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상륙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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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
6.25 전쟁의 일부
날짜
1950년 9월 15일 ~ 1950년 9월 28일
장소
경기도 인천시[1]
교전국 UN군

대한민국
미국
영국
23px-Canadian_Red_Ensign_1921-1957.svg.png 캐나다
23px-Flag_of_Australia.svg.png 오스트레일리아
23px-Flag_of_New_Zealand.svg.png 뉴질랜드
22px-Flag_of_the_Netherlands.svg.png 네덜란드

북한
지휘관 더글라스 맥아더[2]
아서 듀이 스트러블[3]
에드워드 알몬드[4]
올리버 스미스[5]
월튼 워커
제임스 밴 플리트
손원일
정일권
신현준
백인엽
김일성
최용건
병력75,000명
함정 261척
불명
사망자222명 전사1,350명 전사
결과
국제연합의 승리.
기타
국제연합의 반격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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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를 넘는 미 해병대(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경, 인천, 신원미상의 종군기자 작품).

이 사진에서 소대원들을 이끌고 가장 앞장서서 장애물을 오르고 있는, 제1해병사단 1/5대대 에이블 중대 3소대장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는 이 사진이 찍힌 바로 몇분 후,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첫 번째 수류탄을 투척 후 곧바로 두 번째 수류탄을 투척 도중 적군 자동화기에 가슴과 오른 어깨를 피격당해, 막 투척하려던 수류탄을 땅바닥에 떨어트렸다. 자신이 떨어트린 수류탄 때문에 소대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온몸으로 막아 대원들을 구하고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당시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는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한 소대장 중 유일하게 실전 경험이 없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 이 사진은 인천 상륙작전의 기념비적인 사진으로, 쌍안경을 들고 있는 맥아더 원수의 사진과 함께 역사에 길이 남을 사진이 되었으며, 발도메로 중위는 그 전공을 기려 사후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에 추서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해상 수송선인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함'[6]이 있다. 수송선이긴 하지만, 위관급의 이름이 붙었다는 것으로 그의 영예를 존중하는 미군의 자세를 알 수 있다.

영어Battle of Inchon(Operation Chromite)
러시아어Инчхонская десантная операция
프랑스어Bataille d'Incheon
독일어Landung bei Incheon
스페인어Batalla de Incheon
일본어仁川上陸作戦
중국어仁川登陆, 仁川登陆战

1 개요

6.25 전쟁의 판도를 뒤엎고 대한민국을 구해낸 작전이자 세계의 유명 작전 중에서도 손꼽히는 작전

코드네임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7]

6.25 전쟁 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인천에서 유엔군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작전. 2차대전에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미드웨이 해전과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미군은 이 전쟁에 참전한 후에도 계속 북한군에게 연패하고 피해를 내며(북한군과 경기도에서부터 싸웠으나 대전-경북-경남-부산까지 밀리며 수천 명에 이르는 미군 사상자가 나올 정도였다. 국군의 피해는 더 컸고.) 경상도까지 밀려오다가 결국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이 뒤바뀌는 한 계기가 되었다.

2 과정

2.1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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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개전된 이래 북한군은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나, 이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된다. 인민군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칠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다. 당장 1950년 9월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강제 징집한 타칭 의용군 5만여 명을 포함해서도 10만 명이 되지 않았다.[8]

산을 저지선으로 삼을 경우 북한군이 샛길 등으로 산을 쉽게 넘어가서 아군을 역포위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국군과 UN군은 낙동강을 주요 저지선으로 삼았는데, 수비를 할 때는 적이 보이므로 유리하지만, 역공을 하려면 도강부터 해야 하고 적에게 개활지에서 엄폐물 없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문제점 때문에 반격도 쉽지 않았고, 북한군 역시 격심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공세의 기세를 늦추려 하지 않아 낙동강 전선의 국군 및 UN군은 마땅한 반격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실제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UN군이 반격을 시작할 경우, 38선까지 도달하는데만 1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며, 그 기간도 상당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지경이었다.

2.2 상륙작전의 결정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전황을 일거에 뒤집을 수 있는 적 후방으로의 상륙작전을 원했다.[9] 이는 북한군이 빈약한 육상보급으로 현재의 전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보급선을 잘라버리면 일제히 총붕괴될 것으로 충분히 예상되었다.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보급을 위해 사용한 육상 교통인 경부선 철도와 경부 가도는 필연적으로 서울을 통과했고, 따라서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까지 진격할 경우 이 보급선을 완전히 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덤으로 한국지형의 특성상 보급로가 끊어지면 전차 등의 중장비는 몽땅 버리고 사람만 빠져나오기도 힘든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에. 잘하면 단번에 쳐들어온 조선인민군을 몽땅 제거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 수 있었다.

2.2.1 인천의 험준함

이에 참모들이 처음 생각한 곳은 군산시였다. 하지만 군산은 상륙조건 자체는 좋으나 적의 보급선을 하나도 끊지 못하며, 적의 병력도 하나도 포위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고, 이런 점 및 맥아더 장군 자신의 소신으로 인해 맥아더 장군은 혼자서 끊임없이 인천 상륙을 주장했다.

하지만 참모들과 상륙작전을 실제로 수행할 미 합동참모본부(합참)와 해군본부도 인천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는데,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 조수간만의 차가 최고 수치는 9m, 최소 수치도 7m라서 대한민국 2위의 수치이므로 밀물 때 상륙하지 않으면 상륙군이 수백 미터 이상을 엄폐물도 없이 질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그리고 밀물 때 상륙한 상륙선은 다음 밀물이 올 때까지 좌초하므로 적의 반격 시 탈출하기도 힘들다.
  • 썰물이 되면 나타나는 갯벌은 수백 미터 이상의 폭과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도보 및 차량통행이 거의 불가능하다.
  • 위 두 항을 이유로 선발대는 상륙 후 최소 9시간 동안 어떠한 지원이나 보급도 받을 수 없다.
  • 상륙지 주변에 모래사장은 없다고 봐야 하고, 보통은 돌로 쌓은 높은 방파제와 축대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배타고 방파제에 다가가서 사닥다리 놓고 올라가는 전근대적 공성전을 벌여야 상륙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인데, 당연히 방어군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 방어시설이 잘 갖추어진 항구를 직접 점령하는 것은 디에프 상륙작전 이후 거의 금기시된 일이며, 설령 상륙이 성공적이더라도 적과 치열한 시가전을 치르면서 인천을 점령해야 하는 등 난제가 산적해 있다.
  • 썰물이 되면 선박이 통행할 수 있는 수로가 비어수로라고 불리는 좁은 통로에 국한되므로 상륙작전을 하는 선박 및 지원포격을 하는 선박이 모두 좁은 단일 통로에 밀집한다. 이는 방어군의 해안포 입장에서는 그냥 고정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비어수로의 유속이 매우 빨라서 주의하지 않으면 엇 하는 사이에 엉뚱한 곳으로 배가 떠내려가기 일쑤다.

이렇게 인천이 상륙하기 힘든 특징이라는 특징은 거의 모두 보유하는 바람에 일부 참모는 과장삼아 "성공율은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고 그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앞바다로 장소 변경을 권하기도 하였다.

