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타구치 렌야

일본군 삼대오물
무타구치 렌야스기야마 하지메도미나가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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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을 입힌 사진도 있다.깜놀주의

자꾸 보면 정든다. 한국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열망하며 불타오르는 저 카와이한 눈빛을 보라.
일본 제국원균[1]

"언제까지나 정글 속에 있어봤자 굶어 죽기 십상이지."[2]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むたぐちれんや)[3]
(1888년 10월 7일 ~ 1966년 8월 2일 향년 77세)

1 소개

일본군에 숨어있었던 독립군의 장군이자 일본군 삼대오물의 독보적인 원탑. 그리고 일본 패망의 장본인 중 첫째.사실 무능한 정도만 놓고 보면 도미나가 교지 쪽이 더 병신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인지도가 월등히 더 많아서인지 도미나가는 잘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프렌드 실드

일본군 소속의 장성. 최종 계급은 중장. 대한민국에서는 도미나가 교지,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일본군 팀킬의 귀재이자 인간 과부제조기로 유명하며, 바닥이 없는 무한한 무능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 셋은 서로 호형호제하고 다닐 만큼 친했다. 이뭐병

그래도 츠지는 전략 면에서는 다른 2인과 똑같이 무능했으나 그나마 줄타기와 처세술에는 능해서 패전 뒤 정치인을 하는 등 능력이라고 봐줄 만한 건덕지는 있었는데[4] 무타구치는 그런 것도 없었고 그냥 무능했다.

무타구치의 만행(?)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라고 감탄과 조롱을 섞어서 부른다. 심지어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무능한 일본군 패장들까지 미화하고 찬양하는 일본 극우들조차 이 인간은 전쟁과 패망을 이끈 '삼간사우(三奸四愚)'를 능가하는 '삼대오물(三大汚物)' 중 하나로 일컫고 학을 뗀다. 참고로 많은 우리말 문헌에서 무타구치 렌야를 삼간사우의 한 사람으로 꼽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더한 면모를 보였기 때문.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2 초기 생애

무타구치는 1888년 10월 7일에 태어났고 22세이던 해인 1910년 육군사관학교를, 1917년 29세의 나이로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시베리아 침공에 참전했고 이후 프랑스에 주재무관으로 갔다. 소좌 계급일 때 캄차카 반도에 잠입하여 홀로 정탐 활동을 벌였다고. 여기까지 보면 그냥 평범한 고급장교 A처럼 보이나...

3 업적(...)

삼대오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가 저지른 만행은 현재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하는 위대한 독립투쟁이라고 봐도 좋을 지경이다. 시작은 다름아닌 중일전쟁 이전에서부터였다.

3.1 중일전쟁에서의 그의 경애로운 일화들

월권으로 루거우차오 사건, 통칭 노구교 사건중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무타구치는 당시 루거우차오에서 연대장으로 복무 중이었다. 훈련 중 휘하 병사 하나가 똥 싸느라 화장실에 가서 인원수가 안 맞자 중국의 소행이란 섣부른 보고가 올라왔는데, 사태 파악도 않고 독단으로 중국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불법전투 개시다.

그리고 이게 다가 아니라 나중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고 중일 간의 협상이 벌어지는 와중에 대놓고 "상관 없다! 공격하라!"고 굿판을 벌여서 회담장을 엎어 놓았다. 너무 황당한 공격 명령이라 부하들이 "정말 공격해도 됩니까?"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그때 그는 전쟁을 개시할 권한이 없는 일개 연대장일 뿐이었다.

사실 이는 당시 일본군 전체에 만연했던 분위기로, 1931년에 이시와라 간지가 자기 멋대로 만주를 침공하는 행패를 부려놓고도 오히려 영전하자 '정부 말 좀 어기면 어떠냐? 나만 승진하면 그만이지' 식의 생각이 온 장교들 사이에 팽배했다. 무타구치도 그 중 하나였고, 그게 제대로 건수를 터트린 셈이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정작 그는 노구교 전투에는 코빼기도 안 내밀었던 주제에 작전회의에서는 멀쩡한 팔에 붕대를 감고 나와 다친 척을 했다. 사실 이건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용맹'을 자랑하기 위한 쇼였는데 서로들 뻔히 아는 작전회의에서까지 그 짓거리를 했던 것이다. 임팔 작전 문서에도 있지만 무타구치가 환장하는 3가지 중 하나가 기자였다. 이는 <밀리터리 실패열전>(홍희범 저, 호비스트)에서 작전 실패와 관련한 첫 사례로 실렸다. 츠지 마사노부는 그래도 스스로 직접 뛰기라도 했는데 자세한 사건 진행은 루거우차오 사건 참조.

사실 중일전쟁을 벌인 건 루거우차오 사건을 구실로 삼은 상층부지만, 이 사건은 이 인간의 차후 행적을 짐작할 만한 일화였다. 이 인간이 이렇게까지 쇼를 해가며 자신을 알린 이유는, 그가 속한 파벌이 1936년에 일어난 2.26 사건의 주동세력인 황도파였기 때문이다. 사건의 결과로 황도파가 대숙청을 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무타구치는 뭔가 공적을 억지로 세우지 않는다면 자동적으로 예비역으로 쫓겨날 처지였던 것. 즉, 자기가 살자고 사건을 뻥튀기하는 데 일조하고 자기 선전까지 한 것이다. 어차피 당시 일본군의 풍조가 민간정부를 무시하는 것이었지만, 무타구치는 그 정도가 심했던 셈.

이 사건 뒤 무타구치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제4군 참모장에 있다가 1939년엔 육군유년학교의 교장에 올랐다.

3.2 싱가포르 전투

1940년엔 중장으로 진급했고 18사단 사단장으로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했다. 여기서 무타구치는 수류탄 파편에 맞아 다쳤다. 이 부상도 엄청나게 황당한데, 부대에서 술 잔치 벌이다 갑자기 날아온 포격을 피하려고 도망갈 때 하수구를 대피소로 착각해서 숨다가 겪었다. 그리고 18사단은 싱가포르 함락 뒤 필리핀의 바탄 반도에 갔으며 1942년 4월에는 버마 전선으로 다시 왔다. 1943년 3월에는 제15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이때 대본영의 인도 진공 계획을 충격적이게도 밀림과 산악에서는 작전 수행이 어렵다며 바로 반대해, 끝내 대본영이 인도 진공을 미뤘다. 여기서 천하의 개쌍놈이자 희대의 인간 쓰레기도조 히데키가 이 일을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다(...)고 극찬했으니 웃기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때는 버마 함락의 후유증으로 인도 국경 쪽 영국군의 상태가 엉망진창이라서 오히려 이때 공격했으면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았다. 더구나 아무리 일본군 육군과 해군의 사이가 나빴지만 1943년 당시엔 일본 해군이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나마 제해권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다를 통한 육해군의 보급과 수송이 과달카날 전투처럼 시궁창이기도 했지만, 1944년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랬던 그가 버마를 지키는 제15군의 사령관이었을 때 인도의 영국군이 버마를 공격하자, 생각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 도리어 자신이 인도 진공을 추진하게 된다. 조지프 스틸웰이 버마 탈환 노래를 부르며 병력을 모은 인도군, 영국군이 예전과는 달리 전열을 정비했던(…) 상태에서 말이다.

