일이 패망하자, 1945년 6월에 독일을 무찌른 공로를 인정받아 소련에서 전승훈장을 수훈했다. 총 17명의 수훈자 중에서(실제로 이게 끝이었다) 서방 연합군 측에서 받은 사람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이 사람 뿐이다.

2.7 전후

몽고메리 원수는 전쟁이 끝난 후에 연합군측 독일 점령군 사령관을 역임했고, 또한 영국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16] 이후 NATO 초대 부사령관[17]을 역임, 그리고 NATO에서 물러난 뒤에는 군을 은퇴하여 저술 활동을 하다가 사망했다. 문필가로써의 평가는 <전쟁의 역사>도 그렇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는 평. 자칭 시인인 조지 S. 패튼이 악평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몽고메리 역시 패튼 못지 않게 장교고 사병이고 가리지 않고 닥달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부하들의 총평은 장군이라기보다는 훈련소 교관같다는 것이었다. 퇴역후 런던시내에서 그의 전 부하가 거리에서 그를 만나 반갑게 인사했지만 "군인 출신인 사람이 복장이 그게 뭔가?"라는 핀잔만 들었다고 한다. 그런 주제에 자신은 '고급 장교들은 규정 외 복장이 가능하된다는 거의 사문화된 법규를 절묘하게 이용하여' [18][19] 자신을 돋보이려 한 점 등은 사제 전투복과 쌍권총, 승마부츠, 반짝이 철모로 치장한 패튼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어쩌면 패튼과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일종의 동족혐오가 아니었을지...

몽고메리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자신의 라이벌들인 롬멜, 패튼과는 달리[20] 88세라는 천수를 누리고 1976년 햄프셔의 저택에서 편안히 사망하였다. 사후 윈저의 성 조지 성당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죽기 전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는지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주님께 나아가 내가 아른헴알라메인에서 앗아갔던 모든 목숨들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겠지..."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몽고메리의 전략적 식견은 그럭저럭 훌륭한 편이었다. 자신이 구성한 전략이 상황에 맞아떨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기다리는 인내심도 있었으며, 아군이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을 확실하게 계산하고 조성하는, 그리고 그 상황이 왔을 때 적을 압도해버리는 능력이 있었다.

독빠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한 한국의 밀덕후들은 엘 알라메인의 전투를 일본군이나 벌일 무식한 어택땅으로 비하하지만, 그런 소모전이야말로 아군과 적군의 교환비와 작전목표의 성공여부에 대해서 확실한 계산이 서지 않는다면 벌일 수 없는 전투다. 또한 그 당시 아프리카 군단의 전투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경향도 있는데 공세를 시작한 몽고메리의 앞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지뢰 50만발과 대전차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밀덕들 말대로 숟갈 올리기였다면 깍쟁이 소련에서 전공 훈장을 줄 턱이 없다

승리의 조건을 조성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그냥 죽치고 있었다고 폄훼하는데, 사실 몽고메리가 취임할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사를 조금만 훑어봐도 공격할때가 아닌데 윗분들의 압박때문에 무리하게 공격했다가 패배하거나 거부했다가 목이 잘린 장수는 엄청 많이 볼 수 있다.굳이 멀리 안가도 한국사에도 원균칠천량 해전이 있다...물론 이건 원균 본인의 주장도 있긴 했지만

한마디로 윗분들의 말도 안되는 명령을 회피하면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유능한 지휘관이다.

그의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내부의 적처칠은 승리에 대한 조급증으로 몽고메리의 전임자들을 날려버린 전적이 있으며 싱가포르 전투에서도 전멸할 때까지 싸우라는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퍼시벌이 일본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는 결과를 만든 적이 있다. 처칠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빨리 공격하라는 닥달을 했지만 몽고메리는 그런 압력을 무시하고 8군의 역량을 키우는 뚝심을 보인 것이다.

그가 자신의 참모진들에게 가장 자주 했던 말버릇이 바로 "100% 확신하는가"였으며, 영국 8군이 롬멜에게 결정타를 먹일 병력과 자재를 계속해서 보존하여 알라메인의 승리를 거두어 내었다.