2.2.2 인천이 결정된 이유

인천이 이렇게 상륙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륙지로 결정된 이유는 일단 인천 이외에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적 후방의 완전 단절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

  • 군산시의 경우 상륙하기는 양호하나 앞서 언급했듯이 적의 보급선을 하나도 절단하지 못하는 데다가, 적의 병력을 하나도 포위하지 못한다. 이런 곳에 상륙하느니 해당 병력을 부산으로 증원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난 지 오래였다.
  • 포승면은 현재의 평택항 근처로, 이 곳이 바로 대한민국 1위의 조수간만의 차를 자랑하는 아산만 유역이다! 그나마 수도에서 정서방에 다다르는 인천과는 달리 수도와의 거리도 형편없이 먼 데다 조수 간만의 차도 극복하기 어려워 한반도 역사 동안 아예 버려진 땅이었다. 오늘날의 평택항의 개발이 이루어진 건 토목 기술 수준이 괄목할 정도로 좋아진 1990년대 이후의 이야기이다. 또한 북한군이 인천항을 폭파해서 못 쓰게 만들 시간을 준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장 상륙작전 시는 물론이거니와, 이후 북진 때도 인천항을 주보급항으로 사용해야만 작전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 있었다.
  • 인천이 유일하게 유리한 점이 있다면 배치된 병력이 매우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대략 1,000명 이내의 병력만이 인천을 지키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맥아더는 합참과 해군본부를 설득했고 결국 1950년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은 최종 승인을 받게된다. 다만 인천 상륙작전의 구상에 대해서는 맥아더 이전에, 심지어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미군 내에서 충분히 유력한 작전으로 검토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Clay Blair의 『The Forgotten War』에 따르면, 1950년 6월 19일 미 국방부가 소위 SL-17 계획을 승인, 배포했는데, SL-17 계획은 북한군의 남침 시에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여 전선을 안정화하고 9월 30일까지 인천 인근에서 상륙작전을 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을 고립시킨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6일에 연합군 최고사령부(맥아더사령부)가 SL-17의 복사본 50개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맥아더와 별개로 이미 미군은 북한군의 침공에 대응하는 작전 전반을 구상한 상태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곧 앞서 언급한 인천의 험준함으로 인해 해당 계획은 그냥 서류상에만 남았으며, 맥아더가 이 계획을 현실화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한 것을 볼 때 인천 상륙작전은 맥아더의 작품이 맞다.

2.3 준비

참가부대

  • 제7합동기동부대 Joint Task Force SEVEN - 아서 듀이 스트러블 해군 중장
    • 미군
      • 혼성[10] 제10군단 -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11][12]
      • 해병대 제1해병사단 - 올리버 스미스 해병 소장
    • 한국군
      • 육군 제17보병연대 - 백인엽 육군 대령[13]
      • 해병대 제1해병연대 - 신현준 해병 대령
    • 영국군 - 앤드류스 해군 소장

또한 9월 초, 대한민국 해군 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은 비밀리에 이희정 중령과 함명수 소령에게 해군 육전대(陸戰隊)를 편성, 영흥도 및 덕적도에 대한 탈환을 지시했고, 육군 김동석 대령[14] 예하 특수부대원들의 사전첩보작업을 바탕으로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의 기반을 닦았다. 이어서 9월 10일부터 본격적인 사전 준비포격 및 공중공격을 시작했다.

한편 아무리 무리해서 인천으로 계획을 잡았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 중요했다. 따라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듯한 공격이 다른 곳에도 실시되었는데 그곳이 삼척, 남포, 군산이었으며, 9월 4일부터 9월 14일까지 F4U 콜세어를 동원하여 폭격을 하였다. 상륙 이틀 전, 9월 13일에는 강원도 삼척으로 아이오와급 전함 BB-63 USS 미주리 함을 출동시켜 삼척 일대에 함포 사격을 가하여 적들의 눈을 돌리려고 하였다. 또한 같은 날 낙동강 전선의 총사령관인 미 제8군 사령관 육군 중장 해리스 월튼 워커 장군은 기자회견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10월 중순 즈음에 총반격을 감행할 것입니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라고 발언함으로써 기자들이 유엔군과 국군이 10월 즈음에 총반격을 한다는 기사를 앞다투어 내도록 유도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북한군 수뇌부에서는 후방에 남아있는 예비 부대를 모두 낙동강 전선에 투입해 전쟁을 빨리 끝내기로 결정하였다.

8월 20일, 캐나다 해군 구축함 Athabaskan의 상륙반이 팔미도에 상륙하여 등대 내부의 통신시설을 파괴했다.

한편 미 해군 첩보수집 특공대에 배속된 임병래 중위의 공작조는 미리 인천에 잠입하여 인천의 장비배치도, 배치병력, 고지 등의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벌였으며 월미도에서 북한군 군관 2명을 생포하였다.

상륙 작전 사흘 전, 9월 12일에는 영국 SAS 부대가 전라북도 군산에 잠입하여 북한군을 속이기 위해 미군의 군용장비를 일부러 버려두고 퇴각하였다. 또한 상륙 바로 전날 9월 14일 영덕 장사리에는 학도병이 상륙하여 장사 상륙작전을 시행하는 기만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같은 날 9월 14일, 앞서 첩보 수집을 위해 투입되었던 임병래 중위의 공작조가 북한군에게 발각되자 위기에 놓였고 퇴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임병래 중위는 홍시욱 하사와 둘이 남아 북한군과 교전하였다. 그가 벌어준 시간 덕분에 특공대 공작조는 무사히 퇴각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북한군에게 생포되었을 경우, 고문당하여 정보를 누설할 것을 염려하여 마지막에 자결하였다. 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의 전공을 기려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고, 2012년에는 윤영하급 고속함 10·11번함 PKG-722·723에 그들의 이름을 붙였으며 미국 정부 역시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2.4 적의 예측

마오쩌둥은 북한에게 상륙작전이 벌어질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 일이 있으며[15] 저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인천을 조심하라"고 전문을 보냈으나, 빨치산 중대장 출신으로 백명 미만을 지휘한 경험밖에 없는 소련군 대위 출신인 김일성이 상륙작전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북한군이 인천에 유엔군이 상륙할 때를 대비해 서해안 방어사령부를 신설하고 육군 제18사단과 전쟁 몇 달 만에 거의 작살나 버린 해군과 공군에서 차출한 육전대 병력 등으로 여러 방어용 신규 부대를 편성하는 한편 월미도에 해군 인원들로 구성된 방어진지를 만드는 등의 준비를 했으나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16]

게다가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서 9월 공세를 밀어붙이면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자 이렇게 경기도 일대에 준비해 둔 방어 부대까지 빼서 동원했고, 그 결과 9월 15일 인천 월미도에 한/미 해병대가 처음 상륙했을 때 당장 인천 일대에서 방어에 임하고 있는 병력은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 2개 중대 규모의 병력과 인천 시가지의 2개 대대 병력 정도밖에 없었다.

물론 북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은 하고 있었는지, 소련 해군의 도움을 받아서 주요 항구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천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나 늦어서다행이다 몇 개 부설하지도 못했으며, 그나마 기뢰 부설함들이 들켜서 공격을 받고, 부설한 기뢰도 거의 다 발견돼서 조기에 제거되었다.

2.5 상륙

2.5.1 개요

인천 상륙작전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Inchon_landing_map.jpg

  • 월미도 제압(그린 비치) : 해안포와 동굴진지가 갖추어진 월미도와 소월미도를 제압해서 상륙작전의 안전을 도모하고 인천항과 시가지 등에서 날아오는 반격에 대항할 토대 및 방패막을 만든다.
  • 인천항 상륙(레드 비치)[17] : 인천항에 직접 상륙해서 항구를 조기에 확보한다. 가장 어려운 임무이므로 미해병대 중 가장 베테랑인 부대를 동원한다. 이때 높은 방파제를 돌파하기 위해 일본에서 나무사다리 수천개를 긴급히 제작해서 공수했다고 한다. 위 사진에서 사용하는 사다리가 바로 그 사다리다.
  • 인천 남동부 상륙(블루 비치)[18] : 인천항에서 적의 방어군이 방어작전에 임하고 있을 때 후방으로 우회해서 경인가도를 장악하여 인천을 고립시킴과 동시에 서울방면에서 오는 적의 증원군을 차단한다.

상륙 하루 전 9월 14일, 인천 방면에 주둔하던 북한군은 평양으로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 적 함정들이 인천에 접근 중. 다수의 항공기가 월미도를 폭격 중. 유엔군 상륙기도가 극히 농후함.
  • 휘하 전 부대에 전투준비를 명하였음. 적이 상륙을 기도하면 저지 및 격멸할 것임.