3.3 무타구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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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총대장[5]
한국을 독립시킬 늠름한 모습과 타오르는 의지. 그의 의지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눈 앞의 모니터로 넘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 유명한 희대의 팀킬 임팔 작전 등으로 일본군을 수만 단위로 팀킬시킨 역사에 남을 일등 중 하나. 파벌과 인맥으로 카스트 제도 같은 계급을 결정하는 일본군 지휘관답게 수많은 실패에도 끝까지 책임을 안 지고 요직에 남았으며, 전후에도 잘 먹고 잘 살았다. 아무튼 군사 교리와 병법의 기본마저도 뒤흔드는 정신 나간 말들을 했는데...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적의 것을 빼앗아 쓰는 것은 고대~중세인, 산업화 이전의 전장에서는 주요 수단의 하나이자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하지만 그 고대에서조차 이 방법은 주류가 아니었다. 당시에도 보급완비가 기본이라는 것은 장군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주류가 되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단 한 번의 전투만으로도 모든 상대편 병사들이 모랄빵 나서 도망친다면 보급을 많이 얻을 것 같지만, 당하는 상대도 바보는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어째 질 것 같아서 바로 청야전술을 편다면 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전투 중에 죽은 적군 병사들의 시체에서 보급하는 방법뿐이다. 현지에서 징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조건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수는 없다. 징발이나 약탈이 가능한 물자는 거주인구의 규모에 따라 한계가 있고,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 부작용으로 현지 물정을 잘 아는 게릴라 등이 양산되거나 적에게 협력하는 수가 있어 최대한 피해야 하는 수단이다.

손자병법에서도 기본적인 보급은 필요하다고 나오는 데다가 19세기에도 프랑스 혁명 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거쳐서 유럽의 군사 규모가 이전 시대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기 때문에 나폴레옹 1세는 보급 문제를 풀려고 공모전을 열어 여기에서 병조림, 이어서는 통조림이 나왔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보급 문제를 상당히 신경 썼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청야전술로 인해 기껏 모스크바까지 치고 들어가서도 혹한과 보급품 고갈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했다는 점에서 보급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전혀 무관한 사항이다. 산업화, 특히 부품 규격을 일정하게 관리한 뒤의 전장에서는 같은 가솔린 연료라도 옥탄가가 다를 수 있고 무장도 탄약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힘들게 되었으니, 보급품을 전장에서 조달한다는 개념은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는다.

아직도 연료, 식량, 보급품의 조달을 점령지에서 하는 전시 지침을 마련한 그런 당나라 군대가 있냐고 묻는다면, 사실 존재한다. 남한 도시 하나를 점령한다면 수많은 연료, 식량, 보급품(?)을 얻을 수 있겠지만, 애초에 휴전선 뚫을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건 잠시 잊자 그게 영원히 가겠는가? 게다가 그때면 이미 민간인들이 사재기했을 가능성이 크고, 이미 한국군에서 징발하는 등 가만히 둘 리가 없으니 많은 물자를 얻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참고로 아돌프 히틀러아르덴 대공세를 계획할 때 독일군 연료 수급 상황으로는 작전 실행을 거의 못했는데, "간단히 풀 수 있음. 연합군 거 탈취하면 그만임"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연합군은 바보가 아니었으니, 독일군이 연료를 못 빼앗게 물러날 때마다 연료를 없앴다. 에르빈 롬멜조차도 청야전술을 하기 전이나 하는 사이 점령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적군도 아군과 판단이 같다면 이기든 지든 간에 그날 그 전투는 끝장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날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대위[6]가 15군 사령부에 시찰을 왔다.
다카히토 대위 : 무타구치 공의 부대는 보급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7]
무타구치 중장 : 전하, 보급이 뭐 걱정 있겠습니까?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입니다.
다카히토 대위 : (황당한 듯) 그런가? 그래, 다 말이 된다고 하겠네만... 만약 적군도 같은 생각이면 어쩌려는가?
이렇게 말하자 무타구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직업군인인 장교도 아닌 젊은 왕자보다 몇 배의 짬밥을 먹고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점을 몰랐다니 충공깽. 게다가 다카히토 대위는 황자였기에 제대로 된 실전 경험도 없었다.[8]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은 될 수 없다.

문장 자체는 명대사급이지만 전문은 이렇다.

사토 그놈은 군명을 어기고 코히마를 버렸다. 식량이 없다며 전쟁을 할 수 없다고 제멋대로 퇴각했다. 이것이 황군인가.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병기가 없어, 탄환이 없어, 먹을 것이 없어 싸움을 포기한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 탄환이 없으면 총검이 있다. 총검이 없으면 맨손이 있다. 맨손이 없으면 발로 차라. 발도 없으면 물어뜯어라. 일본 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 주는 나라다.

그럴 거면 개인화기는 왜 주는 거냐?
무능하다 무능하다 말만 들었지 이 정도로 무능할 줄은 몰랐다

그야말로 똥군기 찬양의 극치. 생명 존중의 ㅅ자도 이 인간의 사전에서는 없다. 전쟁 영화 등을 보면 후퇴 금지 명령 아래 장비 부족에도 무조건 특정 지점을 사수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대다수 군대의 사령부 지침은 전략/전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 물자가 떨어지면 인력 낭비를 막기 위해 후퇴해서 보급을 주고 재투입한다. 즉, 후퇴 금지란 어디까지나 무절제한 적전 도주를 금지하는 거지 전략-전술상 후퇴가 필요하거나 사수가 필요하지 않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전쟁영화 등에서 나오는 경우는 상당수가 특정 지점에 고립되어 보급과 후퇴가 불가능한 상황 또는 그 지역 자체가 적에게 넘어가면 전략적으로 큰 문제가 생기는 극단적인 곳들만 보여줘서 그런 오해를 초래한다.

게다가 식량과 무기의 보급이 완전히 끊겨 전투력이 발휘되지 않고 증원조차 불가능한 전멸 상황이라면, 일단 후퇴해 보급을 받으며 재편성을 해서 전투 효율을 높이고 공격을 다시 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다. 그걸 뿌리부터 뒤흔드는 무타구치의 주옥 같은 발언이다.

