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壹淳
호는 호암, 청강, 무위당(无爲堂), 일속자(一粟子)
대표적인 시민운동가이자 서화가, 교육가
한살림운동이 태동하는데 산파역할을 함
1928년 원주 출생, 1994년 원주 타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초기 시민운동가이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원주 대성중고등학교의 실질적인 설립자이다. 두 번의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하였고 5.16 군사정변 직후 평소 주장해 왔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3년간 수감되었다.
그 이후에도 뻑하면 반독재 운동의 배후와 빨갱이로 몰아가고는 했으며, 장일순 때문에 그의 집 앞에 따로 파출소를 만들어 그를 전담했을 정도.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념교구로 원주교구가 설정되고 초대 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의 요청으로 본격적인 신협운동과 평신도교육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72년 남한강 대홍수를 계기로 지학순 주교와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만들었다. 강원도 일대 농촌과 탄광촌을 중심으로 신협운동과 소비자협동조합운동과 같은 민간주도의 사회개발운동을 벌였다.
정인숙 살해사건이 터진 후에는 원주문화방송 개국과 관련해 부정부패 규탄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으며한 것은 지학순 주교였다. 장일순은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가 없었다.
민청학련 사건 때는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은 무효"라고 주장하는 양심선언을 하는데 기여하였다.
장일순은 70년대 원주캠프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러나 반독재투쟁을 비롯한 운동의 전면에 나서기보다 드러나지 않게 일하는 것을 선호했다.
장일순은 정치활동에 나서지 않고 후방에서 반독재 투쟁을 지원하면서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평소 난 치는 것과 잡초를 그리는 것을 즐겼으며, 이를 팔아 민주투사들을 돕기도 했다. 1980년대 원주의 '한살림 운동'을 시작하여 호를 일속자로 바꾸고 하늘, 땅, 물, 공기, 사람, 벌레는 모두 한생명 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자연을 중시하는 생명사상운동을 펼쳤다.
그의 사상과 삶은 동학의 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