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권

조위의 오왕
신규 책봉손권동오 건국
동오의 역대 황제
동오 건국1대 대황제 손권2대 폐황제 손량
묘호태조(太祖)
시호대황제(大皇帝)[1][2]
손(孫)
권(權)
중모(仲謀)
연호황무(黃武, 222년 ~ 229년)[3]
황룡(黃龍, 229년 ~ 232년)
가화(嘉和, 232년 ~ 238년)
적오(赤烏, 238년 ~ 251년 1월)
태원(太元, 251년 1월 ~ 252년 2월)
신봉(神鳳, 252년 2월 ~ 252년 4월)
관직200년 - 토로장군
209년 - 거기장군
219년 - 표기장군
220년 - 오왕
229년 - 황제
생몰기간182년 5월 18일 ~ 252년 4월 16일
재위기간229년 ~ 252년[4]
아들을 낳으려면 손중모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는가! -조조


1 개요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손권은 안후이와 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소수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을 진무(토벌)하고, 타이완과 하이난섬 방면에도 원정군을 보냈으며, 랴오둥의 공손씨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 외의 경영에 노력한 군주였다. 그런데 정작 언급한 일들이 결과가...


2 외모

적벽가에는 손권의 풍모를 벽안자염(碧眼紫髥)이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푸른 눈에 자줏빛 수염을 뜻하므로, 이를 두고 그의 혈통이 페르시아 계통이 아닌가 하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눈이 푸르렀다는 것은 연의의 창작이며, 자색 수염에 상체는 길고 하체는 짦았다는 <헌제춘추>의 기록과 턱은 네모나고 입은 크고 눈의 총기가 남달랐다는 <강표전>의 기록이 남아있다. 그의 눈이 푸르렀다는 묘사는 아마도 탈색이나 그의 신성함을 묘사한 듯하다. 다만 건강실록에서 인용한 강표전에 묘사된 손권의 외모는 넓은 이마를 가졌다고 쓰여 있다. 그의 아버지인 손견의 미추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없으나, 그의 외모는 평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손권의 생김새는 이국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여지가 있다. 형 손책은 특이한 외모에 대한 언급은 없고 대단한 미남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어머니 쪽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주연의 무덤에서 황제의 연회를 묘사한 그림이 하나 발굴되었는데, 만약 이 그림에 그려진 황제가 손권이라면, 삼국시대의 인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당대에 그린 초상화'가 남아있는 셈이다. 아마 가운데 있는 인물인듯 한데 실제로 상당히 이국적이다.

3 생애

손권/생애 참조.

4 평가

4.1 군사적 평가

손권은 군사적 능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다. 위나라 방면 공격으로 환성의 주광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긴 것이 그가 이루어낸 몇 안되는 완승중 하나였으며, 합비 공방전은 그의 대표적인 완패다. 그러나 그는 수성을 비롯한 방어전술에서는 어느정도의 일가견을 이루었다.

손권이 스스로 정벌에 나섰을 때는 장제에게 속아서 처참하게 도망쳤고, 장료장패 그리고 강하의 문빙과 합비 신성의 만총 같은 용병에 능한 장수들에게는 철저하게 패배했다. 출신이 좋아 어려서부터 고등교육을 받은 조조나 그를 따랐던 수장들, 비록 배운 건 적었을지라도 현장에서 용병술을 익힌 유비. 그리고 이 둘보다도 더 뛰어난 완력과 군재로 중무장한 손견과 그러한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아비에 버금갔던 손책과는 달리, 손권은 아비와 형의 노력으로 일구어낸 강동의 군주가 되고나서는 정치에 역량을 집중하였기에 군사쪽에는 큰 경험을 쌓을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손권은 그의 부족한 용병술에 변명의 여지가 있다. 그가 친정을 하여 승리를 거둔 전투에서 적장들은 이술, 황조, 주광, 서씨가 주도자를 죽인 규람, 대원의 잔당인 마와 보의 도적 때, 또는 왕릉이 만총의 만류에 지원도 없이 대충 보낸 이름 없는 독장과 같이 평범한 무장이었거나 용병을 모르는 일개 싸움꾼들이었다.

하지만 손권의 군사적 능력을 매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구체적으로 유수구에서의 전투를 봤을때, 그는 전황을 유리하지도 혹은 불리하지도 않게 유지하여 싸움을 장기전으로 이끌었고, 그는 결국 조조를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더하여 조조는 손권의 군세를 멀리서 보고는 "손권 같은 아들을 가져야 한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유표의 아들들은 돼지와 같다며 비하하였다고 한다. 이는 조조에게 항복한 유종이 들었다면 기분이 참 좋지않았을 듯한 욕이다.

물론 유수구에서의 전투를 순전히 손권이 이루어낸 그의 완전한 승리라고 평가하기에는 부당하다는 의견도 역시 있다. 하지만,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공당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것은 승리가 아닌 걸까? 대표적인 예로 고려의 전쟁이 있는데, 여기서 고려는 심지어 의 연호 대신 요나라가 준 연호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요는 고려와의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결국 군사를 물려야 했다.

앞서 설명한 내용에서 독자는 손권의 용병술은 평범하다면 평범했지 결코 뛰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알았다. 하지만, 이는 결코 손권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었으며, 또 다른 원인은 오나라 병역문제에 대한 법안 그 자체에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주유, 노숙, 여몽, 육손, 주연, 보즐 등의 뛰어난 부하들을 직접 뽑아서 모든 걸 맡기고 싸우게 한 것은 좋게 평가할 만 하다. 한고조 유방도 본인의 능력은 항우에 뒤쳐졌지만[5], 부하들의 능력을 활용해 항우를 쓰러뜨렸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와는 달리 오라는 나라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도 있었는데, 나라의 병력체계는 이나 와 달리 세습령병제(世襲領兵制)였다는 것이다.

보통 세병제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병호를 따로 할당해서 병역을 부과하는 세병제 자체는 삼국 모두 실행했다. 다만, 오나라에서는 이 병호를 식읍처럼 신하들에게 분배하여 평시에도 병호를 부려 농지 개간 등에 노동력으로 쓸 수 있게 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사실상 호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병을 부릴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 아마도 오나라 자체가 호족들이 뜻을 같이 하여 세운 국가였으므로 오나라의 중앙정부로써는 호족들에게 특혜 따위를 부여해야만 했을 것이다.

다시말하자면, 손권이 모든 군권을 가지고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체계가 아니라 손권은 호족들의 동의하에 세워진 우두머리와 같은 존재였으므로 지휘체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군비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호족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중앙정부로써는 곤란한 데다가 무엇보다 통솔력이 떨어지면 반란과도 같은 처절한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투 중에 부하 장수가 싸움을 거절하면 대안이 없는 지휘체제였다. 위나라나 촉한의 경우 부하 장수가 전투에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면 중앙정부로써는 이를 군율로 다스리면 됐지만, 오나라는 군권이 중앙정부에 있지 않은 지휘체제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호족과 호족 출신 장수들을 달래고 어르러서 참전하게 설득해야 했으며, 이들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재물을 따로 마련해야했을 것이다.

손권이 전장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이런 어수선한 체계이기 때문에 그나마 손권이 직접 나서야 우두머리로써의 존재감을 과시할 수 있었다는 것.

4.1.1 손권의 전술

이렇듯 그의 군사적 능력은 유비나 조조에 비해서는 모자랐다고 평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장제전예, 만총에게 기만 당하는 등 그의 지략도 확실히 모자라 보인다.

하지만, 손권이 자주 활용하였고 결과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작전이 있으니 바로 사항계다. 삼국지의 사항계하면 황개고육지계가 생각나기에 이것일까 싶겠지만 고육지계는 손권의 계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외에 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잘 알려지지는 않은 사항계는 많다. 첫째로,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219년 위나라에 양우를 보내 첩자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 있다. 둘째로, 228년에 주방에게 거짓항복의 계책을 실행하라고 명한 사람이 바로 손권이었다. 사항계의 결과로 적의 십만 병사를 쳐부수었고, 결과적으로 조휴는 병을 얻어 죽었으니 말이 더 必要韓紙인가? 물론 세세한 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한 사람은 주방 자신이었나, 이 사항계를 명한 것은 손권이었다. 셋째로, 231년에 한 손포의 위나라로의 거짓항복 또한 사항계였다. 그러나, 이는 만총에게 간파당하여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 했으나, 적의 700군사를 없애는데 성공하였다. 마지막으로, 제갈일로 하여금 제갈탄을 속이게도 하였지만 이것은 실패했다. 이처럼 사항계를 활용하는 손권에 대해 호삼성은 자치통감에 주석을 달아 이런 평을 했다.