영화 같은 가상이면 인력에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현실은 인력이 가장 중요하다! 애초에 무기는 어떤 사람이 쓰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전장에서 살아남아서 경험을 축적하고 숙련도를 키운 사람이 무기를 쓰는 것과, 전장에 못 나가 경험이 없거나 숙련도가 없는 사람이 쓰는 것은 당연히 큰 차이가 난다.[9] 심지어 인력을 허비하면 인력이 모자라 무기가 애물단지로 전락한다.[10] 그러니 전장에서는 할 수 있으면 보병들을 최대한 살려야 옳다. 그러나 이 인간의 전략엔 그런 거 없다.

더구나 인력이 남아있으면 상황에 따라 잃었던 지역을 다시 탈환할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몽땅 죽어 쓸려나갔다면 인원이 모자라 공백이 생겨 지켜야 할 곳들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적에게 밀려나가게 된다. 물론 임팔전투에서 대패한 여파로 인해 당연히 이러한 공백들이 생겨 일본군은 완전히 밀려났다.

식량은 자동차 대신 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일명 '징기스칸 작전'. 그런데 저 '식량'으로 쓰겠다는 코끼리은 대개 점령지에서 조달했는데, 먹이도 제대로 안 주고 부려먹은 데다가 원래 장거리 이동을 잘 안 하는 종들이라, 먹은 소보다 지쳐서 객사한 소가 더 많았다. 일부는 강을 건너다가 떠내려가거나 산맥을 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며 포격에 놀라 도망도 쳤다. 거기에 그 동물들이 죽는 바람에 물자와 식량이 함께 날아가, 실제로 무사히 온 개인 탄약의 양은 계획의 절반뿐이었다. 게다가 지쳐서 쓰러진 가축의 짐은 어거지로 하급 병사들에게 떠넘겨 짊어지게 하고 험난한 정글을 행군하도록 강요해서 부상이나 탈진 등의 비전투 손실을 야기했다. 더욱 후덜덜한 것은 병사들이 최소 40kg가 넘는 무게를 견디다 못해 몰래 조금씩 짐들을 정글에 버리는 통에(...)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과 무기들이 더욱 빠르게 줄어드는 결과까지 야기했다는 것.

더욱이 수송 수단으로 쓸 가축들의 사료를 마련하는 방안에서 질문을 받자 "초식 동물들이니 풀 뜯어먹으면 되지"라고까지 했다.군용 이나 들은 절대로 무타구치의 말대로 길가에 난 아무 풀이나 뜯어먹게 두어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건초 사료를 먹이는 게 정상이다. 재수 좋게 길가에 마침 말에게 먹이기 좋은 풀이 있다고 쳐도, 수송용 가축이 쓰는 막대한 칼로리를 감당할 순 없다. 소 키워 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소에게 풀을 뜯기려면 적당한 초지에 데려가서 마음껏 먹게 몇 시간씩 두거나, 새벽부터 푹 끓인 쇠죽을 먹여 건초를 쉽게 소화하고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사람 밥 먹듯이 하루 3번 20~30분 생풀 뜯어먹게 하면 그 소 굶어죽는다! 정말 생풀로 소 배를 채워 주려면 뜯어먹는 시간 +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거의 소가 깨어 있는 시간 전체하고 맞먹는다. 하지만 1분 1초가 급한 전장에서 쉴 새 없이 짐을 날라야 할 소나 말들에게 하루종일 풀만 뜯길 시간은 없다. 삼국지에서 마초(馬草, 말에게 먹일 풀사료)가 군량과 함께 중요한 보급품으로 종종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11], 무타구치는 전근대 시절 장군들보다 무식했던 셈이다.[12]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동맹인 나치 독일을 비롯한 다른 추축국은 야전에서 연료를 아끼려고 로 많은 물자를 보급한 반면, 기계화를 잘했고 무엇보다도 자원이 넘쳐나는 미국지프 등을 썼다. 추축국은 당연히 미국의 효율성을 못 따라갔다. 통에 든 가솔린만 먹고 움직이는 빠르고 센 자동차와 달리, 가축은 환경 변화에 취약하고 유지 및 보수가 힘든 데다 운반량이 적다. 더구나 길가의 아무 풀이나 먹일 수는 없기 때문에 같은 거리를 가는데 훨씬 많은 부피와 무게의 사료가 필요했고, 이는 후방에서 무기나 필수품에다 많은 양의 사료까지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상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더구나 보내야 할 사료의 양이 늘어나면 사료 자체를 실어나르기 위한 가축이 추가되고, 다시 추가된 가축을 위한 사료가 또 추가되는 식으로 수송대의 규모를 여러 번 다시 계산해야 하는데 이러다 보면 처음보다 당연히 데려가야 할 가축의 규모가 더 커진다(...). 경우가 다르지만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아무리 작은 전투라고 하더라도 병력이 수천명 이상이 나온 이유이고 신라의 선덕여왕을 급습하기 위해 백제에서 꾸려서 보낸 작은 규모의 기습군이 500명이나 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사료 문제는 전혀 감안하지 않고 가축으로 수송대를 편성했으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다만 처음부터 소와 말로 보급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상부에 요청한 보급 지원 증강이 거절당하자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인데...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한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이딴 작전을 짜지도 않았을 테니 어찌되었든 무뇌 인증인 셈.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비행기의 ㅂ자도 모를 법한 무식의 극치. 병신의 ㅂ자는 안다 카더라 이런 말이 중장까지 올라간 작자에게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 인간과 일본군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프랑스군에서도 '전쟁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13] 같은 발언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비행기는 그야말로 신생아 수준이여서 속도가 느려 병사들이 총으로 쏴서 격추시키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생각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 항공 산업이 발전하고 항공기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씨알도 안 먹히는 개소리였다.

일례로 영국군은 그 '써먹을 데 없는 항공기'로 일본군이 포위한 진지에 계속 항공 보급으로 각종 물자를 쏟아부어 포위 상황에서도 계속 버텼다. 가끔 운 좋게 일부가 일본군 쪽으로 떨어지면 일본군들은 이것들을 '처칠 급여'라고 부르며 생명줄로 여겼다. 연합국 전투기들도 놀고 있던 게 아니라서, 최전선 병사들의 요청에 따라 근접항공지원을 위해 일본군 진지와 벙커, 참호를 공격하여 제압하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야기했다. 추가로 항공 보급이나 근접화력지원 말고도 네이팜이나 소이탄 같은 걸 끼얹어서 정글을 통째로 태우는 활용법도 있었지만, 네이팜이 실전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한 건 1944년 일본군을 상대로 티니안 전투서 7월 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일단 임팔서는 논외로 친다.

그런데 위의 모든 명대사들을 버로우시킨 희대의 명언이 있었으니, 일선 부대에서 보급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파일:일본인은 초식동물이야.png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의 학력 수준을 의심할 만큼 괴악한 발언. 정말 어이없게도 이 인간은 창작물에 등장하는 장군처럼 일개 병사부터 올라와서 장군을 한 인물이 아니라, 고등 교육을 받고 정상적인 진급 코스를 밟아 온 정식 육사 출신이다! 더 황당하게도, 그들이 진군할 정글녹색 사막이라 부를 만큼 생각보다 인구 부양력이 매우 떨어지는 곳이기까지 하니 이만하면 그의 부하가 개막장 일본군임을 감안해도 애처롭다(...).

