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와 지사부로 | |
생애 | 1886년 10월 2일 ~ 1966년 11월 9일 |
출생지 | 일본미야자키현고유군다카나베정 |
사망지 | 일본도쿄도세타가야구 |
복무 | 일본제국 해군 |
복무기간 | 1910년 12월 15일 ~ 1945년 10월 10일 |
최종계급 | 중장 |
주요참전 | 제2차세계대전(태평양전쟁) 필리핀 해전, 레이테 만 해전 |
서훈내역 | |
묘소 | 다이키치사 고향 |
목차
自殺するためには、独りでやって[宇垣纏に]자살하려면 혼자 하지[우가키 마토메에게]
敗戦の責任はあるが、開戦の責任はない。 私は最後の連合艦隊司令長官としてその最期を注視する。패전의 책임은 있지만 개전의 책임은 없다. 나는 최후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그 최후를 지켜보겠다.
1 개요
2 일생
2.1 학창시절
오자와 지사부로는 어릴 때 폭력소년으로 소문나 시비 거는 불량배를 다리 밖으로 던져(!)버렸는데 이 일로 그는 중학교에도 퇴학당하게 된다. 실의에 빠져있는 지사부로에게 형의 군대 상관인 육군 장교가 열심히 공부해서 장교가 되라는 편지를 써서 보내니 마음을 바로잡고 공부하여 제7고등학교 조사관(造士館)에 합격하였다. 얼마 안있어 오자와 지사부로는 해군병학교에 합격하였고 예전에 뜻한대로 해군 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2.2 장교 시절
졸업한 후 소위후보생으로 순양함 무뇌야슴가야"무네야"에 탑승하였다. 그런데 이 때의 함장은 태평양 전쟁 패전 직전의 수상이 되는 스즈키 간타로 대좌였다. 그리고 후보지도사관은 다름아닌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위였다. 그는 태평양전쟁 발발전까지 제1항공전대의 사령관으로서 기동부대를 육성해냈다. 원래는 겐다 미노루 중좌가 항공전대의 창설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을 그가 해군중장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에게 건의하면서 창설되게 되었고 이로 인해 1항전과 2항전이 창설된 것. 그러나 후에 이 두 항공전대는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미드웨이에서 제대로 말아먹게 된다.
2.3 남방함대 사령장관
1941년 남방함대 사령장관 재직시의 오자와 제독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말레이 부대 지휘관 겸 남파함대 사령관을 맡았다.
이 남방작전 당시에도 오자와 제독은 여타 일본장성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는데, 남방작전에서 육군을 지휘한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이 수송함대 호위의 빈약함(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을 우려해서 호위함대 증원을 상부에 건의했으나, 해군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었던 남방총군 사령부는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마무라 장군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남방함대 사령관인 오자와 제독을 만나 호위함대 증강을 요청했다.
이에 오자와 제독은 호위함대를 대폭 증강(중순양함 4척, 경순양함 3척, 경항모 2척, 구축함 19척)하고 거기다 추가 타격함대(!!!)까지 편성해서 파견해주었고, 이렇게 증강된 일본 함대는 자바 해전에서 연합군 함대를 격파해서 육군의 자바섬 공략을 효과적으로 엄호했다. 이 조치에 일본 육군이 얼마나 감격했던지 이마무라 장군이 탄 수송선이 모가미급 중순양함 모가미의 어뢰 오인사격으로 격침당했을 때, 작전종료 이후 수송선 격침건을 사죄하러 온 해군 장교들에게 이마무라 장군이 영국 해군 순양함에서 발사한 어뢰로 인해 격침된 것으로 하자고 말하면서 없던 일로 해버렸다. 일본 육군이 일본 해군 제독의 약점을 덮어준 셈이다. 육군과 해군 사이가 그렇게나 좋지 않았던 일본군이 말이다!!![1]
그리고 1941년 말레이 해전에서 영국 해군의 Z기동부대 소속의 전함인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 함과 순양전함 HMS 리펄스 함을 오직 1,000km가 넘는 거리에서 출격한 뇌격 무장과 폭탄을 장착한 쌍발 폭격기만으로 격침시켜 버린다.[2] 이때 그는 중순양함 초카이[3]에서 지휘하였으며 영국 함대와 야전이 벌어질뻔 했으나 영국 해군이 발견하지 못하여 교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2.4 필리핀 해 해전
1944년 나구모 제독의 후임으로 제1기동함대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가 제대로 항모기동부대를 잡자마자 처음으로 맞는 전투가 재수없게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으로 불리는 필리핀 해 해전이었다.[4] 이때 그는 아웃레인지 전술[5]을 사용해서 미 해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때의 일본 해군은 도저히 이 전술을 수행할 정도로 제대로 경험이 쌓이지않은 데다가 태반수가 제대로 훈련도 못 받은 조종사들이었다.[6] 거기에 미 해군 조종사들은 이미 베테랑에 뛰어난 기동부대가 있었던 덕에 공격하기도 전에 말 그대로 녹아 버렸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기함인 항공모함 다이호[7]와 쇼카쿠 등을 잃고 패배하게 된다.
