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무라 히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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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村均(いまむら ひとし)

1886년 6월 28일 ~ 1968년 10월 4일

휘하 장병들의 안위를 끝까지 걱정한 덕장.
휘하 장병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해 수많은 전쟁범죄를 방치한 무책임한 지휘관.

1 개요

미야기 현의 센다이 출신으로, 도쿄에서 공부하던 중 일본 천황의 행차를 호위하는 육군의 위용을 보고 바로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한다. 판사였던 아버지가 영 군인을 탁탐치 않게 여겼기 때문에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고 했다. 처음에는 지병으로 고생했지만[1] 친구의 도움으로 육군유년학교-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교를 모두 수석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었다.

2 2차대전시기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제16군 사령관으로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공략을 지휘, 불과 9일만에 약 9만 3천의 네덜란드군과 5천명의 영국군·미군·호주군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의 가장 중요한 전략 목표였던 팔렘방의 유전지대를 확보했다.

이 인도네시아 공격 당시 한 일화가 있는데 당시 일본 육/해군 간의 심각한 팀킬이 있었다. 제2차 자바 해전 당시 육군 병력이 탄 수송선단이 이동 도중, 미 해군 순양함과 호위함이 교전을 벌이다가 오인사격으로 수송선을 여럿 격침시켜 버렸고, 히토시 본인도 물에 빠지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난리가 날게 뻔했지만 두루뭉술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수송선단의 호위 임무를 지휘하는 오자와 지사부로가 본래 계획보다 호위 전력을 대폭 증강해 주어서 인도네시아 공략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 때문에 해군 측에 감사를 표하던 이마무로 본인이 수송선의 격침은 연합군 해군에게 공격받은 것으로 치자며 넘어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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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이마무라 히토시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호감을 얻었고, 포로학대와 학살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게 유명무실한게 밑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무려 300건이 넘는 전쟁범죄를 막지 못했다. 물론 표면상으론 무언가를 했다는 것에 전범재판에서 관대한 형을 받는 이유중에 하나가 된다. 당시 자바섬에 목면은 생필품으로 중요하게 사용되었는데, 목면을 징발하면 현지인들의 장례식에서 죽은 자에게 목면옷을 입히는 종교 전통을 손상시키고, 목면이 주수입인 기본 생활을 파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중일전쟁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태도가 문제가 되어 결국 1942년 11월에 현지를 떠나게 되었지만, 공훈이 공훈이라 좌천을 포함한 처벌은 거의 없이 영전이라면 영전인 제8총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3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했다.

1942년 말부터 8방면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마무라의 후임 사령관인 바바 마사오는 전후에 민간인 학대와 전쟁범죄로 사형당했다. 여기에 네덜란드 민간인 위안부 강제동원 사건도 터지는 등 다른 곳보다는 여전히 낫기는 해도 꽤 막장화되었다.

이마무라 히토시는 라바울과 뉴기니 섬 인근 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운이 좋게도 라바울은 농사를 짓기에 용이한 기후와 토양을 가져 태평양 전쟁 때 라바울에서 직접 농사까지 지어가며 종전까지 버텨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덕분에 일본군 중 거의 유일하게 식량 보급으로는 곤란을 겪지 않은 곳이었다. 그와 반대로 트럭섬에 있는 일본군은 미군이 해상봉쇄를 가하자 농사를 짓지 못했고 많은 수가 굶어 죽었다. 미군은 애초부터 라바울을 공략할 생각이 없었다.[2]라바울의 해군, 공군병력을 무력화 시키면 해상주도권이 미국에게 있는한 라바울에 있는 일본군은 고립될것이고 미군은 마음 놓고 전진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더군다나 라바울의 방어 시설과 보급도 잘 되어있는 데다가 병력도 8~13만명이 주둔하고 있어서 만약 미군이 상륙했으면 (2만여명의 일본군이 주둔했던) 이오지마는 놀이터처럼 보일정도로 대격전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래서 미군에게 라바울은 피해를 무릅쓸만큼 점령할 큰 전략적 가치가 없었다.

3 전쟁 이후

전쟁 이후 이마무라 히토시는 휘하 장병들의 본국 조기 송환을 위해 호주 군 당국과 공조하였다. 일이 마무리되자 1946년 7월 독약을 마시고 면도칼로 목을 그어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호주 전범재판에서 연합군 포로들을 처형시키는걸 용인하고 2만여명의 인도인들을 강제로 인도국민군에 배속시켰다는 혐의로 B급, C급 전범으로 10년형을 선고 받게 된다.출처 그는 재판에서 부하들을 잘 통제하지 못했다는 혐의를 인정했으며 죄를 저지른 자신의 부하들에게 제대로된 처벌을 받을수 있도록 자신의 재판을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호주 전범재판에서 라바울에서만 이마무라 대장을 포함한 390명이 전쟁범죄에 대한 재판을 받았고 266명이 유죄를 선고 받고 무려 87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단순 전범들의 숫자만 봐도 다른 일본군 점령지를 훨씬 상회한다. 이마무라 대장이 휘하 장병들의 전쟁범죄를 적극적으로 막았는지에 대해서 의심의 가는 부분 출처.