손권은 오나라의 국력이 위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점을 헤아려서, 위나라를 속이는 기책으로 적을 유인하여 함정에 넣으려고 하였으니, 이는 제갈량이 천하를 두고 다투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손권이 국가간의 국력을 잘 헤아렸다고도 하고, 사나이가 천하통일을 할 야망도 없다니 옹졸한 놈이라고도 하는 등 평가는 천차만별로 나뉘니 알아서 생각하도록 하자.

4.1.2 손권의 무예

그는 비록 용병은 능하지 못하였지만, 무예에는 소질이 있었다. 그는 마술과 궁술에 능하여 합비에서 장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정도였고, 쌍극을 던져 달려드는 호랑이를 물리친 일화와 호랑이를 수레에서 맨손으로 쳐냈다는 기록도 존재할 정도다. 포박자 같은 책에는 부적을 써서 화살이 그를 피해갔다는 표현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손권의 무술로 생각한다면, 이것도 나름 무서운 부분이다. 사실 아버지가 삼국시대에서 손 꼽이는 명장 손견이고 형 역시 강호의 양아치 호랑이 손책이다. 게다가 동생 손익 역시 무예가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동생 손부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발휘한 임기응변의 지혜의 예로는 212~213년의 유수구 전투의 일화가 있다. 싸움중 궁병의 공격을 받아 수많은 화살들의 무게 때문에 배의 한쪽이 무거워져서 기우뚱하자, 배를 돌려 반대쪽에 화살들을 일부러 맞게하여 균형을 맞춘 다음에 탈출하였다. 그리고 이 기록은 연의에서 아버지와 제갈량에게 뺏긴다

포박자 잡응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오병(五兵; 병기)을 피하는 방법을 물었다. 포박자가 대답했다. 오대제(손권)는 개선생(개상)으로 부터 비결을 전수받았다. 북두(北斗) 글자와 일월(日月) 글자를 붉은 글씨로 쓰면 곧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 황제(손권)는 언제나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선봉으로 나서서 적진을 함락시켰지만 끝내 몸을 상하는 일은 없었다.


4.2 외교

4.2.1 대촉 외교

형주에 관한 문제와 그에 대한 평은 형주 공방전형주 공방전의 평 참고.

어찌됐든 형주공방전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던 이릉대전 이후, 유비가 허세를 부렸다가 육손의 편지를 받은 뒤 유비가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이에 손권이 정천을 보내 유비에게 답장하였다. 곧이어 유비도 종위를 통해 답장하였다. 이렇듯 친밀함을 쌓으려는 노력을 통하여 두 세력들간의 우호는 나름대로 회복되었으나, 손권은 아직도 조비랑 관계를 끊지 않은 상황이었다.

유비가 죽은 뒤 유선이 그의 뒤를 잇게 되었다. 유비가 남긴 유언에 따라 전권을 위임받은 제갈량의 판단아래 등지가 오나라를 방문하고 나서야 손권은 장온을 위나라에 보내어 조비와의 관계를 끊었다. 자세한 것은 손권/치세의 해당 부분 참고. 그후에는 손권의 입장에서 양 국가의 관계가 썩 만족스러웠는지 보즐이나 주연이 촉이 배반했다고 손권에게 진언할 때, 손권은 자신의 가족을 걸고 촉이 결코 그럴 리 없다고 자신하였다.

4.2.2 대위 외교

적벽대전 무렵에는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오왕(吳王)으로 책봉받으면서 일단 위에 칭신한다. 그러나 당연히 완전히 복속되지는 않았고 대촉 관계가 안정되자 칭제하여 위의 신하에서 벗어난다. 그 뒤로 위와 전쟁을 반복하며 적대적인 관계였으나, 한편으로는 교환 형식으로 무역을 하는 등 교류는 끊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4.2.3 동방 외교

손권은 요동의 독립 세력을 형성한 공손연, 그리고 고구려와도 외교관계 수립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보물과 함께 연왕으로 임명한 공손연은 머나먼 오나라보다는 가까운 위나라에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사신의 목을 잘라 위나라로 보내고 보물은 자기가 가졌다.

고구려에서도 공손연과 비슷하게 위나라와 동맹을 맺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 사신 호위의 목을 잘라 위나라로 보냈다. 안습

이 부분에 있어서는 손권의 발상이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수 없다. 병법에서 흔히 말하는 遠交近攻(원교근공)에 맞는 행동이다. 만약 잘되었다면 위나라로써는 전선을 늘려야 하고 상대할 곳이 완전 양극이니 나름대로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적으로 바다 건너 수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는 것은 너무 어렵다는 점이다. 바로 옆에 있는 촉한과도 군사 공조가 제대로 되지 않는 판국인데 말이다.(…) 비록 요동으로 1만 명을 보내고 공손연이 멸망할 때 군사를 보냈으며 239년에는 요동에서 위를 공격하는 등 멀리 있었다해도 도움이 될 여력은 충분히 있었으나 당시 고구려나 공손연 입장에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위나라가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는 것.

사실 초반에는 공손연과 어느 정도 이러한 이상적인 우호 관계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32년에 위나라가 오나라와 양다리 걸치는 공손연을 잡으려 했고[6], 이에 위나라와 척을 진 공손연이 손권에게 과감히 칭신하면서, 그리고 위에서 본 것처럼 도로 손권에게 빅엿을 날리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에는 공손연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정주를 지원군으로 보내는 대인배의 모습도 보여주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공손연은 참패함으로 공손연과의 연계는 끝이 난다.

당시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신하들도 말린 일을 손권이 터무니 없는 고집을 부린 끝에 망신만 당한 셈이다. 고구려와 교린할 때는 "오나라가 위나라보다 강하다."는 터무니 없는 뻥까지(…) 쳐가면서 엮으려 들었으니 될 리가 있나. 섣불리 멀리 있는 나라와 군사 협력을 시도하기보다는 위나라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우호교린을 하는 방향이었다면 차라리 결과가 나았을 것이다.

4.2.4 남방 외교

4.2.4.1 교주 방면

손권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던 사섭이 죽은 후 여대에 의해 사광을 제외한 사섭의 일족을 전멸시킨 행위가 일어난다. 그런데 여기서 여대는 안 까이는 곳이 없지만 손권의 경우는 주를 나누면서 사휘를 천대하는 등 사휘가 반란하는데 빌미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수는 사휘가 스스로 화를 불러왔다고 평했으며 교주의 입장에서 쓰여진 대월사기전서에서조차 여대가 사휘를 속여 죽인 일을 욕하고 있지 사휘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토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하고 있다.[7] 옛날 사람들의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다 과연 그럴까? 호족들 중에 세대 교체 후 가세가 기울어 가는 가문이 권력에서 멀어지는 것은 당연하지. 단순히 사섭 덕분에 받던 특혜가 없어진 것 뿐 아닐까

뭐 어찌됐든 통치자체는 사섭이 죽은 후 손권 치하에서는 교주는 안정적으로 활약을 하고 248년 독립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 찌에우 티 찐 부인을 육윤이 진압한 이후로는 손권이 죽은 후에도 한 동안 잠잠했다.

손권이 죽은 후 황제들은 손권을 본받자라고 할만큼 막장 황제들이라 260년대에 탐관오리를 교주자사로 임명하는 바람에 이번에는 독립이 아닌 폭정에 항거하여 반란이 수 차례 일어나고, 결국 교주는 263년에 위나라로 넘어가[8] 이후 오나라는 위나라의 영역을 이어받은 진나라와 교주에서 맞붙게 되어버린다.

이후 교주는 한동안 진나라의 교지태수 양직이 다스리면서 오나라의 교주자사 유준을 역관광보내는 활약을 보여주다가, 271년에 비로소 유준의 후임으로 부임한 도황이 대도독 설후와 함께 교지를 함락하고 양직을 잡아 다시 오나라가 교주를 차지한다. 하지만 정작 오나라는 280년에 멸망 크리라.


