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용군

1 개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문교부는 학원의 사상통일과 훈련을 목적으로 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하였다.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안호상은 학생단체를 통합하려는 계획 하에 1948년 8월에 대한민국 학도호국단을 결성시켰다. 당시 학도호국단의 설치목적을 학생의 사상적 통일과 유사시의 향토방위로 설정하고 있었다. 1948년 12월에는 여자 간부양성을 목적으로 학교 선생 및 청년단원 130여명을 선발하여 서울 사범대학에서 여자 청년간부훈련을 실시하였다. 1949년 8월 1일 육국본부 특명 제164호에 의거 32명이 제1기 여자배속장교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최초 여자 군인으로 탄생하였다.

6.25 전쟁의 발발로 대한민국 정부가 대전으로 이동하였을 때 제1기 여자 배속장교 출신 11명이 대전에 모여 여자의용군 창설을 결의하고 의용군 모병에 들어갔다. 이들은 대구와 부산으로 이동하여 모집을 재개하여 2000여명의 지원자를 모집하였다. 이들은 18세 이상 25세 이하의 중학교 이상 대학교 학력 소유의 미혼여성들이었다. 1950년 9월 1일부로 국군일반명령- 육군 제58호에 의거하여 부산의 제2훈련소 예속으로 여자의용군 교육대가 창설되었다.

2 편성

  • 대대본부
  • 권총중대 100명
  • [M1] 소총 중대 200명
  • 칼빈 소총 중대 200명

3 역사

1950년 9월 1일 여자의용군 교육대(교장 김현숙 소령)가 창설되었다. 대구와 부산에서 구두시험과 필기시험을 실시하여 각기 250명씩을 합격시켜 총 500명을 여자의용군 1기생을 선발하였다. 이들은 부산 성남초등학교 교정에서 9월 4일 입소식을 거행하고 훈련에 들어갔다. 여자의용군의 교육과목 편성은 주로 전투에 필요한 화기학 및 전술학 과목으로 실탄사격, 독도법, 야간훈련 등 보병으로서의 기초훈련 과정이었다. 1950년 9월 26일 여자의용군은 4주간의 교육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입소 인원 500명 중에서 중도에서 9명만이 탈락한 491명이 수료하였다. 이들이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이 되었다. 1기생은 수료 후 즉시 전방 배치되지 못하다가 2기 수료 후인 1951년 1월 10일 1기, 2기생이 합쳐져 전방에 배치되었다.

여자의용군 교육대는 1950년 11월 12일부로 여자의용군 훈련소로 개칭되어 12월 8일 2기생 384명이 입소하여 훈련을 받던 중 9.28수복으로 서울 일신초등학교(현 극동빌딩자리)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2월 18일 다시 부산의 서대신동에 위치한 경남상업중고교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12월 27일에 약 3주간의 교육훈련을 마치고, 단 1명만이 중도에서 탈락한 383명이 수료하였다. 이들 1,2기생 중 우수자 12명을 선발 장교로 임명하고, 부대당 장교 1명, 사병 9명씩을 편성하여 1950년 1월 12일부로 전방 12개 군단 및 사단에 배치하였다.

이들은 행정요원으로 G1-G5와 사단장실에 각각 배치되어 문서연락과 필서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중공군 여자 포로병의 심문 시에는 통역의 임무도 담당하게 되었다. 여군들의 숙소는 부대 내에 제대로 구비되지 못해 일부는 피난지 민가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들 여자의용군 중 31명은 임관 후 정훈 제1, 제2대대에 배치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 북진 시 국방부와 육군이 이북의 완전수복에 대비하여 정훈부대를 편성, 그 지역의 선무공작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100여명의 정훈 선무대원들이 황해, 평남, 함남, 강원지역에 들어갔고, 이어 본격적으로 대거 파견하기 위해 모집한 것이 정훈대대였다.

정훈국장 이선근 준장의 건의로 1950년 11월 24일 국본 일반명령(육) 제109호에 의하여 육군본부 직할로 정훈 제1대대(772부대), 제2대대(773부대)를 창설하게 되었고, 이것이 정훈대대의 발족이었다. 정훈대대의 임무는 북한 수복지구에 들어가서 공산분자들의 죄악성을 폭로시키고, 대신 대한민국의 이념을 계몽 선전하는 중요하면서도 위험이 따른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정훈대대내의 여자의용군의 비중이 컸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역할과 효과도 높았다. 정훈대대는 전세의 변화로 이들 후속대원은 이북파견이 불가능하게 되어 결국 남한에서 대민선무, 부대 정훈 등 다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제1대대는 대전 1950년 12월 25일 대전에 본부를 두고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를, 제2대대는 안동에 본부를 두고 경상남북도를 중심으로 정훈활동을 수행하였다. 1951년 5월 15일 제1, 제2대대를 1개 대대로 통합하였고 1952년 1월 31일 전세가 안정되자 인원을 점차 감소시켜 운용하다가 동년 9월 대전에서 해산시켰다.

전방에 배치된 여자의용군은 1951년 8월경에 대구보충대로 철수하였고 상당수가 제대하였다. 이들의 제대사유는 각 급 학교의 복귀가 대부분이었고 전선의 후방보다는 전방전투지역에 직접 참가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제대하지 않은 여자의용군은 타자, 속기, 필서, 통신, 정보교육 등의 기술교육을 이수하였고, 여자의용군 2기에는 추가로 예술대가 편입되어 국군의 위문 활동을 전개하여 군의 사기진작에 커다란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이 6.25전쟁 당시 여자의용군은 여러 성격을 띠고 활동하였다. 이들을 유형별로 보면 몇가지로 구분된다. 첫째는 현역신분인 의용군으로 전쟁에 참여한 경우이다. 이들은 비록 계급장을 달고 있었지만 국방의 의무가 없었고 대부분이 여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자의용군의 성격과 유사하였다. 두 번째는 학생의 신분으로 자원하여 군번 없이 전후방에서 활동한 순수한 의미에서의 여자의용군이었다. 이들은 9.28수복을 전후로 각 전투부대에 자원, 입대하여 행정업무지원과 병원에서의 간호원 및 선무활동에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세 번째는 여자의 몸으로 총을 들고 직접 유격대 활동에 참가한 경우이다. 전쟁 전에 학생의 신분으로 적 치하에서 지하투쟁을 하다가 1.4후퇴 시 남하하여 유격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남성들 못지않은 활동을 통해 상당한 공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네 번째는 전투사단 후방지역에서 지원활동에 참여한 여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후방에서 주먹밥을 만드는 보급 활동에 참여하든가 혹은 간호활동에 참여한 여학생들로 그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처럼 여자의용군은 남자와는 달리 병역의 의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는 당연히 보호를 받아야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조국 수호의 길에 나선 숭고한 의미를 갖고 있다.

4 기타 참고 자료

  •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신오성, 1995.
  • 육군본부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 육군인쇄창, 1994.
  • 육군본부 <<정훈50년사>> 육군인쇄창, 1991.
  • 여군단 <<여군30년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