이를 들은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련이라고 한들 별 도리가 없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당일 새벽
제7합동기동부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제독의 지휘 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19]의 함정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하였다.

2.5.2 팔미도 등대 점령

9월 15일 00시 05분 클라크 미 해군대위와 한국 해군 장병들로 구성된 부대가 팔미도의 등대를 점령, 불을 켰다.[20]

2.5.3 월미도 상륙

9월 15일 05시 00분 미 해군이 월미도에 상륙 준비 사격(로켓을 퍼부었다)을 감행하였고, 05시 45분에는 미 제15항모부대의 F4U 콜세어 10대가 출격하여 해안가 지역에 폭격을 감행한다.

USS 마운트 매킨리 함상에서 지휘부는 상륙시간(L-아워)을 06시 30분으로 확정한다. 제5해병연대 3대대 해병들은 06:00시까지 여러 척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 옮겨 탔다. 그 상태에서 신호가 떨어지자 월미도 북단의 그린 비치로 돌격한다. 상륙 제1파에 속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7척이 해안에 도달했을 때 시간은 06시 33분이었다. 수중폭파대가 해안에 있는 침몰선의 잔해를 제거하는데 실패해 차량 및 병력 상륙자들은 우회 기동을 펼쳐야 했다.

전투기들이 불과 45미터 전방을 기총사격으로 훑는 가운데 제1파 인원들은 해안 상륙에 성공한다. 상륙 제2파는 2분 뒤인 06시 35분 추가로 2개 중대를 싣고 온다. 북한군의 저항으로는 산발적 무지향 사격만이 있을 뿐이었다. G중대는 재정비를 위해 잠시 정지했다가 방향을 남쪽으로 바꿔 무선전신국 언덕으로 돌진했다. 그곳에서도 북한군의 저항은 약했고, 공황상태에 빠진 북한군은 항복을 했다. 06시 55분 성조기가 언덕에 게양된다.

한편 H중대는 월미도 북단의 산업지역의 잔적을 소탕하고 인천과 연결된 방파제를 차단하였다. I중대는 참호 속에 숨어있던 북한군 1개 소대로부터 수류탄 기습공격을 당했다. 그러나 해병 전차소대가 전차포를 참호 속에 발사했고, 약 30명의 북한군이 투항한다. 해병들이 월미도를 휩쓸고 다니며 소탕작전을 계속했고, 08시 00분 해병은 무선으로 기함에 월미도 점령을 보고한다.

10시 00분, G중대의 전차와 보병 전투단은 남쪽 제방을 통해 소월미도로 진격한다. 이곳은 인민군 1개 소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나 곧 박격포와 해병 전투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며, 오전 11시 15분쯤 소월미도의 점령이 완료된다.[21]

2.5.4 레드 비치 상륙

9월 15일 14시 30분부터 미 해군이 다른 상륙 지점 중 하나였던 인천항(Red Beach)과 인천 남동부(Blue Beach)에 함포 사격을 감행한다. 미군의 함포사격이 진행 중일 때 미 육군 7사단, 대한민국 육군 제 17연대와 해병 제 1연대는 미군 상륙주정에 옮겨서 상륙을 대기하였다.

H-아워 8분 전에 제5연대전투단은 차량 및 병력상륙정을 타고 공격개시선을 넘어 레드 비치로 돌진했다.

레드 비치의 상륙 제1파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각의 차량 및 병력 상륙정에는 사다리를 2개씩 보유하고 있었고, 각 소대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 2척에 나누어 타면서 각각 20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 주정조(boat team)[22]를 형성했다.

여기 탑승한 제5해병연대 제1대대 A중대 돌격소대들은, 레드 비치 좌익에 상륙해 공동묘지 고지를 점령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추가로 차량 및 병력 상륙정 4척에 타고 있는 E중대 2개 돌격소대는 레드 비치 우익에서 영국 영사관 고지 점령을 맡았다. 미리 월미도에 상륙한 제3중대에서 박격포 엄호사격을 했다.

공병 1개 팀이 방파제를 따라 전진해 전차의 통로를 개척하면, 그곳을 지나간 전차들이 북한군과 교전을 벌일 예정이었다. 해병 전투기들이 연속적으로 급강하하면서 방파제 뒤편을 공격했다. 해변에 접근하는 차량 및 병력 상륙정들은 만조에 편승할 수 있었고 적의 저항은 심하지 않았다.

레드 비치에 상륙한 제5연대는 인천 시가지 소탕, 해안 경비를 맡으며 작전을 진행해갔다. 벙커에서 저항하던 북한군에 맞서 불도저로 짓눌러 벙커를 땅 속으로 묻어버리는 효율적인(?)[23] 전술로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격해갔다. 북한군의 잔존병력이 몇 없었기에 허를 찌른 격이 되어서 인천항의 주요 감제고지 탈환에 성공하고 인천항의 도크를 확보하였으며 북한군을 시가지 내부에 몰아넣어 모두 소탕하였다. 대한민국 해병 제1연대가 상륙하는 것을 끝으로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 후 유엔군과 국군은 경인가도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을 완벽히 성공시켰다.

이때 총 지휘는 맥아더 장군이 했으며 국군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했다(홍은혜 여사의 회고집인 '우리들은 이 바다 위해' 수록). 손원일 제독은 단순히 기함에서만 지휘를 한 것이 아니라, 해병 전투복을 입고 소총을 들고 해병대와 함께 상륙, 서울 수복시까지 해병대원들과 일선에서 함께 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서울에 입성한 국군 최선임자라는 기록을 세웠다.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는 포고문 역시 그의 명의로 작성된 것이다.

2.5.5 블루 비치

2.6 서울로 진격

그리고 인천은 다음날 아침까지 완전히 해방되었으며, 북한군의 이렇다 할 반격은 전혀 없다시피 했다. 그 결과 인천에서 유엔군이 입은 손실은 전사 21명에 실종 1명, 부상 174명에 불과했다. 비전투 사상자를 포함해도 부상자가 188명으로 늘어날 뿐이었다.

이후 미 해병 1사단을 주축으로 한 상륙부대는 다음날인 9월 16일 아침 역할을 분담한다. 제5연대는 경인국도의 북쪽을 택해서 서울로 진격하고 제1연대는 남쪽을 택해서 서울로 진격하며 제7연대는 예비병력으로 당분간 인천수비에 전념한다는 것이었다. 제5연대와 제1연대는 다음 날인 9월 17일 오전 내륙으로의 진군을 시작했으며, 이날부터 18일까지 산발적인 전투를 치러 영등포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북한군은 인천 방면의 증원을 위해 T-34/85 전차와 병력을 보냈으나, 부평근방의 경인가도에서 오히려 미리 매복한 미 해병대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이 시점에 와서야 북한의 김일성은 인천이 주공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며, 경인가도에 지뢰를 엄청나게 부설하는 한편, 급히 진격방향을 바꿔서 김천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 북한군 9사단 87연대가 필사적으로 영등포를 방어하는 사이에 서울로 동원할 수 있는 2선급 부대는 모두 동원했다. 하지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중국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전선의 주요 정예부대는 극히 일부만 빼내서 서울로 올렸기 때문에 병력에서나 장비에서나 상륙군에 대항하기가 어려웠다.