4.2.4.2 섬 탐방기

손권이 인구 수 좀 얻으려다가 한 뻘짓으로 뭔가 여러 가지 일이 얽혔기에 손권/인간 사냥 문서 참고.


4.2.4.3 기타 남방에서의 교류

앞서 교지에서 사섭일족을 모두 죽인 여대는 구진까지 정복해 사신을 보내 부남(캄보디아), 당명(라오스 남부), 임읍(베트남 남부)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하여 조공을 받은 기록이 있으며 243년 12월에는 추가적으로 부남의 왕 범전이 사자를 보내 예인과 그곳의 특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추가로 있다.

또 황무 5년(226년) 남주이물지에는 페르시아와 천축국과 남해에서 교류한 사실이 남아있으며 진론이라는 로마상인이 온 사실이 양서 제이전 천축국전에 나와 있고 오시외국전에도 배를 타고 로마를 갈 수 있음이 나올 정도로 여러 나라와 교역을 했다.성과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만 말이지

물론, 손권이 죽은 후에는(…)

4.3 문화적, 경제적 업적

중국 역사상 매우 중요시되는 강남 개발의 시작.

사기에서는 너무 습해서 요절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우왕이 치수를 할 때 9주로 나눌 때 경제력이 황하 지역에 비해 심각하게 떨어진다고 평가 받은 건업 등 양주 지역, 강남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을 손권 대로부터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굉도 개간을 할 것을 요구하고 제갈근도 손권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개척한 것을 언급하며 육손의 개간 요구에 손권이 직접나서서 농사를 짓고 심심하면 행정 구역의 재조정이 보이고 건설 얘기가 계속 나오는 등 개간 관련 내용이 넘쳐나며 손권이 죽은 후에도 계속 개간의 얘기가 나오는 등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후 육조시대를 거쳐 남송 때는 강북의 생산력을 앞서지만 그건 또 나중의 이야기.

경제적 업적의 자세한 내용은 오(삼국시대)#s-6 참고.


4.3.1 불교의 전파

후한 말 낙양에는 사마르칸트, 파르티아 등지에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승려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게 동탁삼보의 난을 전후로 유기난, 축율염 등의 승려들은 강남에 와서 모여 살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삼국지/인물#s-8.3의 인물들을 참고.

당시, 착융이라는 도적에 의해 서주->광릉->말릉->예장을 거치며 온갖 막장짓거리를 저지르며 불교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고 손권의 형인 손책도 그에 의해 피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강승회를 만나 양자강 이남에 최초의 사찰인 건초사라는 사찰을 만들어주고 지겸의 경우는 손권의 보호 아래 유마힐경을 번역하는 등 당시, 불교에 있어서는 불모지였던 강남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에도 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4.3.2 도굴

중국 민간에서는 손권이 도굴을 했다는 전설이 많은데 실제로 조달의 점술 책을 얻기 위해 도굴했다는 내용이 있고 세어에서는 믿기 힘든 얘기지만 장사왕 오예의 무덤을 손권이 도굴했는데 시체가 하나도 썩지 않아서 오예의 후손 오강을 인부가 알아봤다는 내용이 있다.[9]

이거에 관해서 중국의 학자 웨난이 책을 써 손권의 도굴행위는 장사왕 오예 뿐만이 아니라 남양왕 조타도 있는 등, 이것은 민간전설이 아니라 실제라면서 그의 행위를 욕했는데 [참고링크] 손휴가 등극할 때 도굴한 것을 보고 손권도 황제가 됐을 때 부족한 자원을 얻기 위해 도굴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거기다가 세어에서 도굴했다는 말이 있는 오예의 무덤은 배송지가 수경에서 엄청 컸다고 기록했는데도 불구하고 없어졌다며 이것이 모두 손권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며 조타의 무덤을 얻기 위해 오유여유를 보내 도굴을 했다고 주장하며 현재 중국에서 손권이 도굴을 했다는 말은 모두 이 책을 근거로 이루어지고 있는 중.

어찌됐든 그의 도굴 행위로 인해 촉빠들은 그에게 "역시 쥐새끼라 그런지 땅도 잘 파네요"라는 소리도 하는 편.

그런데 이런 손권의 묘에도 위기가 찾아오게 되니, 나라 태조 주원장의 묘자리가 손권의 묘 주위에 정해진 것. 그의 묘자리가 정해지자 주위 묘들을 몽땅 다 파헤치게 되는데 이중에는 손권의 무덤도 있어 파헤쳐질 위기에 처해지나 파헤쳐지기 직전 주원장이 친히 나와 "그도 사내 대장부이니 내 무덤을 지키게 하라."라고 했다.[10] 이에 손권의 묘는 아주 잘 보존된 형태로 지금까지 남게 된다. 지금도 주원장 묘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손권의 묘를 지나가야하니 한 번 봐주도록 하자. 주원장 묘 앞에는 손권 동상도 있다. 이유는 당연히 묘 잘 지키라고(……) 황제에서 묘지기로 추락했지만 어쨌든 무덤이 보존되었으니... 하지만 이 내용은 저인획의 견호집이라는 소설에 나오는 것으로 진실 여부는 약간 모호하다. 후배의 무덤관리인이나 하는 선배가 되어버린 손권은 참으로 안습하다.


4.3.3 기타

이시진본초강목에 따르면 개자리 또는 거여목으로도 불리는 목숙(苜蓿)을 먹기 시작한 것이 손권이라고 한다. 손권과 유비가 술을 마시다가 개운한 안주가 생각나 주방에 요청했는데 마침 채소가 다 떨어졌고, 주방장은 밖으로 나가 사료로나 쓰이던(…) 묵숙을 뜯어다가 술안주로 만들어서 바쳤다. 손권은 맛있다면서 한 접시를 다 비웠고 그 때부터 민간에서 묵숙을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군주에게 말 사료용 잡초를 먹이는 주방장의 패기 유비는 무슨 죄


5 후계자

5.1 후계자 손권

불안정한 가업을 성공적으로 안정화시킨 최고급의 후계자

일단 손권의 가장 큰 약점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는 점이다. 사실 손권은 손책이 죽고 그 지위를 승계한 시점에서 고작 18세 소년에 불과한 '소년군주'였고, 적벽대전을 맞이했을 때도 약관 26세의 젊은이였다. 군주의 나이가 이렇게 어리면 치세일 때도 문제가 일어나기 쉬운데, 당시와 같은 난세에는 약점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막 후계자로 등극한 시점에서 손권의 가장 큰 약점은 '명분 부족'이었다.

자세히 뜯어보면 손권이 집권할 당시의 명분 부족 문제는 상당히 심각하다. 일단 손권의 지위는 형인 손책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지위라는게 기껏 토역장군(討逆將軍) 오정후(吳亭侯) 회계태수(會稽太守)로서, 토역장군은 단지 잡호장군이며 오정후는 한의 이십등작에서 열후 아래의 관내후 등급의 하나다. 게다가 회계태수는 손책의 '자칭'에 가까운 것이었다.

손책은 스스로 회계태수의 자리에 오르면서 친족들에게 자신이 정복한 군현을 임의로 분할하여 손가의 집권 체계를 만든다. 이 때, 오경[11]을 단양태수로, 친척 아우 손분을 예장(豫章)태수, 예장군의 일부를 나눠서 노릉군(盧陵郡)으로 만들고, 손분의 아우 손보(孫輔)를 노릉태수로 삼고, 주치[12](朱治)를 오군태수로 만들었다.

일단 이렇게 주변 군현을 장악하기는 하였으나, 실상 이들을 통솔하는 손책의 위치는 조정의 공식적인 인증이 전혀 없었다. 단지 손책에게 임의로 태수에 임명된 손가 일족, 가신들과의 사적인 연결에 의지하는 취약한 체계로서, 거의 동등한 권한을 가진 태수들을 그저 손가의 수장이라는 사적인 권위만으로 묶고 있는 것이다. 이런 체계에서는 언제 누가 배반해서 세력이 하루 아침에 공중분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물론 손권 역시 이 취약점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심지어 손가 내에서조차 손권의 권위는 완전히 확고한 것은 아니었다. 일단 장소 자신도 후계자로 손권의 동생 손익을 추천했는데다가, 나이가 어리는 해도 손책의 장자 손소(孫紹)가 있었으니 이는 손가 내에서도 껄끄럽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평남장군 교주자사에 가절을 받아 명목상으로는 손권 이상으로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던 손권의 사촌형 손보(孫輔)는 실제로 문제를 일으켰다. 손권이 뒤를 이은 뒤 얼마 안 되어 조조와 내통하여 항복하려다가 손권이 직접 음모를 제압해야 했다.[13] 그 뒤에는 바로 이술이 손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는 등 손권은 뒤를 잇자마자 이런 사람들을 숙청해야 했다.

