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명칭: 교향곡 제5번 D단조 작품 47
(Sinfonie Nr.5 d-moll op.47/Symphony no.5 in D minor, op.47)
1 개요
쇼스타코비치의 다섯 번째 교향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에 속하며, 동시에 가장 치열한 키배논쟁을 지금까지도 불러오고 있는 문제작이다. 전작인 4번이 소련 집권층의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비판 대공세로 인해 오랫동안 발표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곡이 1961년 이전까지는 네 번째 교향곡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작곡 시기는 1937년 4월부터 7월까지로 여겨지며, 그 동안 전위적인 실험성을 많이 추구해오던 쇼스타코비치 음악도 여기서부터 전통과 '사회주의 사실주의' 를 버무려낸 중도적인 노선으로 변경되게 되었다. 다만 이것이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주체적인 결단인지, 아니면 체제로부터 받은 압박에 의한 마지못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뭐든 제목 붙여대기 좋아하는 일본에서는 한 때 이 곡을 '혁명' 이라는 부제로 부르기도 했지만, 실제로 혁명과 연관된 키워드는 곡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주의.
2 곡의 형태
1번처럼 다시 고전적인 4악장 형식으로 돌아간 것에서부터 전통 회귀의 자세가 보이는데, 스케르초와 느린 악장이 각각 2악장과 3악장에 들어가고 모든 악장이 제대로 분리가 되어 있다. 그리고 4악장 엔딩도 단조 교향곡의 전통적인 '해피 엔딩' 인 장조 조바꿈으로 끝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1악장은 별도의 서주나 인트로 없이 현악 파트가 거칠게 부점 리듬이 가해진 첫 번째 주제를 내놓으며 시작되는데, 격한 흐름이 진정되면 부점 리듬을 다소 변형시켜 유지하며 바이올린이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대선율을 추가한다. 이어 첫머리 후반부의 8분음표 위주 리듬이 다소 건조하게 반복되는 가운데 바이올린이 긴 음가로 다소 들쭉날쭉한 음역을 보이는 두 번째 주제를 켠다.[1]
고전 소나타의 발전부에 해당하는 섹션은 비올라의 두 번째 주제 연주로 시작되고, 이어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에 피아노의 저음부까지 가세해 다소 묵직한 리듬형이 나오며 서서히 고조되기 시작한다. 속도도 점차 빨라지고, 첫 번째 주제의 조용했던 대선율이 강렬하게 내지르는 금관악기들에 의해 변형되어 나타나는 등 주제들 외에 대선율이나 특정 리듬도 집요하게 반복되면서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 부분은 전작인 2번이나 4번에서처럼 서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악구들을 비논리적으로 나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때처럼 무절제 혹은 무질서하게까지 보이지는 않고 악장 첫머리로 돌아가는 고전적인 재현부까지 자연스레 이어져 첫 번째 클라이맥스를 형성시킨다. 하지만 이 재현부처럼 보이는 부분도 사실은 재현부스러운 작은 발전부로 볼 수 있고, 이전 주제들을 내놓되 여러 가지로 뒤틀어 놓거나 아예 변형시켜 내놓으면서 기분나쁠 정도로 고요한 종결부로 이어진다.
2악장은 4번의 같은 악장에서처럼 말러의 영향력을 강하게 내비치는 스케르초인데,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다소 무뚝뚝하게 내뱉는 듯이 연주하는 주제로 시작된다. 여기에 화답하는 목관과 호른의 연주는 다분히 쇼스타코비치의 신랄함이 더해진 말러풍 악구로 만들어져 씁쓸한 아이러니를 더하고 있다.
대신 형식의 경우 4번에서보다 훨씬 전통적인데, ABA' 아치형 3부 형식을 상당히 규칙적으로 준수하고 있다. 중간부에서는 쇼스타코비치가 초기에 장기로 했던 왈츠의 리듬을 타고 진행되지만, 마냥 우아하지는 않고 중간중간 거칠게 튀어나오는 신랄한 악구를 넣어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반복되는 A 부분에서는 실로폰이 더해지고 코데타(짧은 코다)가 붙는 것 외에는 크게 다른 점이 없다.
