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음이의어는 팔랑크스(동음이의어) 참조.
1 개요
방패와 창을 든 다수의 병사를 고슴도치처럼 밀집대형으로 배치하여 근접전을 벌이며 적을 압박하는 전술이다. 대열이 흐트러졌을 때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어서 대열이 무너지면 곧 부대의 궤멸로 이어지기 때문에 빠른 걸음 이상의 속도는 거의 내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는 아예 움직이지 않고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기도 한다.
팔랑스라고 잘 알려졌으며, 팔랑크스를 구성하는 각 병사들을 팔랑기테스(Phalangites), 복수형은 팔랑기타이(Phalangitai)라고 한다. 영어식으로 Phalangist, Phalangists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2 전통 그리스식 팔랑크스
그리스 호플리타이(Hoplitai)의 팔랑크스. 긴 거리를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들과 붙기 직전 무게를 실어 짧은 거리를 돌진하는 모습이다.
기본적인 전투방식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큰 원형 방패를 일렬로 포개어 적들의 무기가 파고들 수 없을 정도로 두텁고 넓은 방패벽을 만들고, 오버핸드[1] 방식으로 든 창을 방패벽 너머로 적병들에게 내리꽂는 것. 방패가 커버하지 못하는 다리 쪽은 각반이 보호해주고, 방패 너머도 갑옷과 투구가 보호해주기 때문에 웬만해선 공략법이 없는 단단한 방어력을 자랑한다. 주로 고대 그리스의 주력 병력인 중무장한 호플리테스로 구성되며, 이후로도 보병 방진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다.단 후대에는 아래쪽의 마케도니아식에 인지도가 밀린다
기본적으로 대열을 유지하면서 방패로 자신과 옆 병사를 동시에 방어하는 것이 포인트. 그런데 정말로 방패로 옆 사람을 가드해주었느냐는 점에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설명은 그리스 도자기에 그려진 호플리타이의 싸움 방식을 통해 구성된 것인데, 모두들 알다시피 호플리테스 보병이 활동하던 기원전 4~5세기 그림은 구도고 원근법이고 그딴 거 없다. 게다가 호플리테스를 묘사한 조상(彫像)을 보면 정면을 바라보고 서는 게 아니라 측면을 보고 선 상태이다. 여기에 들고 있기만 해도 상반신이 다 가려지는 호플론의 크기는 현대인보다 훨씬 작았을 고대인의 체구를 생각하면 자신의 몸의 오른쪽 측면이 다 가려지지 않는다는 설명은 부족한 점이 있는 듯. 이후의 중세시대엔 호플론보다 작은 방패들고도 각개전투 잘만했다.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뒷 대열에서 잽싸게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 그래서 한 분대는 가로열이 아닌 세로열로 섰다. 교전이 맨 앞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뒷열의 병사도 적 진형을 무너뜨리고 아군을 전진시키기 위해 앞 사람을 민다. 맨 앞에 선 놈은 눌려죽지 않나? 아니 그보다 창으로 등 찔리지않아? 따라서 같은 팔랑크스끼리 정면 대결을 한다면 종심이 깊은 쪽이 더 강력하다. 대열에 구멍이 날 경우 자신 뿐만 아니라 하나의 팔랑크스 전체가 위험에 빠지기 때문에 이런 진형으로 전투를 치르려면 높은 규율이 필요했고, 따라서 그리스군의 훈련은 진형 유지에 집중되었다.
다른 폴리스들은 자기 생업에 종사하는 시민병으로써 1년에 십수일에서 30일 정도의 훈련을 받았을 뿐이지만, 스파르타는 스파르타 시민도 시민병이긴 하지만 이쪽은 시민보다 병사가 우선이다. 다른 폴리스 군인들이 진형 유지 훈련하느라 날 다 보내는 동안 이놈들은 진형 유지는 처음 몇 년만에 다 떼고 개인 무술이며 기동훈련이며 제식이며 심지어 '임무형 지휘체계'까지 훈련했다.
창을 들고 있는 오른쪽의 경우 방어를 전적으로 옆 병사의 방패에 의존해야 했기에 병사 간 신뢰도도 상당해야 했다. 하지만 역시 타인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지라 병사들은 오른쪽 병사의 방패로 몸을 자꾸 붙이려는 경향이 있었다. 거기에 접전이 붙으면 방패로 보호받는 오른쪽 병사는 전진하고, 왼쪽 병사는 물러서는 경향이 있어 전투가 오래 지속되면 각 전열의 오른쪽이 좀 돌출되고 왼쪽은 좀 물러서 있는다.