결국 적벽대전을 앞둔 상황에서 손권의 권위는 단지 손가 내부의 친분관계를 이용한 사적인 결속체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손책보다 조금 나아진 것이 있다면 조조를 통해서 토로장군(討虜將軍)·영 회계태수의 지위를 인정받았다는 것 뿐인데 딱히 권위가 더 높아진 것은 아니다.

당연히 이는 천자를 끼고 조정의 권위를 장악한 조조에게는 도저히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 손가의 사적인 연결은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손권의 지배에 정당성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대 인들은 "별로 없다."고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조정에서 인정한 손권의 권위는 일개 잡호장군이며, 회계태수의 지위를 인정한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조조가 공격해오자 항복론이 급격히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손가 내부조차 흔들렸는데 속관들은 장소마저도 항복론으로 기울 정도로 동요가 극심했다. 유표 사후 구심점을 잃고 맥없이 항복한 유표의 형주 세력처럼 손가도 공중분해 될 위험이 컸다. 유표가 유종에게 물려준 지위는 진남장군(鎭南將軍) 형주목(荊州牧) 성무후(成武侯)였는데, 손권이 지위는 이보다 격이 낮고 맥없는 것이었다.[14]

그래서 손권은 유비와 동맹을 맺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좌장군(左將軍) 예주목(豫州牧)이라는 거물급 지위를 가지고 있는 유비는 헌제의 밀서를 명분으로 하여, 조조가 가진 '협천자'의 명분을 일전시켜 조조를 '조정을 장악하고 황제를 농락하는 역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손권은 유비와 동맹하고 명분을 함께함으로서 이 적벽대전에서 손오 세력의 구심점을 잡는데 성공한다.

적벽에서 승리한 후 유비가 상표하는 형식으로, 손권은 서주자사(徐州刺史) 행 거기장군(行 車騎将軍)의 지위를 칭함으로서 손오 정권은 이전처럼 동등한 지위의 태수들을 손가의 사적인 인간 관계로 다스리는 모호한 형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손권은 유비, 조조의 공격을 격파하고, 형남을 병탄하고 사섭을 복속시켜 영토를 크게 늘렸다. 이 과정에서 손권의 권위는 더욱 탄탄해졌고, 조비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면서 오왕(吳王)에 봉해진 것은 이미 확고한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에 불과했다.

손권과의 관계가 틀어지자 조비는 손권을 오왕에서 폐위하였으나, 손권은 태연하게 오왕이라는 지위를 계속 유지하였고 국내에서도 이미 손권의 지도력은 확고하게 인정받아 반발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즉, 이 시점에서 손권의 오나라는 후한이나, 그를 선양한 위나라의 명분론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독자적인 존속 명분을 확보한 것이다. 게다가 조비가 무리하게 손권을 공격하다가 연전연패하면서 손권의 권위는 더욱 크게 올라갔다.

그리고 건업(建業)의 개발과 수도 이전, 황무(黃武) 연호의 개원과 유홍(劉洪)이 만든 건상력(乾象歷)의 도입으로 독자성을 더욱 강화한다. 연호를 제정하고 역법을 만든 것은 황제의 통치 행위이므로, 왕호를 칭하고 있기는 하나 그 권위는 황제와 다름 없는 외왕내제 수준이라는 것이다.

229년, 정식으로 황제가 됨으로서 손권은 단순한 호족 군벌 집단을 하나의 독립된 왕조까지 발전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래도 일단 형 손책과 그의 아들로 인해 생긴 명분 문제에는 뒤끝이 있었는지 형과 아들을 왕에만 추존하고 그치는데 진수가 이를 손파토로전 평에서 깐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손권은 같은 시대의 원상, 유종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어쩌면 그들보다 훨씬 힘든 불안정한 지위에서 시작하여 개인의 능력으로 이를 모두 극복하고 황제의 지위까지 올라온 것이다.

5.2 후계자 문제

자기가 만들고 키운 나라를 자기 손으로 잿더미로 만들었다. 견훤???

불리한 상황에서 후계자로 잘 등극한 손권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의 후계자 문제는 파탄으로 몰고갔다.

손권이 세운 업적 모두가 이것 하나로 인해 다 날아가 버린다.

장자(손등)와 차남(손려)이 일찍 죽어 3남(손화)을 황태자로 삼아 놓고 넷째 아들(손패)을 그에 맞먹는 위치로 격상시켜 오나라 조정이 두 파로 갈라져 시끄럽게 되는데 이 와중에 육손이 분사하는 등 수많은 대신이 죽고 3남은 유폐시키고 4남을 죽인 뒤 손량을 태자로 삼는 이른바 이궁의 변 사건.

여태까지 손권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던 역사가들이 모두 힘을 합쳐 한 목소리로 손권을 욕하는 부분으로 연의에서 그의 활약 몇 개가 빠졌지만 이거 하나 빠진 것으로 조운, 관우 급의 수혜자가 되어버렸다

자세한 내용은 이궁의 변 항목 참고.

이 항목도 이 내용이 링크로 빠져서 엄청난 수혜를 봤다고 표현 가능할 정도다.


6 인물 평

6.1 인재의 활용

뭐하러 이 항목을 초창기를 따로 두냐고 하겠지만 실제가 그렇다(…) 역사학자들도 초반의 손권과 후반의 손권의 인재 활용에 대해서는 같은 사람이라도 상반된 평가를 내리기 때문에 따로 둘 수밖에 없다.


6.1.1 강남을 제패하는 초창기

이거 하나로 강남제패

진수는 오주전 평에 손권을 재능 있는 자를 임용하고 지혜로운 자를 존중했다고 평했고 육손전에는 육손을 알아본 손권의 안목을 칭찬한다. 정황한장주진동감릉서반정전 진수의 평에서는 반장의 쓰레기 짓거리에도 허물을 잊고 공을 기억한 것을 칭찬했다.

이릉대전 때 군신들이 제갈근을 의심할 때 제갈근을 믿는 것은 당연하다는 손권에 대해서 호삼성은 주를 달아

손권의 군신관계는 정성으로 서로 사귐으로써 아첨하는 말이 그 사이에 횡행하지 아니하였으니 강동을 보유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라며 진수와 같은 의견을 밝힌다.

오주전 주석의 부자의 평에서도 몸을 굽혀 치욕을 참으면서 손권이 인재를 잘 활용해 이겼다는 말이 된다.

손성주태, 진무, 능통, 여몽의 경우를 언급하며 손권이 부하를 위함은 인정한다. 하지만 모두까기로 유명한 손성답게 뒤에게다가는 "하지만 이런 세세한 일을 하는 것은 패왕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장수들을 위한 것은 맞지만 한 나라의 군주가 하기에는 너무 세세한 일들이라는 것.

위나라의 중신 손자 또한 팽기의 반란 때 강릉성에서의 주연의 활약을 언급하며 손권의 유대감을 칭찬한다.

