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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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이름레너드 번스타인
LEONARD BERNSTEIN
분야음악
입성날짜1960년 2월 8일
위치6200 Hollywood Blvd.

Leonard Bernstein 1918년 8월 25일 ~ 1990년 10월 14일

미국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음악교육가, 음악저술가. 2차대전유럽 예속 경향이 강했던 미국 음악계에 일대 파란을 몰고 온 천재 뮤지션이다. 애칭은 '레니(Lenny)'. 가끔 영어발음 그대로 읽어 '레너드 번스틴'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stein'으로 끝나는 이름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 1980년대 이전에는 유럽식(독일어식)으로 '레오나드 반슈타인(베른슈타인)'으로 불리우기도 했으나 1990년대 이후 미국식 발음인 '레너드 번스타인'으로 고정되었다.[1]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마지막 부분.(관련 배경지식이 없어도 멋진 지휘에 감동을 받을것이다.)

하이든 교향곡 88번 4악장. 눈빛과 얼굴 표정으로만 지휘하는, 만렙찍은 모습[2]

“나는 지휘도 하고 싶고, 피아노도 치고 싶다. 교향곡도 쓰고 싶고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를 위한 음악도 쓰고 싶다. 책도 쓰고 싶고 시도 쓰고 싶다. 내게는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1 생애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 주의 로렌스라는 마을에서 우크라이나유대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고 즉시 암기해 피아노로 연주할 정도의 절대음감과 비상한 기억력을 보여주었고, 계속 사적으로 피아노 레슨과 음악이론 교육을 받았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 재능에 대해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딱히 음악가로 성장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도 않았다.

1935년에 보스턴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이론가로 유명한 월터 피스턴에게 음악이론 전반을 집중적으로 배웠고, 대학 합창단의 반주자로 뛰거나 학교 연극제에 쓸 무대음악을 작곡하는 등 일찍부터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하버드 졸업 후에는 필라델피아커티스 음악원에서 지휘와 피아노, 작곡, 대위법, 관현악법 등을 배웠는데, 특히 지휘 수업에서는 대단히 깐깐하기로 소문났던 프리츠 라이너에게 유일하게 A학점을 받아 화제가 되었다.

커티스를 졸업한 직후인 1940년에는 보스턴으로 돌아왔고, 보스턴 교향악단 주최의 여름 음악제 겸 음악캠프가 열리는 탱글우드에서 당시 악단 수장이었던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보조 지휘자로 재직하며 관현악 지휘 경험을 쌓았다. 1943년에는 뉴욕에서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당시 음악 고문을 맡고 있던 브루노 발터가 병에 걸려 출연이 취소되자 급하게 대역으로 발탁되어 무대에 섰다. 제대로 된 공연 리허설도 없이 치러야 했던 공연이었지만, 시어도어 토머스 이래로 미국인 지휘자가 공식 무대에 선 사례가 거의 없던 미국 관현악단 역사상 굉장한 기대를 모았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본격적인 지휘자 인생을 시작했고, 1945년에는 뉴욕시 교향악단 지휘자로 부임해 좀처럼 듣기 힘들었던 당대의 현대음악을 과감히 선곡해 공연하는 등 진보적인 면모로 화제가 되었다.

작곡가로서도 1942년에 첫 교향곡을 발표했고, 1944년에는 뮤지컬 '온 더 타운'을 발표해 브로드웨이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이후 십여년간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지휘자로서 아직 짧은 경력 때문에 오케스트라에 고정적인 포스트를 얻지 못하고 객원지휘자 생활을 전전했으며 그나마 자주 들어오지 않아 자살을 생각할 정도 암담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설상가장으로 50년대 초 미국에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닥친 판에 번스타인도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활동에 큰 타격을 받았다.

매카시즘이 잠잠해질 때 쯤 한 방송사의 기획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이 큰 인기를 끌면서 그의 인생은 단번에 바뀌게 되었다. 수려한 외모와 중저음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 열정적인 지휘 동작, 게다가 방송사는 번스타인의 작은 키를 커보이게 하기 위한 앵글을 사용했다. 이 방송으로 이 잘생긴 젊은 미국인 지휘자는 단번에 미국 전역에 얼굴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방송에 출연한지 2년이 되지 않아 번스타인은 뉴욕 필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하게 된다.