게다가 정글은 험난하고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므로 일반적인 곳보다 더욱 잘 먹고 체력을 유지할 필요성이 높은 지역인데, 풀만 먹으라니 이미 전쟁을 포기한 수준의 발언이다. 그리고 가축도 마찬가지지만 독초나 못 먹는 풀들이 무성한 정글에서 함부로 이것저것 뜯어먹다간 부대 단위로 중독되어 최하 수십에서 수백 명 이상이 골로 가는 수가 있어 매우 위험하다. 게다가 사단 수준의 인원이면 최소 몇천~몇만 단위인데 그 숫자가 뜯어먹게 안전한 식물이 충분할 리가 없다(...).

그 결과로 당시 일본군의 기록을 살펴보면 각종 독초를 뜯어먹고 부대 전체가 쓰러졌다던지, 그나마 먹을 수 있는 , 도마뱀, , 원숭이 등의 각종 동물은 물론 벌레까지 잡아먹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는 증언들이 무수히 많다. 물론 저런다고 식량 부족과 굶주림이 해결될 리가 없으니 결국 부대 체계가 무너지고 각종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일본군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마인칸 교외에서 연합군에 투항해온 일본군의 영양실조는 놀라울 만큼 심했다. 개중에는 문자 그대로 굶어 죽기 직전인 자도 있었다. 먹을 것을 던져 주자 몹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그것을 받아 먹었는데, 10일이고 1개월이고 아무것도 못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나무 뿌리벌레를 잡아 먹으며 연명했다고 한다.[14]"

- 장인중(張仁仲)[15]

결국 일본군은 둘러싸여 후퇴로도 보급도 끊긴 절망적인 상황에서 있는 식량을 다 쓰고, 그나마도 없는 벌레나 풀뿌리만 겨우 뜯어먹으면서 쫄쫄 굶으며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으로 아사하거나 급기야는 아군의 시체에 손댈 만큼 막장이었다. 상식적이라면 이러한 상태에서 뭘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최후의 방법으로 둔전이라도 시도할 수도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종자로 쓸 씨앗도 없었고 충분한 시간과 여유, 알맞은 날씨, 작물을 키울 공간도 없는 상태에서 둔전이 가능할 리가 없다.[16] 더구나 임팔같은 험한 곳에서 둔전을 하려면 일단 정글을 불태워 화전을 해서 넓은 공간을 만든 후에나 벼농사 등이 가능한데, 연합군 정찰기들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과 넓은 지역이 불태워져 밭으로 변한 걸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고, 발견한 후에는 일본군이 식량을 자급하려 일하면서 작물을 관리하는 걸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으니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방침이 얼마나 개차반인지 상급 부대 참모장이 미친 듯이 깠고, 더욱이 삼간사우로 악명 높은 사나다 조이치로 대본영 작전과장조차도 "정 보급이 안 되면 해군의 협조라도 얻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최후까지 태클을 걸었다. 당시 육군과 해군 간 사이가 어떠했는지 고려하면, 이러한 진언은 받아들이긴커녕 찍혀서 해임을 걱정할 판이었다. 그런데 삼간사우로 악명 높았던 이 양반이 자기가 짤릴 거 각오하고 이런 말까지 했다는 점에서, 무능한 높으신 분들도 이 작전을 얼마나 대책 없고 막장으로 봤는가가 드러난다.

3.4 임팔의 중심에서 진격을 외치다

NHK에서 제작한 코미디 다큐멘터리. 《도큐먼트 태평양전쟁 제4부, 책임 없는 전장 버마, 임팔》

다만 이 다큐멘터리를 진지하게 찾아보실 분은 주의를 요한다. 이 시리즈는 원래 NHK 스페셜 중 특별기획의 일환으로, 1989~91년 냉전이 붕괴되며 각종 자료가 쏟아지자 그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당시 총제작지휘를 맡았던 야마모토 히로시 CP는 상당히 개념찬 인물로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무능을 신랄하게 깠다. 그나마 1~3부를 제작하고 몇 달의 텀을 둔 후 4~6부를 제작, 총 6부작으로 완결지었다. 그런데 이걸 보고 그 소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펴낸 신죠샤에서 '결장판 다큐먼트 태평양전쟁사' 7부작을 내놓았다. 그리고 한국 웹에서는 이 두 시리즈가 짬뽕되어 돌아다니고 있다. 1, 3, 6부는 신죠샤, 2, 4, 5, 7부는 NHK판이다. 감상시 주의 요망. 참고로 야마모토 CP는 이후 1994년 NHK 시즈오카국장으로 영전되었는데, 일본에서 샐러리맨의 좌천영전의 형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NHK를 퇴직한 후에는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교재로 반전 강연활동 등을 벌이고 있다.


임팔 작전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 인도의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 직접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다. 작전 입안과 강행 자체가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증언한다. 지형이고 적군 상태고 생각조차 하지않고 개인이 휴대할 만한 최대량의 물자만 감안해서 15일짜리 작전이라고 휘하 부대에 지시하고는, 실제 작전 기간은 3달이 넘어갔다. 그리고 이 작전을 승인한 도조 히데키도 다른 전장의 전황이 나빠서 정권을 유지하러 작전을 인가했다는 증언도 아직 있다. 작전 최종 인가를 자기 집 목욕탕에서 했다는 점이 웃기다. 이 때문에 임팔 작전의 결재는 '목욕탕 결재'라고도 한다.

영국군과 마주칠 때 병력의 절반 이상이 영양 부족과 피로로 전투가 힘들었지만 그 뒤로도 보급을 제대로 안했다. 임팔 작전에서 굶어 죽어가는 일본군들의 모습을 알려면 <여명의 눈동자>에서 을 산 채로 뜯어먹는 장면을 보자. 그게 바로 임팔 작전의 현실이다. 휘하 부대장이 계속 철수를 요구하고 부하들이 전장에서 뜻없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알면서도 진격하라며 계속 독촉하고선 무타구치 자신은 초조했다. 작전 실패가 확실해서 상황을 파악하러 온 버마 사령관 가와베가 무타구치를 찾아왔지만 둘 다 아무 말도 못했고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 까닭이 참 어처구니 없었다.

가와베 - 무타구치 중장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무타구치 - 나는 가와베 장군의 참된 심중은 작전 지속에 대한 나의 생각을 떠보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장군에게 실토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먼지투성이인 내 풍모를 보고 장군이 알아차려 주기만을 바랐다.

