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련

王連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자는 문의(文儀).

남양군 사람으로 유장이 익주목일 때 촉군으로 들어가 재동현의 현령이 되었으며, 유비가 가맹에서 병사를 일으켜 남쪽으로 진군하자 성문을 닫고 항복하지 않았다. 유비는 의로운 마음에 감동해 무리하게 핍박하지 않았으며, 성도가 유비에게 평정되자 십방현의 현령으로 임명되었다가 광도현으로 옮겨졌고 임지마다 공적을 세웠다.

이후 사염교위로 관직을 옮겨가 소금과 철의 이익을 따졌으며 이익이 들어오는게 매우 많아서 국가의 쓰임에 도움이 되었다.

촉나라에서 제갈량은 기존의 촉땅에서 나는 암염을 화정(불이 솟는 우물이란 의미)을 이용해 더 개선하도록 했고, 철광이 많이 나던 촉에서 철강 개발을 장려하여 백련강과 쉬화법 등 당시 최신의 제철기술을 도입해 갑옷과 무기류를 개선했다. 즉, 사염교위로 임명된 왕련은 촉의 국가단위적 사업을 맡은 관리중 하나이며, 그가 사염교위를 맡았을테 이익의 증가는 생산과 품질의 증대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 유능한 사람을 선발해 속관으로 임명했다. 여기서 선발한 인물 중에 여예, 두기, 유간 등은 높은 관직에 이르렀으며, 왕련은 승진해 촉군태수, 흥업장군으로 임명되었지만 소금을 관리하는 일은 이전과 같이 했다.

223년에 둔기교위로 임명되어 승상장사를 겸임했다가 평양정후에 봉해졌으며, 당시 남방의 여러 군이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제갈량이 직접 정벌하려고 하자 한 나라의 기대를 받고 있는 사람이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언해서 제갈량을 만류해 가지 못하게 했다. 이로 인해 제갈량은 자신이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왕련의 간언이 매우 간절해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되었으며, 왕련이 세상을 떠나자 왕산이 뒤를 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간의대부로 등장해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하려는 것을 말리는 역할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