추가적으로 조비조자에게 어째서 손권이 뛰어나다고 묻자 조자가 대답할 때 말을 봐도 손권이 노숙과 여몽을 보잘 것 없는 사람 들 중에서 뽑은 것을 장점으로 뽑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육개도 자신이 올린 상소에서 손권이 인재를 사용할 때 신분에 관계 없이 사용했다며 칭찬을 하고 있다.[15]

농부출신인 감택, 목동출신인 오찬, 서민출신의 장병, 병졸 출신의 정사 그외 낮은 집안 출신인 은례 등을 등용하는 등 직위에 신경쓰지 않고 인재를 뽑았으며 또, 쌩양아치에 불과한 반장을 능력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중용하며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주환감녕[16]을 전투에 활용하는 등[17], 조조유비보다도 능력 중시로 인재를 뽑았다. 심지어 유찬 같은 경우는 자신의 다리를 잘랐다는 기이한 소식만 듣고 등용한다

이렇게 인재를 모으는 것 뿐에만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끼는 것도 남들에 비해 심해 여몽이 병에 걸렸을 당시에는, 조금이라도 몸이 나빠지면 자신이 침울해지고, 조금이라도 몸이 나아지면 국가적으로 상을 내리고, 자기가 자주 들리는 게 여몽에게 부담스러울까봐 몰래 집에 구멍을 내서 여몽의 병세를 계속 지켜보기도 했다. 아, 물론 이것도 손권이 관음증이 있다고 깔 수는 있다

심지어 말년에 막장인 상황에서 주연이 아플 때도 마찬가지의 행동을 한다! 이때는 주연이 좀 먼 곳에 머물러서였는지 직접 들리지는 못했지만, 항상 조문을 내릴 당시에 병에 진척에 대해 묻고, 주연은 상소를 올리며 이에 대답했다고 한다. 오히려 부담되어서 병세가 악화됐을 듯 주유나 노숙이 죽었을 때도 몹시 슬퍼했으며, 이는 손권의 일생에서 가장 일관되게 나타났던 성격이기도 하다. 정사에서 동급으로 평가된 월왕 구천과는 다르게, 이 양반은 이궁의 변 이전에는 적어도 인재를 토사구팽시키지는 않았다.

특히 그를 성공시킨 것은 도독들의 인사관리로 주유-노숙-여몽-육손으로 이어지는 오나라 대도독 라인업은 그 결과. 산월토벌과 관련해 육손제갈각, 반준[18]등을 적절히 임용해 국력을 신장시키는데 성공한다. 그 외에 내정에도 장소반준, 고옹 등을 공경하여 이후의 오나라의 번영에 많은 역할을 한다. 물론 여기서도 말년은 제외

반대로 촉서에서 기록하는 초창기[19]의 모습 중 제갈량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단 원자에는 제갈량이 손권을 섬기라는 장소의 말에 자기를 어질게 대할 수 있으나 모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며 거부하나 배송지는 여기서 또 주석을 달아 뜬금없이 원환에게 왜 제갈량이 밑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군주라면 배반할 것처럼 기록하냐며(…) 기록에 신빙성을 의심한다.거기다가 내용 자체도 손권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못할 것이라고 했지, 손권이 자신을 업신여길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의를 다해 대할 것이라는 투의 칭찬에 가깝다.

한 마디로 이렇게 손권의 초창기 인재의 활용을 비판하는 내용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이제 말년으로 넘어가보자.

6.1.2 말년

'손권의 평을 제대로 깎아먹은 시기

오주전 진수의 평을 봐도 드러나듯 의심이 많아 주저없이 죽였고 말년에 더 심해졌으며, 참언을 믿어 아들, 손자 등을 버려 자손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면서 오나라가 망한 것이 손권에게 유래된 것이라고 했다. 장소전 또한 장소를 대한 것만 봐도 손권이 손책보다 못하다며 디스한다. 여기에 뒤이어서 장휴, 고승 고담가 남쪽 땅으로 유배가서 애석하다는 말까지 있다. 이어서 우육장낙육오주전에서는 육모를 제외한 모든 인물의 평이 다 손권을 까는 평이다!

앞서서 손권의 인재등용을 칭찬하던 호삼성도 결국 후반부에서는 얄짤없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그 명령을 따르지 않고, 그 뜻을 따른다. 손권은 스스로 제환공보다 뛰어나다고 이르며, 그의 신하를 관자를 근거로 책망했으나, 설사 오에 관자가 있었더라도, 또한 감히 손권에게 생각했던 바를 다 쏟지 못했을 것임은, 육손을 보면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손권의 인재 활용을 욕하는 것이 이런 말년의 막장 행위 때문이다. 모으는 것은 일생이었지만 날려먹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니…… 기껏 모아놓은 인재풀을 이궁의 변 한 번으로 날려버리는 위엄

6.2 인격적 평가

6.2.1 그놈의 술

손권은 술을 좋아하고 자주 마셨으며 주사가 심해서 술에 취하면 개가 되는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삼국지연의에는 안나오지만 삼국지 전체에서 장비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최고의 주벽이 손권이다.

게다가 술버릇은 가장 안 좋은 술버릇 중 하나인 다른 사람에게 술 권하기. 심지어 무창에서 술을 먹을 때는 사람들이 술에 취하자 술을 더 먹이려고 물을 뿌려 깨우기까지 한다! 그러고 하는 말이

오늘 술을 즐겨 마시는데, 오직 술에 취하여 이 조대 위에 쓰러지거든 그때 술 마시기를 그칠 뿐이니라!
이 미친 짓을 보고 장소는 정색하고 밖으로 나간다. 손권이 다시 불러 즐기려는 것에 불과한데 왜 이러냐고 하니 장소는
옛날에 주임금은 조구에 술 담은 연못을 만들어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당시에 역시 즐기는 것이라고 여겼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니 손권이 그제서야 부끄러워하며 술자리를 끝내지만 나중에 제갈각을 시켜 장소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는데 성공한다.

웃긴 건 같은 중신이지만 고옹은 아예 술을 안 마시고 손권도 그에게는 술을 권한 기록이 없다는 것. 오히려 사람들은 술을 먹고 실수하면 고옹이 지켜볼까 두려워 방자하게 구는 사람이 없었고 이에 손권은 심심하다며

고공이 자리에 앉았거든, 사람들이 즐거워하지 못하게 한다.
라고 한 것이 전부로 술 먹이려고 했다는 기록은 없다. 장소는 어정쩡하게 먹어서 손권이 괴롭히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은 술에 떡이 되어서는 우번에게 술을 마시라고 했는데 먹기 싫던 우번이 바닥에 술취한 척 엎어져 있다가 손권이 떠날 때 쯤 일어나니까 빡친 손권이 우번을 칼로 죽이려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때 손권을 끌어안고 말린 사람은 유기밖에 없었다고 한다.[20]

...오죽하면 '내가 취했을 때는 누구를 죽이라고 해도 죽이면 안된다'라고 자기입으로 명령을 내렸을까... 이런 명령을 내린 걸 보면 자기 술버릇의 심각함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되지만...

다만 나중에 손호 때의 육개의 상소를 보면 주량을 제한 했다는 등의 말을 볼 때 어느 정도 개선이 됐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최소한 손호 저놈은 술 안 마신다고 진짜로 사람 죽인 녀석이니 그놈보다는 낫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손권의 술주정으로 볼만한 일 중 그나마 훈훈한 일은 두 가지 있는데 주환이 술잔을 올리면서 손권의 수염을 만지고 싶다고 하자 만지게 해준 것과 서성주연주태를 따르지 않자 술을 먹으면서 주태의 상처를 하나 하나 찍은 연의에도 채택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각각 주환 항목과 주태항목을 보도록 하자.

사실 술 많이 먹었다고 까는 건 아니고 먹은 뒤에 개가 되어서 까이는 거다. 유비도 손권처럼 엄청나게 고생했지만 술 먹는다고 개가 됐다는 기록은 없는 걸 볼 때 손권 술버릇이 정말 거지같긴 했나보다.

또한 주연묘에서 황제의 연회를 묘사한 그림을 보면, 단순히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 악사들이 동원되고 많은 어리광대가 저글링 묘기를 보여주고 있는 등 상당히 화려하게 노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꽤 화려하게 노는걸 즐긴 듯 하다.

6.2.2 잔인함

손성은 아예 오나라가 빨리 망한 것이 손권의 잔인함 때문이라고 평했고 진수 역시나 손권은 잔인했다고 평했다.

참고로 위에서 진무의 첩을 순장한 것이 손권이 부하를 위함이었다고 한 것도 손성이다. 즉, 진무를 위한 것은 맞지만 너무 잔인하다는 것. 그외에는 심우가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죽인 것과 오군에서 영향력이 큰 성헌을 죽인 등의 행위가 있었으나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궁의 변 때 인간들을 마구 죽여버린 것. 육손은 손권에게 죽지는 않았으나 그의 일패인 오찬을 죽여 육손을 죽음으로 이끄는 등 손권의 말년은 암군이라 칭해질 정도로 잔혹했다.

