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기

  • 이 항목은 닐 패트릭 해리스가 출연한 외화 '천재소년 두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는 않다

1 杜畿

위서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임준소칙두기정혼창자

(163? ~ 224)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 두서의 아버지이자 두예의 할아버지.

경조 두릉 사람으로 자는 백후(伯侯)이며, 한의 어사대부 두연년의 후예라고 한다. 조조의 식량 셔틀.

1.1 생애

1.1.1 초창기

1.1.1.1 어린 시절

어린 시절 고아가 되어 계모 밑에서 괴롭힘을 당하여 자랐으나 두기는 오히려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형주에서 살던 때 그를 괴롭히던 계모가 죽자 고향에 시체를 묻기 위해 그 시체를 등에 지고 길을 가다가 도적을 만난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도망칠 때 혼자 가만히 있다가 화살을 맞게 되자 두기는

경은 재물이 필요하겠지요. 지금 나에게는 가진 짐도 없는데, 어찌 나를 활로 쏘는 겁니까?

라고 말하자 도둑이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견초사마지도 비슷한 얘기가 있는 걸로 봐서 전기를 만들 때 붙여주는 접대용 일화일지도 모른다.

1.1.1.2 근자감

고향에 도착하자 경조윤이었던 친구 장시가 그를 공조에 임명하면서 두기는 20세의 나이에 군의 공조가 되어 정현 현령직을 대행했으며, 투옥자가 수백명이 있자 그들을 직접 돌아보면서 죄의 경중을 판단해 판결을 내렸다. 보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기가 이를 데 없어 사람들이 천재가 나왔다고 놀라더라'스러운게 나올 것 같지만 두기에 대한 것은 '모두 타당한 판결은 아니었다'고 나오는데, 그래도 어린 나이에 요점을 뽑아내는 것에 군민들이 주목했다.

뭐, 어쨌든 날림 처리였는지라 장시가 일 좀 제대로 하라고 하자 두기는 조용한 목소리로

나는 공조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하동태수에는 어울린단 말이다.

라고 말했으며, 잠깐, 이것도 어디서본 내용 같은데 당시에 서로 모욕하면서 지내던 사람인 위고가 이 말을 듣고 옷자락을 걷어 제치면서 두기를 매도했다고 한다.

효렴으로 천거되어 한중부의 승이 되었다가 천하에 혼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도망간다.

1.1.1.3 순욱 피라미드 등용의 일원으로

이후에 경기의 집에 잠깐 들러 얘기하는 것을 운좋게 옆집의 순욱이 엿듣게 되었는데, 순욱은 그것만 듣고도 두기가 뛰어난 인재임을 알아보고 경기에게 "어떻게 이런 좋은 인재를 알았으면서도 자신에게 추천을 하지 않냐면서 네가 그러고도 관직에 있을 자격이 있냐."면서 핀잔을 주고 순욱이 두기를 조조에게 추천해 두기는 사공사직, 호강교위, 사지절, 서평태수가 되었다.

1.1.2 반란 진압

1.1.2.1 필마단기

조조가 하북을 평정할 때 도움을 준 고간이 반란을 일으키자 하동군의 위고[1], 범선 등이 겉으로는 하동태수 왕읍의 귀환을 요청하면서 속으로는 고간과 내통해 반역을 모의했다. 왕읍 혼자서는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여긴 조조는 순욱에게 인재 추천을 요청하자 순욱은 두기를 추천하여 두기는 하동태수가 되었는데, 위고가 본색을 드러내 섬 나루를 차단하면서 두기의 하동 진입을 막자 순욱은 하후돈이 오기를 기다렸다 공격하자고 했다.

그러나 두기는

하동에는 삼만호가 있으나 모두 반란을 일으키려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군이 강하게 밀어붙이면 우리에게 적대치 않는 자들도 주도자가 없으므로 두려워해 위고의 말하는 바를 따르게 되어 위고 등의 세력이 일체가 되면 필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입니다. 혹여 이를 토벌하여 승리치 못하면 근린 사방이 그들에 호응하여 천하의 변란이 정돈되지 않을 것이고 정벌에 성공한다 하여도 이는 일 군의 민중을 학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위고 등은 아직 왕명을 거부한다고 표명치 않고, 상표해 전임자(왕읍)을 요청하는 명목을 내세우고 있으니 필시 신임자를 살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수레 한 대에 올라 그들의 생각지 못한 바를 찌르겠습니다. 위고는 사람됨이 계략이 많은 반면 결단력이 없으니 필시 저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제가 군에 한 달간 있으면 계략으로 그들을 옥죄어 버리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라는 제안을 하였고, 이에 두기의 계획대로 뒷길로 빠져나와 황하를 건너 하동으로 들어간다.