1957년에는 세 번째 뮤지컬 작품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내놓아 대박을 쳤고, 이내 번스타인의 최대 성공작이자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1957년 방송과 뮤지컬 등 여러분야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번스타인은 미트로풀로스와 함께 뉴욕 필의 공동상임지휘자에 취임했고 이어, 1958년에는 단독으로 뉴욕 필의 사상 두 번째 미국인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11년 동안 재임하면서 콜럼비아(현 소니 클래시컬)에 바로크에서 현대작품을 포괄하는 많은 양의 녹음을 남겼다. 특히 말러의 교향곡 전집은 세계 최초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기록물이고, 이외에도 덴마크 작곡가 칼 닐센소련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녹음, 자작곡을 포함한 여러 미국 작곡가들의 관현악 작품 녹음도 발매 당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굉장한 입담과 해박한 지식을 활용해 청소년들에게 클래식을 거부감없이 듣게 할 목적으로 시작한 '청소년 음악회' 도 뉴욕 필 재임기에 행해진 연속 연주회였는데, CBS 텔레비전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 전역에 중계되어 클래식 청취 인구의 증가에 큰 몫을 했다. 이 때 녹화된 필름들은 훗날 세계 각지에 수출되어 방영되었고, 한국에서도 EBS를 통해 전 시리즈가 방영된 바 있다.

1969년 번스타인은 뉴욕 필 상임지휘자직에서 물러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작곡 활동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서였다. 뉴욕 필은 번스타인을 계관지휘자로 추대하여 그간 뉴욕 필에서 쌓아온 업적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사실 번스타인은 이미 뉴욕 필에서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나 적당히 놀면서 뉴욕 필을 지휘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당연히 뉴욕 필을 지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는데, 세상물정에 어둡고 사람좋아 보이던 후임 피에르 불레즈가 의외로 독하게 전임자 지우기에 나선 것이었다. 불레즈는 번스타인의 뉴욕 필 객원지휘를 원천봉쇄했다. 사실 불레즈가 사람 좋아보이지만 그가 인터뷰한 내용을 한번만이라도 본적이 있다면 보기와는 달리 매우 독하고 출세욕이 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불레즈가 뉴욕 필 지휘를 방해하자 번스타인은 깊은 빡침을 표했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자 유럽 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1970년대 유럽에 진출한 번스타인은 도이체 그라모폰과 장기 계약을 맺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주요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물론 미국 활동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고, 1971년에 가톨릭 미사 형식과 반전 평화 운동의 메시지, 재즈의 어법을 혼용한 '미사' [3]를 발표해 굉장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73년에는 모교인 하버드 대학교에서 열린 특별 음악 강좌 시리즈에서 강의하기도 했는데, 이 강의도 녹화/녹취되어 '대답없는 질문(The Unanswered Question)' 이라는 타이틀의 책과 영상물로 발매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서독의 영화사인 유니텔에서 자신의 공연으로 제작한 영상물을 다량으로 녹화했다. 특히 빈 필과의 말러 교향곡 전곡 영상물(2번은 런던 심포니가 연주했다)[4]은 당시 공중파로 방영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78년말 남미로 여행을 갔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큰 고생을 했다. 반년 이상 지휘를 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아팠다. 1979년 여름에야 회복을 하였는데, 투병 결과인지 외모에도 변화가 생겼다. 병상에서 일어나 지휘대에 복귀한 79년 일본 공연 모습을 보면 윗눈꺼풀이 완전히 들어가 있어서 인상이 상당히 달라졌다. 78년 이전과는 확연히 달리진 모습이다.
79년 하반기에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5번(뉴욕 필의 일본, 한국 순회 공연 등)과 말러 교향곡 제9번(로열 콘서트헤보, 베를린 필과)을 주 레퍼토리로 삼았는데, 투병의 경험 덕분에 말러 교향곡 제9번을 더 잘 이해하고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77년 빈 필과 베토벤 교향곡 전집 녹음을 시작했고, 이후 브람스, 슈만 교향곡 전곡을 비롯한 주요 레퍼토리의 녹음이 이루어졌다. DG와의 녹음은 모두 라이브로 이루어졌다.