고대 그리스 시절의 전투력은 최강으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팔랑크스를 이루는 호플리테스는 전신을 방어구로 보호했는데, 페르시아 전쟁 시대에는 청동으로 된 흉갑들이 너무 무겁고 비싸서 비효율적인지라 소수 상류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대신 두꺼운 린넨 천으로 된 흉갑이 더 널리 쓰였는데, 어차피 방패의 지름이 1미터에 이르고 겉부분을 청동으로 보강했기 때문에 몸의 대부분을 가릴 수 있었다. 거기에 투구나 다리 보호대도 청동으로 만들었으므로 사실상 정면은 빈틈이 거의 없었다. 한편 린넨은 동방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반면 페르시아군은 귀족 기병이나 이모탈 같은 정예병들도 투구를 쓰고 몸통 갑옷만 입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나마 머리 대부분을 가리는 그리스식 투구와 달리 당시 페르시아의 원뿔형 투구는 머리 윗부분만 가렸다. 페르시아 정예 기병들이 마갑이나 전신 갑옷을 써서 호플리타이보다 더 중무장하기 시작한 것은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후의 일이다. 특히 다리 보호대가 없고, 방패는 화살 막이용이었는지라 페르시아 병사들이 아무리 용맹해도 장비의 차이를 극복할 수가 없었다. 이는 당시 오리엔트를 석권했던 페르시아군의 기본 전술이 다수의 경보병과 투사 무기를 동원하고 이를 기동성이 뛰어난 다수의 기병이 보조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스파르타 군인들이 거의 알몸으로 나오지만 영화 300의 무대였던 테르모퓔라이에서 압도적인 규모의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버틸 수 있던 이유는 이러한 무장의 차이, 그리고 그 무장의 차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형 때문이었다.
이러한 페르시아군에 대한 그리스의 팔랑크스의 우세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때에도 재확인되며,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드로스가 쳐들어올 때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가 맞붙은 이수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는 팔랑크스 대열과 페르시아 보병대의 사상자 비율이 1:20이네 1:30이네 뭐 그런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물론 그리스측의 주장이니 과장이 들어갔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강력한 전술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고대 전쟁은 대부분의 전사자가 전투중이 아니라 대열이 무너지는 순간과 승패가 갈린 후 패주하는 병사들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따라서 팔랑크스도 대열이 깨지지 않는다면 피해가 극히 적다. 비슷한 밀집방진인 로마의 레기온 역시 마찬가지로, 인정사정없이 밀렸다던 전투에서도 사상자가 수백 나오고 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일단 대형이 깨지면 사상자 규모는 하늘을 찌르게 된다.
다층으로 이루어진 이 대형은 전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파괴력을 가졌는데 반대로 기동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정교한 전술을 발휘할 여지가 적었고 심지어는 장군이나 장교들도 대열에 끼어서 그냥 묵묵히 전진했다고 한다. 팔랑크스에선 대대나 연대는 존재하지 않고 병사나 장교 할 것 없이 모두 한덩어리로 직사각형의 대열을 이루는 것이었다. 물론 편제가 존재하기는 했다. 편제상으로만. 20세기 중반까지 소대 단위 전술은 쓰일 여지가 거의 없었음에도 소대 편성이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단, 스파르타는 예외다. 얘들은 위 주석에서도 얘기했듯 요즘으로 치면 종합각개까지 했다(...). 단순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팔랑크스 대형끼리의 전투에서 복잡한 전술 기동이 가능한 유일무이한 군대.
그리고 이러한 대열은 빨리 움직이면 전열이 무너지므로 천천히 전진해야 했다. 그래도 빨리 걷는 속도 정도는 낼 수 있었지만 어쨌거나 팔랑크스의 기동성이 매우 떨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었고, 이것은 이 전술의 최대 약점이었다. 이 때문에 팔랑크스는 측면과 후방에 대한 공격에 상당히 취약했다.
거기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진의 통제가 굉장히 어렵다. 진격 방향의 변경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비어있는 오른쪽을 옆 병사의 방패가 보호하고 있다고는 해도, 본능적으로 오른쪽을 보호하기 위해 옆 병사의 방패쪽에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시키게 되었고, 그 결과 직선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전진하는 진이 된다는 것. 이 상태가 지속되면 팔랑크스의 파괴력 역시 살릴 수 없으며, 측면 혹은 후면을 공격당할 경우 진이 무너진다. 테베의 장군 에파미논다스는 이 점을 파고들어 진형을 사선으로 짜는 간단한 응용으로 상대편의 팔랑크스를 박살내는 전술을 만들었다. 하지만 레욱트라 전투에서 나타난 사선전술은 팔랑크스의 측면을 노리는게 아니라 한쪽에 부대를 집중시켜놓고 그쪽 부대를 질량으로 밀어버린 것에 가깝다(...). 여기에 기병도 좀 써주고(...).
