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대

예비대가 없는 지휘관은 전투의 방관자에 불과하다. - 프리드리히 대왕

전투에서 지휘관이 언제든지 투입할 수 있도록 예비로 남겨놓는 부대. 따로 병력을 남겨놓았다고 하더라도 당장 필요할 때 병력을 투입할 수 없다면 예비대가 아니다.

상비군이 아닌 전쟁 발발 후 동원되는 전력을 의미하는 예비군과는 다른 개념.

중장보병들끼리의 방진 대결이었던 고대 그리스 시기에는 예비대란 개념이 사실상 없는 것에 가까웠다. 적절한 평지에서 중장보병 방진끼리 최대전력으로 부딪쳐서 오래 버틴 쪽이 이기고 진 쪽은 죽거나 도주하는 형태의 싸움이 이어졌으며, 이는 예비대에 적합한 기병 등 기동력과 살상력이 뛰어난 병과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 뒤엎은 것이 알렉산더 대왕의 전술혁명으로, 그 뒤로 예비대를 확보하고 이를 적절히 운용하는 것은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로 평가받는다. 전투에 투입되지 않아 팔팔한 예비대는 결정적 국면에서의 돌파와 포위섬멸 및 전과확대를 담당하며, 만약 전투에서 패배했거나 상황이 불리한 경우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역으로 적군의 돌파와 포위 시도를 저지하고 파쇄하는 임무에 동원된다.

따라서 예비대의 투입 시점을 판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지휘관의 역량을 판단하는 게 가장 중요한 사항 중 하나이다.

전선이 돌파되지 않았거나 적절한 공간이 없음에도 예비대를 너무 일찍 투입하는 경우엔 예비대를 무의미하게 소모하게 되며, 반대로 망설이다 예비대 투입이 너무 늦어진다면 축차투입으로 전과확대의 기회를 잃어버리거나, 패배가 패주로 돌변할 수 있다.

신속한 투입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병이나 기계화보병, 기갑 등 기동력 있는 병과들이 주로 예비대로 할당된다.

근대 군 편제의 기본이 삼각편제인 이유 중 하나로, 삼각편제의 기본원리는 두 개 전투부대를 전선에 투입하고 한 개 전투부대를 예비대로 확보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최전방 사단들 중에는 3개연대 편제를 못 채운 경우가 많았으며 이 때문에 예비대를 운용하지 못해 전선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예비대를 너무 일찍 투입해 피 본 경우는 한국전쟁 당시의 용문산 전투[1]가 있고, 예비대를 너무 늦게 투입하거나 또는 예비대를 확보하지 않아 좆망한 대표적인 경우가 한국전쟁 당시 의정부 전투이다. 의정부 전투는 당시 7사단 예하 연대가 1, 9연대 두 개밖에 되지 않아 북한군의 전선 돌파를 저지하지 못해 3일만에 서울을 내주게 된다. 반대로 낙동강 전투에서 UN군은 좁은 지역에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력이 되는 한 최대한 예비대를 편성했으며 내선의 이점을 살려 이 예비대를 이곳 저곳에 투입해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전선 붕괴를 막아낸다. 반면 인천상륙작전 당시 북한군은 경인지역을 방어할 전략예비대까지 죄다 뽑아가서 낙동강 돌파에 몰빵하는 바람에 2주만에 서울을 내주고 사실상 전 전투부대가 붕괴되는 손실을 겪고 만다.

4차 중동전쟁 당시 골란고원 전투를 다룬 서적인 "골란고원의 영웅들"을 보면, 당시 골란고원 지역의 방어를 맡은 7기갑여단장은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거의 전 전선에서 병력 열세에 몰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를 막론하고 자신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예비대 편성에 소홀하지 않았다. 처음엔 중대 단위로 빼놨다가 나중엔 3~4대 단위의 소대 병력으로 줄이더라도 항상 예비대를 마련해놓았으며, 이는 7기갑여단이 골란고원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내는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뭔가 야구의 불펜진(구원 투수)과 비슷하다. 예비대와 불펜진 모두 역할이 선발에 이어 나와 승리를 확정짓거나 패배의 손실을 최소화 시키는 것 이며 너무 일찍 당겨쓰거나 막 쓰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1. 국군 1개 사단에게 중공군 3개 사단이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