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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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浩相

1902년 1월 23일 ~ 1999년 2월 21일.

1 개요

대한민국의 사학자, 철학자, 종교가, 정치가.

2 생애

1902년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탐진(耽津)으로 호는 한뫼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안석제(安奭濟)였다.

1920년(18세 때) 대종교에 입문했고, 그해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1921년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1922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에 있는 중덕학교(中德學校, 현재 국립 퉁지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며, 1924년 7월 예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1925년 5월부터 독일의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하였다. 바우흐(B. Bauch), 그리스바흐(Griesbach), 콜로이터(O. Koellreuter), 휘브너(Hübner), 헤데만(J. Hedemann) 교수 등의 강의를 들었고, 헤겔 학도가 되었다. 1929년 독일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 1929년 ~ 1930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연구생으로 공부하였고, 1930년에는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와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연구생으로 있었다.

1933년에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한국 철학연구회 1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 이광수의 소개로 여류문인 모윤숙(毛允淑)과 결혼하였으나 뒤에 이혼하였다.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었다. 그러나 병중(病中)이어서 체포는 면하였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역임하며 철학을 가르쳤다. 이 시기 김영삼이 철학과에 입학하여 그의 철학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1946년에 조직된 조선민족청년단의 부단장을 맡았다. 이범석이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자 안호상은 그에게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1948년 8월부터 1950년 5월까지 대한민국의 제1대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교육이념을 토대로 한국교육의 방향을 설정했으며 국민교육헌장의 사상을 구축하는 데 박종홍과 함께 참여하였다. 보성전문학교에서 만난 역사학자 손진태를 문교부 차관 겸 편수국장으로 특별 발탁하기도 했다.
문교부 장관시절인 1949년 2월 18일에는 학도호국단을 창설하였다. 이는 당시 국회의 반대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 '히틀러의 유겐트'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해 안호상은 당시 국시였던 '일민주의'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1949년 이승만이 제시한 '일민주의(一民主義)'[2]의 이론적 틀을 제시하였다. 본래 일민주의는 이승만이 제시한 구호수준의 단어였는데, 안호상에 의하여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민주의'는 대한국민당의 당 이념이 되었으며 '일민주의 보급회'에 의한 국민운동으로 나아갔다.
1949년 12월 일민주의보급회 부회장직에 선출되었으며, 관련 이론서들을 저술하면서 일민주의를 적극 홍보하였다. #
그의 저서인 『일민주의의 본바탕』(1950)에서는 '하나의 민족에는 하나의 사상만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면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우리 민족의 지도원리가 되기에는 천박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민족 전체가 하나로 뭉쳐 이승만 대통령의 영도에 따라 움직여야한다.'라고 강조한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기분[3]
이후 안호상은 이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한백성주의'를 탄생시켰다. 이 사상은 모든 차별의 철폐를 주장하고 하나로 일체화된 단일민족의 통일사회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파시스트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린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3년 8월 1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국민의당 창당발기인대회를 가졌을 때 참석하였다. 그러나 1967년에는 박정희의 특사로 국제사회를 순방하고 돌아왔다. 1969년에는 재건국민운동 중앙회 회장, 사회정화 대책위원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와 함께 70년대 국사교과서 바로세우기 운동을 주도하면서, 1975년 임승국, 박시인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1978년에는 현행 국사교과서가 고조선 역사를 축소하는 등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다고 발매금지를 신청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1981년 11월 국회 국사청문회에 출두, 국사교과서 검인정에 관련된 청문회에서 고조선과 한사군은 만주에 있었으며, 3~7세기 백제는 중국동해안을 통치하였고 통일신라의 영토는 만주를 비롯하여 북경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4]

1981년부터 1991년까지는 한성학원, 한성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1993년에는 경희대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는 대종교 14대 총전교[5]를 지냈다. 이 시기 북한의 단군릉 개건 기념 어천절 행사에, 대종교 교주자격으로 참가하기 위하여 북한에 밀입북하였던 적이 있다. #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대공용의점이 없고 고령이라는 나이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남북교류협력볍애 따라 북한에 밀입북한 것만 처벌받았다. 당시 같이 밀입북했던 이는 구속되어서 논란이 되었다.

1999년 사망하였고, 사회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 이는 한국인으로는 다섯번 째라고 한다.
  2. '하나의 국민(一民)'으로 대동단결하여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한다는 통치이념
  3. 애초에 안호상이 독일유학 시절 당시의 독일은 희대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지배하는 제3제국 시기였으니 나치즘의 영향을 적잖아 많이 받았다고 볼 수있다.
  4. 이러한 주장은 만주원류고, 요사 지리지 등을 참고로 하고 있다.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사서로서 신뢰도가 매우 낮은 책들이다.
  5. 본래 교주를 가리키는 명칭이 '도사교'였으나 3대 도사교 윤세복이 총전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엄밀히 말해서 16대 교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