원래 팔랑크스에서는 '오른쪽으로 도망치는' 현상 때문에 부대의 최우익에는 최정예 병사를 배치했다. 슬금슬금 도망치다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군 우익이 상대하는 적 좌익은 점차로 '도망가고 있는' 적이므로 적 좌익을 먼저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에파미논다스는 이런 좌익을 역으로 비정상적으로 강화해 적 우익을 격파함으로써 적 전력의 핵심을 궤멸시켰다.
이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서로를 지지해주는 진형이 주력이었던 덕분에 그리스가 민주정이 발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서로가 계급을 둔 상태인 군대에서는 이런 진형을 갖출 수 없어서라나. 심지어 그리스에서 동성애가 장려된 것도 이런 땀내나는 진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또한 테베에는 신전에 죽을 때까지 복무하기로 맹세해 신성부대라고 불리는 정예 보병대가 있었는데, 150쌍의 동성커플 3백명으로 편성했다고 한다. 굳이 동성커플을 쓴 이유는 애인과 함께 전장에 나오면 자신의 애인을 지키기 위해 더 잘 싸울 것이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 부대는 필리포스 시절의 마케도니아 군대와 싸울때 큰 타격을 받았는데, 당시 왕자였던 알렉산더가 기병대를 이끌고 이 부대를 격퇴했다고 하며 전사 254명 부상 46명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도 언급되었다.
3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파일:Attachment/Phalanx.jpg
마케도니아 페제타이로이(Pezhetairoi)의 팔랑크스. 그림에 묘사된 병사들은 가로 16 줄 세로 16줄에 총 256명으로, 사리사 보병의 기본 부대 단위인 신타그마 하나가 전부 그려져 있다.
으아아악 전사보다 위대한 제식진격
토탈 워: 로마2에서 재현한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방진. 순식간에 적 병력을 절반 이하로 갈아버리는 팔랑크스의 위력을 잘 볼 수 있다. 물론 게임이니만큼 100% 동일하진 않겠지만, 현실에서도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근데 돌진하는 쪽이 하필 켈트 나체보병이다... 병신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창끝에 돌진해 죽겠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1. 팔랑크스의 전면 방어력을 잘 모르는 타국의 지휘관 또는 압도적인 병력차로 희생을 감수하고 머릿수로 그냥 밀어버리겠다고 작심한 지휘관이 돌격명령을 내리면, 2. 수백, 수천명이 돌격을 시작하고 이후 뒤에서 달려오는 아군 때문에 3. 가까이 접근해서 창꼬치(...)를 보고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 물론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시체가 쌓이면서 장애물을 형성하므로 훨씬 덜 죽겠지만...
그리스식의 팔랑크스는 한손에 큰 방패, 다른 손에 2.5m 가량의 창을 든 모양이지만, 필리포스 2세가 개량한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방패를 가죽끈으로 팔뚝에 묶고,[2] 사리사라고 하는 두손으로 찌르는 자그마치 6.5m가량의 미친 듯이 긴 창을 썼다. 1진의 창들을 비집고 들어왔다해도 2진, 3진의 창들도 줄줄이 가로막고 있기에 훈련이 잘된 팔랑크스를 정면돌파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고 만약 들어왔다고 치더라도 보조무장인 검으로 상대할 수 있었다. 이 고슴도치처럼 솟아오른 창의 무리는 의외로(?) 투사무기에 대해서도 굉장한 방어력을 가졌다고 한다. 날아오는 발사체가 빽빽한 창의 숲에 걸려 운동에너지를 잃었다고 한다. 심지어 사과를 던져서 그 사과가 땅에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모이는 것을 이상적인 밀집대형이라 칭한 자도 있었을 만큼 정말 빽빽하게 모여있다 보니 저럴 수도 있었던 모양. 이처럼 강력한 모습과 더불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활약 및 헬레니즘 국가 전역에 이 형태의 팔랑크스가 도입된 덕분에 오늘날 팔랑크스하면 원조 그리스식을 제치고 마케도니아식의 인지도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 팔랑크스를 기병대 및 경보병과 면밀히 연계해서 사용하여 적의 주력을 팔랑크스로 받아내면서 경보병으로 팔랑크스의 측면을 방어함과 동시에 적의 측면, 후방을 기병으로 공격하는 통칭 망치와 모루 전술로 많은 승리를 거둔 바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사후에도 주력 전술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잦은 전쟁으로 기병전력이 급감하고 팔랑크스의 주적이 다른 팔랑크스가 되자 공격력, 방어력 향상에 치중하여 대형화되고 무게가 증가된 창과 방패로 무장하여 기동성이 거북이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것은 마케도니아 전쟁 당시에 로마군이 그리스군의 과도한 기동을 강요받게 한 후 빈틈을 만들어 파고들어 돌파하는 것을 막지 못해 대패하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피드나 전투에서 팔랑크스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던 로마군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울퉁불퉁한 지형을 이용하여 각 팔랑크스 부대 사이에 생긴 틈을 로마군이 파고 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팔랑크스를 대략 정면에서 마주한다면 다음과 같이 끔찍한 얼굴과 창세례를 맞보게 된다. 그림은 에페이로스의 페제타이로이를 묘사했다.
