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장정구(張正九) |
생년월일 | 1963년 2월 4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부산광역시 서구 |
출신학교 | 아미초등학교 |
신체사이즈 | 161cm |
프로데뷔 | 1981년 MBC 프로복싱 신인왕전 |
통산전적 | 38승 4패 17KO |
수상내역 | 2000년 WBC 선정 '20세기 위대한 복서 25인' 선정 2009년 프로복싱기자협회선정 국제복싱 명예의전당 헌액 |
1 개요
짱구, 파마머리, 저돌적인 스타일로 일세를 풍미한 복서
대한민국의 전 복싱선수.
프로복싱 전 챔피언 유명우와 함께 80년대 프로복싱 대흥행을 이끌었으며, 한국인 최초로 WBC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1983년, WBC 라이트 플라이급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1988년에 타이틀 15차 방어에 성공하고 은퇴하였다. 20세기 100대 복싱 선수에 들었다고 한다. WBC가 선정한 25인의 복서에 선정되었고, 지금은 동대문구 장안동에 복싱 클럽을 운영중이다.
2 생애 초기, 복싱 입문
1963년 2월 4일 부산 아미동 빈민가에서 출생.
이 아미동은 6.25 피난민들의 판잣집 동네로 좋지 못한 주변 환경 때문에 필연적으로 어려서부터 남과 자주 싸우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 당시의 상황을 기고하는 기사에는 "아미동 빈민가는 너무 못사는 동네였고, 심지어 택시기사한테도 요금을 떼어먹으려해 택시기사들도 가는 것을 꺼릴정도로 사람들끼리 서로 뺏기지 않으려 싸움이 일쑤였다."라고 적혀있을 정도.
그러니 어려서부터 주먹 쓰는 법을 알고 있었고, 12세의 어린 나이에 한 두번 들락거린 극동체육관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그때 어머니께 받은 1500원으로 회비와 입관비를 내었다고 한다.[1] 어린 아이가 운동을 하니 체육관 형들이 귀여워 해주었고 본인도 운동신경이 좋아서 남들이 6개월 동안 배워야 할 기술들을 단 2개월만에 터득했고, 14세 나이에 아마추어 복싱 데뷔, 부산 아마추어 최고 선수권 모스키토급 준우승, 다음해 봄 부산 신인선수권 동급 우승, 같은해 최고선수권 동급에서 아쉽게 준우승 했지만 복싱 천재의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후 당시 고등학교 학력이 없었던 점을 들어 다른 체육관에서 장정구의 대회 출전에 이의를 제기, 결국 78년 전국 체전 고등부 출전을 불허당하고 만다.[2]
이때부터 이해할수 없는 협회의 행정과 판정이 거듭되는데, 78년 전국 체전 고등부 예선을 불허당한 장정구는 79년, 만 16세의 나이로 전국체전 부산 예선 일반부(!)에 출전했고,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한다. 하지만 전국체전 본선에는 한국체대 소속이었던 장홍민이 출전했다. 당시 국가대표였던 장홍민이 예선과정 없이 바로 본선 출전 자격을 가진 것, 같은 해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 준결승에서 장홍민과 장정구가 격돌했는데 여기서도 편파적인 판정으로 장정구가 탈락하고 만다.
80년 5월, 전국아마복싱대회에 나갔지만 이 대회에는 신인들만 출전하는 대회였음에도 장정구는 자신의 경력이 들통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출전했지만 준결승을 앞두고 협회의 조사를 통해 올림픽 선발전 기록이 뽀록나왔고 결국 실격한다.
3 프로 입문
같은해 전국체전 부산 예선은 결국 장정구가 프로 데뷔를 하게 만드는 계기인데, 부산예선에서 우승을 했지만 또 장홍민이 출전권을 가로챘고 이에 소속 관장과 사범은 분노, 결국 프로로 전향을 한다.