느린 템포의 3악장에서는 금관악기를 모두 배제하고 현 파트를 일반적인 5분할 방식보다 더 잘게 쪼개놓고 있는데, 바이올린은 세 그룹으로, 비올라와 첼로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매우 섬세하고 정갈한 음색을 들을 수 있다. 한동안 현악 파트로만 진행되다가 플루트를 비롯한 목관악기들이 가세하고, 점차 음량을 더해 첫 번째 클라이맥스가 조성된다.
이어 다시 조용한 분위기로 돌아가면 템포가 약간 빨라져 오보에 독주가 나오는데, 플루트가 악장 맨 처음에 연주한 선율의 단축형이다. 이후 목관악기가 주축이 되어 선율을 반복하며 점차 변형시키고, 첼로가 가세하면서 갑자기 텐션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다른 현악기군의 거친 트레몰로를 배경으로 바이올린과 첼로가 악장 첫머리에 제시된 악상을 힘차게 켜고, 피아노와 실로폰까지 가세해 매우 강한 긴장감이 조성된다.
곧이어 첼로가 오보에의 연주로 나온 선율을 마찬가지로 받아 억세게 연주하며 이 악장의 진짜 클라이맥스를 마무리한다. 긴장감이 차츰 풀리고 나면 다시 첫머리처럼 현악 파트 주도로 섬세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하프와 첼레스타가 오보에 선율의 단편을 띄엄띄엄 연주하며 조용하게 마무리짓는다.
마지막 4악장은 관악기의 크레센도(점점 세게)로 시작되며, 팀파니가 거칠게 두드리는 가운데 트럼펫과 트롬본이 강한 추진력을 보여주는 첫 주제를 연주한다. 아주 섬세하고 내성적이었던 이전 악장과는 거의 상극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거칠게 밀어붙이는데, 템포도 점점 빨라지며 트럼펫의 자극적인 독주 악구가 더해져 첫 번째 클라이맥스가 연출된다.
잠시 진정 기미를 보이며 호른이 트럼펫의 강렬했던 악구를 부드럽게 연주하고, 이어 현 파트의 지속적인 반복 음형을 뒤에 깔고 관악기들이 조용하게 이어받으면서 중간부를 마친다. 다시 스네어드럼과 팀파니가 약하게 리듬을 깔아주는 가운데, 첫머리에 억세게 나왔던 선율이 목관악기들에 의해 다소 약하게 재등장한다.
일종의 재현부 성격이지만, 1악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첫머리의 충실한 반복이라는 도식은 피하고 있다. 다른 악기들이 가세하고 타악기의 강한 연주가 더해지면서 장대한 코다로 이어지는데, 트럼펫을 비롯한 금관악기들이 아주 끈질길 정도로 D장조의 1도 화음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해피 엔딩' 으로 전곡을 마무리짓고 있다. 다만 이 곡이 정말로 긍정 속에 끝났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악기 편성은 피콜로/플루트 2/오보에 2/피콜로클라리넷/클라리넷 2/바순 2/콘트라바순/호른 4/트럼펫 3/트롬본 3/튜바/팀파니/베이스드럼/스네어드럼/심벌즈/탐탐/트라이앵글/실로폰/글로켄슈필 또는 튜블러 벨/하프/첼레스타/피아노/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오보에만 두 대를 쓰는 변칙 3관 편성이고, 4번에서 이상할 정도로 거대했던 스펙보다는 많이 축소되고 일반적인 형태라 일반 관현악단도 연주에 큰 부담이 없다. 이런 점 때문에도 대중적으로 많이 연주되는 듯.
