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

사목표어는 Fiat Lux (빛이 있으라)이다. 푸른색(위의 횡선 부분)은 하늘과 천국을 뜻하며, 검은색(아래 검은 부분)은 세상의 어두움을 뜻하고, 황금색(문장 외곽, 십자형, 삼각형, 원형을 두른 테두리)은 빛을 표시하며, 빨간색(종선부분, 삼각형, 십자형, 원형)은 천주의 사랑을 표시한다. 위 부분의 ▽은 삼위일체이신 천주를 상징하고, 아래 부분의 ○은 세상을 상징하며, ▽과 ○을 연결하는 +는 그리스도의 +로써 세상을 천주께 연결하는 상징이다.
역대 천주교 원주교구장
교구 신설초대 지학순 다니엘 주교2대 김지석 야고보 주교

1921~1993

1 개요

대한민국천주교 주교이자, 민주화 운동가. 세례명다니엘. 1970년대 유신시대에는 독재와 맞선 민주화 운동가로, 그리고 5공 시기에는 윤천지강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2 월남 사제

원래 고향은 평안남도 중화군으로, 여기서 세례를 받았다. 고교 시절에 서울로 유학을 와 소신학교에 다니면서, 일찍부터 사제의 길을 걸을 마음을 품었다. 그래서 1948년 원산 덕원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생의 길을 걷던 도중, 북한 공산당 정권에 의해 신학교가 폐쇄되자, 친구인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와 함께 월남을 시도하였다. 이 때 가족들과 헤어지게 되면서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1]

그러나 월남 도중 체포되었는데, 다행히 사형당하지는 않고 해주 감옥에 수감되는 정도로 끝났다. 그리고 1950년 1월에 기어이 탈출에 성공하며, 서울 성신대학에 입학하였다. 그 해 6월에 터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는 신학생 대신에 자신을 핍박한 공산당과 맞서는 전사가 되기로 하고, 국군에 입대하여 참전한다. 그리고 1952년 부상을 입어 제대했고, 제대 후에 다시 신학생으로 돌아와 1952년 사제서품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3 원주교구장 착좌

사제 서품 후 본당 신부로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다가 로마로 유학하여 교회법 박사가 되었다. 그리고 1965년 원주교구가 창설되자,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주교 서품을 받았고, 원주로 돌아와 교구장으로서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4 반유신 활동

원주교구장으로 임명되기 직전이 그 유명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던 무렵이었고, 그 모습을 직접 본 영향인지, 혹은 당시 40대 중반의 젊은 주교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학순 주교는 열정적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것이 원주교구가 40%의 지분을 후원하면서 창설된 원주문화방송이며, 김지하장일순의 후원자도 지학순이었다. 그러나 원주문화방송은 60%의 지분을 가진 5.16재단의 부패로 인해 운영이 엉망이 되었고, 분개한 지학순 주교는 1971년 사회정의 실현과 부정부패 고발을 선언하며, 원주문화방송의 운영을 규탄하기에 이른다. 한국 천주교가 처음으로 사회 운동에 개입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지학순 주교의 활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2년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이사장이 되었고,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도 맡아 활동하며 유신 정부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 결과는 1974년 바티칸에서 귀국하는 길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는 것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된 것은 김지하에게 준 돈 때문으로 유신정권은 이를 민청학련의 자금으로 쓰였기 때문에 지학순 주교를 민청학련의 배후자로 몰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된 후 하루만에 석방되었지만, 수녀원에 연금되었다. 하지만 지학순 주교는 수녀원을 나와 유신헌법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을 하며, 공개적으로 유신정권에 저항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유신헌법은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 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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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석방 시기의 모습. 이때가 리즈시절. 같은 리즈 시절을 보내던 모 인물의 모습도 보인다.

이런 선언을 내놓으면서 유신 정권과 공개적으로 맞섰고, 박정희 정부는 이에 징역 15년으로 응답했다. 물론 진짜로 15년을 다 징역 산 것은 아니고, 1975년에 석방되었지만 200일 넘게 옥고를 치뤄야 했다. 지학순 주교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고, 이 사제단이 민주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셈이었다.

5 윤천지강

민주화 운동가로서 지학순 주교의 명망은 신군부가 등장한 후에도 여전했다. 1982년 미 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킨 인물도 원주로 숨어와서 지학순 주교를 만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5공화국 시절의 지학순 주교는 민주화 운동사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70년대 그렇게 열렬하게 유신과 맞섰던 지학순 주교는 비록 적극적으로 5공과 협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5공에 대한 태도는 확실히 유신 정권과는 달랐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유신 때 박정희와 정면을 맞섰지만, 5공 전두환 정권에서의 태도가 묘하게 유화적이거나 협조적이었던 네 사람, 즉 윤보선 전 대통령, 천관우 시인, 지학순 주교, 강원용 목사를 가리켜 윤천지강이라 부르게 된다.

지학순 주교가 5공 시절에 민주화 운동에서 다소간 멀어지게 된 원인은 여럿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가장 큰 것은 그의 건강. 당뇨로 인해 1980년대 내내 고생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전면에 나서 활동하기 힘들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다른 하나는 어쨌든 반공적인 그의 성향인데, 1980년대 운동권은 분명 과거보다 더 격렬해 진 것은 사실이었고, 유신 치하에서도 <내가 겪은 공산주의>라는 저서를 낼 정도로, 아니 애당초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온 그의 과거를 감안한다면, 다소 거리가 멀어진 것은 사실이었다.[2]

마지막으로 그의 관심사가 달라진 점인데, 1985년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방북해서 자신의 여동생을 만난 지학순 주교는 변해버린 여동생을 보며 실망했다고 한다. 지학순 주교의 여동생은 "여기(북한)가 천국인데, 오빠는 왜 죽어서 천국을 찾느냐"고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방문 이후 충격을 받아 지병인 당뇨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사회운동 대신에 사회복지나 장애인 운동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뭐 그렇다고 민주화 운동에 아예 관심을 끊은 것은 아니고, 전두환에 아주 협력했던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소수 반유신 운동가들이 실망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런데 여동생한테 저런 소리 들으면 빡쳐서 사회운동 그만둘 법도 하다

6 선종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당뇨로 인해 1980년대 후반부터는 사실상 대외 활동이 줄어들게 되었고, 결국 1993년 선종한다. 지학순 주교의 뜻을 기리는 사람들이 만든 단체가 지학순정의평화기금인데, 매년 꾸준히 지학순정의평화상을 시상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 후에 주교가 되고 나서야 1985년 9월 20일부터 4일간 진행된 처음으로 열린 이산가족 상봉때 서울-평양 교환방문때 평양에 가 4살 아래인 여동생 지용화 씨를 만났다. 여동생이 "북쪽이 천국인데 왜 오빠는 죽어서 천국을 찾느냐"라고 말을 하자, 지 주교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40여년만에 처음으로 9월22일 아침 6시 10분에 방문단 숙소로 사용 중인 고려호텔 3층에 있는 제1영화관에서 지학순 주교가 집전하는 공식적인 미사가 북한에서 봉헌되었다. 마침 이날은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시성 1주년으로, 대축일로 봉헌되었다. 미사 집전 중에 지 주교가 순교자들의 희생과 관련한 기도를 진행하다 감정에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통곡을 하느라 약 2분 동안 미사가 지연되었다고 한다.
  2. 사실 고령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반공성향은 윤천지강 4인 모두에게 해당된다. 이들이 1980년대 공통적으로 민주화 운동 일선에서 멀어진 건 어떻게 보면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