프로데뷔 준비 당시에 WBC 前 챔피언이자, "소매치기 복서"로 유명한 故 김성준의 스파링 파트너가 되었는데 당시에 놀라운 실력을 보여줄 정도였다. 그 덕분에 한국 복싱계의 "대모"이자 큰손인 심영자[3]의 귀에 들리게 된다.
데뷔전은 그 당시 프로 복싱 영웅들의 등용문과도 같았던 "MBC 신인왕전"이었는데, 데뷔전 포함 6연승을 질주하며 해당 체급 우승과 우수선수 선정을 거머쥔다. 82년 7월까지 18연승(7KO)을 질주, 결국 당시 WBC 챔피언이었던 일라리오 사파타에게 도전을 하게 된다. 장정구는 그때 심영자의 후원을 받고 있었는데 심영자가 살고있던 워커힐아파트에서 숙식 중이었다. 그런데 어린이대공원 잔디밭에서 맨발로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던 도중에 엄지손톱만한 유리조각을 밟게 되고 이로 인해 부상을 당하게 된다.
부상 후 3주 정도의 휴식을 의사는 권고했으나 경기의 연기는 1주일 정도였다. 부상 후유증과 제대로 된 훈련 스케쥴을 치르지 못한 장정구는 82년 9월 18일, 일라리오 사파타와의 타이틀 매치에서 15라운드 1-2 판정패했다. 후에 장정구는 "이 패배가 없었다면 15차까지 방어를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에게는 의미있는 경기였다고 한다. 경기 패배 이후 심영자는 6개월 후에 재도전을 성사시킬 정도로 큰 지원을 해주었는데, 장정구는 자신이 패배한 이 경기를 비디오로 돌려보며 분석을 했다고 한다. 이 이후에도 상대방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습관이 형성되어 복싱 인생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고.
결국 6개월 다시 만난 리턴 매치에서 일라리오 사파타를 일방적으로 압도, 3회 TKO로 쓰러뜨리며 83년 3월 26일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당시에 한국에는 세계 챔피언이 없던 상태였고 세계 타이틀 도전 11연패를 기록하던 중이었다. 장정구는 당시 일본의 복싱 영웅 구시켄 요코[4]가 가지고 있던 세계 타이틀 방어 13차를 넘어서 14차, 15차를 성공시킬 정도로 대선수가 되는데 전성기 시절 그의 연수입이 당시 돈으로 2억이 넘었다고 한다. 85년 프로스포츠 선수 수입 순위 중 단연 1위는 장정구였는데 그 금액이 무려 2억 4100만원을 기록하였다. [5] 한국 복싱 타이틀 매치의 선수 수입이 백만원 정도 밖에 안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저때가 정말 한국 복싱의 르네상스인듯...
4 전설이 된 15차 방어
15차까지 방어를 치르기까지 장정구의 갖은 노력은 이로 말할 수 없다. 빡빡한 스케쥴은 물론이고 체중감량은 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여타 다른 복싱선수들도 체중 감량으로 인해 많은 고통이 있긴하지만, 장정구는 먹는 음식에 극도로 예민했고 그 때문에 정해진 식단 외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대로 운동을 해야 직성이 풀려 잠을 제대로 잤다고 하며, 자신의 방에는 자신에게 필요한 딱 5가지만 두었다. 추저울, 이부자리, 볼펜, 노트, 책상 대용 소반. 창문 커튼은 대낮에도 완벽하게 빛을 차단하는 검은색 벨벳으로 달았다. 체력 관리를 위해 운동외에는 움직이는 것을 최소화 했으며 심지어 전처의 아기가 울때에는 전처가 아이를 업고 밖으로 나갈 정도였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짱구 파마(그전까지는 바가지 머리를 했으나 바가지 머리 특성상 앞머리가 눈을 찔렀고 이에 심영자는 자신의 단골 미용실로 데려가 파마를 시켜주었다. 그 이후로 쭉 파마머리만 고집했다고 한다.)를 할때에는 자신의 몸은 해골일 정도로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고 한다.