매우 까다롭고 욱하는 성격도 강했지만, 온갖 쌍욕을 입에 달고 살았던 라이벌 패튼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어휘를 구사하였으며, 부하들을 대놓고 닥달하기보다는 주로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그게 더 피말리는거 아닌가 조국 영국에 대한 애국심도 매우 강한 인물이었으며, 가족들에게도 무척 자상했던 아버지였다고 전해진다.

3.2 부정적 평가

기타 인간적인 면모를 뒤로하고 지휘관으로서의 문제는 사실 위에 써져있는 장군으로서의 장점들이 사실 1차대전에나 최적화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전략적인 식견이 있고 작전수립능력도 출중했지만 상황의 변화에 대처하는 전술적인 능력은 미숙한 면이었고, 특히 마켓 가든 작전의 대참사를 보면 2차대전에서 중요시되던 기갑전력을 이용한 기동전에 대해서는 정말 무지했단 이야기밖에 할 수 없다. 애초부터 보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던데다, 1차세계대전에서의 경험과 그 개인의 성향 등으로 인한 한계로 보인다. 사실 마켓 가든 작전에서도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하하는 마켓 작전의 구상 자체는 나무랄데 없이 훌륭했지만, 이들의 지원부대를 진군시키는 가든 작전을 적군에 대한 과소평가, 도로의 확보실패 등으로 말아먹음으로서 귀한 공수부대를 날려먹는 대참사를 일으킨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하던 거나 잘해야 해요..

3.2.1 패전의 책임 전가

한 사람으로서 개인적 인품이 부족한 것은 사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단점을 영국군 원수로서 공적 영역까지 끌고 왔다는 것이 몽고메리라는 인물의 크나큰 결점이라 할 수 있다.

마켓 가든 작전의 처절한 실패 직후인 1944년 10월 17일, 몽고메리는 영국군 참모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폴란드 공수부대를 비판하며 소사보프스키를 전출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서 영국군 공수군단장 브라우닝 중장 또한 이때를 틈타 참모차장인 로널드 윅스 중장에게 폴란드 공수부대의 역량에 의구심을 표현하며 '이 장교(소사보프스키)는 위기 상황에서 무력한 대처능력을 보여주었고 논란을 일으키며 맡은 바 임무들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는데 현재 35년째 영국군 공수부대에서 근무 중인 마이크 러셀 대령은 2012년, <Polski Bohater(Polish Hero)>에서 이러한 몽고메리와 브라우닝의 행적에 대하여 패전의 비난을 소사보프스키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라 평가하였다.

결국 1944년 12월 26일, 소사보프스키 장군은 폴란드 공수여단장에서 물러났는데 모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장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한직에만 머물렀고 33년의 군 경력을 마감하고 1948년 퇴역할 당시 300파운드의 퇴직금 뿐 연금조차 받지 못하였다. 소사보프스키 장군은 75살까지 영국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였고 76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하였다. 몽고메리의 후배라 할 수 있는 영국군 장교들조차 마켓 가든 작전에서 누구보다 분투하고 정확한 상황 판단을 보였던 소사보프스키에게 패전 책임을 전가한 이기적인 면모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4 기타

4.1 이순신 장군에 대한 언급

몽고메리 원수는 자신의 저서 '전쟁의 역사'에서 이순신 장군을 이렇게 소개하기도 했다. 잠시 인용해 보자면...

"그러나 일본은 뭍에서 성공을 거둔 반면, 바다에서는 일대 타격을 받았다. 한반도 사람들은 항해에 능한 민족이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시아의 해군 전술은 여전히 화살공격을 가하고 배를 들이받아 적선에 올라타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며, 대포는 배에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순신 장군은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배를 고안했다.

