于仲文
(545 ~ 613)
북주, 수나라의 인물. 자는 차무(次武). 우의의 동생, 우식의 아들, 우근의 손자.
북주에서 동군태수를 지내다가 580년에 울지형의 초대를 받았지만 응하지 않아서 우문위에게 백마에서 공격을 받아 장안으로 도주했고 처자식이 살해당했으며, 하남도 행군총관에 임명되어 우중문이 기운이 없는 군사들로 싸움을 도발하게 하면서 거짓으로 패배해 단양이 대비하지 않자 격파해 5천여 명을 생포하고 700명을 죽였다.
또한 조주를 공격해 이중강을 붙잡고 단양이 성무에 있자 기습 공격을 해서 성무를 함락했으며, 석비라가 10만을 이끌고 패현에 주둔하자 사람을 파견해 서선정에게 다음날 오시에 단양이 금향에 도착해 촉공(울지형)의 명령을 선포하고 상을 내릴 것이라고 속인 뒤에 거짓으로 울지형의 깃발을 세우고 금향에 가서 서선정이 영접하자 그를 붙잡았다. 또한 석비라의 군대를 공격해 격파하고 단양을 붙잡았다.
수나라가 일어서자 행군원수가 되어 돌궐과의 싸움에서 군을 정비된 진용을 해서 싸우지 않게 달아나게 했으며, 수양제 때 우익위대장군이 되었고 612년에 고구려 원정 때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출발했다. 고구려에서 을지문덕을 파견해 거짓 항복을 하자 수양제의 밀명에 따라 그를 붙잡으려고 했다가 유사룡의 만류로 놓아줬다가 후회해서 사람을 보내 속여서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놓쳤다. 이때 을지문덕이 전했다고 알려진 시가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
우중문은 우문술과 함께 을지문덕을 놓치고 나서 불안했고 양식이 떨어진 상태였고 우중문은 정예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을지문덕을 추격하면 공로를 세울 수 있다고 하면서 우문술이 추격하는 것에 반대했는데도 공을 못 세우고 돌아가면 황제를 볼 면목이 없다고 해서 우중문은 우문술이 추격하게 했다.
살수 대첩에서 크게 패하자 장수들은 모두 우중문에게 죄를 씌우고 수양제는 장수들을 석방했지만 우중문만 가두었으며, 우중문은 근심하면서 화를 내다가 병이 발생해 어려운 것이 심해지자 석방되었다가 집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