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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산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한 파로호 전투가 끝난 후, 중공군 포로들이 후송을 기다리는 모습.
1 개요
6.25 전쟁 당시 1951년 용문산과 화천 저수지 일대에서 한국군 제6보병사단이 중공군 3개 사단(63군 187사단, 188사단, 189사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를 말한다.
2 전투 이전 상황
1951년 5월(당시 UN군은 '썬더볼트 작전' 개시하던 시기), 동부전선의 한국군을 격멸하기 위해 대공세를 펼친 중공군은, 중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으로의 증원을 막기 위한 강력한 조공을 가했다.
이렇게 중부전선에서 펼쳐진 중공군의 공세를 직면하게 된 부대는 당시 장도영이 사단장을 맡고 있던 한국군 6사단. 한국전쟁 개전 초기인 춘천-홍천 전투에서 북한군을 저지하면서 유명세를 떨친 사단이었으나, 불과 한 달 전 펼쳐진 중공군의 4월 공세 당시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에서 사단 전체가 줄행랑을 치면서 패전했고, 이 때문에 미군 수뇌부부터 일개 병사들에게까지 비웃음을 당하는 존재로 전락한 상태였다. 당시 미군 병사들은 6사단 마크를 단 장병이 지나가면 "겁쟁이 블루스타"라고 조롱하며 침을 뱉는 경우도 있었다고 할 정도.
하지만 화천군 사창리에서 중공군의 진격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도망친 덕에(…) 장비는 왕창 잃었지만 병력 소모가 적어 빠른 재편성이 가능했다. 그렇게 재편성된 6사단은 용문산 일대에서 사창리에서보다 훨씬 강력한 중공군의 공격을 직면하게 되었다.
3 전투경과
전투 직전 6사단의 주 방어선은 용문산.
그러나 당시 6사단 사단장이던 장도영은 북한강을 넘어 오는 중공군의 공격을 염려해서 사단의 주 방어선보다 한참 앞에 있는 북한강 아래쪽으로 사단 예하 1개 연대(2연대)를 올려보내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전초병력이라기엔 너무 많은 전체 사단 병력의 3분의 1이나 되는 병력을 주 방어선보다 훨씬 위로 올려보낸 장도영의 병력 배치는 방어의 정석과는 완전히 벗어나 있었으나, 하여간 장도영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1951년 5월 18일. 중공군의 공세가 개시되었다. 주방어선과는 외따로 올라와 있던 6사단 2연대는 도강하는 중공군에게 공격을 퍼붓고 427 고지로 후퇴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전방에서 경계임무를 완수한 후 주 저항선 뒤로 빠져야 할 2연대의 1, 2대대가 오히려 주 저항선 전방의 427고지와 나산에 틀어박혀 우주방어를 시작한 것. 거기다 공군과 인근 포병의 무지막지한 지원 공격이 중공군을 두드렸고, "이렇게 방어가 단단한 거 보니 한국군의 주 방어선이 여기가 틀림없다!"고 생각한 중공군은 예비 사단까지 꺼내들어 총 3개 사단으로 올인러쉬에 나섰다.
그러나 2연대는 믿을 수 없는 저력으로 그 무지막지한 공세를 버텨냈다. 더욱 강화된 방어진지(427고지, 이곳이 용문산 전투 전역을 통틀어 가장 격렬한 전장이었다고 한다)로 질서있게 물러서며 새로 적을 맞이하는 2연대의 효과적인 방어와, 전투 시작부터 쉬지 않고 어마어마하게 쏟아진 포병과 공군의 타격으로 결국 중공군의 공세는 둔화되고 말았다.
그 타이밍에 용문산의 주 방어선에서 대기하고 있던 6사단의 나머지 2개 연대(7연대, 19연대)가 총 반격을 개시하였다. 며칠 동안 2연대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중공군은 갑자기 뒷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자 이것을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병력의 대대적인 반격이라고 오판하고 말았다. 급기야 중공군은 전열이 완전히 와해되며 3개 사단 병력이 2개 연대 병력에게 패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부대가 한 번 전의를 상실하거나 지휘체계가 붕괴되면 3개 사단이 아니라 30개 사단이라도 그냥 인간세트(…)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비수대전, 그리고 비슷한 시기의 현리전투.