1983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명예단원(honor member)으로 추대되었다.[5]

1985년에는 자신의 최대 히트작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지휘해 전곡 취입했는데, 오페라 성악가들을 주역으로 캐스팅한 것이 다소 까이기는 했지만[6] 굉장한 기세로 팔려나가 베스트셀러 앨범이 되었다.

1985년에는 말러 교향곡 전곡 재녹음에 나섰다. 빈 필, 콘서트헤보, 뉴욕 필 세 개의 오케스트라가 동원되었다. 말러 전곡 녹음은 번스타인의 마지막 5년 동안 가장 중요한 녹음 프로젝트였는데, 끝내 8번 천인교향곡은 녹음하지 못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빈 필이 아닌 오케스트라와의 녹음도 조금씩 증가했는데 시카고 심포니와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7]을, 콘서트헤보와 슈베르트 교향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또 만년에는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종교음악 녹음도 진행했다.

1989년 12월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동서 베를린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지휘해 두 차례의 기념 음악회를 열었고, 이 중 동베를린에서 열린 공연은 전세계로 실황 중계되었다.

1990년 초에는 건강 악화 때문에 잠시 입원하기도 했지만,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얼마 후 복귀해 예정된 공연들을 계속 강행했다. 하지만 8월 19일에 보스턴 교향악단과 가진 탱글우드 페스티벌의 공연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7번 연주가 마지막이 되었다. 이 공연의 실황녹음은 번스타인 사후 '최후의 콘서트(The Final Concert)'라는 제목의 음반으로 제작되었는데, 대략 3악장 중반부에서부터 음악의 텐션이 점차 떨어짐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이 당시 기사에 의하면 3악장 중간 부터 기침을 시작하여 4악장이 끝날 때는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연신 기침을 해대면서 간신히 공연을 마쳤다고 하며, 호흡곤란 증세로 공연 직후 입원했다.

입원 후에는 최대한 안정을 취하며 병세 호전을 기다렸지만, 이미 오랜 흡연으로 인해 폐가 회복 불능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받자 10월 9일 은퇴 성명을 발표했다. 5일 뒤인 10월 14일 뉴욕 자택에서 폐암으로 타계했고, 유해는 뉴욕 브루클린의 그린우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2 주요 작품

2.1 교향곡

  • 교향곡 1번 '예레미아' (1942)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 2번 '불안의 시대' (1949. 1965 개정)
  • 교향곡 3번 '카디시' (1963. 1977 개정)

2.2 관현악

  • 교향 모음곡 '워터프론트' (1955)
  • 교향 춤곡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1961. 시드 래민, 어윈 코스털과 공동 작곡)
  • 발레 모음곡 '디부크' 1~2번 (1975)
  • 정치적 서곡 '슬라바!' (1977)
  • 관현악을 위한 디베르티멘토 (1980)
  •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원제 '주빌리 게임즈'. 1986. 1989 개정)
  • 캔디드 서곡(1956)
  • 관현악을 위한 팡파르 1,2번 (1961)
  • CBS 음악 (1977)

2.3 협주곡

  • 클라리넷과 재즈 앙상블을 위한 '전주곡, 푸가와 리프' (1949)
  • 독주 바이올린과 현악 합주, 하프, 타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1954)
  • 독주 플루트와 피콜로, 알토플루트, 현악 합주, 하프, 타악기를 위한 야상곡 '할릴' (1981)

2.4 실내악

  • 피아노 3중주 (1937)
  • 클라리넷 소나타 (1942)
  • 금관 5중주를 위한 무용 모음곡 (1988)
  • 리코더와 첼로를 위한 오카토닉 스케일 변주곡 (1989)
  • 바이올린소나타 (1939)
  • 두 대의 클라리넷, 두 대의 바순,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연습곡 (1940)

