霧社事件.[1] Wushe Incident.
우서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상
1 개요
1930년 타이완 섬에서 일어난 대만 원주민들의 항일 봉기.
이 우서와는 관계없다
2 배경
대만 원주민은 당시 생번(生蕃, 야만인, 원시인등으로 해석)이란 멸칭으로 불리며 차별받고 있었다.[2] 그 전부터 대만 원주민들은 이런저런 항일 봉기를 일으키곤 했었으며 일본은 이들에 이해 동화정책 및 무력진압을 해왔다. 특히 1906년부터 1915년까지 대만 총독을 지낸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는 아타얄족과 부눈족의 봉기를 진압하고 대만 동해안을 개발하는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원주민들은 이런 과정에서 강제이주당하기도 하였다.
3 우서 사건
봉기의 중심 인물이었던 모나 루다오(가운데)의 모습
1930년 10월 9일 대만 북부의 원주민 중 하나인 세디크(Seediq)[3] 족의 족장 모나 루다오(莫那魯道)는 그의 아들 결혼식을 열고 있었는데 순찰을 돌던 일본 경관은 신랑인 모나 루다오의 아들 다호 모나에게 포도주를 따른 잔을 권유받았으나 일본 경관은 금수의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따르는 잔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다호 모나가 계속 잔을 받길 권하자 일본 경관은 곤봉으로 그를 때렸고, 싸움이 일어나 경관이 부상당했다. 그 다음 날 모나 루다오는 사과하기 위해 경관에게 포도주를 바치려 하였으나 이것 또한 거절당했다.
10월 27일 우서 초등학교에는 육상 경기로 일본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나 루다오가 300여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습격해서 134명의 일본인과 2명의 대만인을 살해했다. 이에 일본 측은 2,000명의 병력을 우서로 보내고 심지어 독가스가 주입된 산탄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측에 붙은 세디크 족에게 반란을 일으킨 쪽에 대한 머리사냥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세디크 족도 1,200명의 전사를 조직해서 저항했으나 진압 끝에 세디크 족 중 644명이 죽었다. 3주간의 봉기 끝에 1931년 봉기는 진압되고 남은 세디크 족 500여명도 항복했으나 4월 25일 일본 측에 붙은 원주민 측에 의해 세디크 족 생존자가 습격당해 216명이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1931년 5월 6일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타지로 강제이주당했고 "반란 협력자"의 적발도 계속되었다.
4 평가 및 영향
원래 세디크 족에 대한 총독부 통치는 "효율적"이라 평가받아오고 있었기 때문에 항쟁은 충격을 줬다. 심지어 당시 일본 내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비판이 있었을 정도였다. 대만 총독부는 이후 원주민에 대한 정책을 3.1운동 이후 조선에서 그랬듯 비교적 덜 강경하게 바꾸고 생번 같은 멸칭도 고사족(高砂族)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물론 친일 교육 등도 강화되었다(...)
대만에서도 잊혀지던 이 일은 2011년 오우삼이 제작한 홍콩자본 합작의 장장 276분의 대만영화인 세디크 발레(Seediq Bale)에서 다뤄졌다. 국내 개봉명은 '워리어스 레인보우'. 이 영화를 두고 일본 극우들은 중국이 제작한 반일영화라고 악을 썼지만 니네가 좋아하는 친일 대만에서 만들었는데? 대만에서 흥행도 상당히 성공하고 대만 금마장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베니스 영화제나 토론토 영화제 등 메이저한 영화제들에서도 상영되었다. 다만 영화 자체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라는 평가도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