6.2.3 만용

아버지의 기운을 물려받았는지 아니면 본받고 싶었는지 그는 일국의 군주임에도 자주 선두에 나서거나 전장에 직접 참여했다. 합비에서 장굉이 말린 것도, 손권이 장료에게 발린 뒤의 하제의 말도, 호랑이와 맞짱을 뜨는 장소의 말도 모두 이것을 증명한다. 장굉의 말마따나 편장(偏將)이 할 일 주장(主將)이 한 것이다. 그나마 일신의 무예가 뛰어났다고는 하지만, 일개 장수가 아닌 왕이 선두에 나서서 위험을 재촉하는 일은 분명 만용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선성에서 산월의 습격을 받았을 때 부상을 입고 주태가 사경을 해맸으니 정신을 차려야 할텐데 그는 이후에도 무모한 짓을 계속했다.

유수구 전투에서 그는 앞으로 나서 조조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들었지만 배가 전몰할 뻔했다는 기록은 어찌보면 너무나도 위험한 행위였다. 합비에서 퇴각할 때도 그냥 퇴각했으면 엌 ㅋㅋㅋ 장료노 합비와 튼튼데스네하고 손권의 군사적 재능을 비웃으며 끝내면 되는 문제였는데 이 군주라는 작자가 퇴각할 때 후위대에 있었다. 지 딴에는 군사들 사기 살리려고 그랬을지 몰라도 덕분에 진무는 전사하고 능통의 식객은 전멸하며 손권 본인도 죽을 뻔한 희대의 개그 장면이 탄생한 것. 이 때 장료는 손권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그저 싸움실력이 좋은 장수인줄로만 알았는데, 만일 장료가 손권을 알아보았다면 그대로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다.

국가에서 군주를 잃는 것은 무장 하나를 잃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피해고, 죽지 않더라도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고 군주를 구출하기 위해 더 큰 희생이 생긴다. 누가 봐도 득과 실의 차이가 명백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 물론 전면에서 싸운 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고 손권 본인의 무력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일국의 군주가 아니라 원술 산하에 있었거나 이제 막 창립된 군벌이라 입장이 달랐다. 게다가 아버지는 실제로 전투중에 전사했다. 그리고 손권이 만큼 뛰어난 야전 사령관이었던 것도 아니다.

일본의 센고쿠 시대 다이묘였던 호조 우지야스는 거친 전장에서 평생을 보내느라 몸에 흉터가 상당히 많았는데, 이를 보고 부하들이 그 무용을 칭찬하면 대장 된 자가 이런 상처를 갖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개인적 무용과 지휘력이 뛰어난 야전 사령관도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 만용과 실책을 경계하면서 이런 말을 했는데 뛰어나지도 않은 자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소스 전투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국왕이 직접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적을 박살낸 적도 있고, 사자심왕 리처드 1세처럼 국왕이 적진에 뛰어들어 난전을 벌이며 적을 몰아낸 적도 있으며, 동양에서는 항우처럼 군주급 되는 인물이 일선에서 나서서 적을 박살낸 적도 여러번 있는 건 사실이니 무작정 군주가 선두에 섰다는 것만으로 까이기만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21] 어쨌든 최고 지도자가 선두에 서면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간다는 것은 여러차례 역사에서 증명된 바 있고, 특히 숫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는 역전의 계기가 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손권은 저런 인간흉기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기량이 차이나는 데다가 일부러 군주가 최전선에 설만큼 급박한 상황도 아니었으니 결국 만용이라고 할 수 밖에.

호랑이 잡은 것도 우스개소리로 무력 상승 요인이지 장소 말대로 군주가 사냥하면서 죽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다. 그리고 합비는 손가락 깨물면서 반성이라도 했지 사냥은 장소의 말을 듣고도 계속할 뿐만이 아니라 가운데 덮개를 제거해 오히려 수레로 달려드는 짐승을 쳐내는 것을 즐기기까지 한다(…)

6.2.4 검소함

검소한 하나만큼은 역대급이라 불릴 만큼이었다. 육개의 상소에서 볼 수 있듯 궁궐의 노복+궁녀가 100명이 넘지 않았고[22] 백성들중에 아내가 없는 자에게 자신의 첩을 주기도 했으며 홑옷 입은 사람에게는 비단을 주고 길거리에 있는 유골을 매장하기도 했다. 수신기의 말처럼 호화스러운 것이 있던 손휴나 그 이후와는 달리 의복은 소박했고 궁궐에는 조각이나 장식이 없을 정도. 화핵 또한 손권이 양잠과 농업을 통해 비축한 것을 칭찬하였다.

또 사치품에 대해서는 더 대단해서 조비가 삼년상 중에 사치품을 요구하는 거부할 명분이 충분한 사건도[23] 자기에게는 기왓장과 돌이라며 바치고 조예가 말로 사치품을 구할 때는 고민도하지 않고 받아들인다.[24] 이런 것은 세종대왕님도 본받아야 한다고 언급했을 정도.


예전 위(魏)나라 임금 조예(曹睿)가 오(吳)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말로써 주기(朱璣)·비취(翡翠)·대모(玳瑁) 등을 바꾸니, 오나라 임금 손권(孫權)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내가 쓰지 아니하는 물건인데다가 말을 얻을 수 있으니 내가 어찌 아끼리요.' 하고 주어 버렸다. 예전에도 이러하였는데 지금 우리 나라가 왜국(倭國)에 대한 경우야 더욱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세종대왕신상에게-

무창에서 건업으로 다시 환도하며 건업궁을 다시 개축하면서도 나무를 베는 것은 국가적인 사업이라며 무창궁의 목재들을 다시 사용하게 하기도 하는 등 다른 군주들에 비하면 확실히 검소했다. 비교 대상이 사치 황제의 대명사들이라 문제지 이것이 심해 인색의 정도에까지 들어가 진수는 손책전에서 남긴 평으로 인색하다고 깔 정도였다. 단, 다른데서는 손권을 깐 순위로는 1등을 하는 손책을 인색하게 대했다는 진수의 평에서는 맞지 않다고 주를 달았다. 그 이유가 손책의 자손들이 답이 없다며 까기 위함이 문제지


6.2.5 너무 오래 살았다

제법 장수[25]하는 바람에 요절하는 가족들과 인재들 가운데서 홀로 살아남아 버텨야만 했다. 딱히 요절한 인물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웬만한 인재는 죄다 손권보다 먼저 죽어버렸다. 어떻게 보면 오나라의 요절징크스의 최대 피해자. 오나라에 국한될 것 없이 일반적으로 지명도 있는 삼국지의 대부분의 네임드는 손권이 살아있을 때 죽었다. 제갈량도 손권보다 먼저 죽었으니 뭐...

먼저 가족사가 술버릇이 이해가 될 정도로 처참. 먼저 11세에 아버지 손견이 전사하고 성인도 안된 19세에 형 손책이 병사해 졸지에 나라를 떠안게 되었는데, 21세에는 어머니가 사망하고, 23세 들어서는 동생이 사망[26]했다.(...) 결론적으로 손권이 군주되고 나선 그를 도와줄 친척따윈 없었다. 이래서야 술을 놓을 수가 없었을 것. 거기에 자청해서 후견인 역할을 해주며 도와줬던 주유마저 손권 나이 29세에 죽었다. 이러니 손권의 편에 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마디로 자기 혼자서 운빨인지, 저주인지 모르게 오래 사는데, 자기를 지금까지 있게 해 준 가족, 선배, 친구, 측근들은 자연스럽게 한명씩 한명씩도 아니고 특정한 시기에 몰아서 막 죽는 상황. 농담조가 아니라 진지하게 우울증성 알콜 중독이었을 수도 있다.

거기다 이게 끝이 아니다. 조조를 물리치니 이젠 손권이 그 누구보다 아꼈던 도독들과 맹장들이 신명나게 죽어가고(주유, 노숙, 태사자, 감녕, 능통, 여몽...) 황제까지 되고 나니까 이젠 마누라와 자식들이 죽어나자빠진다. 먼저 238년에 첫 아내였던 보연사가 죽는 것을 시작으로 장자 손등은 33세에, 아버지보다 11년 먼저 죽었다. 차남 손려는 20세에 죽고, 사남 손패는 당시 태자 삼남 손화와의 불화 때문에 손권이 직접 명령해서 20대 중반에 자결해버렸고, 덤으로 손화도 폐태자해버린다. 그리고 이때 육손까지 죽여버리고, 빈 승상 자리에 보즐, 대도독 자리에 절친 주연을 앉혔는데 보즐은 승상 된 다음 해에, 주연은 보즐이 죽은 그 다음 해부터 앓아 눕더니만 249년에 죽었다. 신임하던 제갈근은 8년 전인 241년에 이미 죽었다.[27] 그리고 이 꼴을 보고서도 손권은 3년을 더 살았다.