3 초연과 출판
1937년 11월 21일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가 이끄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초연 무대를 열었는데, 물론 당시 쇼스타코비치의 입지는 별로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통 교향곡 형식론과 '고통을 넘어 환희로' 라는 베토벤풍 도식을 취해 '당의 입장' 에 부합한 것으로 여겨져 초연 무대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소련 언론과 공적 단체들의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비판(이라고 쓰고 다굴이라고 읽음)도 다소 완화되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출판은 1939년에 소련 국립음악출판소에서 행해졌다.
4 곡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들
한동안 소련에서는 이 곡을 '형식주의에 빠졌던 쇼스타코비치가 개전의 정을 뚜렷하게 나타낸 곡' 이라고 보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골계미가 완전히 빠진 것도 아니었고, 기존 형식미에서도 다소 일탈한 성격을 여전히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 사후 서방에서 출간된 '증언' 이라는 책에서는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았는데, 이 곡에서 느껴지는 해방감과 환희는 '정권으로부터 강제된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말년에 솔로몬 볼코프라는 젊은 음악학자가 구술한 원고를 망명 후 발표한 것이라 정치적 논쟁까지 유발했을 정도로 파급 효과가 대단했고, 이 해석을 받아들여 곡의 절정감과 기복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냉정하게 조망하는 듯한 연주가 서방에서 한때 대세가 될 정도였다.
소련 붕괴 후 해외에서는 좀처럼 접근하기 힘들었던 러시아 음악계와 교류가 다시 활발해지자 이런 류의 해석도 다시금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쇼스타코비치를 지나치게 '반공 투사' 화한 볼코프의 책이 신빙성과 증거를 결여하고 있다고 반박하는 자료들이 발굴되면서 '정권의 희생양' 으로만 바라보는 시각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 곡에 대한 논쟁이 소강 상태를 보이고 있냐 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고.
한편으로는 소련 정권의 해석도, 그렇다고 볼코프 류의 해석도 아닌 순음악 개념만으로 접근하는 시도도 나오고 있고, 소련 시절 활동했던 지휘자나 망명해 활동한 지휘자, 서방에서만 주로 활동한 지휘자에 따라 이 곡을 바라보는 시각도 천차만별이다. 쇼스타코비치 자신도 이 곡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특필할 만한 의견을 내놓지도 않았는데, '나의 음악이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다' 라는 뭉뚱그림식 발언으로 더 이상의 논의를 피했다.
결국 죽은 작곡가는 말이 없고, 정답이라는 것도 없다. 받아들이는 이들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이고, 또 받아들인 이들도 개별 연주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다르게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한 양면성을 내포하는 작품인 셈.
5 한국에서 연주되기까지
논쟁이 활발함과 동시에 이 곡은 현재 가장 자주 연주되고 있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으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상당히 늦게 연주되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쓰라린 경험 때문에 반공을 사실상의 국시로 삼고 있던 한국 정부좋게 써놨지만 결국 권력유지가 목적이다로서는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에프, 하차투리안 같은 소련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를 금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이 곡을 접하는 길은 불법 수입한 LP 등의 음반을 헤드폰 끼고 몰래 듣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 소개된 클래식 음악이 상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브루크너,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도 극히 제한적으로 연주되던 시기였고 음반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에 비해서도 듣보잡이라 할 수 있는 쇼스타코비치나 다른 소련 작곡가들의 작품이 거의 연주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유럽에서도 쇼스타코비치는 자주 연주되는 곡이 결코 아니었고 특히 보수적인 빈 필 등에서는 더욱 그랬다. 일례로 레너드 번스타인은 1979년 여름 뉴욕 필과 아시아 순회공연[2]때 연주했던 쇼스타코비치 5번에 매우 만족해서[3] 그 해 빈 페스티벌에서 이 곡을 연주하자고 빈 필에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사실 1978년 6월 7일에는 정명훈 지휘의 국립교향악단이 정명화의 독주로 같은 소련 국적 작곡가인 드미트리 카발렙스키의 첼로 협주곡을 한국 초연한 전례가 있었다.[4]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연주회 시리즈의 일환으로 초청되어 내한한 레너드 번스타인 지휘의 뉴욕 필하모닉이 1969년 6월 29일에 연주한 것이 이 곡을 한국 초연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 필의 선곡 목록을 받아본 공연 관계자는 프로그램 변경을 요구했지만, 번스타인은 그 요청을 무시하고 공연해 버렸다.
