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서』 「동류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 | ||||||||||||||||||||
동화 | 유파 | 마량 | 마속 | 진진 | 동윤 | 여예 |
呂乂
(? ~ 251)
1 개요
삼국시대 촉나라의 인물. 자는 계양(季陽).
삼국지연의에서 여의(呂義)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각종 창작물에서도 여의로 나온다.
남양군 사람으로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며, 독서와 북을 치고 거문고 타는 것을 좋아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여 염부교위를 두어 소금과 철의 이익을 따지게 했는데 후에 교위 왕연이 청하여 전조도위로 임명되었다가 신도, 면죽의 현령에 승진했다, 이때 그의 마음이 선량하고 다른 사람을 동정하고 도왔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칭찬해 주에 있는 성읍에서 최고의 정치라고 평가했다.
파서태수로 승진했고 승상 제갈량이 해마다 출군하여 여러군에서 조발[1]했는데, 많은 이들이 서로 돕지 못하였다, 여예는 (제갈량의 명령으로) 병사 5천명을 모아 제갈량이 있는곳에 다달랐고, 이들을 위로하고 타일러 점검하고 제어하였으므로 도망치는 자가 없었다.(丞相諸葛亮連年出軍,調發諸郡,多不相救,乂募取兵五千人詣亮,慰喻檢制,無逃竄者.)[2]여예는 전임하여 한중태수가 되었고 독농(교위)를 겸임하여 군량미를 지속적으로 공급했다.
제갈량이 죽고 여러 차례 승진해 광한태수, 촉군태수 등을 역임했다. 제갈량이 죽은 후에 달아났던 병사가 들어와 군대를 안 가기 위해 다른 사람의 호적이나 이름을 빌려 써 교활한 간계가 끝이 없었는데, 여예는 이에 대한 방치책을 세워 교육하고 지도해 수년 사이에는 간사한 무리들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촉군을 나간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3]
조정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으며, 동윤을 대신해 상서령이 되었지만 각종 사무가 남아있지 않고 문에서 기다리는 빈객도 없어졌다. 여예는 안팎의 일을 역임하고 몸을 닦아 검소하게 절약하면서 생활했으며, 겸허하고 말이 적으면서 정치적인 사무에 있어서는 간명하고 복잡하지 않아 청능(淸能)으로 불렸다.
그러나 법률을 지키는 일이 매우 엄하고 법에 능통한 문속리[4]를 임명했으므로 고관의 지위에 있을 때의 명성은 군이나 현에 있을 때보다 못했다고 한다. 251년에 세상을 떠났다.
진수가 그에 대해 평가하기를 군에 있을 때는 칭찬받았지만 조정에 있을 때는 명성이 줄었으니 황패(黃覇)[5]와 설선[6] 같은 부류의 인물이라 해 군수 같은 것은 잘하지만 승상 같은 것은 못한다고 평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상술한 대로 이름이 여의로 나와 촉 평정 후 유비가 공을 세운 장수들과 항복한 문무 관원 등을 포함해 60여 명이 승진시켜 썼다는 것에서 언급되며, 또한 제갈량의 제1차 북벌을 시작하기 전에 명단에서 정원장군 겸 한중태수를 지내고 있으면서 이회의 부관으로 언급된다.
2 미디어 믹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당연히 이름이 여의로 나오고 삼국지 8까지 나오다가 그 다음편부터는 나오지 않는다.지못미 능력치는 평범하다.
- ↑ 調發, 중국어 단어사전에선 调发'이라고 쓰고 '금전, 물자 등을 조절하여 방출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이나 말 또는 군용품을 모아 거두는 것에 대한 군사상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 ↑ 전근대~근대 초기의 많은 국가에서 병사들의 사기가 영 믿을 만하지 못했고 당대 탈영율은 지금보다 훨씬 높았다. 이런점에서 병사들 내부를 잘 다스려 탈영자가 없게 한 이 당시 촉군의 역량은 평가받을 만하다.
- ↑ 위연이 난을 일으켰을때 위연 휘하의 병졸들이 모두 도망갔는데 이들일 가능성이 있다.
- ↑ 글귀로 적힌 법에 얽매어 꽉 막힌 벼슬아치이다.
- ↑ 전한 때 시랑알자, 정위정, 승상장사, 양주자사, 영천태수, 승상 등을 지낸 인물로 지방 관리 시절에는 지방 관리들 중에서 가장 잘 다스린다는 평을 받았다.
- ↑ 전한 때 정위부의 관리, 대사농의 관리, 불기현의 현승, 낙랑군의 도위승, 장안 현령, 어사중승, 좌릉상, 승상 등을 역임했으며, 지방에 있을 때는 어디든 가면 그 곳의 치안이 바로 안정될 정도로 정치를 잘했지만 승상이 되었을 때는 승상부의 속리들이 처리하는 일이 자질구레하다고 해서 그를 칭찬하는 말이 없었으며, 6년간 승상으로 있었지만 별로 흥성하지 못했고 성제는 그 책임을 설선에게 미루어 승상에 해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