가와베 - 나는 랑군으로 돌아왔다. 내 눈에는 귀기 어린 빗속에서 일선을 지키는 장병들, 특히 파렐 전선에서 악수를 나눈 인도 국민군 장병들의 모습이 역력히 떠올랐다. 만일 냉정하게 이 전황을 판단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이미 이때 작전 중지를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나의 생각 이외에 보다 더 큰 성격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최후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무타구치 - 저는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상부에 보고를 할 수 없었기에 작전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전후 미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진술한 내용)

무슨 지거리야!

체면 때문에 차마 후퇴하겠다고 말도 못하며 후퇴하라고 연인도 아닌 사람들이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다가 끝내 말을 못했다는 엄청난 위대함을 자랑한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 듯하다 그야말로 돌려 말하기, 눈치껏 알아차리기를 중시하는 일본인 특유의 간접적 의사 소통의 정점을 보여주는데, 문제는 병사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장에서 저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술을 미군 헌병이 듣자 빵 터져서 5분이나 웃어댔다고 한다. 그래서 진술한 내용을 토대로 언론에 공개하자 그 결과 전미가 웃었다(...). 일본에선 장군들이 개그맨을 웃깁니다! 끝내 전투는 참다가, 참다가, 참다가 피골이 상접한 채 자신들의 비관적인 처지를 노래하는[17] 부하들을 보다 못한 휘하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이 독단으로 후퇴를 결정할 때까지 이어졌다. 참고로 이게 일본 육군 항명 사건 1호다. 바로 이 사토 중장이 무타구치를 만나러 왔을 때, 무타구치는 자결해버리라며 단도를 남겨두고 정작 자신은 사토 중장을 보기 부끄러웠는지 숨어버리는 추태를 보였으며, 사토는 이 칼로 무타구치의 배때기를 쑤셔버리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며 칼을 갖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당시 31사단장 사토 중장이 얼마나 열받았는지는 그가 무타구치의 15군 사령부에 보낸 전문에서 절절히 알 수 있다.

공격 계속 명령 접수했음. 그러나 명령만으로 병력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이 작전을 실패로 이끌어가는 중대요인이 되고 있음. 눈 앞의 본 사단의 1만 장병은 아사 직전 상태에 놓여있음. 탄약은 고갈되어 맨손의 병력으로 화해버렸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가 귀 제15군에게 그 책임이 있음. 귀군은 이상 사실을 판단, 반성하여 본 작전을 즉시 중지함으로써 폐하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이끄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강구하기 바람.

쉽게 풀이하자면 이런 뜻이다. "렌야 너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이런 짓을 더 하라고? 안해! 배째!" 더 놀라운 건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황에서도 욕은 한 톨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러한 류의 전문이 계속 날아오자 무타구치의 참모들이 사토 중장을 달래러 찾아왔는데, 오히려 "너희들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느냐! 우리들의 적은 영국군이 아니야. 바로 너희들 제15군이란 말이다!"라고 길길이 날뛰면서 규탄하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왔다. 게다가 독단적으로 철수하기로 마음 먹고는 참모진과 부하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을 만큼 화가 났었다.

지금 우리 사단의 위에는 3개의 머저리 집단이 있다. 제15군과 버마방면군과 남방총군이다(나중에는 대본영이 더 들어가 4개의 머저리였다). 이런 머저리들을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 사단이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에 본 사단의 퇴각을 본관 책임하에 독단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작 그 뒤에 사토 중장은 일본에서 정신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소환되어 연금당해 입막음 당했다. 평소의 일본군이라면 저런 때에는 아무리 장군이라도 불명예 제대 및 군사 재판, 심하면 할복인데 그나마 저렇게 약한 조치인 까닭은 군사 재판이 열리면 다른 파벌이나 해군한테 꼬투리를 잡힐 여지가 있어서였다. 그 뒤 사토에 대한 일본군 높으신 분들의 평가는 '임팔 작전의 실패를 가져온 원흉'이었지만 사토의 부하들 평가는 당연히 정반대였다.

반대로 작전 책임자인 무타구치는 15군 총 철수 이전에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 편입이라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 뿐더러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좌천되는 걸로 끝났다. 또한 사토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주장한 사람도 무타구치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만 봐도 구 일본군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 집단이었나 드러난다.

3.5 임팔 작전 관련 일화

아래는 무타구치 렌야가 임팔 작전 당시 (영국군의 기준으로 ) 어떻게 재치 있고 뛰어난 언변과 행동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 부대의 80%를 요단강 건너게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 임팔 전선의 전황이 나빠지던 당시, 자신은 전선 지휘부 옆에다 기생집을 차린 뒤 무조건 오후 5시 땡~ 하면 업무 마치고 기생집에 들어가서 마시며 노느라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전황이 한참 악화하자 전선 지휘도 제대로 안하면서 사령부 옆에다가 제단을 쌓아 신불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비느라 그나마 주간에 하던 업무 처리조차 다 뒤로 밀어버렸다. 게다가 이 소식을 영국군이 알자 "야! 니네 부대 사령관님께선 느덜이 굶을 때 번화가에 있는 기생집에서 여자 끼고 논다며? 너희는 왜 싸우냐? 이 땅에서 꺼져!"라고 조롱했다. 그 덕에 일본군은 모랄빵.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냐면, 일본군 15군 전체가 Men of War의 모랄빵 상태로 바뀌었다고 생각하면 좋다.
  • 게다가 임팔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에 신문기자단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인터뷰라 쓰는 개소리를 했는데... 정말 가관이다. 사실 현실은 시궁창이었지만...
"임팔은 문제 없다. 3주일이면 충분히 뺏을 수 있지. 그러나 그 다음의 문제가 있단 말이야. 임팔 정도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 자동차, 전차, 대포 따위는 적의 것을 빼앗아가지고 우선 브라마푸트라 강으로 나간다. 여기가 브라마푸트라 강이야. 여기서 캘커타로부터 뻗어나오는 벵골 철도와 아삼 철도를 차지한다. 제대로 들어맞으면 레도도 탈취한다. 아니 델리의 붉은 성벽(城壁)까지 진격하지. 어때, 핫하하."

김칫국을 마시다 못해 배가 터질 수준

  • 그리고 임팔 작전 도중 어느 작전 참모가 식량과 탄약 보급을 어떻게 하느냐 묻자
무타구치 : 뭐가 문제인가?

부하 : 사령관님. 전체에 돌아가는 음식은 어떻게 운반합니까? 트럭도 없는데...
무타구치 : (걱정 없다는 듯이) 뭐가 걱정인가?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될 거 아닌가? 이름하여 징기스칸 전략! 소나 말을 이용해 음식으로 쓰면 되지! 이거 간단한 거 아닌가?
부하 : (기가 막힌 어투로) 그거 참 간단하네요...