2.5 뮤지컬

2.6 오페라, 오페레타

  • 오페라 타히티의 소동 (1952)
  • 오페라 조용한 장소 (1983)
  • 오페레타 캉디드[8] (1956. 1973 대본 개정, 1989 전체 개정) 네이버 캐스트

2.7 발레

  • 팬시 프리 (1944)
  • 관현악을 위한 무용 에세이 '팩시밀리' (1946)
  • 디부크 (1974)

2.8 합창

  • 미사 (1971)
  • 보이소프라노 (또는 카운터테너) 독창, 혼성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치체스터 시편' (1965)
  • 카운터테너 독창과 혼성 합창, 타악기를 위한 '미사 브레비스' (1988)
  • 메조소프라노와 바리톤 독창, 피아노 연탄을 위한 '아리아와 뱃노래' (1988)
  • 혼성합창을 위한 하버드 합창곡 (1957)
  • 혼성합창을 위한 웜 업 라운드 (1970)

2.9 가곡

  • 좋은 요리 (1948)
  • 2개의 사랑 노래 (1949)
  • 온 더 워터프론트 (1954)
  • 시편148 (1955)
  • 새로운 친구들(1979)

2.10 영화음악

  • 워터프론트 (1954)

2.11 피아노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음악 (1937)
  • 피아노 소나타 (1938)
  • 7개의 애니버서리 (1944)
  • 4개의 애니버서리 (1948)
  • 5개의 애니버서리 (1952)
  • 결혼 모음곡 (1960)
  • 터치(1981)
  • 13개의 애니버서리 (1988)

3 수상 경력

국내
그래미상 최우수 어린이 앨범 부문 (1962, 1963, 1964)
그래미상 최우수 구술 앨범 부문 (1962)
그래미상 최우수 클래식 성악 연주 부문 (1963)
그래미상 최우수 클래식 음반 부문 (1965, 1968, 1978, 1991, 1992, 1993)
그래미상 최우수 합창 연주 부문 (1968)
그래미상 최우수 오페라 연주 부문 (1974)
그래미상 평생 공로 부문 (1985)
그래미상 최우수 관현악 연주 부문 (1990, 1991, 1993)
토니상 최우수 오리지널 스코어 부문 (1953)
토니상 특별상 (1969)
케네디 센터 명예상 (1980)

국외
덴마크 소닝상 (1965)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3급) (1986)
영국 로열 필하모닉 협회 금메달 (1987)

4 음악 성향

그야말로 바로크 시대 음악인들도 버로우탈 정도의 잡식성과 마당발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는데, 클래식 지휘자로 많이 유명하지만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히트시킨 작곡가이자 교향곡 세 곡을 비롯한 '진지한 계통의' 음악까지 써낸 작곡가라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 게다가 피아노 실력도 장난이 아니어서, 모차르트베토벤, 라벨,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독주와 지휘를 모두 맡아 1인 2역으로 연주하거나 슈만의 피아노 5중주 같은 실내악곡에서 피아노 파트를 맡은 녹음들도 있다[9]]. 이런 녹음 중에서도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에서는 신나게 피아노 치면서 지휘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다.

거기에 수많은 대학 강연 기록과 저술 활동, 인권 운동 참여 등의 활동상까지 보면 한 인간이 이 정도로 많은 일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다(...). 지금도 음악계에서 이 사람에 필적할 활동상을 보여주는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진정한 의미의 초인. 다만 뮤지컬 외의 작품들 같은 경우에는 '너무 극장 음악삘이 강하다'는 이유로 종종 비판받기도 했고, '미사' 처럼 사회 문제를 곡에 진지하게 반영했을 때도 정치/종교적인 논쟁이 상당히 격렬하게 오갔다.