84년 8월 18일, 포항에서 열린 일본의 도카시키 가쓰오와의 4차 방어전 당시에는 체중을 무려 14kg를 감량했다. 당시의 회고로 "날은 무덥고 운동은 힘들고 정말 하기 싫었지만, 언론에서 비겁한 챔피언, 나약한 챔피언. 이렇게 말할까봐 너무 두려웠다."라고 언급했다. 경기 일정이 8월 18일로 15일인 광복절 3일 후로 한국의 분위기 자체는 그야말로 "극일"이었다. 장정구는 "지면 맞아 죽을 것 같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도카시키 가쓰오는 前 세계 챔피언 "김환진"에게 타이틀을 빼앗은 후 일본에서 다시 김환진의 도전을 저지한 선수였는데 장정구는 14kg의 감량과 탈진 증세에도 9회에 TKO로 방어에 성공한다. 경기영상을 보면 승리 직후 장정구는 울면서 그 자리에서 엎드리는데 인터뷰에서 "너무 힘들어서 그 경기를 끝내고 울었다. 그런데 너무 땀을 많이 빼서 눈물도 안나오더라."라고 말했다.
장정구의 방어전은 일본선수나 일본 체육관 소속인 선수들이 많았는데, 앞서 말한 도카시키 가쓰오와 일본 권투협회가 장정구의 타이틀을 빼앗기 위해 수입한 멕시코 출신 헤르만 토레스나 2차례나 경기를 가진 오하시 히데유키가 대표적이다. 헤르만 토레스의 경우 멕시코 선수로 무려 3차례나 장정구와 격돌했다가 모두 패했다. 오하시는 당시 일본에서 "150년만에 나올듯한 천재 복서다."라고 대서특필할 정도의 기대주였다. 물론 다소 과장된 경우도 있지만 굉장한 파이팅을 기반으로 저돌적인 선수였다. 그러나 86년 5회 TKO로 패했고, 장정구의 마지막 방어전인 15차 방어전에서도 8회 TKO로 패했다. 15차 방어전의 경우 장정구의 최초이자 마지막인 해외 원정 방어전으로 일본 고라쿠엔홀에서 열렸다. 역시 장정구의 우세로 몇차례 다운을 빼았으며 순조롭게 이끌어갔는데 3회 위기가 있었다. 3회에만 2번 다운을 이끌어냈는데 불과 20여초를 남기고 수세에 몰린 오하시가 기적적으로 파이팅을 벌였고 정타를 맞은 장정구는 비틀거리면서 다운의 위기를 겪었다.일본판 4전5기?! 그러나 장정구는 클린치와 몸부림으로 시간을 벌였고 위기를 넘겼다. 오하시는 피로 범벅이 되고 7번이나 다운을 당할때까지 경기를 계속했다..... 파이팅 하나만은... 결국 8회 TKO로 장정구의 승리였다.
그의 15차까지의 방어전은 결코 쉬운 상대가 많지 않았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상대들 중에서 前 세계 챔피언이나 장정구와의 일전 이후에 세계 챔피언이 되었던 상대가 많았다. 4차방어인 도카시키 가쓰오는 前 세계 챔피언이었고, 3차 방어전 상대인 태국의 소트 치탈라타와 3번이나 붙었던 헤르만 토레스, 2번을 붙었던 오하시 히데유키는 모두 후에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특히 오하시 히데유키는 90년 2월 WBC 스트로급 세계챔피언이자 한국 복서인 최점환을 9회 KO로, 92년 10월 WBA 미니멈급 세계챔피언이자 마찬가지로 한국복서인 최희용을 누르며 2체급 챔피언의 과업을 이루었다.상대는 달라도 모두 한국인이고 2차례 패배역시 2차례 승리로 갚았다... (오하시의 경우는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오하시짐이 있는데 일본의 복싱 천재 이노우에 나오야라는 유망주를 길러내 세계챔피언 등극에 성공했다.