2.6.1 영등포 시가전

경인국도 남쪽을 향했던 미해병 제1연대는 한강을 건너기 전 영등포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을 받는다.[24] 9월 20일이었다. 이 날 하루에 걸쳐 영등포 시가지는 포병대와 항공기의 맹폭을 지원받았으나, 북한군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9월 21일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영등포 서북측(현재의 당산 방면)과 서남측(현재의 문래방면) 양 돌각을 향해 각각 호킨즈와 사타의 양 대대가 공격을 진행하였으나 별로 진전이 없었다. 호킨즈 대대는 안양천을 건너지도 못했으며, 사타대대는 영등포 남쪽 고지에서 받는 포격으로 인해 안양천을 건너는 데만 85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러나 시가 중심부에서는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1선 독려를 돌고 있던 호킨즈 중령이 영등포 적진지를 상세히 정찰해 보았더니 북한군은 시가 중앙부(현재의 영등포 로터리)에는 거의 배치가 되어있지 않았다. 호킨즈 중령은 예비의 에이블중대로 하여금 그 틈을 찌르게 하였다. 에이블중대는 돌격태세를 갖추어 쏜살같이 영등포 중앙부를 향해 돌진하였는데, 그동안 한 발의 총격도 입지 않았으며 또 시내에는 한 사람의 북한병사도 없었다. 중대의 좌우후방에서는 격심한 총포성이 나고 있는 반면 영등포 시가는 죽음의 거리처럼 조용하여 오히려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고 한다.

바로 중대는 시가 중심부를 향해서 전진, 약 600미터 정도 진입하여 중앙 십자로(현재의 영등포구청 사거리)에 다다른다. 그러나 아군, 적군, 민간인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고 좌우후방의 총포성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호킨즈 대대장은 "개의치 말고 계속 진격하라"고 명령하였고, 중대장은 잠시 북한군의 함정이 아닐까 의심하였으나, 명령이 있기에 동쪽으로 계속 밀고 나갔다. 중대는 서울 방면에서 구보로 증원해 온 수십 명의 북한 병사를 매복하여 기다렸다가 괴멸해버린 후 정오 경에는 시가의 동쪽 끝에 진출한다. 그곳에는 경부국도가 동서로 뻗어있었으며, 중대는 이 도로제방에 진지를 구축했다. 남쪽으로는 영등포 시가 중심부, 북쪽으로는 여의도가 내려다보이는 이 곳에서 진지공사를 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이 있을까 조마해하며 기다렸으나 그들은 시가지 양단의 전투에 몰두하여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

오후 늦게 북한군 소부대가 정찰적 공격을 해왔으나 어렵지 않게 격퇴했으며, 이때 진지 남쪽 300미터 정도에 있었던 북한군 탄약고를 폭파해버렸다. 저녁 무렵에는 5량의 T-34전차가 시가 중앙 쪽에서 나타나 진지에 공격을 가했으나, 이 때 나머지 보병들은 개인호에 엄폐하고 바주카병들만 응전하여 2량을 완파, 2량을 반파시켜 격퇴한다.

밤부터는 북한군의 야습이 개시된다. 총 4차례에 걸친 야습이 있었으나 그 때마다 중대는 화력을 집중하여 격퇴했으며 특히 4회째에는 진지 앞 10미터 정도까지 유인한 뒤 일제사격을 가하여 북한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북한군이 민간인 가옥 뒤에 숨어 5회째의 야습을 준비하고 있을 때 웹 하사가 몰래 접근하여 훈시 중인 지휘관을 저격한다. 5차 야습은 함성을 지르는 것만으로 끝났다. 날이 밝고 보니 북한군은 퇴각하였으며 제방진지 앞에는 275구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미해병 제1연대는 그것으로 영등포 점령을 완료하였다. 한편 미 육군 제7사단 32연대는 영등포의 남쪽, 현재의 관악구/구로구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한다. 해병 제1연대는 여의도를 거쳐 한강을 도하한다.

2.6.2 서벽(西壁)전투

한편 경인국도의 북쪽을 담당한 미해병 제5연대는 한국해병 제1연대를 동반하고 있었다. 이들은 9월 18일 김포비행장을 확보하였고, 이후 행주나루를 거쳐 9월 20일에는 북한군이 농성하던 행주산성을 점령하고, 진지를 구축한다.

해병 제5연대와 한국해병 제1연대가 모래내(홍제천 일대)에 진출한 것은 9월 21일 저녁. 이 떄만 해도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다음 날이면 서울을 탈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무악재 산계. 높이 296미터의 안산[25]을 기점으로 남쪽으로 금화산(105m)[26], 노고산(105m)[27], 와우산(105m)[28] 일대로 이어지는 이 산계는 지금은 건물이 밀집하여 상상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60~100m 정도의 산맥과 계곡이 구파발부터 한남동에 이르기까지 한강과 수직으로 수없이 연이어 있는 지형이기 때문에 북한군의 자연요새 노릇을 하고 있었다. 미군은 금화산, 노고산, 와우산을 각각 105북고지, 105중고지, 105남고지라고 불렀다. 이 구간의 지형의 험준함과 무자비함은 오늘날에도 서울 버스 740 강북 구간 시승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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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부터 일본군은 이 곳에 군사연습용의 각종 토치카, 교통호, 개인호 등을 구축하여 훈련하였고,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인민군은 서울시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동원하여 서울 주위의 산들과 시가지 안에 진지구축을 개시했다.

이때 무악산 일대를 방어한 북한군 부대는 독립 제25여단과 독립 제78연대였다. 제25여단은 낙동강전투에 파견되기 위해 훈련을 받던 중 급거에 서울 방어명령을 받고 배치된 부대로, 총원은 약2500명이었으며 보병 2개대대, 중기관총 4개대대, 공병 1개대대, 76mm 카농포 1개대대, 120mm 박격포 1개대대를 기간으로 한 특이한 편제였고 방어전문 부대였다.

9월 22일 아침 미 해병 제5연대가 서울 서벽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으며, 제1대대가 105남고지를, 제3대대가 안산에서 105북고지까지를 맡고 한국 해병 제1,2 대대가 연희104고지를 맡았다. 여기에 인천의 항모에서 출격한 F4U 콜세어가 공중지원을 하여 일대에서는 혈투가 벌어졌다. 그 날 미 해병 제3대대는 가까스로 안산 산정을 점령하였으나 금화산에는 접근하지 못하였고, 한국해병대는 연희산을 탈취하지 못하였다. 미 해병 제1대대는 오후 5시 30분에 와우산 고지를 탈취하지만, 다음날 낮 북한군의 결사적 반격으로 다시 빼앗기고 만다. 24일에는 한국해병대가 연희104고지와 능선일대를 점령한다.

전쟁 후반의 고지전의 예고편격인 이 전투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은 25일 미군 지원부대가 한강을 건너 서울 남쪽을 압박하면서부터. 미 육군 7사단 32연대는 앞서 구로,관악 일대를 평정한 후 사평리(현재의 서초구 잠원동 일대)까지 진출하였다가, 서울탈환작전에 참가하라는 알몬드 소장의 명령에 따라 한국군 17연대와 함께 25일 새벽 서빙고 나루를 건너 오후에는 남산장충단 일대를 점령하였다. 철옹성같은 서벽에 비해 남벽의 수비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영등포를 점령한 미 해병 제1연대도 25일 아침 밤섬을 거쳐 서강나루에 상륙하였다. 병력의 증원과 수비분산에 따라 고지들이 하나씩 점령되었다.

25일 오후에는 새벽에 거의 허물어졌다. 이 때 북한군의 패주를 결정적으로 만든 것이 M4 셔먼전차의 개량형 전차들. 화염방사전차들이 북한군의 토치카들을 생지옥으로 만들었고, 불도저 전차는 아예 참호를 생매장시켜 버렸다. 이는 미군이 태평양 전쟁의 전훈을 십분 활용한 것. 25일 저녁 무렵에 한미 해병대는 마포 전차종점과 용산역을 거쳐 삼각지 근처에 당도한다.