...그야말로 오래 살아서 못 볼 꼴 다 보고 욕 볼 일 다 당한 셈. 말년의 손권은 어쩌면 저 부담감 때문에 미쳐갔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장수를 원망했을지도. 이쯤되면 동정표를 주고싶을 지경.

덤으로 손권이 죽은 후에도 자식들의 요절 징크스는 끊기질 않았다(...). 2대 황제 손량은 18세에 죽고, 폐태자 손화는 제갈각이 옹립할까 두려워한 손준에 의해 자결 명령을 받아 30세에 죽고, 3대 황제인 육남 손휴도 30세에 병사... 그나마 요절을 면한 5남 손분도 270년에 손호의 손에 횡사했으며 50세를 넘기지 못했다.

여담이지만 그나마 손권보다 오래 산 거물급은 여대, 유찬, 육개, 시의 정도다.

이렇게 보면 정말 운없는 남자였다.

7 현대의 평

유비, 조조와 마찬가지로 손권은 업적과 실책,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군주다.

이러나 저러나 높게 쳐주는 사람들이 꽤 많다. 송나라 때 손권을 제갈량보다 높게 본 하거비 뿐만아니라 현재 중국쪽 학자들을 보면 유비나 조조보다 손권이 더 훌륭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전반적으로 기성 삼국지 연구계에서는 손권을 뛰워주는 경우가 꽤 많다.

대표적인 손권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은 자치통감을 17번 읽은 것으로 유명한 마오쩌둥.

을 제외하고 권이 아니라면 누가 과연 조조에 맞설수 있었을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손권이 유비나 조조와는 달리 그 동안 관심을 덜 받아서(…) 그리고 유비나 조조만 찬양하는 분위기에 신선감을 불어넣기 위해서(…) 조장되는 경향이 좀 있다. 특히 일반인들이 인물평가를 할 때 정사 삼국지 자료는 거의 인용하지 않고 오직 삼국지연의만 인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 전반적으로 손권은 연의에서는 관심을 덜 받아서 실책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나오지 않은 편이라 이미지 면에서는 이득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국지 팬덤에서는 그에 대한 반발로 손권에 대한 이런저런 연구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기성 삼국지 논단의 손권 고평가조차 거품이 아니냐는 의견이 생겨나고, 반발이 너무 심해 극단적인 손권 깎아내리기로 퍼지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특히 디시인사이드 삼국지 갤러리에서는 연의에서 여몽관우의 혼령에 씌일 때 남긴 말인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이하생략)[28]"에서 유래하여 손권의 성(姓)과 톰과 제리에 나오는 쥐인 제리를 합친 말인 손제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다.[29] 심지어 이 항목에서 실책 아래의 항목명은 전부 "~에서의 손제리"였다(...).

아무튼 DC 삼갤에선 그저 쥐새끼라고 까인다. 아니, 위빠촉빠나 모두 한 마음이 돼서 손권을 깐다. 촉빠와 위빠가 키배를 벌이다가 손권이 언급되면 둘이 한 마음이 되어서 손권을 까기도 한다. 거기다가 가끔은 오빠마저 손권을 깐다.

다만 인터넷 팬덤에서도 손권에 대한 비난은 어느 정도는 과한 면이 있다. 말년을 제외하고는 크게 비난받을 만한 점이 없는 술만 안 마시면 나라를 잘 운영하는 훌륭한 군주다. 특히 2세대 중에서는 누가봐도 가장 뛰어난 군주. 애초에 유비, 조조의 자식들이 아버지로부터 이미 세운 나라와 당대 제일의 인재 풀을 물려받은 반면 손권은 형에게 물려받은 불안한 기반을 바탕으로 스스로 황제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니만큼 1대 1 비교 자체가 무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30]

거국적인 시야가 떨어진다고 하지만 이는 호삼성, 하거비의 평대로 할거, 칭제건원로 손권의 목표를 잡아버리면 완전히 분쇄되어버리는 문제다. 물론 죽은 사람의 목적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일은 부질없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뭐, 그거조차도 명분이나 혈통이 딸리긴 하는데... 손권은 한조의 녹을 먹어본 적이 없다.

다만 비판하는 측과 옹호하는 측이 매우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니, 어느 정도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실제 손권이 말년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막장군주가 아니라는 점을 보더라도 시정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따지고보면 당대 제일의 호걸들인 유비와 조조를 상대로 끝까지 나란한 세력으로 싸워왔다는 자체만으로도 손권의 능력은 평균적인 군주 이상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와 형이 만들어준 세력을 기반으로 했다지만 그때까지 손가는 천하의 유력한 제후들 중 한 명 정도였으며, 삼국지를 중반까지만 읽어봐도 자기 땅을 지키지 못하고 원소나 조조의 제물로 사라진 군웅들이 수두룩하다. 하물며 아무리 지리적으로 유리했다지만, 갓 성인이 된 어린 나이에 나라를 이어받아 유비와 조조라는 희대의 먼치킨들과 맞겨루면서 동오를 삼분천하의 한 축으로 올려놓고 스스로 제위까지 오른 손권 역시 비범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게다가 앞에서 언급된 손권이 물려받은 기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아직 개발이 진척되지 않은 양주의 땅과 손책대부터 쌓아온 호족들과의 악연, 손책 사후의 불안한 민심(장소전), 떠나려는 인재, 그리고 각지에서 터지는 반란들이야말로 손권이 물려받은 기반이었다. 친척이라는 놈은 조조에게 동오를 낼름 가져다바칠 생각을 하고 앉아있었고, 이술은 아예 여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조조와의 연계를 꾀하였다. 서쪽의 구원(舊怨) 유표황조는 건재하고 북쪽에서는 조조가 강동을 병탄할 생각을 하고 앉아있으며(장굉전), 내부에서는 한때 손권의 목숨까지 위협하기도 했던 산월족이 준동하는 등, 어린 나이에 권력을 물려받은 손권이 마냥 울고만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말 그대로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세력 자체가 공중분해 될 수 있는 상황. 이쯤 되면 물려준 기반이고 뭐고 차라리 새로 시작하는 편이 나을 정도의 상황에서, 고작 18살의 나이에 군주가 된 손권은 그 악재들을 이겨내고 강동에 뿌리를 잡아 결국 구오지존의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 괜히 그 군사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손권의 별명이 수성의 군주가 아닌 것이다. 일반적으로 손권을 계승군주로 보지만, 꿀물셔틀노릇이나 하다 죽은 아버지나 온갖 악연을 쌓아오며 동오를 정벌하고 꼴랑 죽어버린 손책에 비해 이쪽을 진정한 오나라의 창업군주로 볼 여지 역시 충분하다. 흔히들 삼국지 내에서 자수성가의 대명사로 유비를 꼽지만, 겪었던 역경의 정도로는 손권 역시 만만치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유비는 역경이 일생 전체에 걸쳐 있었지만 손권은 그것들 중 대부분이 한번에 몰빵(...)으로 일어났다는 것 정도. 하물며 앞서 언급한 조조와 유비 모두 손권에게 잊지 못할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도 유념하자. 물론 손권도 조조에게만은 잊지 못할 깊은 상처를 입긴 했다.

말년의 거대한 삽질[31] 때문에 위무제나 한 소열제에 비교하긴 무리일지 몰라도 손권 역시 즉위 전반에 있어 가히 명군이라 할 만하다. 손권 이후의 육조시대 남조 군주들만 봐도, 손권이 아무리 못해도 그들보단 뛰어나단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알 수 있지만, 대중 및 학자들의 대체적인 평가는 "충분히 한 나라를 운영할 역량이 있었고 실제로 나라를 잘 운영한 훌륭한 군주였지만, 말년에 미쳐돌아서 모든 걸 말아먹었다." 수준이다. 군주제의 단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게 훗날 인간들을 위해 몸소 실천한 깨우친 임금이시다


8 가족 관계


9 삼국지연의에서의 손권

합비대전에서 장료가 도발해오자 몸소 창을 들고 싸우려는 대목이 있다. 이점에서 손책에 못지않은 장재가 있었는지도... 근데 장료한테 죽을 뻔하다가 이미 죽었던 태사자가 구했다. 또 멍하니 있다가 송겸이 죽었다는 것.