당시 일본언론은 나오야가 일본 최고의 복싱 천재라면서, 150년만에 나올만한 오하시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천재와 천재의 만남이라고 찬사를 보냈는데 오하시는 이후에 "6전만에 세계타이틀을 따내겠다."고 했다. 6전의 의미는 당시 일본 최단경기 세계 챔피언 등극이 7전이었는데, 나오야는 정말로 4전만에 일본챔피언(!), 5전만에 동양챔피언(!), 6전만에 WBC 라이트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나오야의 세계챔프를 우습게 볼수가 없는것이 단순히 최단경기 챔프의 기록만이 아니라 세계 타이틀 방어만 27번을 성공한 WBO 슈퍼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오마르 나르바에스를 2라운드만에 초살 KO패를 시키며 2번째 챔프에 올랐다. 나르바에스는 커리어 내내 한번도 다운 당한 적이 없었고 절정의 복서였기에 그의 진영에서는 "인간의 주먹이 그렇게 단단할수 없다."며 부정글러브 검사를 하기도 했다. 현재 나오야는 3체급 제패와 무패가도를 달리는 현존 경량급 최고의 복서, 니카라과의 로만 곤잘레스와의 경기를 추진중이다.) 오하시는 후에 장정구와 친분을 쌓아 가끔식 연락을 한다고 한다.
다만 14차 방어전의 경우 판정 의혹이 짙은, 아니 사실상 편파에 가까운 경기였다. 14차의 경우 그 승리가 구시켄 요코의 13차 방어를 무너뜨린 것에 대해 의미가 크나 상대인 이시드로 페레스에게 시종일관 밀리는 경기를 보여주었다. 한차례 다운을 빼앗기고 클린치 작전으로 버텼는데도 3-0 판정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의 부심 중 한명이 일본인이었음에도 장정구에게 우호적인 판정을 주었으며 이에 이시드로 페레스 측에서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WBC협회는 심판이 모두 제3국인이라서 의미가 없다며 일축시켰다.
참고로 비슷한 체급의 유명우와의 일전은 사람들에게 기대가 되었지만 당시 대전료 문제와 소속협회와 전속 방송국과의 이익문제를 고려하면 문제가 많아 성사되지 않았다. 유명우는 17차 방어를 성공했으며, 18차 방어에서 일본의 이오카 히로키한테 패배하며 타이틀을 상실했지만 리턴매치에서 일방적인 경기 끝에 다시 타이틀을 탈환하였고 1차 방어 후 명예롭게 은퇴하였다. (유명우는 한국 복서로는 타이틀을 빼앗아간 상대에게 다시 타이틀을 탈환한 유일무이한 선수다.) 다만 일부 사람들은 장정구가 다차례 방어전을 치루면서 상대한 선수들은 전직 챔피언이거나 후에 챔피언이 되는 선수들이 꽤있어서 비교적 어려운 상대들이 많았다라면서 이 점을 들어 장정구의 우세를 점치기도 한다.