2.6.3 서울 시가전

9월 26일 아침, 남산을 점령한 미 육군 32연대는 계속해서 흥인지문, 낙산 일대를 점령해 나갔고 한국군 제17연대는 훨씬 더 동쪽으로 가서 용마산 고지 일대의 북한군 기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서울 시가지 안의 탈환작전은 미해병 제1사단이 담당했는데, 제1연대는 삼각지에서 서울역-서울특별시청 방면, 한국 해병 제1,2연대는 서울역에서 갈려 남대문시장-한국은행-소공동 방면으로, 미 제5연대는 금화산을 넘어 서대문형무소-독립문-서대문네거리-광화문-세종로 방면으로 진격하기로 한다.본격 3호선 레이스 제7연대는 사직동 뒷산을 넘어 경복궁중앙청 방향으로 직행한다. 해병들은 위에서 말한 줄기 격인 도로만 따라 선(線)의 전진을 한 것이 아니라, 가지에 해당하는 대로 주변의 골목을 다 소탕하고 주요한 거점은 점령하는 면[面]적인 점령을 해가면서 부채살 같은 형태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때의 시가전은 바리케이드전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앞서 말한 와 같이 북한군은 서울시민을 동원하여 주요 도로 요충지에 2-300미터의 간격으로 전진 방해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 흙을 담은 가마니를 주로하고 돌과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 올려 만든 이 바리케이드 주변에는 적의 지뢰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길 양쪽의 2,3층짜리 건물을 토치카로 해서 박격포와 기관총, 저격수를 깔아두었으니 접근이 매우 곤란했다.

이에 대응하여 미 해병이 창안해낸 방법은, 먼저 전차와 보병이 바리케이드 주변의 저격수와 기관총을 무력화시키면 공병들이 뛰어 들어 지뢰를 제거하고 그 후에 전차가 바리케이드를 깔아뭉개서 진격로를 여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바리케이드 하나를 돌파하는데 평균 1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이렇게 천천히 한미 연합군은 서울을 점령해 나가서, 26일 밤에는 서울 시가지의 절반을 점령했고 그 다음날에는 서울에서 완전히 북한군을 몰아낸다.

9월 27일에는 중앙청을 탈환하고 태극기를 게양하는 데 성공했고,[29] 27일 밤 서울 일대의 인민군이 전부 후퇴하면서 인천 상륙작전은 막을 내린다. 이 기간 전체를 통틀어 유엔군이 입은 피해는 전사 500여 명과 부상 2,000여 명. 그 대가로 1만 5천여 명을 사살하고 포로 6천여 명을 획득했다.

이틀 뒤 손원일 소장은 서울시에 국군 최선임자로서 공식 포고문을 발표했다. 포고문은 백지에 붓으로 쓰여져 시내 곳곳에 붙었다.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일 당시의 작은 에피소드. 당시 전투에 참여한 한국 해병대에는 훈련소가 있는 제주도 출신 장병[30]들이 많았다. 이들은 처음 서울 시내에 와서 시가지나 노면전차 등을 매우 신기해하며 구경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유엔군에선 '전투 중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매우 용맹한 군인들'이라고 오해(?)했단다.

2.7 낙동강 전선의 반격

인천 상륙작전의 시기에 맞추어 낙동강 전선 일대에서도 대대적인 반격 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북한군의 두 배가 넘는 병력을 유엔군이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은 지지부진한 성과만 보였는데, 9월 20일 무렵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이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에게 알려지자 북한군은 붕괴되고 말았다. 한반도의 서부가 유엔군에게 장악당했으므로 보급선을 동쪽으로 이동시켜야 했는데, 이는 백두대간의 험산준령 때문에 거의 불가능했다.[31] 어떤 전쟁이라도 최전선 전투부대의 보급선을 끊으면 승리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낙동강 전선 일대의 북한군 병력들은 2만이 넘는 정도의 병력만이 제대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군중 만이천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고, 만 명이 좀 넘는 정도의 병력은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되었으며, 낙동강 일대의 북한군 병력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남한 내에서 강제징집된 인원들은 도망쳐서 원래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상당수가 대한민국 정부의 징집영장 크리를 맞고 다시 군대엘 갔다

이 작전으로 북한군이 입은 타격은 그냥 '전멸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 뒤는 쭉쭉 밀려날 수 밖에.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은 파죽지세로 저멀리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된다. 뭐 이후 상황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안드로메다지만.

3 재평가?

1990년대 이후 현대 군사학자들은 인천 상륙작전 자체는 흠이 없었지만 이후 대응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인천-서울 라인. 즉 한반도의 서부를 장악한 후, 바로 기동병력을 동쪽으로 보내 한반도의 허리를 장악했어야 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면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장악해 당시 북한군의 주력을 싸그리 포위 섬멸할 수 있었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인천을 점령한 후 바로 병력을 다시 배에 태워 원산 상륙작전을 계획했으나 그 과정에 시간이 너무 걸려 오히려 국군 기동병력이 원산시에 더 빨리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군의 진격이 적군의 후퇴보다 더 빠를 리가 없으니, 이는 상당수의 북한군이 백두대간을 넘어 후퇴 후 재편성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것이 전쟁을 종결 짓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최소한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다.

여기서 반론이 있다. 일본에서 저술된 한국전쟁에 따르면 유엔군의 청천강 전투의 결정적인 패배 원인을 이 원산 상륙으로 꼽는다. 여기서 언급한 바로는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 비해서 경력과 학업성적 그리고 1920년도에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아주 고참이였다. 맥아더가 육참총장을 할 때 아이젠하워 장군이 부관이였다. 그 정도로 차이가 났지만 2차대전 중에 맥아더는 필리핀 철수를 하였고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아이젠하워 장군은 유럽전선 총사령관으로서 대규모 병력을 지휘하였고 이러한 사실에 맥아더는 약간의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후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게된 맥아더는 실제 10군단을 미8군에 배속시키지 않고 직할부대로서 2개의 군을 지휘하는 고집을 부렸고 이에 따라 백두대간을 기점으로 전선을 나누어 10군단을 원산 상륙 후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하게 명령했다. 여기서 원산 상륙을 고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때까지 미국 정부와 유엔군의 작전목적은 38선의 회복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북으로 진격도 안되었고 차량이동이 기본인 10군단이 동쪽으로 진격해도 애매한 상황이였다. 이왕 병력은 빠져나와야하고 도로는 엉망인데 북한군은 괴멸되지 않았을 거고 평양도 사수할 거니까 원산으로 상륙해서 평양을 치자 이것이 맥아더의 주장이였다. 하지만 미 태평양 사령부에 속하는 모든 배를 동원해서 원산상륙을 시도 했지만 서울에서 병력을 다시 인천으로 빼서 다시 장비를 하역하고 병력을 탑승시킨 후 원산으로 갔지만 그전에 미리 벌써 한국군 3사단이 점령을 하였고 이 병력들은 행정상륙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갑자기 아주 큰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미 원산 앞 바다는 기뢰천지가 되어있었고 소해병력은 일본 소해정까지 다 끌고 와서도 한 달 이상을 소해 해야했고 모든 수송선은 여기서 열중쉬어 하게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여서 유엔군 참모부는 반대했지만 맥아더가 원산상륙을 결정하는 것을 감히 막지 못했다고한다. 만약에 이러한 미 10군단 병력이 뒤로 돌아서 인천으로 돌아가지 않고 태백산맥을 넘어가지는 못하더라도 경춘가도를 따라 춘천으로 진격했으면 그만큼 인천상륙작전의 성과가 더 나왔을 거라고 판단되었고 원산상륙의 보급상의 문제로 반대했지만 맥아더는 북한군이 그렇게 빨리 후퇴할지를 생각하지 못한 결정적인 판단미스였다. 이때 참모진의 원산상륙의 가장 큰 반대 이유는 탄약보급선의 문제였는데 인천항과 김포공항, 경부철도로 보급선을 유지하게되는 유엔군 입장에서 부분 파손된 김포공항과 철도가 중간중간에 끊겨서 긴급복구를 했지만 아주 서행 운전해야하며 중간중간에 잔류 북한군의 습격으로 보급선 유지가 힘든 입장에서 인천항은 유엔군의 생명줄이였다. 하지만 이 원산 상륙에 의해서 탄약 재고량이 2일치로 간당간당하게 되고 원산 상륙 후에도 이 탄약재고량은 겨우 예비분 2일치를 유지하는 상황이 청천강 유역에 유엔군이 도착한 시점의 일이다. 이때 충분한 탄약 재고량이 있었다면 평양도 포기 하지 않았을 것이고 청천강 패전 후에 임진강 유역까지 밀려나지 않았다. 평양 철수의 제일 큰 이유가 중공군을 파악하지 못한 것도 못한 것이지만 보급량의 부족으로 미군의 강점인 화력을 쏟아 붓지 못하는 상황이 가장 큰 이유이다. 대동강 방어선 그러니깐 평양-원산선은 한반도에서 가장 종심이 좁은 지역으로서 충분한 화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방어가 가능했을것이지만 여기서 이 보급선의 문제로 대동강 방어선을 방어하지도 않고 급하게 포기하게 된 것이다. 여튼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까지는 명장 소리를 들을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지만 그 후의 북한군 잔존세력의 전력을 과대 파악 하는 바람에 잘못끼운 단추는 계속 잘못 끼우게 되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 원산상륙을 위해서 춘천으로 급하게 진격을 안하고 10군단을 회군시킨 것은 결정적인 실수다.
2 원산상륙으로 결국 지금의 휴전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이 원산상륙이 없었다면 대동강선으로 휴전선이 그여졌을 확률도 있다.
3 만약에 춘천으로 진격했다고 하더라도 교통 때문에 더 이상 가지를 못했고 그 당시 경부가도 말고는 장비를 가지고 후퇴할 수 없었으며 춘천으로 진격했다고 하더라도 패잔병 몇 명을 더 잡을 정도지 한반도를 횡으로 진격한 것은 전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특히 북한군은 잔존 빨치산의 안내를 받아 태백산맥을 따라 장비를 버리고 총만 들고 북으로 올라갔고 그 당시 우리나라 형편상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엇다.
4. 그때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의 괴멸적인 타격을 준상황이였고 오히려 그 피해상황을 적게 판단하였기 때문에 엉뚱한 원산 상륙작전이 계획되었고 삽질작전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5 인천 상륙작전은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작전이였다. 하지만 너무 작전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이후로 판단미스가 되어서 이런 상황이 되었다.
6 중공군들은 10월 10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자마자 압록강과 두만강변에 대기하고 있으면서 넘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공군 개입 전이라는 것은 엉터리다.
7 주은래의 참전선언으로 긴가 민가한 트루먼 대통령이 북진명령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