전체적으로 수혜를 받은 편. 젊은 나이에 수성의 달인으로 불리거나 위연의 됨됨이를 알아본 일화를 그대로 채용하면서 이궁의 변이라는 손권의 대표적 흑역사 중 하나는 아예 언급도 안 됐다.

10 미디어 믹스


손권/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1. '大'는 시호로서는 안 쓰이는 글자고, 흔히 '대황제'라고 하면 시호가 아니라 단순히 황제를 더 높여 부르는 말로 쓰이므로, 이 시호는 굉장히 이례적이다. 그래서 대황제라는 시호는 후대에 오나라가 비판당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2. 진수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아 조조를 무제(武帝)로, 조비를 문제(文帝), 조예를 명제 등으로 호칭했고, 자기가 한때 섬겼던 촉한은 유비, 유선을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어느정도 권위있게 존중해서 표현했다. 오나라의 경우 손권은 오주(吳主), 이후 황제들은 삼사주전으로 일괄처리, 이전의 손견, 손책도 추숭이 아니라 다 생전관직인 '파로토역'으로 전을 처리한걸로 봐선 아무래도 손권만 특별 대우를 받은듯 싶긴 한데 촉서 선주전만 봐도 '선주의 성은 유 휘는 비 자는 현덕이다'라고 표현하고 계속 선주라고 부르는 반면 오주전(손권전)은 그냥 다짜고짜 '손권은 자가 중모다'로 시작한 이후 그냥 계속 손권이라고 칭하고 있다.
  3. 독자 연호를 선포하기 이전에는 후한과 위의 연호를 사용했다. 참고로 손권이 황무라는 연호를 썼을 때는 손권이 아직 황제를 칭하기 전이다. 본래 연호는 천자가 선포하는 것이니, 독자 연호를 선포한다는 것은 향후 적절한 시기에 위나라에 대한 신종(臣從)을 철회하고 스스로 황제가 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더불어 222년에는 조비가 태자 손등을 인질로 보내라는 요구를 해오자, 손권이 이를 거부하여 위나라와 오나라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손권이 명목상 위나라의 신하를 칭하면서도 독자적인 연호를 선포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4. 오나라 황제로서의 재위기간만 표기한 것이다. 오왕으로서는 220~229년에 재위하였으며 총 재위기간는 32년이다.
  5. 유방의 군사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항우가 워낙 사기여서...
  6. 이 과정에서 전예가 바닷가에서 대기타다가 공손연에게서 말을 사서 돌아가던 애꿎은(?) 오나라 사신단을 족쳤다. 해당 항목 참조.
  7. 대월사기전서의 오사련의 평은 사휘항목 참고.
  8. 263년 오나라의 교지태수 손서가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백성들이 우환이 되었다. 마침 오주가 감찰관 등순을 교지로 보냈는데, 등순이 멋대로 30마리의 공작새를 수집해 건업으로 보내자 백성들이 원역(遠役)이 있을까 두려워해 반란을 일으킬 것을 꾀했다. 5월에 군리 여흥 등이 손서와 등순을 죽이고 사자를 위나라로 보내 태수와 군사의 파견을 청하자, 구진과 일남이 모두 이에 호응했다. ─ 『자치통감』
  9. 자세한 내용은 오강 항목 참고.
  10. 참고로 주원장의 고향은 난징으로 이곳이 삼국시대 건업이다.
  11. 손견의 부인 오국태의 남동생.
  12. 손견의 부하
  13. 이때 손권이 보여준 단호하고 빠른 대처는 세력의 존속이라는 관점에서는 매우 영민한 행동이었다. 원상이 혈육의 정 때문에 원담을 봐주다가 결국 패망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는걸 생각해보자.
  14. 애초에 유표는 황족 출신이다. 그 아들인 유종 역시 당연히 황족이다. 그에 비해서 손가는 그 근원이 불분명하다. 삼국시대의 인물인 진수조차도 삼국지에 '아마 손자의 후손일 것이다'라고 추측성 언급만 하였을 정도이다.
  15. 육개전 뒷면에 있는 것으로 일단 진수는 진짜 있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좋은 내용이라 육개전 뒷면에 나열한다고 적어두었다. 신빙성이 조금 떨어지지만 본전에 있는 기록이고 진수도 좋은 기록이라 했기에 여기에 적어둔다.
  16. 주환은 성격이 매우 거만해서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는걸 치욕스럽게 여길 정도였고, 감녕은 성격이 깡패 같았다고 한다.
  17. 물론 이들의 성격적 결함에 비해 지위가 역대급이다 보니 이런 인재의 활용을 까는 역사학자도 많다.
  18. 형주 공방전 당시 항복한 그 반준 맞다.
  19. 초창기라는 것이 중요하다. 말년가면 누구든지 손권을 까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20. 정확한 상황과 정사의 전문은 유기 참고.
  21.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언급한 세 사람은 무인으로선 몰라도 한 나라의 지도자로선 '꽝' 소리 듣는 인간들이다(.....).
  22. 비교당하는 손호는 멸망할 당시 궁녀만 해도 5천명이었다. 그리고 오나라가 멸망하고 이 궁녀들은 모조리 끌려가서 사마염의 궁녀수는 1만을 찍었다.(…)
  23. 조공을 바칠 경우 예법에 종류와 수량을 정해 놓고 있었다. 조비는 이걸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는 걸 바치라고 요구했다.
  24. 물론 조비를 보고 근본적으로 예를 모르니 예의를 의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하필이면 조조의 삼년상 중에 상주인 양반이 예법에도 맞지 않는 사치품을 달라고 하니 예의가 없다고 할만하다.
  25. 손권이 죽은 나이는 21세기인 지금의 평균수명에 해당하는 나이다. 그 당시의 평균수명이 더 짧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손권은 꽤 오래 살았다.
  26. 손익. 사실 손광이라는 동생이 하나 더 있는데, 생몰년이 불명이나 20세 남짓해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의상에서 손책의 유언을 들었다고 되어있으니 손권 20~22세 즈음해서 죽은 듯. 관직에 오르지도 못했다. 조조와의 동맹 당시 조조의 아우의 딸과 결혼했다고.
  27. 참고로 강력한 동맹이었을 제갈량은 형보다 7년 빠른 234년에 죽었다. 덤으로 2년뒤인 236년에는 평생의 애증관계였던 장소도 죽었다.
  28. 관우는 푸른 눈의 애송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29. 잘 쓰이는 말은 아니나 조조의 경우는 조톰이라고 불렀다. 물론 합비 공방전에서 장료의 활약이 매우 컸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실제로 디시인사이드 삼국지 갤러리에서는 장료가 조조의 부하인 것을 감안, 결국 장톰이 대신 조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매우 압도적으로 많다.
  30. 그런데, 손권이 과연 2세대 군주인지는 약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 유비나 조조보다 한 세대 어린 인물이기는 하지만, 지방의 군벌중 두각을 보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손견이나 손책을 생각하면 손권이 실질적으로 오의 창업군주였다고 볼 여지도 상당하고, 대략 적벽대전시기부터 화려한 활약상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조조나 유비와 전성기가 어느 정도 겹치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삼국이 실질적으로 정립된 시기의 군주가 유비-조조-손권이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1.5세대 정도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듯.
  31. 흔히들 노망나서치매끼 때문에 저런 짓을 벌였다고 하지만, 그 시기 손권은 후계자 문제나 숙청 건 외의 외교적, 군사적 일처리는 의외로 멀쩡했다. 주연이 촉의 배반을 의심해도 논리적인 이유를 들어 반박했으며, 위군 측에서도 이 당시 손권을 만만하게 보지 않아서 제갈탄이 왕기에게 의논을 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말년의 만행은 의도적으로 제정신으로 저질렀을 가능성이 더 높다! 와 완전 미친놈 나는 세계를 만들고 세계를 부순다.
  32. 실제로 이궁의 변을 일으킨 원흉 중 한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