범선은 이에 두기를 죽일 작정으로 성문 아래에서 주부 이하 삼십 명을 참살했는데, 두기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위고가 그를 죽여도 악명만 늘어나고 두기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며 범선을 만류해 두기를 죽이는 것을 포기했는데, 범선이 사람 죽이기를 싫어하면 호랑이가 될 수 없다면서 아쉬워했다. 그들의 생각을 알아챈 두기는 자신은 신임자로 아는 바가 없고 위고, 범선은 하동에서 덕망이 있으니 모든 것을 맡기겠다며 위고를 도독으로 삼아 군숭, 공조의 역할, 범선에게는 장수와 관병 3천명을 통솔하게 해 둘은 만족해 형식적으로 두기를 섬기기로 서로 약속했다.

1.1.2.2 반란 세력 약화를 위한 활동

위고가 대대적으로 징집을 시도하자 두기는 이 병사들이 모반에 사용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징집을 하면 민심이 흉흉해진다면서 천천히 재물을 이용한 모병을 하라고 하면서 위고와 범선에게

사람의 마음이란 본래 자기 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 장수들과 속관들을 나누어 휴식하게 합시다. 위급한 때에는 그들을 불러들여 대비하면 어려운 일 따윈 없겠지요.

라고 말하니 위고와 범선은 민중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 싫어서 이 말에 따르게 된다. 이로 인해 모집된 병사는 많았지만 위고에게 돌아오는 직속 병사는 얼마 없었다. 또한 위고와 범선의 편에 선 사람들만 골라 여러 곳에 나누어서 고향에 가도록 하면서 조조를 따르는 자에게는 은밀히 자신을 돕게 해 위고와 범선의 세력은 점점 약해졌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간, 장성 등이 반란을 일으키지만 두기의 계책으로 위고는 충분한 병력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때이른 거병을 한 것이 되었다.

1.1.2.3 하동의 반란 제압

두기는 미리 여러 현을 자기 편으로 만든 것을 믿고 수천 기를 이끌고 농성을 했고 과연 관민들이 이에 호응해 수십여일에 4천 병력을 얻어 위고, 고간, 장성 등이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하후돈의 대군이 나타나 장성, 고간 등은 도망가고 두기는 위고를 잡아 처형하였으나 나머지는 모두 사면해 생업으로 돌아가게 했으며, 이러한 두기의 역할로 하동은 가장 빠르게 평정되어 피해가 적었다.

1.1.3 하동태수

1.1.3.1 정치 형태

두기는 하동태수로 있으면서 관용과 의의를 제일로 삼아 민중에 관여를 최소한으로 한 정책을 펼쳐 그 효과가 대단하였다. 한 번은 두 군민이 서로를 고소한 일이 있었는데 두기는 서로 이들을 만나 대의를 얘기해 반성하도록 하면서 그래도 앙금이 남으면 그제서야 관청으로 다시 오라고 하니 이 말에 노인들이 "태수께서 이러한 분인데 어째서 이 일에 따르지 않는 것이냐!"라고 말해 송사는 적어졌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그냥 송사 관련 일은 하기 싫은 거다

또 관하의 속현에 효자 열녀 착한 손자를 추천하도록 했으며, 그들의 부역을 완화시키면서 기회가 있으면 그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 주민에게는 암소, 말을 기르는 의무를 조금씩 부과했고, 아래로는 닭, 돼지에 이르기까지 가축을 키우는 규칙을 정해 농업을 권장한 결과 백성들은 윤택해져 삶이 좋아지자 두기는

백성이 부유해졌으니, 이제 가르침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말했다.

이후 겨울에 무구를 익히게 해 무술을 강의하거나 학문소를 열어 스스로 교전을 손에 쥐고 강의해 군 내의 사람들이 교화받았으며, 위략[2]에서는 두기 덕분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동에 유학자가 많게 되었다고 평했다.

1.1.3.2 관중 평정을 위한 수송

이런 정책을 펼친 결과 한수, 마초가 반란을 일으킬 때 홍농과 풍익에서는 많은 현이 그들에 호응했지만 하동만큼은 그들과 가까웠는데도 아무도 그들에게 가담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마초를 토벌하는 조조의 보급품 전부가 이 하동에서부터 수송되어 이 토벌이 끝날 때 비축된 잉여 군량만 20만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감복한 조조는

하동태수 두기는 공자가 말했듯 "우에게는 내가 비난할 바가 없다."라 할 만하다.

라고 말하면서 두기의 봉록을 중2천석으로 올려줬다.