일단 군사학자들의 의견 중 일부는 타당하다. 김일성이 서울에 병력을 집결시키기도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빨리 서울로 진격했으면 서울 시가전이 그렇게 치열하지 않을 수 있으며, 원산 상륙작전의 경우 효용성 자체도 문제가 있고, 꼭 하더라도 이미 상륙한 부대를 다시 인천항에 집결시켜서 다시 배에 탑승시킨 다음, 동해안까지 빙 돌아서 항해한 다음에 상륙하는 시간낭비를 하지 말고 별도의 부대를 빨리 보내는 편이 바람직했다.

하지만 군사학자들의 의견에는 한 가지 큰 문제점이 있는데, 당시의 강원도백두대간의 험준함과 교통시설 미비를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도 강원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교통시설이 미흡하며, 특히 대량의 물자를 육로로 운송할 수 있는 철도 시설은 21세기의 시점에서도 그다지 좋지 않다. 특히 서울에서 정동쪽 방향으로 진격할 경우, 경기도 경계를 넘어서부터는 도로라고 이름 붙이기도 뭐한 험준한 비포장도로를 이용해야 하며, 지독한 산악지대를 횡단해야 동해안에 이르게 된다. 애초에 서울 탈환 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서 수원 방면을 맡은 부대의 일부가 서울 남쪽에서 한강을 도하해서 남산을 점령하고 시가전을 지원한 사실이 있을 정도였는데, 소수의 기동부대가 험준한 산골짜기를 횡단한다고 하면 적의 저항이 없다고 해도 속도도 느리며, 포위망을 구축했다고 해도 간신히 길만 막은 상태라 능선을 따라 도주하는 북한군을 완전히 포위섬멸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이는 북진 작전에서 이미 산악지대에 아군이 맹진격하고 있었으나, 금천에 포위된 북한군이 장비를 버리고 인원만 탈출한 것을 막지 못한 것으로 이미 증명된다. 게다가 북한군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므로 재수 없으면 기동부대가 역습받아서 괴멸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산악전의 쓰라림은 국군이나 UN군이 엄청나게 겪은 일이다.

결론은 좋은 것을 알면서도 능력이 못 따라가서 시행하지 못한 것이다.[32]

인천상륙작전의 승전 표현을 문제삼는 무리들이 있다. 2005년 9월 23일 맥아더 동상 철거 문제로 시끄러웠을 때 SBS 시시비비에 출연한 철거 찬성자들은 맥아더는 인천 상륙작전의 패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왜 패전이냐는 물음에 "인천에서 상륙했지만 인민군은 압록강까지 질서정연하게 다 철수했다. 따라서 실패한 작전이다."라고 대답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 작자들은 "인천상륙작전이란 것이 자체가 야비한 것이다. 북한군 본대가 낙동강에 내려와 있었는데, 맥아더가 북한군 후방인 인천을 쳤다. 비겁한 작전이다."라고 주장했다.(...) 송양지인? 보다시피 그냥 개소리이다. 애초에 전쟁에서 비겁한 작전 같은 것은 전쟁범죄가 아닌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 통일부 장관이자 제 16대 경기도 교육감 이재정은 2013년 10월 2일 10·4 남북정상선언 6주년 기념 참여네트워크 초청 강연회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중공군이 개입했고 분단이 고착화 됐다는 뉘양스의 강연을 해 논란을 일으키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4 북한의 인식

북한에서 자주 언급되는 헛소리 중 하나로, 인천 상륙작전은 사실인즉 9월 13일에 시작되었고 사흘 동안 월미도에서 해군 병력으로 구성된 수비대가 안전한 철수를 위해 처절하게 싸워서 미 연합함대(응?)[33]의 군함 144척을 침몰시키고 수십만 미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고 옥쇄했으며 맥아더가 패배를 덮고자 9월 15일로 날짜를 조작했다는 정신나간 이야기가 있다. 정신승리의 극치. 그나마 양심은 있는지 어뢰정을 이끌고 연합군 함대를 아작냈다는 개소린는 안 한다. 그래봤자 일본놈들 극우 가공전기만큼이나 질이 나쁜 건 변하지 않지만. 실상 월미도의 해군 육전대는 개전 당일 한미 해병대에 의해 단 두 시간 만에 반도 넘는 190명이 전사(진지에 숨어 저항하다 불도저를 동원해 진지를 파묻어 버리는 바람에 생매장당한 인원도 상당수 있다.엥?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거 아니냐?)하고 나머지는 포로가 되어 전멸했다. 월미도 수비대가 이러면서 거둔 전과는 아군 사살 1명(팀킬). 게다가 북한쪽 기록에는 일본 해군도 참전했다고 되어 있지만 이건 사실무근으로, 구 일본 해군의 소해정들이 원산 등지의 기뢰 제거에 투입되어 1척이 기뢰에 접촉해 가라앉고 승조원 1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여담으로 원산소해작전에 구 일본 해군이 투입되는것에 말이 많았지만 원산은 기뢰밭이였고 이 당시 미 해군의 소해정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으며, 그러면 미 본토나 유럽에서 소해정들이 증원을 와야하는데 함정의 크기상 장거리 항해와 빠른 항해가 불가능한 점 등으로 강행되었다. 인천에서 작전하진 않았다는 것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답이 없다.

