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일기

201305052156.jpg
(윤치호의 영어일기 자필)

윤치호가 청년시절부터 죽기 전까지 꾸준히 저술한 일기다. 1883년 1월 1일부터 1887년 11월 24일까지는 한문으로 일기를 쓰고 1887년 11월 25일부터 1889년 12월 7일까지의 일기는 국문으로 썼으며 1889년 12월 7일 이후의 일기는 영어로 저술했다.

윤치호는 어학실력이 매우 뛰어나 한국에서 제대로 영어를 배운 거의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영어일기를 보면 오늘날 미국인들이 봐도 어려워하는 라틴어계열 고급어휘를 매우 많이, 자유자재로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윤치호가 그의 천부적 어학능력을 한국어를 위해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1] 만약, 그가 이 시기에 서양의 대표적 저작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작업을 거들어 주었다면 근대화 과정에서 독자적인 문어 전통을 어느 정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며 현대 한국어에 대한 일본어 영향이 꽤 줄었을 것이다. 일본어 잔재론도 덜 나왔을 것이고..[2]

구한말 정치인으로서[3], 일제강점기 개혁운동가로서, 친일파로서(...) 자신의 매우 솔직한 생각을 숨김없이 터놓았고[4] 당시 주변 환경에 대한 온갖 자잘한 내용들이 적혀있어 한국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개인 회고록이 그렇듯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영국사와 서양근현대사 전공인 박지향 서울대학교 교수가 이 일기를 통해 윤치호에 대한 수정론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청년 시절 일기(1884년 5월 15일자)에는 KYEKANヲシタ(KYEKAN오 시타 = KYEKAN을 했다)라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있는데 이것이 '계간'(鷄姦)을 뜻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해석해놓고 있다.# 정말 계간이라고 해도 단순한 남색인지 양성애인지는 알 수 없다.

문학사상사에서 일제 강점기 시기 일기 중 중요 대목을 발췌 번역한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라는 책이 나와있다.
  1. 조금 앞선 시기 후쿠자와 유키치니시 아마네등의 일본인 번역가들이 만든 번역 한자어 들이 바로바로 근대 일본어에 흡수되었고 나중에 한국어,중국어에도 큰 영향을 미치도 했다.
  2.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오히려 다행인 것이 친일파였지만 어학적 재능은 탁월했던 그가 번역작업에 손을 대었으면 현대 한국어 어휘 대부분이 그가 만든 단어들로 구성되었을 것인데, 이러면 후세 입장에서는 싫어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어 어휘의 기초를 친일파가 만들었다는 것에 멘붕할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고, 불편한 진실 중에서도 제일 불편한 진실이 되었을 것이니...
  3. 이 때 세계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는데 고종이 결단력을 확실히 못내리고 우유부단하게 대처한다고 비판하였다.
  4. 윤치호 본인은 독립협회 활동 전후 시기에 차라리 일본서 살고 싶다거나 조선은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게 더 나을거다 운운하는 글을 자기 일기에 적어놨다. 이 시기 윤치호 일기를 보면, 미국은 인종차별하고 중국은 더럽고 조선은 중국보다 못한데 일본은 세계의 정원으로 가장 아름다운 낙원이다라고 칭송하고 있다. 윤치호 일기가 본격적으로 번역되면서 윤치호의 친일 협력 시기를 상당히 앞으로 당겨잡는 이들이 많아졌다. 다만 윤치호 일가가 상당히 행동을 조심하였으며, 윤치호의 행동이 전형적인 민족계몽운동에 닿아있어서 윤치호를 친일로 비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똥이 튀고, 무엇보다도 윤치호의 독립협회 활동에서 친일적 요소를 찾으면 안그래도 깨끗하지 못한 독립협회가 다시 또 까이게 된다라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친일 협력 시기를 쉽게 올려잡지도 못하는 상황. 105인 사건은 윤치호를 높이평가하려는 이들에겐 축복이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