지휘 스타일은 높이 평가해줬던 스승들인 라이너나 쿠세비츠키와는 거의 극점에 있다고 해도 될 정도인데, 다소 정신 사나울 정도로 지휘봉과 손을 놀려대는 데다가 지휘대에서 발을 구르거나 점프까지 할 정도로 심히 과장된 지휘 폼을 보여주었다. 이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청중들의 환호를 이끌기에 충분했지만, 너무 경박하고 지나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이들도 많았다. 아무튼 번스타인의 지휘 동작은 '레니 댄스(Lenny Dance)'라는 칭호로 지금도 회자될 정도. 영상물을 볼 기회가 있다면 한 번 감상해보기 바란다.[10]

자신이 작곡가였던 만큼 현대음악에 대한 관심도 상당했는데, 특히 모국인 미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매우 정력적으로 소개해 세계 무대로 진출시킨 것이 큰 업적으로 일컬어진다. 작곡된 후 거의 50년이 지나도록 아오안인 상태였던 찰스 아이브스의 교향곡 제2번을 초연해 성공시킨 인물도 번스타인이었고, 이외에 에런 코플런드루 해리슨, 새뮤얼 바버, 윌리엄 슈만, 데이비드 델 트레디치, 네드 로렘 등의 따끈따끈한 신작도 적극적으로 공연하고 녹음했다.

클래식 외적으로는, 비틀즈에 대해 엄청나게 호의적이였다고. 비틀즈의 Sgt.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있는 곡인 She's Leaving Home을 웬만한 클래식보다 뛰어나다라고 표현했고, Yesterday에 대해서도 극찬했다.[11] 활동 초기에는 재즈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했는데, 심지어 당대 본좌 재즈 피아니스트였던 테디 윌슨에게 피아노 레슨을(!!) 해줄 정도였다. 1956년에는 CBS 라디오에서 재즈 관련 강의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했고, 루이 암스트롱데이브 브루벡 같은 재즈 명사들과 협연한 녹음도 있다.

다만 조지 거슈윈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으로 평했는데, 대표작인 '랩소디 인 블루' 의 경우에도 '전체적인 통일감도 없고 이것저것 엉성하게 짜맞춘 메들리' 라고 깠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랩소디 인 블루'인 것이고, 그러한 '랩소디 인 블루'를 즐겨듣고 좋아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무대에서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로 1인 2역을 해서 자주 공연해 곡의 유명세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츤데레???

콘서트에서 주로 활동했기 때문에 오페라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공연 기록이나 음반이 적은 편이지만, 베토벤의 '피델리오' 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비제의 '카르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베르디의 '팔스타프' 같은 굵직한 작품들의 음반과 영상물도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물론 만년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해 녹음한 자신의 오페레타 '캉디드' 도 지금까지 결정반으로 손꼽힌다. 경력 초기였던 1950년대에 전설적인 소프라노 가수 마리아 칼라스와 공연한 케루비니의 '메데아' 와 [12] 벨리니의 '몽유병의 여인' 실황도 음질은 안좋지만 역사적 기록물로 평가되며, 사후 EMI를 통해 정발판 CD가 나온 바 있다. 그리고 최근에 리마스터링 음반이 나왔다!!!

유대인이었던 만큼 말러를 비롯한 유대계 작곡가나 음악인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는데, 2차대전 종전 직후에 유럽에 가서 강제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던 음악인들과 공연하기도 했고 이스라엘 건국 후 갓 창단된 팔레스타인 교향악단(현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도 자주 지휘했다. 하지만 선민사상 급의 정통 유대주의자는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에 유태인 거주구역을 늘려가는 것을 결사반대했으며, 팔레스타인 출신인 에드워드 사이드(항목 참고하면 알겠지만 이 사람도 음악적으로 재능이 꽤 있었다)와 만나 토론하면서 아주 친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뜻이 맞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되려 유대인 수꼴들에게 배신자처럼 취급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 붕괴 기념 공연을 지휘하거나 국제사면위원회/유네스코 지원 공연을 숱하게 개최한 것으로 볼 때 넓은 의미의 자유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로 여겨진다.