번스타인과 뉴욕 필은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순회공연 중이었기 때문에 이미 연습해서 준비가 된 쇼스타코비치 5번을 연주하는 수 밖에 없었다.[5]
다행히 공연은 큰 방해나 제지 없이 끝났지만, 이 공연에 대한 평은 이상할 정도로 적게 나왔고 이 곡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없었다. 뭐 했다면 코렁탕 시식 확정이었을 테니 그렇다고 천조국의 번본좌와 뉴욕 필을 대놓고 깔 수도 없었을 테니, 이 공연에 대해 어떻게든 비평을 해야 했던 평론가들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듯.
1980년대 들어 소련 등 적성국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나 음반 유통 금지 조치가 해제되자, 이 곡은 꽤 자주 연주되는 곡으로 위치가 격상되었다. 심지어 강남 심포니 오케스트라나 마산시립교향악단 같은 경우에는 CD도 냈고, 교향악축제 같은 행사에서도 꽤 자주 들을 수 있는 교향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90년에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지금은 상트 페테스부르크 필하모닉으로 원복했다)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어떤 록 잡지에서는 이 곡을 메탈리카의 전성기 앨범에 버금가는 포스의 곡으로 추천하기까지 했을 정도인데, 격세지감이 확실히 느껴지는 대목.
6 기타
- 한국에서는 4악장이 대중적인데 모 TV광고에서 4악장을 배경음악으로 써서 그랬다. 그런데 광고 내용이 중세 기사가 말타고 성에 들어가서 칼싸움하는 것(...)
- 은하영웅전설/애니메이션에서는 자유행성동맹이 멸망하는 대목에서 4악장이 쓰였다. 어떤이는 동맹에게 너무 과분한 음악이라고 말하기도. 또한 시바 성역 회전에서도 이 곡이 사용되었는데 제국군에 최후의 공격을 퍼붓는 이제르론 공화정부군의 비장한 모습에 잘 어울린다. 의도적인지는 불분명하나 원곡에 대한 논쟁이 매우 치열한데다 전함 포템킨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전례를 볼 때 생각하기에 따라선 매우 의미심장한 사용.
- 일본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에서도 4악장이 자주 들린다. 작중에 클래식 매니아인 주인공이 집에서 자주 틀던 곡이다.
- ↑ 이 선율은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에 나오는 유명한 하바네라 댓구와 비슷한데,
쇼스타코비치가 특별히 의도하고 차용한 것 같지는 않고 우연히 비슷하게 나온 것으로 보인다.사실 이는 쇼스타코비치가 사랑했던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인데, 한때 쇼스타코비치가 이 여인에게 홀딱 반했지만 그녀는 쇼스타코비치의 청혼을 거절하고 얼마 뒤 스페인으로 이주해서 로만 카르멘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 - ↑ 아래에 나와있는 한국 초연도 이때 이루어진 것이다.
- ↑ 다만 번스타인은 처음에는 뉴욕 필에 화를 낼 정도로 퀄리티가 낮았지만 점차 나아져 도쿄에서 마지막 공연은 매우 훌륭했다고 술회했다.
- ↑ 이 공연이 어떻게 성사되었는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추가바람.
- ↑ 이 때 일정이 매우 빡빡해서 내한공연 당일 연주가 끝나고 바로 악기를 싸서 김포공항으로 출국해서 다음날 일본에서 공연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