설명하자면 1. 검으로 그리스군의 장창을 자른다. 근데 창자루는 잘 안잘린다(...). 2. 장창 밑으로 파고들어서 근거리로 접근한 후 싸운다. 말이야 쉽지만 실제로 하려면 총알을 피하는 거랑 비슷하다. 실제로 16~17세기때 쓰이던 테르시오 전술에서도 파이크를 든 병사들이 전투를 펼칠 때 밑으로 기어들어가긴 했다. 하지만 소수만 그것도 파이크병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랬으며, 고대엔 쌍방이 방패와 전신에 갑옷을 떡칠했으므로 소수가 기어들어가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테르시오 전투 영상을 여기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군의 장창과 총의 지원을 받으면서 했기에 망정이지 애초에 장창사이로 검들고 돌격하라고 내린 것부터가 자살행위에 가까운 미친 짓이다.
단, 이 전과는 팔랑크스 자체의 문제만은 아니다. 팔랑크스의 중장화는 팔랑크스끼리 힘싸움이 벌어지자 기동성보다는 "버티는"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며, 상비군인 페제타이로이나 정예부대인 은방패 등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보다 훨씬 중무장했음에도 여전히 상당한 기동성과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단지 오랜 전쟁과 그리스인의 현지인화로 정예부대의 숫자가 줄어들었을 뿐.
측면 부대는 원래보다 짧은 창으로 무장한 보병이나 지금의 터키 앙카라 지방에 정착한 켈트족인 갈라티아인, 혹은 기병을 통해 엄호했는데, 후대로 갈수록 헬레니즘 3국이 막장루트를 타면서 측면 부대가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또한 로마에게 패배한 이후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수차례의 팔랑크스 개량 시도를 했는데 본래 발을 내미는 쪽인 왼쪽에 정강이 받이를 했지만 사라지고 청동방패 대신 목재 합성방패를 쓰는 등 여러가지 개량을 했다고 한다. 이게 상당한 성과를 냈지만, 로마군의 물량 앞에는 닥버로우할 수밖에 없었던 슬픈 사연도 있다.
결국 팔랑크스의 막장화는 중무장화도 중무장화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끼리 박터지게 치고 박다가 자기네들끼리 정예병을 말아먹고 국력을 소모한 것, 소수의 그리스인이 다수의 오리엔트인을 지배해야 하는 헬레니즘 왕국 체계의 모순, 그리고 그리스인의 인구가 적어졌다는 거시적인 측면이 더욱 큰 이유이다. 사실 망치와 모루 전술에 있어서 팔랑크스의 모루로서의 가치는 이 때도 충분했다. 다만 측면 엄호부대의 부재와 기병 전력의 약화, 병력 자체의 질 하락 혹은 삽질이 겹쳐지면서 팔랑크스가 군단병에게 약점을 노출한 것.
어쨌든 피드나 전투를 계기로 그리스의 몰락과 동시에 고대 지중해 지역의 최강 부대는 그리스의 호플리테스에서 로마의 군단병으로 바뀌게 된다.