5 사생활

전성기 때의 사진을 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형 외모에다가 호소력 있는 중저음의 보이스를 가졌기 때문에 숱한 애인들을 끌고다닌 것으로 여겨지는데, 실제로도 그랬다고 한다. 결혼은 1951년에 칠레 출신의 여배우인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와 처음 했는데, 자식 셋을 남기는 등 초반의 부부금슬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남편의 양성애 성향.

번스타인 주변인들의 회고나 증언에 의하면, 번스타인은 매우 가정적인 사람이었지만 '육체적으로는 남성을, 정신적으로는 여성을 필요로 하는' 자신의 성향에 꽤 심하게 갈등했다고 한다. 결국 남자들을 끌어와 관계하는 것을 보다 지친(...) 아내가 별거 신청을 해버렸고, 곧 부부 관계는 파탄나 버렸다.

하지만 아내가 폐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아내 곁으로 돌아와 병수발을 들었고, 1978년에 아내가 죽은 뒤에는 자신이 내놓은 음반과 영상물 몇 종류를 '아내의 추억에 바친다' 고 주기해 발매하기도 했다. 이후 재혼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아내에 대한 애정과 죄책감이 매우 컸던 모양.

그리고 젊었을 적부터 굉장한 애연가였는데, 리허설이나 공연 중간의 휴식 시간이라든가 집에서 곡 쓸 때, 인터뷰할 때 찍은 사진이나 영상들을 보면 제대로 줄담배 스킬을 보여주고 있다(특히 말보로 덕후였다고 한다). 심지어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줄담배를 피워대서 흡연을 싫어하는 학생들이 학을 뗐을 정도였고, 사람들이 자택이나 사무실에 오면 앉으라는 말 다음에 담배부터 권유했다고 한다.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폐기종으로 인해 가벼운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결국 이 습관은 말년에도 고치지 못해 죽음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 주치의에게 폐암 선고를 받고도 치료가 불가능한 것을 알자 계속 담배를 피워댔다. 담배 외에는 잭 다니엘스 위스키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담배 만큼 달고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6 사후의 영향력

생전의 활발한 교육 활동 덕에, 번스타인과 함께 작업했던 신진 지휘자들은 꽤 많고 유명인으로 성장한 인물들도 여럿 있다. 뉴욕 필 시절 부지휘자로 채용했던 일본 지휘자인 오자와 세이지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하며 탄탄한 경력을 쌓고 있는 여성 지휘자인 마린 올솝,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음악 감독으로 재직 중인 마이클 틸슨 토머스, 할리우드 볼 음악회의 지휘자로 유명한 존 모체리 등이 특히 번스타인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인물로 손꼽힌다.

지휘자 외에도 유명한 '청소년 음악회' 시리즈를 통해 독주자로 협연한 뉴비 연주자들 중에 훗날 대성한 인물도 꽤 있는데, 콘트라베이스를 독주 악기로 끌어올리는데 이바지한 게리 카나 화교 첼리스트 요요마 등이 대표적인 예. 생애 후반에도 젊은 연주자들과 협연하는 것을 마다하기는커녕 매우 즐겼다고 하며, 소련과 폴란드 등 동구권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메르나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치메르만과도 여러 협주곡에서 협연하며 명반을 만들어냈다.[13]

저작권저작인접권이 소멸되고 있어서 약간 안습이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출반한 음반들도 양대 전속 음반사였던 CBS/소니와 도이체 그라모폰의 밥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외에 양이 적기는 하지만 EMI와 필립스, 초기의 RCA 등에 취입한 음원들도 종종 언급되는 녹음들. 유니텔 등지에서 많이 만든 영상물도 비디오 테이프와 LD, DVD 순으로 계속 발매되고 있고, 아직 미발표인 영상들도 여럿 있다고 하니 앞으로도 돈줄 역할을 계속 할 수 있을 듯하다.