그 배의 선체는 속도를 낼 수 있고 작전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갑판 위에는 거북등처럼 철갑을 씌워, 불, 화살, 탄환 등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적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철갑 위에는 큰 못을 박았다. 뱃머리는 공격적으로 적선을 들이받을 수 있도록 강화했으며, 둘레 전체에 포문이 설치되었다. 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순신 장군의 철갑전함에 저항할 수 없었다. 조선이 바다에서 승리를 거둔 결과 히데요시의 지상공격은 마비되고 말았다.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한반도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는 조선 사람들과 중국인들이 지상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싸웠고, 일본인들은 바다에서 또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히데요시는 1598년에 사망했다. 한반도를 무모하게 침략해 실패함으로써 결말이 좋지 못했지만, 그의 모국에서의 군사적, 행정적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21]

4.2 꾀보 몬티

그 외에도 이 사람에 대해서 소소하게 알려진 일화들로 북아프리카 전선 당시 롬멜에 대한 대반격을 준비하면서 그 작전의 일환으로 자신과 빼다박은 용모를 지닌 연기자를 고용해서 사령부 안에 침투한 독일군 첩보원들을 감쪽같이 낚았다든가,[22] 가짜 부대를 만들 때는 간이 화장실에 일보는 사람 인형도 설치하게 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4.3 쇼타콘동성애적 성향

전후인 1946년에 만난 스위스 국적의 12세 소년과 스캔들(...)에 휘말린 적이 있다. 편지도 자주 주고받고, 같이 목욕을 하기도 했다고.

물론 이 스캔들은 당사자인 그 소년과 소년의 부모에 의해 부정된 일이긴 하지만, 몽고메리에게 동성애적 성향이 있었다는 점은 어느 정도 근거있는 사실로 알려진 듯. 몽고메리 사후 그의 전기를 쓴 로드 찰폰트는 그가 젊은 남성과의 교제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다고 밝힌 바 있고, 마찬가지로 몽고메리의 '(남자들과의) 유사 연애관계'를 언급한 그의 전기를 쓴 나이젤 해밀턴은 11세 때 당시 육군원수였던 몽고메리와 친분을 갖게 되었는데, 몽고메리는 이후 그에게 100통 이상의 연애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넘쳐나는 마초성에도 불구하고 저주받은 소프라노 보이스(...) 때문에 게이 취급당했던 패튼하고 사이가 안나쁜 게 이상하다 참고로 노년에 쓴 저서 <전쟁의 역사>도 두명의 젊은 역사학과 대학원생과 함께 작업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남녀를 엄격히 갈라놓는 영국 특유의 기숙학교 시스템 때문에 영국 귀족남자들의 동성애성향은 꽤 많았다. 그런 게이문화가 미국까지 펴져서 게이하면 깔끔하고 세심하다는 선입견을 만들게 되었다. 몽고메리의 성품도 그런 분위기에서 길러진 듯하다.

