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遂
춘추시대에 존재하던 소국으로 장강 지류인 운수 유역에 자리잡은 후작의 작위를 받은 제후국이었다. 주(周) 왕실과는 인척관계이며 중원에 위치한 국가로 초(楚)나라와 인접하였다.
초(楚)의 협박으로 주(周)왕실에 초(楚)나라의 작위를 올려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초(楚)의 공격으로 멸망한다.
2 遂
춘추시대에 존재하던 소국으로 성은 규성(嬀姓).
순 임금의 후손이 분봉받은 제후국으로 지금의 산동성 영양현 일대를 영토로 두고 있었으며 노(魯)와는 가까운 위치에 있어 노(魯)의 공격으로 인해 노(魯)의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제(齊)의 환공이 노(魯)를 회맹에 참여시켜 굴복하게 하기위해 공격하자 항복하였으며 이후 제(齊)로부터 노(魯)가 되찾아 다시 노(魯)의 부용국이 되었으며 이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3 隨
춘추시대에 존재하던 소국으로 지금의 호북성 수현 남쪽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초(楚)의 문왕 때 초(楚)의 공격을 받아 속국이 되었다.
이후에 춘추 말기에 오(吳)의 공격을 받아 순복했다고 하나 속국이 된 것인지 멸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4 隋
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기원전 206 ~ 907년 | ||||
기원전 206 ~ 220 | 한(漢) | |||
초한전쟁(楚漢戰爭) 전한(前漢) | ||||
신(新) | ||||
현한(玄漢) | ||||
후한(後漢) | ||||
220 ~ 265 | 삼국(三國) | 위(魏) | 촉한(蜀漢) | 오(吳) |
265 ~ 436 | 진(晉) | 서진(西晉) | ||
동진(東晉) |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 |||
439 ~ 589 | 남북조(南北朝) | 송(宋) | 북위(北魏) | |
제(齊) | ||||
양(梁) 한(漢) 후량(後梁) | 서위(西魏) | 동위(東魏) | ||
진(陳) | 북주(北周) | 북제(北齊) | ||
581 ~ 619 | 수(隋) | |||
618 ~ 907 | 당(唐) 무주(武周) |
만주의 역사 | |||
고대 | 중세 | 근세 | 근현대 |
연(燕) | 고조선 | 동호 | 예맥 | 숙신 / 퉁구스 | |
진(秦) | |||||
전한 | 흉노 | ||||
후한 | 선비 | 고구려 | 부여 | 읍루 | |
조위 | |||||
서진 | |||||
전연 | |||||
전진 | 물길 | ||||
후연 | |||||
북연 | 두막루 | ||||
북위(북조) | 거란 | 실위 | 말갈 | ||
동위 | |||||
북제 | |||||
북주 | |||||
수(隋) |
중국의 역사 | ||||
남북조시대 | → | 수 | → | 당 |
6세기 후반(581년)의 영역 |
남북조시대 이후 세워진 첫 통일왕조. 출신을 따지면 양씨(楊氏)는 북위 초기 무천진(武川鎭)으로 이주하였고, 양견의 아버지 양충에 이르게 되었다. 북위는 선비풍(鮮卑風)의 이름을 중국풍으로 고치는 정책이 펼치다 다시 선비풍으로 고칠 때가 있었는데 이때 한인이었던 양씨도 보육여(普六茹)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보육여는 선비어로 버들이라는 뜻이었다. 황제의 민족적인 선조는 선비족으로 추정된다는 설도 있다.[1] 그러나 까놓고 말해서 이런 설들은 객관적으로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주류 사학에서는 잘 취급하지 않고 있는 편이다. 간단히 그 지역에 살았으니 피가 섞였을 수도 있고 한 선비족이 한족 가문을 먹고 그 행세를 했었을 수도 있는데 이걸 사실로 인정받는 것은 답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 양견에 의해 건국되었다. 수도는 장안으로 결정되었고 이후 문제의 둘째 아들인 양광이 뒤를 이어 양제에 즉위하였다. 이 과정에서 문제를 양광이 암살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양제는 즉위 이후 대운하를 비롯한 수많은 토목사업을 벌였으며, 용선을 타고 지방으로 자주 유람을 다니는 등 꽤나 사치스러운 행태를 보였다. 또한 남북조시대 동안 무너진 주변국과의 질서 회복을 위해 돌궐과 서역에 위치한 토욕혼(土谷渾)을 정벌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양제는 얼어죽을 뻔했지만...
