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목포 출신의 가수 이난영이 불렀던 트로트 가요.
1 개요
판소리 풍의 가락과 구슬픈 곡조가 잘 살아있어 '남행열차' 와 함께 목포를 대표하는 노래로 남아있다. 자매품(?)으로 목포는 항구다가 있다. 지금도 매년 목포에서는 '이난영 가요제' 를 열고 있다. 나라 잃은 한을 말하는 노래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고자 '원한 품은' 을 '원앙 품은' 으로 바꿔불렀었다.
특히 1970-80년대, 상대적으로 차별받던 호남 사람들의 설움을 달래줬고 호남을 대표하는 야구팀 해태 타이거즈의 응원가로도 매우 유명했었다. 1980-90년대 당시를 지배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면 경기장 중립 규정 때문에 5~7차전을 잠실에서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1] 이때 해태 팬들의 응원석 쪽에선 이 노래가 불려지기 시작하면 가히 종교집회를 연상케 하는 그 무엇이 응원석을 맴돌았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 혀가 꼬여서 노래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역전 홈런이나 안타, 삼진이라도 나오면 울면서 이 노래를 불렀었다. 호남 출신의 아버지를 둔 1980년대[2] 생이라면 이 주제를 가지고 한 번 물어보자. 상세하게 설명해주실 것이다. 한 마디로 호남의 서러움이 담겨있는 노래.
그러나 해태 타이거즈도 1997년 외환 위기 크리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그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약해졌으며, 해태를 인수한 기아는 해태 타이거즈의 컬러를 빼기 위해 아예 이 노래를 의도적으로 응원가에서 빼버렸다.[3] 이후 팬덤의 교체와 프로야구의 스포테인먼트화를 거치면서 목포의 눈물은 점차 잊혀져 갔고, 현재 타이거즈의 젊은 팬 중에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지경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 2009년 한국시리즈 6차전, 그리고 7차전 우승 확정 즈음 슬그머니 응원가로 복귀했는데, 하필이면 위에 서술된 대로 가사를 아는 사람이 드물어서 바로 호응이 끊겨버렸다.
목포 유달산에 가면 노래비가 세워져있으며 이난영과 목포의 눈물 노래를 기리기 위해 매년 이난영 가요제를 개최를 한다.
2 가사
사공의 뱃노래 가믈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 년 원한 품은[4]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쪼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쩌다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
3 관련 항목
- ↑ 실제로 해태 타이거즈-기아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10회 우승 중 무등야구장에서 우승을 확정 지은 게 1987년(對 삼성 라이온즈) 우승 딱 한 번이었다. 즉, 한국시리즈의 우승을 결정짓는 10번의 경기 중 딱 한 번만 홈 구장에서 목포의 눈물이 불려졌다는 얘기다.
- ↑ 호남인의 한(恨) 정서가 극대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 정서의 밑바탕에는 이 일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 ↑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부분인데 중간중간에 부활했다가 없어졌다가 했었다 2000년대 중후반에도 잠실 야구장에서 한 팬이 준 가사판을 김주일 응원단장이 받아서 가지고 다니면서 첫 음을 높게 잡으면 삑사리가 나니 주의하라면서 7~8회 지고 있을때는 목포의 눈물 이기고 있을때는 남행열차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당시 올림픽 혹은 WBC 이후에 유입된 팬 들이 많아서 가사판을 들고 다녀야 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도 많았고 질 때 부르는 노래라는 인식이 강해서 호응이 좋지만은 않았다
- ↑ 처음에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삼백련(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으로 바꾸어 부르다가 광복 후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