4.4 그 외

전쟁 중 왕가로부터 하사받은 강아지 두 마리를 각각 '히틀러'와 '롬멜'로 이름붙였던 일화로 유명하다. 본격 개드립

엄격한 금욕주의자로 일평생동안 담배에 손도 대지 않았지만, 영국인답게 차는 좋아하여 꼬박꼬박 마셨다. 술담배를 즐긴 윈스턴 처칠과 이걸 가지고 대화한 적도 있다. 몽고메리가 "저는 평생 술을 한방울도 안마시고, 담배 한 개비도 피운 적이 없어서 늘 건강합니다."라고 말하자, 처칠은 "장군. 나는 매일 이 담배를 입에서 떼지 않고 위스키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지만 이렇게 건강하다오."라고 받아쳤다고.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에르빈 롬멜과 댄스 배틀을 하는데, 중간에 북북노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작중 설명에 따르면 "춤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얼굴이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1. 사실 몽고메리라는 표기는 잘못된 표기이다. 영어 발음을 고려하면 '먼트거머리(/məntˈɡʌmərɪ/)'가 돼야겠지만 거머리는 신경쓰지 말자 이미 몽고메리라는 이름이 고유명사로 굳어진 상황이라 항목을 수정하지는 않는다(...). 수정하면 누군지 모른다 성 자체는 프랑스계, 정확히는 노르만 계통이다. 뭐 한 700년도 더 전에 영국으로 왔겠지만. 프랑스계 영국인의 경우 2014년 기준으로 약 300만 정도이다. 영국계 프랑스인은 40만명 정도로 적은 편.
  2. 당시 영국 정계에서 성격이 가장 나쁜 것으로 유명했던 처칠조차 포로가 되어 몽고메리와 잠시 이야기하게 된 토마를 "성질 고약한 몽고메리와 이야기하게 됐다"고 동정할 정도였다!
  3. 실질적인 집안의 가장은 어머니였고, 아버지는 주로 어머니에게 지시를 받는 등 집안에서 힘이 없었다고 술회한다
  4. 그 당시 모두 몽고메리가 곧 죽으리라 생각했고, 죽은 뒤 묻을 무덤까지 파놓았다고 한다(...).
  5. 몽고메리는 보병장교 출신이고, 패튼은 기갑장교 출신이란 점도 두 사람의 작전견해 차이가 정반대인 이유중 하나라는 이야기가 있다.
  6. 고향이 그리운 병사들은 물론, 차기 대통령 후보를 노리던 아이젠하워에게는 군침을 삼킬만큼 매력적인 대권 보증수표였다. 귀환병들과 그 가족들이 모두 자길 찍어 준다면... 우왕 굿.
  7. 작전 개시 직전 아른헴 근방에 독일 전차부대의 이동이 확인되었으나 지나가는 부대 정도로 폄하되며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8. 이들은 SS 기갑 대장인 명장 빌헬름 비트리히가 지휘하는 제2 SS기갑군단으로, 무장 SS 전력 중에서도 정예 부대였고 동부전선에서 죽어라 싸우다가 서부전선으로 온 노련한 병사들이었다.
  9. 다만 이들은 서부전선으로 재편된 후, 팔레즈에서 연합군에게 개발살이 나버려(...) 서부전선 사령관으로 다시 부임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와, 동부전선에서 온 B 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에 의해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후방의 시골구석, 즉 아른헴(...)으로 보내져 휴식 겸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대기하던, 말이 사단이지 연대 수준도 못되게 짜부러든 전력이었다.
  10. 해당 전투에 참여한 폴란드 공수여단장 스타니스와프 소사보프스키 장군은 패배의 책임을 전가받고 이후 한직을 맴돌다 전후에 공장에 노동자로 취직하여 살다가 죽었다.
  11. 이후 다시는 전투강하를 못했다.
  12. 후일 몽고메리가 이 작전을 90%의 성공이라 자평한 것에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의 남편 베른하르트 공이 "우리나라는 몽고메리가 한번 더 성공해도 될 만큼 부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비꼰 것이 유명한 일화.
  13. 이는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제 4화 보충병에서 닉슨이 언급하기도 했으며 모든 전투계획이 그러하지만 특히나 공수부대의 전투강하는 기습적인 목적이 강하며 또 보급 등의 여러문제로 유럽에서의 연합군의 진격은 멈춰있던 상황이었다.
  14. 정작 패튼은 보급 정체만 신경썼을 뿐 몽고메리의 실패에 관해서는 이렇다할 논평을 하지 않았다.
  15. 허나 그 사단 출혈이 정예병력인 연합군 공수부대...
  16. 성질과 정치적 기술의 미흡함 때문에 평은 좋지 않았다.
  17. 당시 사령관은 미 육군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원수였다.
  18. 당대 고급 장교들의 기본 스킬인 지급 제복 대신 양복점에서 맞춘 사제 제복입는 건 기본이고 그 외에 베레모에 모표 두세 개 달기, 전투복 상의보다 긴 사제 스웨터입기,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플러 착용 등 셀 수 없을 정도.
  19. 괴랄하게도 보병 출신인데도 기갑부대 베레를 썼다. 사실 언제나 기갑부대 베레를 쓴건 아니고, 마켓가든 작전 중에는 공수부대 베레를 쓰고 다니기도 했다. 지휘하는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대의 베레모를 쓰고 다닌 것.
  20. 롬멜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하였고, 패튼은 전후 베를린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21. 전쟁의 역사, 책세상 95년 1판 1쇄/2004년 개정증보판 1쇄
  22. 이것은 몽고메리가 SAS를 동원해 롬멜 암살작전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그 보복이 염려되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