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主義 / historism
1 개요
19세기 발생한 역사 연구의 사조.
2 역사
19세기 독일에서 역사학을 독립적인 학문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베를린 대학(현대의 훔볼트 대학)에서 최초의 근대적 역사학과가 등장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전까지 역사학은 문학이나 왕조를 빛내기 위한 선전 구호 같은 것으로, 대체로 독립적인 학문으로 대접받지 못하였다. 역사학을 학문의 한 분야로 독립시키려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역사 연구에 객관성을 추구하던 이슬람 학자들이나 중국 사관들도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역사주의의 대표주자는 독일의 랑케였다. 그는 역사를 실증적(positive)인 연구를 통한 과학으로 보았다. 여기서 말하는 '실증적'이라는 의미는 자연과학(또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실증적'이라는 말과는 조금 다르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건을 '긍정'하여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에 대해서는 같으나, 역사주의에서는 모든 사건을 개별적인 의미를 지닌 특수한 것으로 보고 반복·재현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과거의 사건을 통해서 미래를 추측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역사주의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해 생겼는데 당시 독일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고 있던 때였다. 이로 인해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주의가 대두됐고[1] 그와 동시에 프랑스에서 생겨난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낭만주의가 유래되었는데, 낭만주의는 계몽주의가 주장하는 보편성(천부 인권 등)에대한 반동으로 개개인의 개별성을 강조했고 이러한 경향은 역사주의에 그대로 녹아들게 된다.
3 특징
역사주의 상에서 사학자의 역할은 과거를 일어난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재현하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관찰자일 뿐이며, 자신의 견해를 배제할 것이 요구된다. 사학자가 사료에 대해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사료 고증에만 존재한다. 역사주의는 실증적인 성향을 띠기 때문에 사료 비판을 매우 중요시한다. 사료가 없으면 역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역사를 가지고 진보를 논하는 것은 연구자의 월권 행위이다. 그것은 주관적인 가치관이 개입된, 사료 이상을 넘어선 '추측'이기 때문이다.
연구자의 사견이 배제되기 때문에 비교적 기록이 명확하게 남아있는 국가나 민족을 대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게 된다. 인민의 생활이나 문화와 같은 부분-사회경제사나 미시사의 연구 대상-은 기록을 통하여 구체적인 조직화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연구자의 견해가 중요한 것이었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랑케도 주로 실제로는 독일 민족을 대상으로 역사 연구를 하게 되었다.
역사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국가 관편사학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편한 사조이다. 당시의 역사학자들은 국가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서는 안되었기에[2], 국가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기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역사주의가 발생한 독일에서는 실제로 1960~70년대 사회경제사가 대두되기 전까지는 관편사학 위주로 역사 연구가 이루어졌다. 독일 사학자들에게 독일 민족 국가(제2제국)는 신성시되었다. 제3제국으로 인한 파국 이후에도 한동안 그 신성성은 존중되었다. 랑케 자신이 가치중립성을 중요시 여겼음에도 역사주의 자체가 민족국가라는 숨은 당파성을 지니게 된 것이었다. 역사주의와 입장을 달리하는 사학 연구는 주로 비역사적인 주체로 이루어졌고 정치적인 수사에 가까웠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별도의 역사 연구 조직을 만들어서 마르크스 사학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하기도 하였다.
4 역사주의 분석
4.1 역사주의의 장점
역사주의는 장점과 동시에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장점으로는 객관적인 사실을 묘사하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역사 연구의 큰 틀을 확립했다는 점과 현실의 철학 및 정치 등에 예속되어있던 역사학을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해방시켰으며 모든 사건의 고유한 특징의 발견을 통해 역사 형성의 다양한 가능성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4.2 역사주의 비평
약점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의 구현이 사실상 힘들다는 것인데, 역사가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역사가의 관점이 개입될 수 밖에 없으며 현존하는 사료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힘들다는 약점이 있다. 또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저마다의 특징이 있다는 이유로 단절시킴으로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는 점도 약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저마다의 의미가 있다는 말은 미묘한 뉘앙스를 띠게 되는데 모든 사건이 의미가 있으므로 긍정된다는 것은, 아무리 그 사건이 비도덕적이고 파행적일지라도 용인된다는 것이다. 가치관이란 것도 상대적인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본래 역사주의에서 이것은 과거에만 해당되는 관점이지만, 이것을 현재까지 소급시켜 적용한다면 현재의 어떠한 행동이라도 허용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제3제국과 같은 폭력적인 체제마저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몰가치성이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역사주의는 근대 과학의 이성적인 실증주의보다도 감성적인 낭만주의와 닮아 있다. 무제한적인 민족의 확대를 요구하는 민족주의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
이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많이 부정되어 왔다. 한편으로는 사회경제사를 통해서, 역사 진행의 원동력이 사료로 드러나는 정치적 상부구조가 아니라 사회 하부구조를 토대로 이루어진다는 비판이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텍스트의 허구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기본적인 전제-실증적인 사료를 통해서 역사 연구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현대에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