  • 휘하 병사들은 그에게 '적보다 무서운 바보 대장'이나 '귀축 무타구치'라는 별명을 붙였고 '각하가 좋아하시는 건 첫째가 훈장, 둘째가 메마, 셋째가 기자 제 0순위가 대한독립'라는 어찌 보면 대단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 임팔 전투 도중 패색이 너무 짙어지자 철수를 요구한 연대장한테 이렇게 일갈했다.
작전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다 너희들 정신력이 부족한 탓이다.(作戦が上手くいかないのは精神力が足りないせいだ)

당연하지만 연대장이 바보도 아니고 총알과 음식이 없는데 무슨 정신력이 필요할까? 그놈의 정신력 드립

  • 임팔 작전으로 9만 2천명의 병사를 전투도 제대로 않고 1만 3천명으로 줄여버린 팀킬에 성공하자 무타구치 렌야는 "아놔 책임감 느낀다. 콱 자결해 버릴까?"라는 상투적 발언을 내뱉었다. 그러나 수석부관 후지와라 이와이치(藤原岩市)가 "아무도 없는 데서 하십시오.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 패전의 책임 같으면 장군님이 할복하고도 남습니다"라며 조용히 권총을 내밀자 째려보고는 살아갈 의지를 곧추세웠다. 당시 부관이 한 말의 원문은 이러하다.
昔から死ぬ、死ぬといった人に死んだためしがありません。司令官から私は切腹するからと相談を持ちかけられたら、幕僚としての責任上、一応形式的にも止めないわけには参りません、司令官としての責任を、真実感じておられるなら、黙って腹を切って下さい。誰も邪魔したり止めたり致しません。心置きなく腹を切って下さい。今回の作戦(失敗)はそれだけの価値があります

옛부터 나 죽어 죽어 하는 사람 치고 진짜 죽고 싶어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령관님이 저한테 할복하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저는 부관의 책임으로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말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령관으로서 정말 책임을 느끼신다면 그냥 닥치고 배를 가르십시오. 아무도 안 말립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배를 가르십시오. 이 작전의 실패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 게다가 겨우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이 간신히 안전지대에 들어오자 장교 전원을 집결시켜 1시간 넘게 훈시하는 바람에 영양실조 상태에 있던 장교들이 쓰러져 기절하거나 심지어 사망한 사례조차 있었다. 아무리 영양실조 상태였다지만 일반 병사도 아니고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았을 장교들이! 이때 했던 연설에서 그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은 될 수 없다"라는 병맛 발언을 했다.
  • 15사단장도 31사단장과 비슷하게 작전 취소를 건의했다고 경질시켰다. 새로 임명한 15사단장은 장교들의 군도를 검사하고 다 녹슬었다며 화를 냈다. 하지만 장교들은 늘 물이 찬 참호에서 살았으니 당연히 녹이 슬 수밖에. 보급품이 모자라 비가림도 못했다. 녹은 둘째치고 그 물바다 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참...
무타구치 중장께 - 본관은 장군의 뛰어난 계책에 감복했습니다. 또한 사단장의 후퇴가 없었으면 아마 임팔은 점령당했을 것입니다. 만약 디마푸르에서 퇴각하지 않았으면 우린 패배했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거길 점령했어도 임팔 전선을 유지할 능력은 있었는지요?
  • 사단장일 때에 다른 사람이 아삼 지역 진공 작전을 계획했을 때엔 무모해 보인다고 반대했다. 그런데 지역 사령관을 하자 임팔 작전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아삼이나 벵골에서 장렬히 죽고 싶다"고 노래를 했다니 이건 뭐...
  • 무타구치는 죽을 때까지 임팔 작전을 가리켜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교훈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즉 1944년의 임팔 작전이 없었다면 동남아 전선의 붕괴는 더 빨랐고 더 파멸적이었다는 말씀. 그러나 1945년의 영인군의 버마 진공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다시 말해 임팔에서 일본군이 말아먹은 정예사단 몇 때문에 진공 계획을 급히 세웠다. 그리고 그러한 약체 일본군의 저항과 우기 우려로 버마 진공 역시 간신히 성공시켰으니, 오히려 임팔 작전 탓에 동남아 전선이 무너졌다.
  • 게다가 이보다 훨씬 기가 막히고 황당한 말도 했는데, 다나카 신이치와 독립유공자 가와베 마사카즈와 함께 나란히 인터뷰를 할 때 기자가 임팔 작전의 패전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이런 개드립을 선사했다. 당연하지만 정말 반성했으면 아래의 유인물은 돌리지도 않았다.
설령 파커 중령의 증언으로 임팔 작전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더라도, 수많은 부하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결단코 지울 수 없습니다. 역시 제 마음은 살아있는 한, 떳떳할 수 없습니다.

피커 중령은 임팔 작전을 조롱하려고 돌려서 깠는데 그걸 정말로 받아들였다

  • 전쟁이 끝난 뒤에 임팔 전투의 일본군 전몰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 때 그 자리에 나타나서 <임팔 전선의 패배는 나의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이 잘못 싸운 것>이라는 유인물을 나눠주려다가 물세례를 받았고, 부대 전우회에 직접 가서 주체 못할 개그 본성으로 또 위의 유인물을 돌리다가 그 회원들에게 멍석말이와 몽둥이 찜질을 겪었다. 더구나 이 전선에 참여하였던 사토 고토쿠미야자키 시게사부로 같은 옛 부하가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 와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다가, 유족들에게 욕설을 처먹는 동시에 멱살을 잡혀 바깥으로 내쫓겼다. 심지어는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도 "내 잘못이 아냐, 부하 잘못이지!(私は悪くない、部下が悪い!)"였고, 자기 장례식에서조차 유족들에게 또 그 유인물을 돌리라 했다. 당시 어떤 참전 용사는 "씨발! 우리는 굶어 뒤질 뻔 했는데, 그 새끼는 왜 이렇게 편하게 뒤졌냐!!"라고 분개했으며, 심지어 15사단이었던 한 병사는 아예 위패를 때려 부수려고 장례식에 참가했다가 사람들의 만류에 가까스로 진정했다는 모양이다(...)

뻔뻔함이 밑도 끝도 없다. 철면피도 이만하면 신급이다.

3.6 연합군의 수호신

무타구치 본인과 일부에서는 임팔 작전이 남방전선의 전면적 붕괴를 막았던 제한 공격전의 성공이라는데 임팔 전투에 간 사단들은 거의 80% 이상 전투 불능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20%는 앞에서 나온 31사단장 사토의 독단 때문. 바꿔 말하자면 무타구치의 지시에 따른 부대는 모두 전투 불능이었다는 이야기이다. 1945년 초반에 연합군 안에서도 위험하다고 한 미얀마 진공 전격 작전의 성공은 원래대로라면 방어할 만했던 일본군 전력이 임팔에서 고스란히 날아간 것도 주요 원인이다.