5 쇠락과 위기
하지만 15차 방어 달성 이후 장정구에게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의 복싱 인생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에도. 전처와의 불화가 커졌고 결국 전처와 이혼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전처는 장모와 함께 장정구의 전재산을 가져간다. 추정되는 금액이 현재의 가치로 수백억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돈일 듯한데, 가령 경기당 7천만원 정도를 받았다고 하는 장정구의 언급을 예를 들어서 15차 경기를 계산하면 10억 5천만원에 이르는데 지금 돈으로는 당연히 수백억의 가치가 있다고 봐야한다. 결국 추가 방어를 더 할수 있음에도 다소 이른 은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처에게 전재산을 빼앗기고 링에 다시 오를 수밖에 없었던 장정구는 복귀를 하게 된다. 그 후 세계 챔피언 탈환을 위해 3번의 타이틀 매치를 치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첫번째 타이틀 매치는 움베르토 곤잘레스와의 89년 8월 27일 경기, 12라운드까지 접전을 펼쳤지만 확실히 밀리는 경기를 한끝에 판정패했다. 그러나 나머진 2경기는 편파적인 판정에 패배하였는데 2번째 타이틀 매치는 장정구가 챔피언이었던 시절 3차 방어 상대인 소트 치탈라타였다. 판정까지 경기를 끌고 갔는데 분명 장정구의 우세승이었다. 하지만 판정은 소트 치탈라타의 손을 들어주었고, 3번째 상대인 무앙차이 키티카셈과의 경기는 그의 마지막 커리어를 치욕적인 KO패배로 장식케하고 암울한 한국 복싱의 미래를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장정구는 11회까지 무앙차이를 압도했다. 무려 4번의 다운을 빼았으면서 사실상 내용면에서 챔피언을 압도했으나 마지막 12라운드에서 체력안배를 생각치 않고 무리하게 파이팅을 벌이다 결국 KO패배로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여러 복싱팬들이 지금까지도 의문을 가지며 왜 우세한 경기를 했음에도 무리하게 나섰느냐고 하는데 후에 장정구는 인터뷰에서 "내용은 이기고 있어도 채점이 밀리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6 명예의 전당 헌액
90년대 들어서 한국 복싱은 점차 그 열기가 빠르게 식기 시작했던 것, 60년대부터 시작한 복싱 붐은 80년대까지 그 전성기를 이어갔으나 80년대 국가발전과 경제호황, 중산층의 대폭적인 양산으로 복싱이 가지고 있던 두주먹으로 싸워 돈을 버는 매력과 헝그리 정신은 사람들에게 외면 당해갔고, 축구,야구 등의 비교적 부상위험이 덜한 안전한 스포츠에 비해 위험성이 강조되어 그 이미지마저 변색되었다. 결국 인기를 잃어가는 한국에, 복싱 흥행과 프로모터들간의 첨예한 이익싸움을 고려할 때, 장정구에게 온전한 판정을 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 장정구 항목도 초반에 기재된 내용은 부실하기 그지 없었다. 과거 유명 복서들은 물론 나무위키에 등재된 한국 전현직 복싱선수들은 거의 없다고 보면된다. 한국 복싱의 현실...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그는 은퇴했지만, 그는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유명우와 함께 한국인으로는 2명째 복싱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WBC가 선정한 25인의 복서에도 선정된 바 있다.
7 근황
장정구는 지인의 소개로 현재 부인인 이숙경과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현재의 부인은 유명 대학 출신으로 장정구가 타이틀 상실과 전처와의 문제로 힘들 때 만났는데 집안의 반대가 심해서 단식투쟁까지 벌여가다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2015년 11월 1일 런닝맨에 출연하였다- ↑ 인터뷰에서 영화 "친구"의 실제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후배라고 한적이 있다!
- ↑ 사실 가정형편탓에 중학교도 진학을 포기했었다.
- ↑ 여성의 몸으로 굵직한 복싱 매치를 주선하는 수완을 보일 만큼 당시 강력한 위치에 있었던 프로모터였다.
- ↑ 이름을 보면 여자인 것 같지만 남자 선수로, 오키나와 출신이라서 오키나와어를 일본어로 가차하다보니 특이한 발음의 이름이 된 것이다.
- ↑ 당시 재일교포로 한국프로야구로 영입된 거물 장명부나 김일융조차도 각각 8800만원, 8600만원이고 "무쇠팔"로 유명한 최동원도 7000만원으로 당시의 톱클래스 투수들의 연봉의 3배정도라고 보면 된다. 경기당 7000만원의 파이트 머니를 받았는데 강남 32평 아파트를 살수 있을 정도의 거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