한중을 공격할 때도 5천명을 파견하여 수송을 하도록 했는데, 이들 전부가

사람은 그저 한 번 죽을 뿐이다. 우리 부군(태수)께 등을 돌려선 안된다.

라고 말하면서 단 한 사람의 도망자도 나오지 않았다.

이 기록이 별 거 아닌 것 처럼 보여도 조엄도 한중 수송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제갈량의 북벌에서 제갈량도 언제나 수송에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 낙곡대전에서도 강족과 저족이 맡은 수송이 여러가지 면에서 문제가 생긴 것 처럼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1.1.3.3 하동태수로서의 올바른 행동

하동태수를 지낼 때 유훈사마지조조와의 친분만을 믿고 오만 방자하게 굴며 대추나무를 구해달라고 하자 그럴 수는 없다면서 유훈이 납득하도록 설득했는데, 조조가 "두기는 부엌에 아첨치 않는구나!"라고 하면서 두기의 공적을 여러 주, 현에 돌려서 보도록 한 일이 있었다.[3]

종요를 배웅하는 길에는 두기가 예전에 자기가 하동태수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던 장시를 만났는데, 장시는 두기를 보고 "지난날의 공조가 이제는 군의 장군이 될 줄이야!"라고 탄식한다.

1.1.4 중앙 생활

1.1.4.1 다른 자가 하동태수가 되다

위나라가 건국되자 두기는 상서로 되었지만 임기를 마치자 다시 하동 땅으로 갔는데, 220년 조비가 왕위에 오르면서 관내후 작위를 내려 조정으로 불러들여 상서로 삼았다. 조비가 황위를 잇자 풍락정후와 사예교위가 되면서 식읍이 100호가 주어졌으나 두기가 아닌 다른 자가 하동 땅을 다스리자 문제가 발생했다.

처음 두기가 군에 있었을 때 명에 따라 과부를 올려보냈는데, 각지에서는 남편이 있는 자라 해도 조정의 명이라며 남편 있는 여인을 빼앗아 진상했으므로 길마다 울음 소리가 울렸는데, 두기는 진짜 과부만을 취해 올려 보내 그 수가 적었다. 후에 조엄이 두기를 대신해 하동태수에 오르자 보내는 과부 수가 늘어나 이상하게 생각한 조비가 두기에게

이전에 군(두기)이 보내던 수는 어째서 적었는가? 지금은 어째서 이리 수가 많은가?

라고 묻자 두기는

신이 이전에 올려 보낸 과부들은 모두 남편이 죽은 여인들이었으나, 지금 조엄이 보내는 자들은 남편이 살아있는 여인들입니다.

라고 답해 이 사실에 조비조차 좌우의 신하들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고 한다.

1.1.4.2 죽음

224년 조비가 오 정벌에 나설 때 두기를 상서복야로 삼아 유수의 일을 통괄하게 되어 황제의 어좌선 건조를 맡게 되었는데, 이 배를 도하[4]에서 제갈탄과 함께 시험하다가 풍랑을 만나 침몰해 두기와 제갈탄은 물에 빠지게 된다. 이 때 호분 직책을 하고 있던 자가 제갈탄을 구하려고 하자 제갈탄은 그 상황에서도 먼저 두기를 구하라고 소리쳤지만 결국 두기는 익사했다.

위씨춘추에는 두기의 죽음에 관한 일이 소개되었다.

과거 두기는 어떤 동자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동자가 "사명이 나를 보내어 당신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하자 두기는 목숨을 구걸하니 동자는 "이제부터 군을 위해서 대신할 자를 찾아오겠습니다. 군께서는 이를 남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는데, 이후 20년이 경과해 그 일을 다른 이에게 말하니 다음 날에 향년 62세로 사망했다.

1.2 안목

이회와 곽지의 아들에 대한 평가가 유명했는데, 이회의 아들 이풍은 이미 유명한 명사인 반면에 곽지의 아들 곽충은 못 생겨서 아무도 칭찬하지 않을 정도였으나 두기는

이회에게는 아들이 없구나. 그저 아들이 없을 뿐 아니라 가문도 없어지겠구나. 군모는 죽지 않겠구나. 그 아들은 그의 업적을 잇기에 충분하니.

라고 말하자 주위 사람들이 두기가 드디어 미쳐서 죽을 때가 다가온다고 했지만 후에 이풍은 부자 형제가 모두 다 주살당했으며, 곽충은 대군태수가 되어 사람들이 그제서야 두기의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에 감탄했다고 한다.

1.3 평가

순욱의 성공적인 인재추천 사례로 자주 등장해 오만하고 학문이 얕았지만 뛰어난 지혜와 책략으로 천거되어 이름을 날렸다고 나온다. 자랑하던 것은 진짜로 근자감이었던가 보다.

