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 므라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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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대로, 굉장히 날카롭고 깐깐하게 생긴 인상이다. 실제로 므라빈스키는 오케스트라를 다루는데 있어서 아주 엄격하고 깐깐한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레닌그라드 필에서만 반세기를 군림한 그에게 어울리는 인상이기도 하다. 일각에서는 그를 일컬어 "가장 러시아적인 지휘자" 라고 말한다. 대머리 독수리를 닮았다.

Evgeny Mravinsky (Evgeny Aleksandrovich Mravinsky)
러시아어 :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равинский
1903. 06. 04 ~ 1988. 01. 19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 5번. 1983년 실황.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 5번은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되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 4번. 1960년 녹음. 도이치 그라모폰과 함께한 이 녹음은 동곡 최고의 명연으로 손꼽힌다.

1 생애

현재 나무위키의 많은 지휘자 관련 문서, 특히 토스카니니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같은 지휘자들의 생애는 시간 순서대로 기술되어있는 편이다. 하지만 므라빈스키의 생애 자체가 거의 대부분이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 함께였고, 그가 지휘자로서 제대로 활동했던 기간의 기록과 죽을 때 까지의 기록 역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 함께였으므로, 시간 순서대로만 생애를 기술하는 것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생애는 시간순으로 기술하지 않는다.

1.1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이전

므라빈스키는 1903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기 전에는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처음에는 작곡 공부를 했고, 피아노 곡도 몇 곡 썼다고 전해지는데, 지휘자가 된 이후로는 작곡을 한 경력이 없다. 1923년부터 1931년까지는 발레 음악 코치로 일했고, 1929년에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포디움에 발을 디뎠다. 1931년에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처음으로 지휘했고, 1930년대에는 키로프 발레, 볼쇼이 오페라를 지휘한 경력이 있다. 1938년에 전 소련 지휘자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그 이후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지휘를 맡게 된다.

1.2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 함께한 50년 (1938~1988)

므라빈스키의 지휘경력은 사실상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50년간의 역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는 50년간 오케스트라에서 군림했고,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혹독하게 조련하며 전성기를 영위했다. 실제로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이 녹음한 음반, 특히 멜로디야를 위시한 러시아 계열의 레이블에서 녹음한 음반들의 음질은 좋은 편이 아닌데, 그럼에도 오케스트라가 전반적으로 높은 밀도를 유지하며 연주를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이다. 이는 므라빈스키의 연습, 특히 리허설 스타일과도 크게 연관이 되는데, 므라빈스키는 50년내내 리허설을 할 때 각 악기마다 파트를 쪼개서 직접 단원들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방식의 연습 방식을 고수했다. 당연하게도 이는 막대한 시간과 체력의 소비를 단원들에게 요구하는 일이었다. 결국 단원들은 므라빈스키에게 반발을 하고 나섰지만, 므라빈스키는 자신의 고집을 결코 꺾지 않는 성격이었다. 인물값을 한다.

상기했듯,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므라빈스키의 절대적인 지도력 아래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므라빈스키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소련이 유지되는 동안, 소련 최고의 주자들이 모여있는 오케스트라였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그가 사망하고 나서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지휘를 맡았고, 현재까지도 그 직책을 유지하고 있다. 악단의 이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변경되었는데, 므라빈스키가 살아있는 동안의 위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현재는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가 러시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는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므라빈스키의 지도력이 아주 뛰어났던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한편, 그는 정치적인 문제 앞에서도 특유의 고집과 깐깐함을 드러냈다. 쇼스타코비치 등의 여러 소련 음악가들이 당국의 압박을 못이기고 솔제니친의 탄핵안에 서명할때도 그는 거부를 했고, 공산당원이 되는 것도 거부했다. 당국에서 외국산 악기를 구입해 사용하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자, 외국산 악기를 써야 좋은 소리가 난다며 일갈하기도 했다. 러시아 악기회사들 의문의 1패

므라빈스키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에서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 같은, 당대 소련의 여러 작곡가들의 곡들을 초연하고 자주 무대위에 올렸다. 이것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레퍼토리 확장을 꾀했던 므라빈스키의 의도와도 연결된다. 특히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6개 (5번, 6번, 8번, 9번, 10번, 12번)와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6번을 세계 초연한 경력이 있는데, 이는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언급하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므라빈스키는 사망하기 전까지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므라빈스키의 상징과도 같은 곡이자, 그의 손으로 직접 세계 초연했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 5번이었다. 므라빈스키는 죽기 직전까지 연주회에서 쓸 악보를 찾았다고 전해지는데, 실로 지휘자다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1.3 쇼스타코비치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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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므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 대머리독수리와 해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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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라빈스키(왼), 쇼스타코비치(가운데), 오이스트라흐(우) 리히터만 있었으면 소련 최고 음악대장들 모임이다. 호로비츠는? 그러면 끝도 없다.

