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px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 시절.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 No.49 | |
장타이산(張泰山 / Chang Tai-shan) | |
생년월일 | 1976년 10월 31일 |
출신지 | 중화민국 타이둥 현 |
신체 | 175cm, 95kg |
포지션 | 3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96년, 웨이취엔 드래곤스 |
소속팀 | 웨이취엔 드래곤스(1996년 ~ 1999년) 신농 불스 (2000년 ~ 2010년)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 (2011년 ~ ) |
국가대표 | 1998 방콕 아시안게임 대만 국가대표 2001년 야구월드컵 대만 국가대표 2003년 아시아 챔피언쉽 대만 대표팀 2004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 2005년 코나미컵 대만 국가대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야구 대만 국가대표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대만 국가대표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만 국가대표 |
1 개요
CPBL을 대표하는 홈런왕
대만을 대표하는 거포
중화민국 출신의 프로야구 선수이며,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의 소속 내야수이다. 대만 프로야구 리그 최초로 1000타점을 기록한 선수이다.
2 선수 커리어
2.1 유, 청소년기
중화민국 타이둥 현(台東縣)에서 태어나 타이위엔 초등학교(台東縣 泰源國小)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때 타이완 남부의 야구명문인 메이허 중,고교(美和中學)로 진학하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길거리에서 패싸움을 하여 야구부에서 퇴부조치를 받기도 하는 등 그렇게 얌전한 편은 아니었던 모양.
그러나 강타자로서의 재능을 알아 본 타이완 청소년 대표팀 감독이 대표로 선발하여 다시 야구계로 돌아올 수 있었고, 별다른 활약은 없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그를 타이완을 대표하는 강타자로 만들어 준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2.2 대만 프로야구 리그 시절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가장 젊은 나이로 프로야구 선수가 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람'[2]
1995년 당시 만 18세의 나이로 스바오 이글스(時報鷹)의 특별 보충선수로 뽑혔지만 바로 팀이 그 해 승부조작으로 해산되는 일이 벌어지면서 다시 무직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면제받았던 병역 문제도 눈 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하지만 쟝타이산은 당시 84kg이던 체중을 당시 중화민국군의 면제 기준이 되는 109kg까지 인위적으로 찌워서 면제 판정을 받은 후, 바로 다시 85kg으로 살을 뺐다. 이 문제로 당시 많은 논란과 함께 비난을 받기도 했만 어쨌든 그 후 당시 웨이취엔 드레곤즈 감독이던 쉬성밍(徐生明)의 강력한 요청으로 다시 그 팀의 연습생으로 입단하게 된다.
1996년, 19살의 쟝타이산은 대만 프로야구 사상 가장 어린 나이로 등록된 선수가 된다. 프로 7년 째인 1996년에 가장 어린 프로야구 선수가 많은 활약[3]을 한 모습을 본 웨이취엔 팀의 궈회장(郭董事長)은 리그 중간에 당시 월급 6만 위엔에서 파격적으로 두 배인 12만 위엔[4][5]으로 인상한다.
1998년에 수 차례의 월간 MVP상 획득과 연도 MVP상, 그리고 골든 글러브 등을 수상하면서 리그에서 쟝타이산은 공수를 겸비한 강타자로 자리잡게 된다. 1999년에 웨이취엔 드레곤즈 팀이 해체되고 나서 2000년부터 신농 불스(現 이다 라이노스)로 옮겨 활약을 하였고, 2003년에는 CPBL 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100홈런과 100도루를 기록한 선수가 되었고, 같은 팀의 황중이(黃忠義), 정쟈오싱(鄭兆行)등과 함께 싱농불스의 삼번도(三番刀) 타선[6]으로 불리게 됩니다.