4 전쟁 이후

다른 건 다 이해가 가는데... 저 녀석은 왜 앉아 있냐? 명예 훈장 받으러 왔냐?

- 아라키 사다오가 렌야를 보고 어이없어하며

같은 자국인이 왜 저 인간이 전범으로 기소가 되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는 뜻이다.

일본 본토에서 연합군을 위해 일본군 수십 개 사단을 쓸어버릴 획기적인 계획을 짜고 있었으나 안타깝게 패전을 맞이하고 도쿄 전범 재판에 A급(평화에 대한 죄, crimes against peace)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다른 A급 전범들 대부분이 전범 재판을 거쳐 사형 등을 받았으나 이 인간은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면서도 도쿄 전범 재판에서 불기소되어 싱가폴 재판에 송치, 전범혐의로 2년을 살다가 1948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 기간 동안 정말 대접이 좋았다고 한다. 심지어 돌아올 때는 살이 더 쪄서 왔다고. 자세한 형 기간은 전범 문서 참조. 국내에선 희화를 위해서인지 무능해서 불기소 처분을 받아 아예 처분이 없었다거나, 재판도 안 받았다는 루머들이 돌아다닌다.

일본에 돌아와서는 패전 책임 때문에 기도 못 쓰고 살았다. 이때도 반성은 커녕 윗사람 탓을 시전했다. 그러다 1962년 영국의 군 관계자가 임팔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다(!)는 서한을 보냈다. 당연하지만 칭찬하려고 보낸 게 아니라 돌려서 까기 위해 보낸 거다. 바로 위에 파커 중령의 서한 내용이 그거다. 이 서한을 받고는 벌떡 일어나서는 죽을 때까지 위에서도 언급된 부하 탓을 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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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에는 일본 도쿄의 공동묘지인 타마레이엔(多磨霊園)에 묻혔다. 참고로 이곳은 일본의 다른 유명한 장군인 도고 헤이하치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함께 묻혀있다. 도대체 왜? 망가져 유명한 사람이라서? 아니 대단한 스파이여서

사실 이런 무능한 인물이 중장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무 능력보다는 학연, 인맥으로 진급을 비롯한 모든 것을 결정하던 일본군 특유의 파벌주의 탓이었다. 무타구치는 당시 군부를 이끌던 우두머리였던 도조 히데키와 같은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 파벌이었기 때문이다.

5 의외의 반전

이처럼, 엄청나게 무능했으면서도 기묘한 부분에서는 인간적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실책과 무능함으로 인한 우스갯소리나 비웃음을 진하게 받고 있을 뿐, 의외로 욕을 먹지는 않는 인물이기도 한데, 위에서 말한 독립유공자 드립 때문이라든지 그런 게 아니라 놀랍게도 일본군에 만연했던 각종 전쟁범죄를 거의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8] 뭐, 인성과 능력은 별개니까 이러한 행보만 보면 일본군의 몇 없는 개념 박힌 장군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타구치의 개념찬 선행은 화려한(...) 똥별 행위 때문에 묻혀서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낮다.

일본 역사상 손에 꼽히는 희대의 막장 집단이었던 구 일본군에는 무타구치의 팀킬은 애교로 보일 만큼 잔학한 학대행위 및 학살을 실제로 벌이고 다닌 진정한 미친놈들이 존재해준 덕분에, 무능하기만(?) 했지 잔학한 범죄에는 손을 대지 않았던 무타구치는 적어도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다. 능력에 안 맞게 과분한 직책과 직급까지 올라간것이 문제일뿐이다. 오죽하면 임팔 작전 당시 사단장이었던 사람조차도 치치지마 식인 사건의 주동자인 다치바나 요시오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면서 "야 이 미친놈아! 무타구치 렌야도 식인을 하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썰까지 흘러나올까.[19]

수많은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만행을 저지를 때 그의 부대는 학살이나 약탈이 없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같이 군인으로 무능하고 똑같이 삼대 오물 소리를 듣던 도미나가 교지 또한 똑같이 적지에서 민간인 약탈을 금하고 학살을 막게하는 개념이 있었던 건 둘 다 같다. 멍청한 데다 부하들은 다 전장으로 몰아넣고 모르쇠할 만큼 뻔뻔하였지만 기본적인 선은 지켰다. 삼광작전 같은 개판 교리를 당당하게 내세워 민간인에게 폐를 끼쳐도 잘했다고 배짱 튕겨댔던 조직이 구 일본군임을 생각하면 아주 이례적인 행동이다. 도미나가와 같이 무책임함과 무능함 때문에 수많은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지만, 적어도 민간인 학살을 막고 포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은 점은 높이 살 만하다.

6 대중매체에서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태평양 전쟁에서는 임팔 진공 자체를 기발한 전략으로 인용하고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 몇 건의 불운한 사건, 이를테면 '보급을 깜박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뭐, 보급을 깜빡하다니? 깜빡할게 없어서 보급을 깜빡하는 일본 육사 출신의 위엄 라 나온다. 그럼에도 무타구치가 작전 수립 때 한 실수는 비판한다. 그렇지만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임팔전투 부분은 차마 말할 수 없는 내용이라 우물대며 자세한 설명없이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다(...)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배우 김기주[20]김기현이 연기한 무타구치는 정말이지 대박이었다.(이 드라마는 후시녹음이었던 덕에 전담 성우를 김기현이 맡았다) 야, 이 일본군 놈의 xx야 니들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조선을 독립시키겠어! 황군 놈의 xx들! 겉모습도 사진을 참고삼아 비슷한 이가 연기했거니와, 참모장이 그리도 반대하고 우려하던 것을 닥쳐라 무시하며 임팔 작전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던 모습에서는 무타구치의 면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무타구치 렌야의 주옥 같은 망언들이 드라마에서는 등장과 더불어 좔좔 나온다. 에로 소설로 유명한 원작에서도 당당히 임팔 전투와 무타구치의 활약이 나온다.그리고 외모는 중후한 미노년이 아니라 스킨헤드였다 성우인 김기현씨가 직접 맡았으면 외모도 잘어울리는 역이였다.

7 기타

일본 검색엔진에 "牟田口廉也"라는 검색어를 넣으면 바로 '無能'이라는 자동 검색이 나온다. 검색창에 스페이스 1번. 루거우차오 사건 덕분에 검색을 하면 중국 사이트들이 많이 뜬다.

일본판 백괴사전에서는 아예 한국 영국의 스파이로 취급한다. 박헌영

한국판 백괴사전에서는 조선인으로 16세에 독립군이 되었는데 스파이의 재능을 깨우쳐서 무타구치 렌야를 가명으로 삼고 18세에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잠입한, 그냥 토종 한국인 취급이다.(...) 초식드립은 사실 본심이었다

<하트 오브 아이언>에서 일본군의 지휘관으로 나온다. 능력치는 뜻밖에 평범한 수준이라 숙련도 2에 특기는 없다. 츠지 마사노부도 일본군의 지휘관인데 무타구치 렌야보다도 능력치가 나쁘다. 숙련도 1에 무타구치처럼 특기를 안 줬다.