4 군단병과 팔랑크스
팔랑크스를 상대하는 로마군
군단병과 팔랑크스를 진의 강력함이라는 기준 하나로만 비교해보면 군단병이 팔랑크스보다 더 강력한 보병전술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보병 전술하나 가지고 군단병이 제대로 포진한 팔랑크스의 중앙을 돌파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팔랑크스가 군단병을 상대로 기존이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모루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나아가 군단병을 밀어붙여 분쇄할 수 있음은 1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레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크산티포스가 마케도니아식으로 개량한 카르타고의 팔랑크스에게 패한 사례나 헬레니즘 국가들이 몰락해서 로마에게 털리는 와중에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 등 수차례의 전투에서 입증되었다. 존 워리의 서양 고대 전쟁사같은 경우는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도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팔랑크스였다면 후방으로 기동해서 적어도 괴멸적 피해는 막을 수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피드나 전투나 마그네시아 전투 등에서 팔랑크스는 고유의 약점을 노출하기도 했으나, 이는 지휘관의 전술상 역량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팔랑크스에게는 군단병에게는 없는 강력한 정면 공격력, 라인 푸쉬를 통한 전열 싸움에서의 우위, 기병 대처능력이 있고 유능한 지휘관은 팔랑크스의 장점을 활용하여 마니풀루스를 압도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피로스 대왕과 크산티포스를 들 수 있고,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도 팔랑크스와 다양한 병종을 활용하여 로마군을 제압한 적이 있다. 물론 술라나 루쿨루스, 폼페이우스에게는 패배하지만 그들의 전술적 역량은 로마 역사에 남을 먼치킨들이었고. 팔랑크스에 대한 군단병의 승리를 상징하는 피드나 전투도 군단병만으로 헬레니즘 국가의 팔랑크스를 격파한 유일한 사례이다. 이 전투에서 처음에 팔랑크스에 밀리던 군단병은 그들을 산악지형으로 유인했다.
로마군은 2개 군단 포함 29,000명에 보조병 포함하면 3~4만명, 마케도니아군은 45,000명 가량되었는데도 사상자수 100:25000이라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보통 이 수치는 로마군의 사망자가 지나치게 적게 기록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적어도 전술이 완벽하게 먹혀들기 전까지는 로마군의 피해도 상당했다는 점을 감안해 위키백과에서는 로마군의 전사자를 최소 1,000명 이상으로 추산한다. 마케도니아왕 페르세우스는 팔랑크스들을 데리고 무모하게 구릉지대로 추격하거나 왕이 화살 맞고서 기병 데리고 튀거나, 2,000명의 카타프락토이를 데리고 전장에서 튀어버리는 막장 지휘로 로마의 승리를 돕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군단병이 지중해의 승자가 된 이유는 팔랑크스가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은 상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팔랑크스는 제대로 포진한다면 정면에서 뚫을 가능성이 거의 없으나 이러한 상황은 다음과 조건에서만 가능했다.
첫째, 나무나 돌 투성이가 없는 매끈한 평야지대여야 할 것. 피드나 전투 또는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와 싸운 전투들을 보면 팔랑크스들이 군단병의 정면공격을 받아 격퇴당했다. 이는 팔랑크스들이 돌투성이 험지에 포진하여 창의 빽빽한 고슴도치 형태가 일그러졌고 이 틈새로 군단병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창이 지나치게 긴 팔랑크스는 접근전이 매우 취약했으므로 군단병이 파고드는데 성공하면 맞서기 위해 창을 버려야 하는데 이것 자체가 쉽지 않을 뿐더러 팔랑크스는 그 특성상 근접전에 약했다. 돌투성이 험지에서는 이러한 약점이 그대로 노출되었으므로 팔랑크스는 반드시 매끈한 평야지대에서 전열을 갖춰야 했다. 산악지형이나 숲같은 곳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어떻게든 맞설 수는 있으니 군단병에게 전상자를 대량으로 강요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은 한 3천 죽는데 이쪽은 2만 죽으면 누가 패한 것인지는 답이 나오는 문제다.
둘째, 측면과 후방이 완벽히 보호되어야 할 것. 팔랑크스는 매우 긴 창으로 병사들이 균형을 맞추어놓았기 때문에 측면과 후방으로 방향 전환이 매우 힘들었다. 따라서 이들은 측면, 후방 공격에 매우 취약했으며 따라서 이쪽을 완전히 보호받아야 했다. 군단병의 경우 백인대가 각각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고, 이들이 천명 모여 대대(cohort)를 이루었으며 백인대 자체도 별도의 소대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측면, 후방의 공격을 받았을때 즉시 몇개의 소대가 따로 방향을 바꿔 맞설 수 있었다. 갈리아 전쟁을 보면 실제로 전투가 무르익었을 때 적이 갑작스럽게 측면, 후방을 치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데 로마군은 즉시 후방의 전열이 분리되어 이들에게 응전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상당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전체를 보호하여 최악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팔랑크스로는 이러한 세심한 움직임이 불가능했다.