여기서 해군 전투라면서 해군 군함이 안 나오고 해안포 부대가 주역으로 나오는 것을 궁금하게 여길 수 있는데, 이는 북한 해군의 함선 전력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원래 6.25 개전 당시 북한 해군은 어뢰정 4척 등 고속정과 상륙정 몇 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개전 초 어뢰정 두 척을 UN 해군에게 상실한 뒤로 수상전을 사실상 접고, 위장어선을 이용한 기뢰 부설 정도의 임무만 종전 시까지 수행했다. 따라서 아무리 정신승리를 하려고 해도 어뢰정 가지고 대형 군함을 잡았네 식의 막장을 쓰기는 어려워서 해안포 부대가 작품의 주역이 된 것이다.[34] 참고로 북이 한동안 NLL에 대해 아무 소리도 안 했던 것도 해군력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해군이 씨가 말라서 어차피 바다 지키는 건 포기해야 하는데 알아서 넘어오지 않겠다 하니 이 얼마나 고마운 소리인가?

그런 이유로 북한에서는 월미도 승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황건의 불타는 섬이라는 대하소설이 바로 이 월미도 승전을 다루고 있으며 영화 월미도[35] 역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ZiS-3 야포와 자돌폭뢰(…)로 미국 신형 구축함을 격침시키는 장면이 압권으로 북한의 정신승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알수 있는 작품. 해당 신형 구축함은 기어링급 구축함으로 추정되는데, 구축함이 포탄과 연료가 모두 바닥나(…) 멈춰있지 않은 이상은 76㎜ 구경의 소구경 야포로는 못 잡는다. 몇 발을 맞춰도 구축함은 큰 피해가 없고 오히려 야포만 함포에 걸려 박살나는 일이 보통인데, 그런 상식은 씹어먹고 만들어졌으니 정신승리 소리를 듣는 것이다. 게다가 야포탄 한 발만 맞아도 구축함이 폭발해 가라앉는다. 더 놀라운 것은 최초로 찍은 판이 수령에게 충성하는 모습이 안 나오고 전투 장면에만 치중했다는 이유로 전부 다시 찍었다고 한다. 원작격인 불타는 섬도 주체사상 정립 후 개작했었던 걸 보면….

탈북자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북한의 선전만 믿고 '월미도의 영웅'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월미도를 방문했다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충격과 배신감을 느끼고 더욱 북쪽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대다수 북한 사람들은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월미도에서 미제놈들에게 한방 먹이지 않았는가 하고 자위하고 있다고. 그래서 자유북한방송을 통해 '환상 깨쇼'하고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을 북한이 언제 예측했는지에 대해서 북한의 공식기록은 김일성의 뛰어난 예지력(...)으로 개전 3일차에 이미 인천상륙이 있을 것을 알고 대비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울고가겠네문제는 박헌영 일당이 미제 간첩인지라 고의로 작전기동을 방해해서 안타깝게 사전대비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박헌영이 어떤 식으로 방해할지는 예지 못한 반쪽짜리 예지력이 돋보인다.(...) 북한의 우상화와 역사왜곡이 어느 수준인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서술이다.

5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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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이면에 있는 민간인 희생 성찰해야"
전쟁의 흐름을 바꾼 인천상륙작전 - 전쟁기념관
인천상륙작전, '승전'과 '희생'의 양면
월미도 미군폭격 피해주민들, 정부 등 상대 소송
미군 ‘월미도 폭격’ 인천상륙작전의 상처는 계속되고 있는데 전승기념 불꽃축제 논란
월미도 미군 폭격 진상 규명법, 3년째 국회서 낮잠

적어도 나무위키에는 지금까지 적혀있지 않았지만 인천상륙작전 직전 실시된 미군의 폭격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있었다. 미군의 폭격은 상륙작전을 염두에 둔 전략적이었지만 무차별적인 포격이었으며 민간인 거주지를 집중적으로 노렸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실시된 미국의 월미도 네이팜탄 폭격 당시[36] 100여 명이 넘는 지역 주민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37]

이때 죽은 사람들과 폭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국가로부터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하고 타지로 쫓겨났기에 인천상륙작전을 주도한 미군과 한국군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좋지 않다. 이후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합의해 피해 보상과 귀향 조치를 취했다지만 그 보상이라는 것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 결과 가구당 300만 원이란 웃지 못할 보상금 액수를 책정한 것. 때문에 피해자들은 <인천상륙작전 ㅇㅇ주년 전승 기념식>에 대한 반응 역시 죽음의 전쟁을 즐기는 몰상식한 축제라고 비판할 만큼 부정적이다.

민간인 거주지에 대한 폭격과 포격이 당시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란 변명도 있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제네바 협약에는 1949년 "전시에 있어서의 민간인의 보호에 관한 내용"을 채택했으며, 미국은 제네바 협약 비준국가였다. 미군은 민간인 피해를 줄이려는 대책조차 세우지 않았기에 월미도 폭격은 당시에도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었다. 지금까지도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과 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당화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들 민간인들은 적성국가도 아니고 한국 국민이다.

이미 진실화해위원회는 미군이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 폭격한 것은 국제법 등에 위반된 작전이라며, 한국과 미국 정부가 협의해 희생자와 쫓겨난 피해 주민들에 합당한 피해 보상과 귀향 대책을 취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

5.1 반론

당시 북한군의 전력배치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상당수가 시가지에 배치되어있었다. 사실 이러한 배치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가지 배치병력에 대응할만한 최적의 전략은 일단 포격과 폭격(특히 네이팜탄이 효과적.)으로 건물을 싸그리 부셔버리고, 보전합동전술에 의한 보병과 기갑부대를 투입하는게 가장 좋다. 실제로 이라크 전에서 팔루자 전투바그다드 전투도 이와 비슷한 형태로 진행되었고[38], 스탈린 그라드에서도 독일군이 소련군의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 Ju-87등을 동원해 폭격을 실행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시에 인천 시가지를 잘 넘어가려면 이 방법말고는 없었다. 일단 북한군의 병력이 적다곤 하나 시가전의 특성상 한번 발목잡히면 후에 있을 작전들이 무기한 연기돼 버리고, 그 동안 잔존 북한군에게 지원이라도 도착하면 답이 없다. 그렇다고 위에서 말한 기본적인 조치라는 것을 해서 민간인뿐만 아닌 북한군들한테 극비작전사항에 대해 전부 까발릴수도 없는터라 결과적으론 유엔군은 이를 무시하고 폭격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때부터 그래왔지만 상륙지점에 살고있는 민간인들같은 경우, 피해를 예방하기란 불가능하다. 여기에 상륙할테니 대피하라고 하면 당연히 적군도 알게되어 상륙에 대비할테고, 이러면 오히려 전선이 고착화됨에 따라 지원선이 존재하는 후방지역에 폭격이 가해져 민간인 피해만 심화된다.

하지만 물론 전쟁과는 반대로 이에 상응하는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건 정부측 책임이 크다. 상황이 어찌됐든 죽은 민간인들 입장에서 보면 맑은 하늘에 날벼락 같은 상황이라서, 이에 관해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함은 틀림없다.

6 기타

태평양 전쟁 당시 여러 상륙작전을 벌였던 맥아더가 그런 상륙작전을 다시 한국전쟁에서 써먹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 해군의 이오지마급 강습상륙함의 마지막 함정인 LPH-12는 인천 상륙작전에서 이름을 따와서 USS Inchon으로 이름지어졌다. 이 함정은 1995년 3월에 기뢰전 지휘함으로 개수되었다. 이후 2002년 6월 21일 퇴역하였다.

그리고 작전을 참관하던 당시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작전중에 실종된 사건이 있었는데, 한국 해병대원들과 함께 상륙해 서울 해방까지 함께했으며 덕분에 손원일 제독은 서울 탈환 직후 자신의 이름으로 포고령을 발표하는 영광을 누렸다.