이 말을 그대로 실현한 미친 게임이 개발되었다 카더라

좌절감이 키운 사나이닮았다.

트위터에도 무타구치 렌야 봇이 있다.

구 일본군을 미화하는 불쏘시개인 가공전기 들에선 무타구치가 좌천 또는 전사하는 인물의 우선 순위로 자주 등장한다. 이후엔 그 자리를 유능한 장군이 대신 채워서 임팔전투를 승리로 이끈다는 등 병맛 전개의 3류 줄거리들이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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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에화 버전.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면서 침 흘리는 부하들을 외면하고 혼자 징기스칸을 쳐묵쳐묵한다.[21]

도쿄 국립국회도서관에 보존된 정치 담화 녹음 중 그의 육성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2개가 있는데, 하나는 1963년 4월에 작가, 참의원이었던 야마모토 유조(山本有三)를 청자로 하여 루거우차오 사건에 관하여, 다른 하나는 1965년 2월에 독백으로 임팔 작전에 관해 녹음했다고 한다.

1박 2일 2016년 하얼빈 특집에서 퀴즈를 냈을 때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고르라는 문제에서 늠름한 모습으로 보기에 등장했다. 다만 임팔 전선에서의 대첩 삽질은 언급되지 않았고 중일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만 나왔다. 그리고 김종민의 혼혈처럼 생겼다는 말은 덤

조선왕조실톡 128화에서도 초식동물 드립이 나왔다!

유녀전기에선 로리 주인공의 입을 빌어 심심하면 까댄다. 무타구치인지 무다구치인지 자주 햇갈리는 모양.

8 무타구치의 라이벌(?)

굵은 글씨는 무타구치와 함께 삼대오물로 취급받는 인물들.

9 관련 문서

  1. 능력 면에서만 그렇다는 소리다. 인성 면에서 따지면 차라리 원균보다야 무타구치가 훨씬 낫다.
  2. 1942년에 한 본인 발언이 맞다! 출처는 타임라이프 2차 세계대전.
  3. 발음상으로나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으로 보나 '무구치 렌야'가 맞지만 어째 한국에서는 '무구치 렌야'로 알려져 있다. 일본어의 た 소리가 원체 기식이 약해서 '다'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는 '쓸데없는 말'을 뜻하는 '무다구치(無駄口)'라 불러도 할 말이 없는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다.
  4. 대신 그런 면에서만큼은 유능했다는 점에서, 그냥 무능하기만 했던 삼대오물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더욱 위험한 인물이자 간신배로 볼 수 있다. 도미나가는 안 쓰고 가만 놔두면 됐는데 등용해 쓴 놈이 멍청한 거였고, 무타구치는 자기 지휘권 안에서만 개판을 쳤지만, 츠지는 할힌골부터 남방전선까지 내내 일본 육군을 망친 셈이다.
  5.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란 임팔 전투 당시 인도(印度)-미얀마(緬甸) 전선에서 영국군에게 협조하여 심리전 등을 편 한국 광복군의 부대이다.
  6. 쇼와 덴노의 막내 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7. 황족이라서 상급자인 무타구치에게도 하대할 수 있었다.
  8. 사실 이런 대화도 이게 원조가 아니다. 이미 할힌골 전투에서도 비슷한 대화가 있었다. 바로 츠지 마사노부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마사노부가 전쟁은 졌다고 생각해야 지는것이라고 씨부리자 야스히토 대좌(이쪽이 더 계급이 높았다)가 "두 사람만 남아도 이긴 것인가?"라고 묻자 바로 버로우.
  9. 그 옛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 소수 정예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10. 당장 현재 러시아 육군이 1만 대가 넘는 전차가 있는데도 실전에서 적게 활용하는 이유는 인력이 모자라서다.
  11. 현대전으로 치면 차량 운용에 필요한 기름이나 마찬가지. 기병의 군마는 물론이고, 기병이 없어도 군량을 운송하려면 말이 끄는 수레를 써야 하므로 성 안에 틀어박혀서 한발짜국도 움직일 일이 없는 수성전이 아닌 이상 마초는 필수적이다.
  12. 물론 전근대에 가축의 전술적 중요성은 현대보다 훨씬 컸기에 가축에 대한 상식은 전근대의 장수들이 현대의 지휘관들보다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무타구치 입장에서도 꽤나 억울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반 지식도 없는 주제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딴 작전을 세웠으니 답이 없다.
  13. 페르디낭 포슈는 비행기는 단지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비행기가 전술적으로 쓰이지 않아서 아직 검증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14. 게다가 이 사람은 중위였고, 당연히 인육도 먹었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자 무타구치의 장례식에서 깽판도 부렸다.
  15. 중국 중앙일보의 종군기자로서, 무타구치가 있었던 임팔 전투에 있었다.
  16. 파푸아뉴기니 지역의 라바울 같은 경우는 둔전에 성공했지만, 여기는 미군이 일부러 우회를 위한 개구리 뜀뛰기 작전의 일환으로 고립상태의 적이 둔전을 하며 군사력과 체력을 낭비하도록 방치한 경우이다. 아예 둔전하러 가는 일본군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미군 조종사들에게 지령이 내려졌고, 나중에 일본 항공기가 라바울에 전무한 상태에선 신참 조종사들을 라바울 위로 날아다니게 하며 실전훈련까지 시켰다(...)
  17. 이 노래는 임팔 전투 문서를 참조. 문서 내에서 코히마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노래가 나온다. 꽤 귀여운 노래니 꼭 한 번 보자
  18. 전에 버전에는 도리어 상부에서 내려온 학살 명령을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무시하고 휘하 장교가 몰래 포로를 해방한 것을 알고도 묵인해준 일화까지 있으며, 이런 인물이 전쟁 발발의 원인을 제공하고, 무능으로 자기 부하들은 별의별 방법으로 괴롭히고 허무하게 개죽음 당하도록 방치해 놓고선 나몰라라했다는 것이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라는 말이 있으나, 출처가 없다.
  19. 당시 일본군의 상황은 대단히 열악하여, 실제로 시체에 손을 대는 막장을 일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들도 시체에나 손을 댔지, 대뜸 붙잡은 포로를 쳐죽이고 그 시체 고기로 바베큐 파티를 벌이는 미친 짓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20. 1940~2001. 이장호 감독의 '일송정 푸른 솔은(1983)'에서 김좌진 연기.
  21. 임팔 작전의 이명이 징기스칸 작전이었다.
  22. 상술했듯 사람들이 이 인간을 삼간사우의 일원으로 잘못 안다.
  23. 독일판 무타구치 렌야.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24.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의 일본은 식량을 모을 때 고기로 모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