  • 싱가포르전투에서 수많은 인도인포로들이 뉴기니에 수감됐는데 많은수의 포로들이 이마무라 대장 휘하 장병들에 의해 학대받거나 처형당했다. 무려 66건의 전범 케이스가 있었고 36명이 처형당했다. 음식을 훔친 죄로 15명의 인도인들이 제대로된 재판도 못받고 처형당했으며 인도인 포로들끼리 싸움이 나자 일본군 장교가 싸움을 벌인 두인도인을 그자리에서 즉결처분한 케이스가 있다. 또한 강제 노역을 하던 인도인이 쓰러지자 일본군 관리장교가 심하게 구타를 했고 내출혈이 일어난 인도인은 이틀후 사망했다.
  • 800명의 중국인 포로도 라바울에서 강제노역을 했는데 수많은 포로학대와 즉결처분 사건으로 22건의 재판이 있었다.
  • 영국인 포로를 학대한 케이스도 몇건 있었다. 한 예로 한 영국인 포로가 말라리아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자 일본군 병사가 그를 끌어내어 두들겨 팼고 그 영국인 포로는 4일후 사망했다.

그외에도 많은 전범재판 케이스들이 있었으며 많은수의 포로학대가 지휘관의 제대로된 조치만 있었더라도 충분히 막을수 있었다. 라바울의 일본군의 상황이 얼마나 개판인지 알수있었던 상황. 만약 일본군이 열악한 상황에 처했다면 어느정도 이해가 갈수도 있지만 라바울은 다른 일본군 기지에 비해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식량난도 없었고 대대적인 적군의 공격도 없었다. 그런데도 수많은 전범케이스가 나온걸보면 이마무라 대장의 책임이 없을래야 없을수가 없다.

호주 전범재판에서 이마무라 대장의 변호사는 이 모든 전범들에대한 무지로 선처를 요청했으며 실제로 이 많은 포로학대건을 몰랐는지 알수 없지만 재판부는 그 의견을 받아 들였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상황이 처했던 라바울의 참모장 아다치 하타조 중장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 이유로는 아다치 중장을 포로학대건들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물론 아다치 중장의 변호사가 이마무라 대장의 변호사와 비슷한 주장을 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지휘관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옳았는지는 확실히 알수는 없다. 하지만 재판부의 판단이 옳았다고 해도 이마무라 대장의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 그는 무책임하게 부하들을 통솔했으며 많은수의 죄없는 포로들이 학대 받거나 죽어 나갔다. 오히려 그의 책임에 비해 너무나도 관대한 형벌을 받았다. 그의 하관 아다치 중장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종신형을 받았기에 이마무라 대장은 큰 형벌을 피할수 있었다.

이마무라의 유죄 여부와는 별개로, 적어도 휘하 장병들에게는 존경받는 덕장이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이마무라가 전후에도 휘하 장병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 점에 대해서는 더글라스 맥아더조차 "일본에 온 이래 처음으로 참된 무사도 정신을 접한 것 같다"며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3]

일본군 장성으론 드물게 최소한의 개념자체는 있는 인물이었다. 그 예로 강간죄로 사형을 선고 받은 장교에게 항소를 금지한적이 있다. 물론 그 장교는 항소를 하던 말던 사형이란건 변하지 않지만 이마무라중장의 최소한의 도덕성을 보여준다. 물론 모든 부하들에게 그런건 아니고 학살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몇몇 장교들에게 탄원서를 써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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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의 모습

이후 출소하여 일본에 귀국한 뒤 은둔 생활을 하면서 회고록을 출판했으나, 인세는 전부 전사자들의 유가족을 위해 쓰고 본인은 군인 연금만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전쟁의 책임을 반성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필리핀 공격 지휘관이었던 혼마 마사하루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19기 동기이며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에히메현의 호국신사에 이마무라의 이름이 '순국 22열사의 비'에 새겨져있다. 참고로 이 비석에 새겨진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다치바나 요시오다.

도쿄의 국립국회도서관에 그의 육성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무타구치 렌야의 육성도 남아있다고 한다.

  1. 현대의학으로 분석한다면 가벼운 기면 발작이 있었다. 전공시간만 되면 갑자기 졸음이 쏟아젔다고.
  2. 정확히 설명하면 과달카날 전역 이후 1943년 전 기간동안 남태평양의 미군(홀시+맥아더)이 라바울 점령을 목표로 카트휠(수레바퀴)작전을 펼쳤으나 작전 중반 개구리 뛰기의 작전술(?)을 발견하고 라바울을 우회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는 1944년 3월까지 라바울 외곽의 섬 거점들을 점령하고 종결..
  3. Tsunoda Fusako, Sekinin Rabauru no shogun Imamura Hitoshi (Tokyo: Shincho-sha, 1984), p.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