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고려)

廉湘
(?~?)

고려의 무장. 궁예 시절 태봉의 마군장군으로 4 마군장(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개국 2등 공신에 봉해졌다. 1등 공신들 중 복지겸이 야전 사령관으로 활동한 다른 3명과 맡은 역할이 달랐던 것처럼 염상 또한 같은 2등 공신으로 일선 지휘관으로 활동한 김락이나 견권 등과는 장기가 달랐다.

918년 9월, 복지겸이 청주출신 순군리 임춘길과 동향의 배총규, 계천(季川 전남 장흥) 사람 강길, 아차귀와 매곡(昧谷 충북 회인) 사람 경종의 역모 사실을 밝혀냈을 때, 왕건의 측근중에서도 청주 출신이라 그 곳 사정에 밝았던 현율은, 경종이 매곡성주 공직의 매제임을 들어, 죽이는 대신 회유할 것을 권했다. 매곡성과 그곳을 다스리는 공직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었던 왕건은 현율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을 용서하려 했는데, 염상이 나서 강하게 반대해, 도망친 배총규를 제외한 일당 전원을 처형했는데, 현율의 예상대로 공직은 백제에 투항해 오랫동안 고려의 발목을 잡게된다.

염상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고려사에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모두 동일해서 전부다 축성에 관한 기록이다.

 928년 2월에 대상 염상과 경(卿) 능강 등을 보내어 안북부(安北府)에 성을 쌓고, 원윤 박권을 진두(鎭頭)로 삼아 개정(開定) 군사 7백 명을 거느리고 이를 지키게 하였다.

929년(태조 12), 봄 3월에 대상 염상을 보내어 안정진(평남 순안)에 성을 쌓고 원윤 언수고에게 이를 지키도록 하며, 또 영청현(평남 영유)에 성을 쌓았다.

930년(태조 13) 8월, 대상 염상을 보내어 마산(馬山)에 성을 쌓고 안수진(安水鎭)이라 이름하였으며, 정조 흔행을 진두로 삼았다.

934년(태조 17) 겨울, 이해에 대상 염상을 보내어 통해진(평남 평원군 영유)에 성을 쌓고, 원보 재훤을 진두로 삼았다.

고려 건국기부터 시작해 고려에서 이름 꽤나 날린 무장들은 거의 모두 참전한 일리천 전투까지 참전 기록은 전혀 없다. 종합하면 전투 지휘보다는 축성과 진지구축에 조예가 깊었던 공병사령관으로 추측된다.

이후 943년(태조 26) 5월 왕유, 박수문과 함께 임종 직전 왕건의 유언을 받들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의 내군 장군인 은부의 측근으로 맨처음 등장했다. 한때는 은부와 함께 왕건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으나 궁예의 폭정에 점차 실망하던 차[1]에 군부로 자리를 옮겼으며[2], 그 뒤에는 왕건을 옹립하려는 4 마군장들의 회유로 왕건의 쿠데타에 가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후 조연급 무장으로서 틈틈이 보이며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지만, 극의 최후반까지 등장한다. 배우는 심우창.
후속작인 제국의 아침에서도 등장 배우는 전작 태조 왕건에서 환선길역을 맡았던 백인철. 전작에 비해 시간이 흘러서 순군부령(지금의 합참의장)으로 등장한다. 직위는 높아졌으나 전작보다 비중은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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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철원에서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점차 회의감을 가지기 시작한다. 궁예가 조회에서 기침한 신하를 때려죽이라고 할때 처음에는 염상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염상이 머뭇거리자, 금대가 대신 그 신하를 죽인다.
  2. 은부가 말하기를, 내군이란 궁예의 개와도 같이 무조건 충성해야 하는데 자네는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이후 은부는 종간에게 염상을 군부로 보냈다고 말하면서 목숨을 거두려 했으나 그간의 정이 있어 그렇게 처리했다고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