이 해전에서 오자와 제독은 기동함대를 이끌기에는 너무 무능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항공기 운용에 관련된 모든 인물들이 파일럿의 기량을 무시한 무리한 작전이라며 아웃레인지 작전에 반대했지만[8] 듣지 않았고, 이후 칠면조 사냥에서 어렵사리 살아돌아온 파일럿들도 '최소한 이 작전의 절반 정도 거리에서 출격했다면 공격기가 3배는 살아남아서 적 항모에 도착했을거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항공참모였던 오쿠미야 마사타케 대좌는 '오자와 제독은 항모전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다'라며 맹렬히 디스. 야마구치 다몬 제독이나 하다못해 나구모 주이치 제독[9]쯤만 됐어도 이것보다는 제대로 된 작전을 세웠을 것이라는 평가까지 있다. 어쨌든 역사에 남을 참패를 당했으니 욕을 먹을 수밖에 없기야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당시 미 해군 기동부대는 규모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자신있게 세계 최강이라고 할만한 수준이었고 햇병아리 파일럿들과 훨씬 작은 규모의 기동부대를 가진 일본 해군이 정면승부를 했다면 항모 셋 가라앉는 것으론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아웃레인지로 공격을 건 것 때문에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을 정말 쫓아가도 되는가를 두고 참모진들이 토론까지 했었고 이 이후 복귀과정에서 잃은 항공기 피해도 굉장히 컸음을 봤을 때 절반 거리에서 출격했다면 아마 오자와 제독은 지금보다도 더 욕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의외로 오자와 제독이 미 해군측 지휘관이었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의 행동을 대부분 예측한 건 사실이다. 실제로 스프루언스 제독의 움직임은 오자와의 예측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스프루언스 제독이 미 해군 최고의 명장 중 하나임을 감안하면 이건 대단한 일이다.[10]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적을 먼저 발견하고 공격을 시작한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스프루언스 제독도 마찬가지로 일본 해군의 방어계획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 함대를 정박지에서부터 감시하고 견제했으며, 오자와 제독처럼 자군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고 적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자와 제독은 스프루언스 제독의 행동을 예측하긴 했어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함재기의 중간 착륙지로 삼은 괌이 불바다가 되고, 항모전단이 개발살나고, 함재기가 수백 대씩 추락하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알면서도 못 막는 벙커링
2.5 레이테 만 해전
1944년 10월 25일 세계 최대의 해전이었던 레이테 해전에서는 함대를 이끌고 윌리엄 홀시 제독의 제38기동부대를 끌어내는 미끼로 전락하게된다…. 그런데 그마저도 얻어터지고 돌아와야 했다. 그저 안습…. [11]
2.6 연합함대 사령장관
1945년 그는 최후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되었다.[12] 그러나 이때는 군함들이 이미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타고 없어서 지휘할 전력이 없었다. 그가 최후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맡았을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패전의 책임은 있지만 개전의 책임은 없다. 나는 최후의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그 최후를 지켜보겠다." 한 마디로 그도 포기했다는 소리다. 포기하면 편해
참고로 그의 최종계급은 중장이었다. 그의 마지막 지위였던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사실상 일본해군의 핵심 전투함 전부를 지휘하는 위치인 만큼 진급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진급할수 있는 위치였고, 여러 번 대장으로 진급할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거절했다고 한다.
2.7 패전 이후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그는 조용히 자신의 저택에 칩거하였다. 간간히 태평양 전쟁의 전사(戰史)를 조사하러 온 미군 관계자의 방문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지사부로는 주당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위스키고 사케고 말(斗)술로 비워내니 주변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이 아닌가 의심을 할 정도였다.
2.8 죽음
1941년부터 지속된 다발성 경화증으로 80세의 나이로 1966년 사망하게 된다.[13] 죽을 때까지 "부하들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3 평가
자살특공을 반대했던 개념있는 군인이라는 소리가 있지만, 진짜로 그랬는가는 미묘. 오자와 제독 자신이 자살특공 작전의 실행과 특공병기를 양성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고, 폭주하는 우가키 마토메 제독을 막아야한다는 해군부의 요청이 있었으나 의욕있는 자를 막아서는 안된다며 오히려 감싸고 돌기도 했다. 우가키 제독 본인이 특공을 하러 출격한 건에 대해 오자와 제독이 열이 받은 것도 '이미 덴노가 일본의 패배를 인정하고 종전을 선언했는데 혼자 죽으러 가는거면 모를까 무슨 권한으로 부하들을 데리고 가는거냐'는 명령위반을 꾸짖는 취지.
육군이 해군에게 식량수송함의 사용허가를 요청했을 때 특공작전에 지장이 생긴다며 반대한 것도 오자와 제독, 그런거에 쓸 연료가 없다며 반대의견이 거샜던 야마토의 특공에 허가를 내준 것이 오자와 제독이었다.