7 관련 매체

  • 오! 인천 - 통일교 희대의 괴작 영화.
  • 돌아오지 않는 해병 - 시작 부분에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상당히 다르긴 하지만 역시 인천 상륙작전을 담고 있다.
  • 인천상륙작전(웹툰) - 만화 미생으로 유명한 윤태호 작가가 매주 연재했다.링크 인천 상륙작전만 바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일본 패망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과정과 인천 상륙작전까지의 한국전쟁 초반의 전개 과정을 그리고 있다.[39]
  • 인천상륙작전(영화) - 현 상영 중인 영화. 문서 참조

8 외부 링크

  • 네이버 웹툰 기사도의 작가로 잘 알려진 환쟁이의 블로그에 가 보면 인천 상륙작전이 관한 만화가 올라 와 있다.(#) 6.25 60주년 기념으로 연재한 만화중 인천 상륙작전에 대한 부분인데 상당히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1. 인천광역시.
  2.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 겸 UN군 총사령관
  3. 미 해군 제7합동기동부대 사령관 겸 제7함대사령관
  4. 미 육군 제10군단 군단장
  5. 미 해병대 제1사단 사단장
  6. USNS 1st LT. Baldomero Lopez, T-AK-3010, 말 그대로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함이다.(#)
  7. 이 코드네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당시 인천 상륙작전은 보안이 굉장히 중요한 작전이었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뱀발로 크로마이트는 크롬 광석을 의미한다.
  8. 이에 비해 국군은 UN군의 참전 덕분에 동수 이상의 병력을 확보하고서 낙동강 전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9. 중요한 점은 이는 미국 국방부 내에서도 충분이 준비하고 있는 작전이라는 것이다. 맥아더가 혼자 만들어낸 작전이 아니다. 잊혀진 전쟁이라는 책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맥아더는 노르망디 이후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 노르망디처럼 인천상륙작전도 잘 될 거라 믿었으나 성공할 확률은 정말 극소수여서 미국 국방부와 대통령도 반대하였으나 이는 영향력이 없었고 맥아더는 작전을 감행했다고 한다. 사실 그 당시 맥아더는 정치적으로도 대통령과의 대립이있었기 때문에 더욱 허락을 안해줄 수밖에...
  10. 미 10군단은 맥아더가 인천 상륙작전을 위해 육군, 해군, 해병대로 구성된 혼성군단이다. 그야말로 주문제작된 군단.
  11. 소장이라도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미8군 사령관이 중장인 워커 장군인 관계로 소장들 중 기수가 높은 알몬드 장군을 뽑아 군단장에 임명했다. 1군단장 9군단장도 소장 계급이였다.이것은 사단 군단 야전군 집단군체계를 가지고 있는 미군으로 군단의 장은 소장 고참이나 중장 초임이 임명된다.
  12. 그런데 맥아더의 참모장을 맡다가 10군단장을 겸직하게 됐다.
  13. 8월경 북한군 12사단 766부대를 궤멸시키고 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인천 상륙작전 참가를 위해 본인의 요구로 연대장을 맡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때가 리즈시절이였다. 예편 후 그 유명한 인천막장사학재단의 주역이였으니...자세한 내용은 백선엽을 참고하기 바란다.
  14. 가수 진미령의 아버지인 그의 업적은 그의 소속부대(HID) 특성상 국내외에서 알려지지 않다가, 미 육군 제2보병사단 부지에 김동석 기념관을 건립하면서 한국전쟁 4대 영웅에 추대되어 뒤늦게 대중에게 알려졌다.#
  15. 정확히는 마오쩌둥은 남포, 원산, 군산 중 하나라고 예상했고, 저우언라이가 인천이 상륙지점일 것 같다는 예상을 했다고 한다. 물론 맞은 것은 저우언라이었다.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롬멜이 떠오른다
  16.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기록을 보면, UN군과 국군이 인민군과의 교전 끝에 적 수병항공병 등을 사살 혹은 생포했다는 내용이 여럿 나온다.
  17. 현재의 만석동 대한제분공장 일대
  18. 현재의 용현동 낙섬사거리. 지금은 인천항 매립으로 인해 내륙이 되어버렸다.
  19. 미국 225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네덜란드 1척, 프랑스 1척, 대한민국 15척
  20. [1]
  21. 이때까지 미군의 사상자는 부상자 17명. 북한군 사망자 108명, 북한군 부상자 137명.
  22. 주정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구체화된 개념으로, 각 주정조는 장교 또는 부사관의 지휘를 받는 임무 지향적 조직이다. 중대 화기소대와 대대 돌격소대로부터 기관총과 3.5인치 바주카포, 화염방사기 등을 배속받아 화력을 보강하고, 주정조 단위로 싸우며 내륙으로 진격하다가, 상황이 안정되면 원 분대 및 소대로 복귀한다.
  23. 첫 도입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먼저 썼다.
  24. 서울 시가지의 팽창으로 완전하게 서울의 일부가 되어버린 지금과 달리, 당시 영등포는 서울 중심부와는 산과 밭으로 동떨어진 별개의 시가지를 구성하고 있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등포 토박이들은 서울과 영등포를 구분하는 독자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25. 연세대학교 뒤편에 인접
  26. 이화여대 정문을 지나 나오는 금화터널이 있는 산
  27. 현재 서강대 뒤편에 위치
  28. 현재 홍익대 동편에 인접
  29. 당시 작전 계획상 유엔군이 중앙청을 점령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당일 새벽 3시, 박정모 해병소위가 이끄는 대한민국 해병대 제2대대 6중대 1소대의 양병수 이등병조·김칠용 견습해병·최국방 견습해병 넷이 명령을 어기고 중앙청으로 진입, 새벽 6시 10분에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태극기를 게양한다. 이는 미 해병이 서울시가지 내의 빌딩을 점령할 때마다 성조기를 달았는데, 일제 지배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시 시점에서는 다른 나라 국기가 우리나라 정부청사에 게양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종군기자 박성환에 의해 촬영되었다.
  30. 제주도 출신이 많은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4.3 사건으로 제주도에서 학살이 벌어진 뒤, 제주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빨갱이' 혐의를 벗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해병대에 입대한 사례가 많았다.
  31. 억지로 , 사람 등에 지우고 보급을 할 수야 있었겠지만. 사람이고 우마고 죄다 낙동강 전선에 동원한데다가 차라리 그 인력을 전력으로 쓰는 게 나았을 것이다.
  32. 여담으로, WRD, 즉 워게임 레드 드레곤의 캠페인 중 하나인 인천 상륙작전의 완벽한 클리어 조건은 위에 나오는 것처럼 5턴, 즉 5일 안에 동해안까지 진격하는 것이다.워프하란 것이냐?
  33. 다 알겠지만 일본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망하면서 군대가 해산되었다
  34. 근데 개전 초에 어뢰정이 미 해군 순양함 USS 볼티모어 함을 격침시켰다는 구라는 치고 있다. 참고로 그 순양함은 한국전쟁에 참전은 커녕 미국 본토에 있었다(…). 일각에선 이들이 동해상에서 작전하던 소련 해군 태평양 함대의 순양함을 오인 공격(…)하고(소련 해군측에서 어뢰맞아 가라앉았다는 배가 있었단 얘길 안 하고 있는 걸로 보아 빗나간 듯하다.) 나서 거짓 보고를 한 것이라 여긴다.
  35. 북의 대남 선전 사이트에서 올린 것이나, 체제 찬양이나 이적 행위 목적이 없는 단순 감상은 처벌 사유가 아니다. 안심하고 보고 실컷 비웃어 주자.
  36. 9월 10일 미국 함공모함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이 월미도 동부에 95개나 되는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37. #
  38. 물론 네이팜탄은 쓰지않았다는점은 차이.
  39. 2015년 부천만화대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