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衡
(? ~ ?)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 자는 숙평(叔平).
양양의 병졸 집안의 자식으로 한나라 말에 오 지역으로 들어가 무창의 서민이 되었는데, 양신을 찾아가 그에게 관상을 봐줄 것을 요청했다. 양신이 사건이 많은 시대에 상서 극조의 낭관을 할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며, 당시에 여일이 권력을 휘두르자 이형이 아니면 여일을 궁지에 몰 수 없다면서 이형은 양신의 추천을 받아 낭관으로 추천받았다.
손권이 불러 이형이 여일의 간사한 행동, 단점 등을 진술하자 손권은 부끄러워 했으며, 몇 달 뒤에 여일이 주살되자 이형은 크게 발탁되었다. 제갈각의 사마가 되어 부의 일을 맡았고 252년 4월에 손권이 세상을 떠나고 손량이 즉위해 제갈각이 정권을 잡았는데, 여러 왕들이 장강가의 군사 요충지에 있으려 하자 손휴도 단양군에 옮기려 했다.
이로 인해 당시에 손휴가 군의 치소에 있었고 이형은 자주 법도로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에 손휴가 편지를 올려 손량의 편지를 받고 회계로 옮겼다. 그의 처인 습씨가 매번 간언을 했지만 이형은 듣지 않았는데, 제갈각이 주살되자 단양태수가 되길 원했다.
손휴가 즉위하자 이형은 걱정하고 두려워해 처에게 그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위나라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자 습씨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면서 스스로 손을 묶고 죄를 받기를 청한다면 훌륭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간언을 듣고 그 말대로 실행하자 재앙이 없었고 위원장군이 더해지면서 계극이 주어졌다.
이형은 매번 가산을 늘리려고 했다가 처가 항상 들어주지 않자 몰래 손님 10명을 무릉군 용양현의 사주로 보내 집을 지으면서 감귤나무 천 그루를 심게 했으며, 죽기 직전에 아들에게 너의 어머니가 가산을 늘리는 것을 싫어해 가난하게 살았다면서 자신의 주리에 1000두의 나무 노예가 매년 1필의 비단을 올릴 것이기에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형이 죽고 20여 일이 지나 아들이 어머니 습씨에게 알려줬으며, 오나라 말기에 이형이 심은 감귤이 이루어지고 해마다 비단 수 천 필을 얻어 집안이 풍족했다. 진나라의 함강 연간에도 그 택지와 고목은 여전히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