므라빈스키의 생애를 이야기 할 때, 쇼스타코비치는 결코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실제로 므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는 굉장히 절친했던 사이였고, 우연히 맺어진 인연들이 꽤나 많은 사이이기도 했다. 쇼스타코비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므라빈스키는 1903년,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 생으로서, 두 사람은 모두 상트페테르부르크 (사실 쇼스타코비치는 혁명 이후에 태어났으므로 레닌그라드라고 해도 무방하다.)에서 태어났으며, 두 사람 다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음악 공부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이러한 점들 때문에 두 사람이 친해지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당대의 소련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지휘자와 작곡가라는 점이 두 사람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이 꽤 오랜 시간동안 절친한 사이였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거기다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 8번은 작곡가 본인이 므라빈스키에게 헌정한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은 소련 당국에서 악평을 사고, 초연 이후 1960년까지, 약 17년간 연주가 금지되기도 했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쇼스타코비치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었는데, 이때 그의 교향곡 제 5번을 자주 연주했던 므라빈스키가 적극적으로 그를 보호해주었다는 일설도 있다.

두 사람의 우정이 금이 간 것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 13번 "바비 야르"의 초연을 므라빈스키가 거부하면서 부터였다. 위의 교향곡 제 13번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겠지만, 이 곡은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담고있는 곡이다. 이 같은 곡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므라빈스키가 초연을 거부했고, 쇼스타코비치가 이에 큰 실망을 하면서 므라빈스키와 화해할 때 까지 연락도 하지 않고 살았다는 설이 현재까지도 지배적이다.
하지만 므라빈스키가 원래 초연 지휘를 하기로 했다가 갑작스럽게 지휘를 취소한 뒤, 그에 대한 명백한 이유도 밝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당국의 압력을 포함한 여러가지 설이 나돌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더구나 이는 므라빈스키가 이전에 보여왔던 행보와는 다소 상반되는 행보이기 때문에, 더욱 모순이 생긴다는 느낌을 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므라빈스키도 쇼스타코비치도 정확한 이유를 생전에 기술한 바가 없다. 게다가 끝내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서로 화해를 했다는 사실까지 생각해보면, 결국 두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을 듯 하다.

한편, 쇼스타코비치 사후에 음악학자인 솔로몬 볼코프가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이라는, 일종의 회고록 성격을 띠는 책을 발간한 일이 있었다. 이 책에는 쇼스타코비치가 므라빈스키의 해석은 너무 소비에트적인 느낌을 주는 해석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를 잘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번스타인의 해석이 자신의 의도를 가장 잘 파악한 해석이라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 5번의 해석에 대한 논쟁을 더욱 격화시키는 발단이 되었다. 하지만 이 책 자체가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고, 이 곡 역시 마찬가지로 더욱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므로 누구의 해석이 "맞다"라고는 분명하게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므라빈스키와 번스타인 모두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 5번의 명연주를 거론할 때 결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지휘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교향곡 제5번(쇼스타코비치) 참조.

2 지휘 스타일

므라빈스키의 지휘 스타일은 대체적으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 4번 4악장,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 5번 4악장, 베토벤 교향곡 제 7번 4악장,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 6번 3악장과 같이 템포의 급가속과 급감속이 많이 요구되는 곡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므라빈스키는 급가속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악보에서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속도를 냈다가, 다시 감속하는 부분에서 악보가 요구하는 만큼의 속도로 돌아오기 위해 아주 급한 감속을 한다. 이 과정에서 레닌그라드 필의 모든 악기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순간의 소리를 들어보면, 므라빈스키가 오케스트라를 다루는 테크닉이 얼마나 절륜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는 므라빈스키가 자신의 입맛대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창조해낸 덕분에 가능한 지휘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4악장 연주를 듣고 있으면 도대체 오케스트라를 얼마나 두들겨 잡았을지 상상도 안간다.

70년대 이후, 나아가 80년대 까지의 몇몇 영상물들을 보면, 므라빈스키는 대체적으로 가만히 앉은 채, 매서운 눈빛으로 오케스트라를 살피며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지휘를 한다. 연주가 끝나고 사냥할 먹이를 찾는 대머리 독수리 딱 걸렸다 이놈! 이는 마치 엉덩이춤을 추듯 격한 동작으로 지휘를 하던 레너드 번스타인이나, 눈을 감고 음악과 호흡하듯 지휘를 하다가 떨어져 굴렀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상기했듯, 그 지독한 리허설과 연습량, 그리고 이미 함께한지 3,40년은 족히 된 시간 덕분에, 이미 지휘자 본인의 의도와 오케스트라의 움직임이 거의 완벽하게 합일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듯 하다. 늙어서 힘드니까 그런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브람스 4번 리허설 영상 보면 늙어서 그런것도 아니다.