7 에피소드

  • 번스타인은 어렸을 때부터 자유주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는데, 초기 활동 시절에는 소련의 대표적인 작곡가들인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와 미국으로 망명와 있었던 좌파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의 음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지만, 주위의 비난을 쌩까고 묵묵히 음악 활동에 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인종차별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군의 참전 반대 운동,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레이건부시 행정부에 대한 비판 등 예술가로서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14]
  • 1979년에는 이 곡을 같은 악단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한국 공연에서도 올렸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작곡가들의 작품 연주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번스타인은 곡목을 바꿔달라는 주최 측의 요구를 잘근잘근 씹어버리고 공연했다. 대인배.[15]
  • 번스타인의 말빨은 어렵게 느껴진 클래식의 대중화라는 명제를 꽤 훌륭하게 소화해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지만, 그 말빨이 오히려 한 동료 음악인과의 관계를 틀어지게 하기도 했다. 1962년 4월에 글렌 굴드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공연할 때 굴드가 템포를 기존 연주보다 훨씬 느리게 잡아달라고 했는데, 번스타인은 이 요청을 수락했지만 워낙 규모가 큰 협주곡이 느리게 연주되면 공연 시간에도 분명히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개연 직전에 청중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무대에 나왔는데, 번스타인의 말투가 다소 개그맨 스타일이어서 오히려 청중들이 박장대소하는 상황이 되었다. 공연 후 해럴드 숀버그를 비롯한 몇몇 비평가들은 번스타인의 사전 멘트가 다분히 굴드의 연주 스타일을 비꼬는 어그로를 끌었다고 맹렬히 항의했고, 굴드도 그 이후로 번스타인과 협연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비평가들의 생각과 달리 굴드와 번스타인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는 그 후로도 계속 유지되었다.
  • 번스타인과 종종 라이벌 관계로 묘사되는 지휘자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번스타인은 생전에 카라얀이 수장으로 있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거의 관계를 맺지 못했다. 1979년에 전직 악단 단장이던 볼프강 슈트레제만의 초청을 받아 정기 공연이 아닌, 국제사면위원회 자선 음악회의 객원으로 출연해 말러교향곡 9번을 두 차례 공연한 것이 전부였을 정도. 그나마 이 공연 실황은 서베를린 주둔 미군 관할 방송국이었던 RIAS를 통해 운좋게 녹음되었고, 번스타인 사후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CD로 출시했다. 번스타인 후기의 말러 9번 연주 중 가장 많이 추천이 쌔워지는 녹음. 또한 카라얀과의 관계도 표면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액면 그대로 카라얀과 번스타인이 사이가 좋았다고 믿는 우를 범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번스타인의 경우 사적인 자리에서 카라얀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전술한대로 번스타인이 베를린필과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한 직후 카라얀이 녹음을 진행하자 자신의 해석을 참고하지는 않았나 하면서 언짢아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둘은 친분은 없었지만 몇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한번은 카라얀이 호기롭게 '베를리필,빈필 중 어디를 지휘하고 싶냐? 내가 주선해줄께!' 라고 하자, 번스타인은 '베를린필이 당신에게 반항하는 것을 보니 건방진 녀석들이 틀림없어서 흥미없음'[16]이라고 대답해서 카라얀을 기쁘게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번스타인은 위 연주를 제외하곤 베를린 필을 지휘한 사례가 없다.
  • 원래 1992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신년음악회의 지휘자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1990년에 타계함으로 인해 불발되었다. 번스타인의 성격으로 볼 때 어느 해보다 재미있는 신년음악회가 되었을텐데, 말러 교향곡8번의 신전집 녹음 무산과 함께 팬들이 많이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대타로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들어왔다.
  1. 다만 여전히 KBS 1FM 같은 음악방송에서 '레너드 번슈타인'으로 발음하는 사람이 간간이 있다.