셋째, 느린 스피드가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할 것. 팔랑크스는 촘촘하게 창으로 대열을 유지한 상황이므로 빠른 움직임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팔랑크스로 기습을 하거나 기습을 받거나 또는 빠르게 적의 배후로 우회하여 협공하거나 하는 종류의 움직임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팔랑크스는 기동력과 신속함이 승부를 결정짓는 상황에서는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또한 이들을 이런 용도로 쓴다면 긴 창을 휴대하기 위해 다른 보조 장비들의 질이 뒤떨어지는 팔랑크스 병사들의 약점이 나타나게 된다. 군단병은 팔랑크스와 달리 매우 빠른 기동력을 가졌고 기습, 기습에 대한 대응, 그리고 신속하게 후방과 측면 등으로 이동하여 적의 약점을 칠 수 있었다.
넷째. 가장 큰 문제점은 훈련도가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는 절대적인 방어력을 자랑했지만 그 대신 구성원의 대부분은 후일 로마 군단병처럼 고참 지원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고강도 훈련을 통해서만 대열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인데 이런 정예병력이 그리스 자체의 약화와 함께 크게 줄어들게 된다. 사실 팔랑크스가 측면 공격에 약하다는 건 그리스인들도 알고 있어서 근접전 혹은 대열 중간 중간의 공백에 대한 유연한 전술 구사 능력이 요구됐는데 이건 결국 유능한 중견 지휘관과 숙련된 병사들의 존재가 필수이다. 반면 피드나 전투 당시 팔랑크스 구성원 대부분은 오합지졸의 징집병들이었다. 만일 이 전투에 투입된 마케도니아군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 그를 따른 고참 정예병들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에 거론한 팔랑크스의 약점에 대해 그리스인 역사가 폴리비오스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전장에서는 모든 전투의 시간, 장소, 상황이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이 모든 중요한 조건 하나하나에 따라 전투의 결과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팔랑크스는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 특정한 상황에서만 무적이다. 팔랑크스에 유리한 시간, 장소, 상황에서 이에 대적하는 한 이 가공할 대형을 무너뜨릴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팔랑크스가 불리한 시간, 장소, 상황이라면 그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다. 팔랑크스를 유리하게 만드는 조건이 쉽게 사라지는 경우는 있어도, 팔랑크스를 불리하게 만드는 조건이 사라지는 법은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스인들의 이 유명한 전투대형이 로마인들이 대항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보다 왜 열등한지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러한 팔랑크스의 약점들을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최소화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팔랑크스 자체도 어느 정도 유기적인 기동이 가능할 만큼 고참병 위주의 정예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점점 전술이 발달하고 망치와 모루의 개념이 장군들에게 상식처럼 되자 기병과 같은 보조병만으로는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가 어려워지게 된다. 로마 장군들의 승전사례를 보면 강력한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보병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없었다면 패배할 뻔한 상황이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자마 전투의 경우 칸나이 전투 시절부터 장기간에 걸쳐 스키피오를 따른 고참병들이 한니발의 고참병에게 수적 우위를 유지하고도 적잖은 손실을 입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면 패했을 것이다. 또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투를 보면 그가 치른 많은 전투가 평야에서 벌이는 회전은 얼마되지 않고 적의 야습에 대한 방어, 포위전, 시가전 등등 다양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군이 계속 승리를 거머쥔 것은 위기 상황에 끊임없이 유기적으로 기동하면서 대응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조병의 보조를 받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보병대 자체에 유기적인 움직임이 필요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또한 로마군은 보조병을 군단병에 맞먹는 수로 편성하여 유기적인 군단병뿐 아니라 방어에 적합한 팔랑크스, 투창기병, 돌격기병, 크레타 궁병, 발레리아스 투석병, 코끼리병 등 온갖 보조병을 동원하였다. 