자꾸만 쌀쌀맞게 구는 고구려를 혼내주기 위해 동서를 막론하고 유사이래 최대규모로 일컬어지는 113만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에 대한 원정을 시도한다. 엄밀히 따지면 300만 대병이다. 자치통감에서는 113만의 병사에 수송대가 그 두 배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수 중심의 천하관 확립과 관계가 있다. 고구려는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수 양제가 돌궐의 계민가한을 방문했을 때 고구려 사신을 목격함에 따라 고구려와 돌궐의 연계를 경계하게 된다.
하지만 을지문덕을 비롯한 고구려군의 맹렬한 저항과 내정불안으로 인해 3차례의 원정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이 때문에 국가 재정은 파탄났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양제는 강도로 피난가게 되고 결국 618년 우문화급의 반란군에 의해 양제가 효수되면서 멸망한다.
수나라때 세워진 운하.
그렇지만 수는 이후 중국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율령의 핵심인 3성6부제, 과거제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수문제와 수양제가 굴착한 운하는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중국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나라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중국의 재통일이었다. 후한 말기의 황건적의 난 이후로 삼국시대와 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 등을 거치며 400년간 혼란의 연속이었던 중국 대륙을 평정하여 이후 당나라의 전성기에도 영향을 미쳤다.[2]
진나라와 약간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의견도 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여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되었고, 이러한 기반이 진나라 멸망 후 한나라가 오랜 기간 부흥할 수 있는 기틀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수나라 또한 중국을 통일하고 3성 6부제, 과거제 등의 제도를 실시하여 당나라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나라는 초대 황제가 기틀을 쌓아 나라를 크게 발전시키고 2대째에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붕괴되어 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담으로 수문제는 전 왕조인 북주의 우문씨들을 모두 도륙냈는데 훗날 우문화급의 난으로 그의 후손들인 양씨 역시 대거 주살된다. 우문씨들에게 가한 업보라고 하는데 정작 본인의 가계는 북주와는 관계가 없다. 그나마 증손자인 양정도(楊政道)[3]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대를 이어나가게 된다.
4.1 역대 황제
대수 | 재위기간 |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능호 |
추존 | 추존 | 태조 (隋太祖) | 무원황제 (武元皇帝)[4] | 양충(楊忠) | - | - |
1대 | 581~604 | 고조 (高祖) | 문황제 (文皇帝) | 양견(楊堅) | 개황(開皇, 581~600) 인수(仁壽, 600~604) | 태릉(太陵) |
2대 | 604~618 | 세조 (世祖) | 명황제 (明皇帝), [5] | 양광(楊廣) | 대업(大業,605~618)[6] | 양제릉(煬帝陵) |
임시 | 618 | 진왕(秦王) | 양호(楊浩) | - | - | - |
추존 | 추존 | 세종(世宗) | 효성황제(孝成皇帝)[7] | 양소(楊昭) | - | - |
3대 | 617~618 | - | 공황제 (恭皇帝) | 양유(楊侑)[8] | 의녕(義寧,617~618) | 장릉(莊陵) |
임시 | 618~619 | - | 월왕(越王), 황태주(皇泰主)[9] | 양통(楊侗) | 황태(皇泰, 618~619) | - |
- ↑ 출처는 ^ アーサー・F・ライト『隋代史』(法律文化社)P64は、普六茹をモンゴル語で柳の一種(楊)を意味する「ブルスカン」の転じたものとみる。姚薇元『北朝胡姓考(修訂本)』(中華書局、2007年)P72-73は、楊氏(普六茹氏)は雁門茹氏、つまりは茹茹(蠕蠕、柔然)の後裔とみる。
- ↑ 사마씨의 서진도 삼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은 했다지만 사마염의 방종과 갖가지 난리통으로 얼마 안가 다시 분열...
- ↑ 양제의 차남 양간의 유복자.
- ↑ 문제 추증
- ↑ 보통은 당나라가 비하할 목적으로 올린 양제(煬帝)라는 시호가 더 잘 알려져 있으나, 정식 시호는 명황제이다. 그 외에 민황제(閔皇帝)라고도 한다.
- ↑ 3대 황제 수 공제와 재위기간이 어느 정도 겹치는데, 이것은 수양제는 강남으로 피난가서 죽었기 때문이다.
- ↑ 황태주 추증
- ↑ 당고조 이연에 의해 장안에서 옹립된 황제. 재위기간이 약간 겹치는 것은 당고조가 수양제를 태상황으로 간주(즉 폐위)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꼭두각시 황제였으며, 선양후 619년 암살당했다.
- ↑ 공황제(恭皇帝)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