므라빈스키의 음악 해석은 대체적으로 악보에 충실한 편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낭만주의 계열의 곡들을 지휘할 때, 낭만주의 계열의 곡들이 가장 큰 특색으로 삼는 감정과 서정의 심화 에 대한 표현이 부족하다는 말이 나온 적도 있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휘에서 러시아의 차가운 벌판과 황무지들을 떠올린다고 한다. 특히 므라빈스키가 해석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은 알프스가 아니라 거의 시베리아 느낌이 난다! 아마 동시대 지휘자 가운데 가장 대조적인 해석을 보여주는 지휘자라면 레너드 번스타인을 꼽을 수 있을 듯.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음에도 불구하고 차이콥스키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에서 이견 없이 많은 명반을 남겼고, 브람스와 같은 독일 낭만주의 계열 음악이나 스크랴빈의 법열의 시 같은 곡에서도 준수한 음반들을 여럿 남겼던 것을 감안하면, 결국 듣는 사람이 어디에 해석의 가치를 두는가에 따라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2.1 레퍼토리

가장 러시아다운 지휘자라는 별명 답게, 므라빈스키가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러시아 출신 작곡가들의 곡을 지휘할 때였다. 그는 주로 차이콥스키와 쇼스타코비치를 레퍼토리에 많이 넣었다. 또한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도 자주 녹음하였다.[1] 하지만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바그너, 시벨리우스와 같은 독일 고전~낭만주의에 이르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넓은 레퍼토리 덕분에, 므라빈스키 본인이 레코딩을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상기한 작곡가들의 다양한 곡들이 음반으로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대부분 음질이 구리다. 불곰국 레코딩의 한계란....

3 음반

므라빈스키는 생전에 레코딩을 상당히 싫어했던 편이었다. 그래서 연주가 레코딩되지 않은 날에 연주가 만족스럽게 이루어지면, 관계자들에게 가서 레코딩이 잘 됐냐고 물어보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레퍼토리 항목에서 서술했듯, 적지는 않은 양의 음반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이 음반들 대부분이 러시아의 레이블인 멜로디야(MELODIYA)것인데, 많은 음반들이 모노로 녹음되었거나, 음질 자체가 좋지 못한 편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 5번, 6번이 함께 묶인 음반은 음질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이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연주는 서구권 지휘자의 녹음과는 조금 다른데, 6번 비창의 경우 서구권 연주들이 처연한 체념같은 인상을 준다고 하면 므라빈스키의 연주는 슬프기는 하되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냥은 못 죽겠다!'라고 분연히 외치는 듯한 느낌이다. 여러모로 동곡의 역사에 오래도록 남을 명반.

쇼스타코비치의 몇몇 교향곡들의 경우에는, 몇 년 전부터 일본의 레이블인 알투스(Altus)에서 음원을 찾아 복각하여 고음질의 음반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 덕분으로, 알투스에서 만들어낸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 5번의 1973년 도쿄 실황공연 음반은 므라빈스키의 동곡 음반 가운데 보기 드물게 음질과 연주가 모두 뛰어난 명반으로 꼽힌다. 물론 연주가 별로인 경우는 거의 없다. 녹음을 워낙 안하다보니 망반은 녹음을 할 새도 필요도 없었다.(...) 또한 알투스에서 만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 8번 음반의 경우에는, 원래 필립스에서 동일한 음원으로 발매가 되었던 음반이었다. 하지만 이 음원은 녹음이 잘못 되었기 때문인지, 므라빈스키가 의도하고 연주한 것보다 음고, 즉 피치가 한 음 더 높게 녹음이 되었었다. 생전에 므라빈스키가 이 점을 지적했었다고 전해지는데, 알투스에서는 이 음원의 피치를 한 음 낮추어 원래의 피치에 맞도록 복각하여 발매한 바 있다.

구 소련에서 내부 테스트 용도로 디지탈 녹음한 것을 일본 빅터에서 발매한 것이 90년대 초반 수입된 적이 있다. 쇼스타코비치 5번과 차이코프스키 6번, 베토벤 6번 등. 전반적인 음색은 조금 날카로운 편으로, 아날로그보다 음질이 떨어진다고 하던 초기 디지탈 녹음의 특색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래도 멜로디아에서 발매된 옛날 녹음들보다는 훨씬 좋다.

위 문단에도 적혀 있지만 멜로디아 레이블의 아날로그 녹음의 경우 열악한 음질의 음반이 많으니, 음질 좋은 음반으로 일단 곡에 익숙해 진 다음 므라빈스키의 명연에 도전하는것을 추천한다. 괜히 열악한 녹음때문에 명곡/명연을 놓치게 되지 말고...
  1. 프로코피예프-교향곡 6번, 로미오와 줄리엣/하차투리안-교향곡 3번/스크랴빈-교향곡 4번 '법열의 시'/글라주노프-교향곡 5번, 라이몬다/스트라빈스키-뮤즈를 이끄는 아폴로/무소륵스키-호반시치나/리야도프-바바야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