로마 장군들은 매우 실전 경험이 풍부했으며 이러한 병력을 적재적소에 쓰는 방법을 알았고 또 로마가 지배하는 지역이 다양했으므로 그만큼 각지에서 보조병을 징발할 수 있었다. 이는 다양한 보조병의 조달이 제한적이고, 이런 병력을 실전에 쓰는데 익숙하지 않은 그리스의 장군들과는 대조적이라 볼 수 있다. 그리스 장군들은 보조병의 활용에 익숙치 않았는데, 가령 팔랑크스의 측면을 지켜줄 수 있는 투레오포로이, 토라키타이 같은 병과들이 탄생했음에도 헬레니즘 지휘관들은 이를 제한적인 용도로만 사용했다. 게다가 당대 헬레니즘 국가들의 군사력을 담당하는 인적 자원은 긴 전쟁을 거치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하락한 상황이었고 셀레우코스를 제외하고는 망치 역할을 할 기병 전력은 더욱 손실이 컸다. 마케도니아는 심각한 인구유출에 시달렸으며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도 오랜 기간에 거친 시리아 전쟁, 동방 원정, 내부 반란 때문에 군사력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이 크게 고갈되어 있었다. 피드나 전투가 벌어진 BC 160년대에 마케도니아의 상비군 팔랑크스는 그 수가 확연히 줄어들고, 이제 소수화된 아게마와 대다수의 징집 팔랑크스가 이를 대체할 정도로 인적 자원이 고갈되었다. 반면 로마군은 로마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둔 피로스조차 "이놈들 히드라 아니냐. 머리 하나를 자르면 그만큼 또 나온다."고 할 정도로 막강한 물량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미 초창기 고대 그리스식 팔랑크스를 운용해본 로마는 전열도 없이 빠르게 이동하는 켈트족과 삼니움족과의 싸움을 통해 팔랑크스가 가진 한계가 노출되는데 켈트족은 전열대형이라 해도 상당히 띄엄띄엄 있거나 아예 진열을 구성하지 않았기에 훨씬 유동성이 좋아 팔랑크스의 측후면을 노리기 쉬웠고 삼니움족은 뛰어난 게릴라전술로 절대 팔랑크스가 유리한 상황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결국 유연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여 적극적으로 상대의 무기와 전술을 받아들였지만, 팔랑크스의 강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헬레니즘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로마의 장수들은 결코 팔랑크스가 우세한 전장에서 싸워주질 않았다. 로마가 지중해의 패자로 등극한 것은 군단병의 우수성과 다양한 병과들의 유기적인 운용, 상대의 강점을 살릴 수 없는 전장에서 전투에 임하는 우수한 전술의 결과였다.
마지막으로, 폴리비오스는 군단병이 팔랑크스에 대해 우위를 지니게 된 이유를 한 가지 더 꼽고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전략적 기동성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 앞서 제시 된 팔랑크스의 문제점 및 약점으로 인해 팔랑크스가 활약을 할 수 있는 지역, 지형 및 조건은 한정되어 있는 반면, 로마군의 보다 유영한 진형은 상대적으로 그러한 약점이 적었기 때문에 (로마군 특유의 준비성만 갖춰진다면) 해안이든, 숲이든, 구릉지든 어디서든 싸울 수 있었다는 것.
로마군이 그리스-헬레니즘계 폴리스 및 왕국들과 적대관계로 붙게 되는 것은 2차 포에니 전쟁이 후 세월이 흘러 3차 포에니 전쟁 즈음이 되는데, 이 무렵이면 1차 포에니 전쟁 때만 해도 이탈리아 반도 인근으로 국한 되어 있던 로마의 지배영역 및 영향권이 동서로 크게 확장이 된다. 서쪽으로 히스파니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에게해를 넘기 시작하는 만큼 로마군은 신속한 행군을 통한 전략적 기동에 이미 이골이 나 있었다.
반면, 알렉산더대왕의 후계왕국들은 셀레우코스 왕조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각자 지배영역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장거리 원정을 경험한 적이 없으며, 시기적으로도 로마의 공세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자기 지배영역 내에서 방어전을 수행한 경우가 많았고, 애초에 고전시대로부터 내려온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들은 손바닥만한 그리스 반도에 그나마도 대부분 산지로 뒤덮인 곳에서 좁은 통로로 이어진 평야지대의 병목을 틀어막고 싸우는데 익숙해 있었다. 즉, 알렉산더 대왕의 폭주족같은 원정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그리스계 군대는 좁은 범위에서 기동하며 싸웠고, 앞서 폴리비오스가 언급한 "팔랑크스가 유리한 고유의 조건들"에 알맞은 곳을 찾아 그 길목을 틀어막고 싸우는 경향이 컸다. 이에 대해 폴리비오스는, 팔랑크스가 아무리 무적이라고 해도 그 정해진 곳에서만 싸울 수 있는 반면, 로마군은 정 안된다 싶으면 그냥 요리조리 잽싸게 우회해서 후방 죄다 털어먹고 본거지 죄다 함락시키고 외교전과 분열책동으로 아예 팔랑크스 군대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데 이걸 뭔 수로 이기나염;;; 하면서 개탄을 한다.
