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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당시 응원단장으로 활약했던 임갑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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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해태 타이거즈 역대 응원단장 | |||||||||||
임갑교 (1982~1995) | → | 김창규 (1996~2001) |
1 소개
1945년 만주 지린성 출생.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1995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단장으로 있던 사람으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응원단장이자 최장기간 응원단장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2 응원단장의 첫 시작
부모를 따라 광주광역시(당시 전라남도 광주)에 정착한 임갑교 옹은 공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쳤고 그 곳에서 응원을 배웠다. 1975년 해태제과에 입사하여 본사 냉동 수리실에서 일을 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공군에서 응원을 닦은 실력으로 회사 야유회에서 응원을 이끄는 등의 활약을 했다.
그러던 도중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으로 부산 구덕야구장에서 해태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를 위해 본사에서 버스 5대를 대절하여 관람을 하러 내려간 것이 그의 삶을 바꾸게 되었다. 이 때 해태가 롯데에게 지면서 해태를 응원하러 온 사람들이 주눅이 들었다. 야유회에서 갈고 닦였던 그의 응원도 빛을 바랬다고 한다. 그러자 좀 더 관중들을 끌어당기기 위해서 응원 방식을 개발하면서 관중들의 응원들을 집중시켜면서 응원단장으로써의 그의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아예 해태에서는 임갑교를 정식으로 타이거즈 응원단장으로 임명했다.
3 경력
임갑교의 응원방식은 호루라기를 이용한 박수와 디스코 댄스, 그리고 트럼펫으로 연주하는 목포의 눈물이었다. 현재의 각 선수들에게 응원가를 붙여주고 빵빵한 앰프를 동원한 화려하고 세련된 응원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현재에도 응원에 쓰이고 있는 3-3-7 박수나 기차박수를 임갑교 단장이 먼저 응용하여 응원에 이용했다는 점에서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 외에도 응원단장의 화려한 응원복을 입는 등 이 때부터 응원단장의 개념이 확립되었다. 임갑교 옹의 신체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신체 결함(...)을 커버하기 위해 화려하게 입은 것. 임갑교 단장은 해태제과의 직원임과 동시에 타이거즈의 응원단장을 겸했기 때문에 아예 직장을 타이거즈로 바꾸라는 권유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응원방식은 응원단장을 필두로 해태 임직원들이 응원에 투입되어 단체응원을 하는 방식이었다. 현재는 이벤트 업체에서 응원팀과 계약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이런 모습은 사라진 지 되었지만, 초기만 하더라도 모기업의 임직원들이 단체로 응원에 투입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임갑교 응원단장이 있는 동안 해태가 83년 우승을 시작으로 95년까지 7번의 우승을 거머쥐었고, 호남인의 슬픈 정서가 더해지면서 해태 타이거즈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시대의 정서에서 호남 지역이 경제발전에 소외되었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장소가 야구장이었기 때문에 임갑교 단장이 이끄는 해태의 응원은 탈출구와 다름없던 셈.
4 은퇴
임갑교 단장은 1995년을 끝으로 단장직을 사임했다. 이유는 해태제과 소속 근로자 신분인 상황에서 '파견근무' 형식으로 응원단장을 이끌었는데, 이를 이유로 아예 해태 타이거즈 홍보실로 옮기면 퇴직금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인 것. 때마침 1995년에는 해태의 가을야구 진출이 좌절되면서 그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1996년에는 다시 일반 근로자 신분으로 해태제과에 돌아왔고 2000년 정년퇴직을 끝으로 해태제과에 퇴사를 한다.
퇴직 이후에는 냉장실 설비 경력을 바탕으로 대한극장, 롯데마트를 거쳐 현재는 영등포 한 모텔의 시설담당 팀장으로 근무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