게다가 전쟁 초기의 개념찬 모습과 달리 말기에는 미국에 대한 세균병기 공격을 주장하는 정신이 홰까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센토쿠급 잠수함을 이용해 미국 서해안부에 생물재해를 일으키자는 발상이었는데, 정작 생물병기를 연구하고 있던 육군쪽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전세계가 일본의 적으로 돌아선다'며 극구반대한 끝에 무산됐다.[14]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에 대해 좀 더 충분한 준비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던 점. 야마구치 제독과 함께 항모를 중앙에 두고 그 외곽에 전함, 순양함, 구축함을 원형으로 배치하고 3개의 항공전대는 투입하여야 한다고 간언하기도 한 점, 그리고 두번 다 알고도 지긴 했지만 마리아나와 레이테에서 두번 연속으로 미 함대의 행동을 예측하는데 성공한 것을 보면 일본군 내에서는 충분히 능력이 있는 제독이었다. 너무 늦게 항모 부대를 지휘하는 자리에 앉았던 것이 그의 문제였다.
4 기타
여담으로 키가 180이 넘어가는 장신이었으며 못생긴 외모 때문에 별명이 오니가와라(鬼瓦)였다. 이시이 시로보단 잘생겼는데? 그건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니까 제외 심지어는 미국의 다큐멘터리 'Battle of 360에서마저 그를 가고일이라고 부른다. [15]
보기와 다르게 유리멘탈이었는지 필리핀 해 해전 당시 다이호가 굉장히 인상적으로 폭침 당하고 구축함에 옮겨탄 직후 자기 담뱃불도 자기 손으로 붙이지 못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항모가 터졌으니 그럴만도한데 두 번은 터져 보고 그러든지
- ↑ 이마무라 히토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마무라 장군이 상당히 개념인이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 ↑ 당시 일본 해군은 소련 해군과 함께 해군에서 육상 발진하는 쌍발 폭격기를 자체적으로 운용했는데, 이때 활약했던 기체가 바로 G4M 베티다.
- ↑ 현재는 공고급 이지스함이 이 함명을 계승했다.
- ↑ 이 해전을 끝으로 일본항모세력은 재기불능이 되었다.
- ↑ 말 그대로 적의 사거리 밖에서 선제공격을 날리는 전술이다. 모든 면에서 열세였던 일본의 함재기들이 지닌 유일한 이점이 바로 항속거리였는데 이를 이용해서 함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 ↑ 다만 이 전투에서 오자와 제독 본인의 실수도 좀 있다. 그건 바로 일본 해군과 미 해군의 전력차를 과소 평가해서 함재기를 네번에 걸쳐 나누어서 보냈다는 것. 과도하게 공격이 몰릴 경우 일부의 중요목표물에 공격이 집중하게되 전체적인 공격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공격부대를 나눠서 시간차를 두고 공격이 이루어지게 보내는게 보통이지만 당시 일본 해군으로서는 공격의 극대화를 생각하기전에 얼마나 많은 기체가 공격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단적인 예로 해전 당시 일본 해군의 모든 함재기를 합친 것보다 미 해군의 전투기가 더 많았었던 상황이었다.
- ↑ 이 항모의 최초의 출진이자 최후의 출진이기도 했다. 안습
- ↑ 당시의 비행대장들은 '만약에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베테랑 에이스들이 전부 되살아나더라도 불가능하다'라는 소리까지하며 이 아웃레인지 공격에 부정적이었다.
- ↑ 최소한 자신이 항공기 운용에 무지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지라 작전 입안에 참모와 파일럿들의 의견을 중시했다.
- ↑ 그런데 스푸르언스 제독의 부하 중 하나인 마크 미처 제독은 달랐다.
- ↑ 그래도 홀시 뚜껑이 열릴만큼 미끼 임무 하나는 완벽하게 수행했다. 홀시는 이때 오자와에게 낚인 일로 두고두고 씹히게 된다. 하지만 일본군답게 주공인 구리다 함대와 손발이 안맞아서 그것도 시망. 미끼 역할을 담당한 항공모함 네척은 전부 다 가라앉았다.
- ↑ 야마모토가 시찰나갔다가 끔살당하고, 고가 제독이 실종되고, 토요다 제독의 직위 변경으로 자리가 비어 태평양 전쟁 당시 네번째의 사령장관이었다.
- ↑ 지사부로의 장례식에 당시 일본 덴노였던 히로히토가 후한 조의금을 보내주었다.
- ↑ 오자와 제독이 저렇게 정신줄을 놓게 된데는 미 함대의 판타지 소설급 전투력에 궁지에 몰린 것도 한몫 했다. 같은 추축군의 해군 총사령관이던 카를 되니츠 제독도 전쟁 초기에는 상식적이고 훌륭한 제독이었으나 전쟁 후반기에는 오자와 제독처럼 비상식적인 발상을 내놓게 된다.
이건 뭐 가망이 있어야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 ↑ 국내 자막에선 '괴물'로 번역되었다. 이 별명을 모르던 사람들은 '오 그렇게 실력이 좋은가?'하고 생각했다던 후일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