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리시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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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시어: אליעזר ליסיצקי (엘리에저 리시츠키), על ליסיצקי (엘 리시츠키)
러시아어: Лазарь Маркович Лисицкий (라자르 마르코비치 리시츠키), Эль Лисицкий (엘 리시츠키)
(1890년 11월 22일 ~ 1941년 12월 10일)

1 개요

소련 구성주의(Constructivism)의 거장

러시아, 소련의 화가이자 건축가. 본명보다는 엘 리시츠키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리시츠키는 1890년 러시아 제국 포치녹(Починок, Pochinok)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시츠키는 어렸을 때부터 비텝스크(Витебск, Vitebsk)에서 지내며 유대인 화가였던 유들 펜(Юдль Пэн)의 미술수업을 받으며 점차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09년에는 알렉산드로프 실업학교를 졸업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미술학교에 지원했으나 당시 유대인의 교육을 제한하던 러시아 제국 법률 때문에 떨어졌다. 이후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에 있는 기술학교에 진학해 건축공학을 전공했다. 이후 1912년부터 유럽을 여행하면서 예술가들과 만났고, 1914년 다니던 학교의 학위를 마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1919년 마르크 샤갈의 영향을 받아 카지미르 말레비치 등과 함께 구성주의 운동을 시작했으며, 당시 러시아에서 활발하던 혁명 운동에 참여해 여러 수의 포스터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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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쐐기로 백군을 몰아내자 (Бей белых красным клином), 1919년

1919년부터 1920년까지는 비텝스크에 있는 인민예술학교 건축부장으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당시 말레비치와 함께 우노비스(УНОВИС, UNOVIS)를 결성해 절대주의(Supermatism)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1921년 독일로 넘어가 독일 예술가들과 협력하는 한편, 베를린에서 러시아 예술을 소개하는 전시회를 가졌다.

전공이었던 건축에서도 재능을 발휘해 1930년 설계한 모스크바 오고뇩(Огонёк) 잡지 인쇄소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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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시에 위치한 오고뇩 잡지 인쇄소, 1932년

하지만 그가 참여하던 구성주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던 스탈린의 신고전주의적 성향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것이었고,[1] 이 때문에 소련에서 유행하던 구성주의는 스탈린의 집권을 계기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건강적으로도 이 무렵 지병이었던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리시츠키는 점차 활동이 줄었다. 이후 1938년 전연방 농업 박람회[2]의 기념물 수석제작자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게 비판적이었던 후배 예술가인 뱌체슬라프 올타르젭스키 등의 견제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39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에서 소련 기념물 제작에 참여했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공방전 도중 결핵이 악화되어 별세했다.
  1. 비슷한 시기에 나치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 등이 탄압받았다.
  2. 훗날 베데엔하(ВДНХ, VDN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