  2. 앙코르 연주여서, 조금 장난기 있는 면이 있다. 그러한 점을 고려하면 '무책임하게' 노는것은 아니다. 저렇게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리허설 때 오케스트라를 조련했으며 오케스트라와 혼연일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마에스트로 반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저런 흉내를 내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것이다.
  3. 규모가 엄청 크다. 그래서 전체 제목이 MASS: A Theatre Piece for Singers, Players, and Dancers일 정도니.
  4. 음반에 이은 영상물로도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5. 같은 해 빈 필은 카라얀을 명예지휘자(honor conductor)로 추대했다.
  6. 호세 카레라스가 토니역이었는데, 토니는 설정상 폴란드계 백인이다. 그런데 스페인 출신인 카레라스의 영어발음이 극중 적대세력인 샤크파와 더 가까워(샤크파는 푸에르토 리코계) 녹음 중 계속 지적질(...)을 당했고 이에 빡친화가난 카레라스가 녹음 중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갔다. 이 장면은 후에 발매된 영상물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또한 그렇게 여러번 반복해서 녹음을 했지만 최종결과물 역시 라틴계 발음을 떨치지 못해서 두고두고 까이고 있다.
  7. 빈 필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을 연주하자는 번스타인의 제안을 거절한 바 있다.
  8. 이를 볼테르의 원작인 '캉디드'로 발음해야 하는지, 미국식인 '캔디드'로 발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토론이 필요한 듯 하다. 일단 이 작품이 볼테르의 원작소설을 고스란히 가져온게 아니라 스토리를 압축 후 양념으로 미국식 유머를 뿌린 형태이고, 실제 공연에서 등장인물의 명칭이 모두 미국식으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9. 다만 이건 앙드레 프레빈과도 겹치는 속성이 있는데 프레빈도 피아노 실력이 솔리스트 못지 않아서 피아노 중주, 피아노 협주곡 등에서 독주와 지휘를 모두 맡았고, 한떄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하면서 관현악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작곡했다.
  10. 어느 클래식 사이트에서는 동영상으로 gif 짤방을 만들기도 했는데, 무서운 속도로 잽을 연타하거나 PT 6번을 무한반복하는 번본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1. 뭐...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같은 조사를 실시하면 거의 모두 이 곡이 1위하긴 하지만..
  12. 마리아 칼라스가 양성애자였던 번스타인이 자신과 친한 무대 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이전 버전에서는 자신과 바람을 피던 남자 무용수라고 나와 있었는데 사실이 아닐 것이다.)에게 작업이라도 걸까봐 번스타인의 양성애 성향을 단원들에게 까발리고 굉장히 모질게 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마리아 칼라스가 이미 유부녀였다는 점.
  13. 치메르만과는 브람스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공연하고 녹음하기로 했는데, 베토벤 협주곡의 경우 1번과 2번이 번스타인의 타계로 녹음되지 못했다. 결국 1년 뒤인 1991년에 치메르만이 번스타인이 생전에 종종 했던 것처럼 독주와 지휘 1인 2역을 맡아 마무리지었다.
  14. 이미 1950년대부터 FBI가 번스타인을 좌빨로 간주하고 비밀 사찰을 지속적으로 시행했다고 하는데, 2000년대에 기밀 해제되어 공개된 내부 문건들에 의해 사실로 밝혀졌다.
  15. 당시 번스타인은 한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순회 공연에서 이 곡을 레퍼토리로 삼았기 때문에 다른 곡을 별도로 연주하는 것은 여건상 어려웠을 수도 있다. 한국 공연 직후 다음날 일본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쇼스타코비치 연주문제 때문에 한국 정부와 껄끄러운 상황에서 공연 직후 김포공항으로 출국하려던 번스타인과 뉴욕 필의 수속이 크게 지연돼 번스타인이 화가 났다는 일화도 있다. 번스타인의 한국 공연에 대한 회상은 꽤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한국의 모 음악잡지와 행한 인터뷰를 보면, 쇼스타코비치 작품에 대한 교체 요구뿐 아니라 소란스러웠던 청중들의 관람 매너에 대해서도 상당히 불만스러웠던 듯.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한국 청중들이 매우 정숙하다며 큰 만족감을 표했던 것과 대조적. 아바도 역시 국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내한 공연 때의 받은 인상이 부정적이었음을 표출한 바 있으며, 아바도 임기 동안 베를린 필의 내한공연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16. 80년대 베를린필 단원과 카라얀의 갈등이 컸으며, 이 때문에 이전과 달리 카라얀과 빈필간의 연주가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