로마군과 맞붙기 이전에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페르시아군이 걍 우회해버리거나 할 수도 있는 위기를 수 차례 맞이했던 전력이 있음을 감안하다면, 팔랑크스는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로마와 같이 지중해 세계 전체를 겨냥하고 기동하는 군대와는 경쟁하기 힘들었다. 지중해의 패자로서 다양한 전장에서 작전을 수행해야 했던 로마군의 입장에서 팔랑크스의 강력함은 군단병에 뒤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유연성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5 후손들
팔랑크스 보병 자체가 강력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슴도치와 같이 단단하게 뭉쳐서 적과 충돌한다는 아이디어는 팔랑크스가 퇴장하고 수백년이 지난 뒤에도 유사한 전술이 등장할 정도로 근접전에서 매우 유용한 개념이다.
장창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동로마 제국의 스쿠타토이(scutatoi)의 대열도 일종의 팔랑크스와 유사한 대열이다.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praecepta militaria나 Leo the deacon 등 10~11세기의 서적에 따르면 스쿠타토이들도 4.3~4.7m에 달하는 긴 창으로 무장하는데, 고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이쪽은 기본적으로 방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방진이라, 장창 대열 사이에 궁병을 배치하는 식으로 오리지널과 비교해서 변형이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면에서는 동일.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사용한 스킬트론도 팔랑크스의 일종이며 15~16세기에 걸쳐 무적을 자랑했던 스위스 용병대의 미늘창, 파이크 대형도 팔랑크스가 발전한 형태라 할 수 있으며, 150년간 무적으로 군림했던 스페인 테르시오를 비롯한 테르시오 대형도 기본적으로 팔랑크스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세대인 전열보병의 경우 무기는 머스킷과 총검으로 바뀌었고 보병 전술도 긴 횡대를 이루게 되었지만, 이들 역시도 대기병 전술로는 밀집방진을 형성해서 맞서게 된다. 방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병력이 밀집대형을 이루어 싸운다는 개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 후장식 대포와 기관총의 등장 이후였다.
6 동양
동양에선 유럽처럼 장창방진을 대규모로 운용하진 않았지만, 엄연히 존재했고, 당나라 군대가 돌궐을 토벌할 때 이정의 1만명의 장창병 부대가 활약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병법서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전국시대때의 병법가 오기가 "보병은 밀집할수록 좋다"라고 한 것처럼 대기병이든, 보병 상대로든 밀집한 보병이 위력을 발휘한다는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淥原.왕은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위의 대병이 오히려 우리의 소병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의 명장이지만 오늘 목숨이 내 손아귀에 있도다.”(몇번 이긴후)
그리고는 철기(鐵騎) 5천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다. 검이 방형의 진(方陣)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니, 우리 군대는 크게 궤멸되고 죽은 자가 1만 8천여 명이었으며, 왕은 기병 1천여 기(騎)를 데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0년(246)
기원후 246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은 고구려 침공 당시 고구려의 기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정사각형의 장창방진을 짰고, 이 비류수 전투에서 동천왕의 1만 4천의 보명 및 5천의 기병은 관구검의 장창 방진에 걸려 궤멸당해 1천여명만 살아 남았다.
불분명하지만 신라가 매소성에서 당군 기병과 싸워 크게 이긴 매소성 전투에서도 장창 방진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 전국시대 때도 이러한 장창 아시가루를 통한 방진은 널리 쓰였다.
동양의 장창병들이 서양의 그것보다는 주목을 못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빅터 데이비스 핸슨이나 존 키건 같은 동양까들은 유럽보다 먼저 시작된 페르시아의 중기병 전통이나 동아시아에서도 4세기부터 널리 사용된 중기병 전술을 싹 무시하고 중세 기사만이 제대로 된 기병 집단이라고 찬양하는가 하면 춘추전국시대의 발전된 보병 밀집대형 진형술이나 당대의 중장보병을 중시한 군사적 전통, 일본의 장창보병 등을 싹 무시하고 호플리테스로 시작하는 중장보병을 끝없이 띄워주면서 '적을 궤멸시키기 위해 아군의 피해에 개의치 않고 근접 육박전을 강요해 승리를 얻어내는' '서양의 군사적 전통'이야말로 '유일한 문명화된 전쟁 문화'라고까지 하는 망발을 보이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전쟁의 끝은 보병이나 기병의 백병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