승세를 탄 한국군은 패주하는 중공군에 대해 맹렬한 추격을 개시했다. 다시 북쪽으로 도하(북한강)할 여유도 없었던 중공군 3개 사단 병력은 북한강 남안을 따라 양평에서 춘천을 거쳐 화천까지 장장 70~80여 km를 쫓기며 엄청난 손실을 입다가 결국 화천 저수지(현 파로호)에 이르러 궤멸되고 만다. 미처 도강을 하지 못한 수많은 병력이 우왕좌왕하다 사살되거나 익사한 것. 그 넓은 호수가 중공군의 시신으로 뒤덮힐 지경이었다고 한다.
4 결과
이 전투에서 6사단은 사살 확인만 17,000명이 넘고 포로로 2,000여 명을 잡는 큰 전과를 올렸다. 단일 전투로서 이만한 전과는 한국전쟁 통틀어 그 예를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대승.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국군의 대참사인 현리 전투로 인해 땅에 떨어진 국군의 명예를 어느 정도 만회한 전투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기념해 화천 저수지에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깨뜨린 곳)라는 명칭을 부여했으며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을 정도이니 이 전투의 의의를 짐작할 만하다.
지휘관의 냉철한 판단력, 부대의 기세,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비대의 중요성을 정말 잘 보여 주는 전투이다. 중공군으로서는 남아있는 예비대를 너무 일찍 투입한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결정적인 순간까지 반드시 확보해두어야 하는 것이 예비대이다.[1]
5 이야기거리
- 2연대를 주 방어선 훨씬 앞쪽에 배치한 장도영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의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쟁사가들의 의견이 다소 갈린다. 그러나 최전선보다 약간 후방인 427고지에 강화진지를 미리 구축해 둔 점, 포위기동이 특기인 중공군을 상대로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후퇴 후 고지 점령에 성공했다는 점, 그리고 미 고문관의 2연대 완전철수 권고를 무시하고 04시까지 427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점 등으로 미루어보면 처음부터 방어 후 반격을 할 계획을 짜 두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압도적인 화력지원을 받은 덕이 크기는 하지만, 그래도 1개 군단의 총공세를 1개 연대로 방어해내고, 직후 반격에 성공하여 1개 사단으로 1개 군단을 와해시킨 장도영은 전쟁사상 희대의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를 시전해낸 장군이 되었다.
- 2연대의 방어전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보여 주는 수많은 무용담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 중대장이 사라져서 중대가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정훈병까지 나서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끝까지 버텨 낸 에피소드도 있다.
- 당시 쫓겨가던 중공군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노무자에게 항복하거나 마을 노인에게 잡혀오는 중공군 포로도 있었다고 한다.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등에 의하면 전투 중에는 이것이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강인하고 끈질기게 싸우는 최정예 전투원이면서도, 일단 총을 놓고 나면 누구보다도 온순해지는 것이 중공군이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이런 에피소드도 그렇게까지 신기한 일은 아니다.
- 인근 주민들은 파로호의 물고기를 종전 후 10년 가까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 시체를 뜯어먹고 자란 물고기라는 이유로(…). 또한 하도 시체가 많아서 식수원이 오염되어 외부에서 급수를 해야 했다고 한다.
- 이 전투 후에는 이전의 추태로 겁쟁이 블루스타라고 불리던 일은 거의 없어졌고, 비웃음을 받아도 흑역사를 가지고 놀려먹는 수준이였다고 한다. 그야 주방어선보다 위로 올라가더니 3개 사단을 떡실신시키고 추격해 갈아버린 용자들인지라(...)
6 참고 자료
전쟁기념관-전투자료 동영상, <용문산 전투> : 단순한 홍보 영상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자료화면과 함께 전투의 경과를 깔끔하게 브리핑하고 있는 영상이다.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 번 쯤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