진수는 너그러움과 용맹스러움이 뛰어났고, 어진 은혜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평했다.

1.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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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1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그의 뛰어난 내정 역할로 인해 높은 정치력을 보유하고 있다. 지력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

삼국지 11의 특기는 그의 운송과 관련된 능력에 의해 수송부대의 이동력이 1 늘어나는 운반을 특기로 가지고 있다. 역사와는 잘 맞는 특기이기는 하지만 그의 능력에 비하면 뭔가 아쉬운 것이 사실.

삼국지 12에서는 전법이 공격약화이다.

2 杜夔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 자는 공량(公良).

사례 하남윤 사람으로 직업은 악사.

음율에 밝아 아악령을 지내다가 188년에 질병에 걸리자 관직을 떠났으며, 사방에 전쟁이 시작하자 형주로 몸을 피했다. 유표가 형주의 온갖 형식을 황제의 것으로 하고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옷과 물품을 썼는데, 유표가 맹요와 함께 한나라 황제가 제사나 조회에 쓸 아악을 만들게 했다.

또한 유표가 결국 관소의 정원에서 이 아악을 연주하라고 하자 두기는 미친새끼가 천자일 줄 알고 나댄다 정도의 말로 유표를 머쓱하게 만들어 유표는 결국 이를 취소하게 된다.

후에 유종이 뒤를 이었다가 조조에게 항복하자 군모좨주에 임명되어 유표와 다르게 이번에는 정말로 황제를 위한 아악을 만들게 했는데, 노래를 잘하던 등정, 윤제, 곡 연주의 윤호 등으로 구성되어 무용의 풍속과 복양을 총괄해 연주를 했다. 황초 연간[5]에는 태악령, 협률 도위가 된다.

시옥이 만든 종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 억울하다고 생각한 시옥이 그 일을 조조에게 알려 조조가 직접 시험을 했는데, 두기의 말이 맞아 시옥과 그 두 아들에게 말을 돌보게 하는 벌을 내린다. 그런데 시옥은 조비와 친한 사이였으며, 일찍이 두기가 빈객들 앞에서 생황을 연주하는 것을 거부하자 조비가 두기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조비가 다른 일을 핑계로 옥에 가두면서 면직시켰는데, 결국 두기는 옥에서 죽었다. 두기에 관련된 이 이야기는 조비의 막장성을 알려주는 또다른 일화이다.

3 杜祺

생몰년도 미상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남양 출신으로 유비가 익주를 평정할 때 염부교위라는 직책을 두어 소금과 철의 이익을 관리하자 교위 왕련이 두기를 전조도위로 임명했다. 두기는 군수, 감군, 대장군사마를 역임했으며, 제갈량이 많은 무장들과 문관들을 모아서 이엄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릴 때 그 이름을 올렸고 이 때 벼슬은 행참군 무략중랑장이었다.

244년에 낙곡대전에 참군으로 참전했고 이 때 왕평이 두기는 유민과 함께 먼저 보내 흥세산을 점거하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으며, 여예와는 친밀한 사이로 당시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출사표에 언급된 장수들 중의 한 사람으로 나온다.

3.1 미디어 믹스

진삼국무쌍6에서는 촉 토벌전에서 조상이 이끄는 위군이 왕평이 있는 서쪽의 군량고를 공격했다가 본진을 공격당하면서 조상이 위기를 맞는데, 위군에서 본진을 구한 후에 조상의 탈출을 도우면서 남동쪽으로 도주할 때 북동쪽의 성에서 유민, 유은, 왕림 등과 함께 촉군의 원군으로 등장한다.

진삼국무쌍7에서 흥세산의 전투에서 유민과 함께 조상이 군사를 이끌고 나간 틈을 타서 위군의 본진을 공격하며, 조상이 퇴로를 차단되서 포위되자 북쪽에서 공격하는 역할을 맡는다.

삼국전투기에서는 낙곡 전투(2)에서 처음 등장. 이름 때문에 '천재소년 두기'의 두기로 패러디되었다.

  1. 위에 나온 두기와의 악우
  2. 참고가 두기가 있을 때는 위략이 쓰일 당시였다.
  3. "과거 중니는 안자에 대해서 안자가 입을 열 때마다 감탄치 않은 바 없었다고 한다. 또 말을 끌어들이려면 준마를 먼저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지금 짐은 여러 사람들이 높은 산을 앙망하며 선행에 힘쓰기를 바란다. (두기를 본받으라)"
  4. 지명 이름.
  5. 220년 ~ 22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