당시 어린 나이[만으로 겨우 26살]에 머리 숱이 빠지게 되면서 여러 우스갯소리로 리그 야구 심판인 쉬쟌위엔(徐展元)은 쟝타이산이 홈런을 치면 그의 머리를 보고 또 날라가는 공을 보면서 '이젠 돌아오지 않는 (공)머리가 되었다'라고 그의 머리 숱이 없어짐을 비유하면서 농담을 하였고, 슝디 팀의 린밍시엔(林明憲)도 머리숱이 없는 사람들을 농담으로 '타이완 빛나리 야구부대'라고 하면서 부대장은 자신이고 대장은 바로 쟝타이산이라고 하기도 했다고...
CPBL 14년차인 2003년에는 28개의 홈런과 22개의 도루를 기록하면서 대만 프로야구 리그 역사상 최초로 20-20 클럽을 달성한 사람이 되었다.
2006년에는 본래 늘 맡아보던 3루수를 그만두고 1루와 외야로 전향했다. 그리고 그 해 타이완 프로 역사상 100홈런과 100도루 외에 다시 1000안타를 최초로 기록한 선수가 된다.[7]
2.3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 시절
청소년 대표팀과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2001년 야구월드컵, 그리고 2003년 아시아챔피언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그리고 2005년 코나미컵과 2006년 WBC, 2007년 대륙간컵, 도하 아시안게임 등 거의 모든 대회에서 타이완의 국가대표 중심타자 역할을 하면서 활동했다.
그러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예선이 끝난 후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하여 베이징으로 출국하기 전에 도핑 테스트에 적발되어 본선 무대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1년동안 자격정지의 처분을 받았다. 본인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갖기 위한 방편으로 복용한 임신 관련 약물이었다고 변명했지만, 국제기구에서 정한 금지약물 성분으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당시 그토록 염원하던 올림픽 무대에 참가하는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으로서는 쟝타이산이 3루에서 빠진 것이 아주 큰 타격이 되었다. 타격에서는 당연히 이루 말할 수도 없고, 수비에서도 안정된 모습을 보이던 그가 약물복용으로 빠지게 되면서 흔들리게 되었고, 결국 삐걱거리는 타선과 엉망인 수비 조직력으로 결국 올림픽에서 숙적인 중국에게마져 져버리게 되면서[8] 쟝타이산에게 엄청난 여론의 비난과 책임론에 휩싸이게 된다.
본인 말로는 그 당시에 죽고 싶었다고 하면서 은퇴도 생각했다고 하지만 아내의 헌신적인 권유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3 여담
타이완의 유명한 야구 명문가 집안인 타이동 양지아(台東陽家)의 구성원 중 한 명이 바로 쟝타이산이다. 가계도의 야구 선수를 보면 대표적으로만 추려도 여러 명이 있을 정도. 잠시 살펴보면 천즈위엔[9]과 천즈펑[10]의 외삼촌이고, 가오펑니엔[11]의 외사촌 형이면서, 천용순[12]의 내종 사촌동생이라는 것.
쟝타이산은 2009년에도 윌튼 베라스(威納斯), 씨에지아시옌(謝佳賢)과 함께 '매우 위험한 타선'이라고 불리운데다가, 거기에 제 2회 WBC 대회를 통해 스타로 발돋움 한 린이취엔(林益全)이 중심타선에 가세하여 '정말 매우 위험한 타선'으로 불리우는 이다 라이노스 팀의 중심타선의 한 축으로 활약하고 있다.- ↑ 국가대표 경력을 보면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대표팀엔 참가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금지약물 복용으로 인한 자격정지 때문이다.
- ↑ 병역을 면제받고 고졸 나이에 프로에 입단한 최초의 선수가 바로 이 사람
- ↑ 퉁이 라이온즈 팀의 슈퍼루키 우쥔량(吳俊良)과 신인왕을 두고 박터지게 경쟁하던 사람이 장타이산이다.
- ↑ 현재의 월급은 33.1만 위엔/현재 환율로 한화 약 1,270만원
- ↑ 야구선수 치고는 상당이 적은 금액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대만 프로야구 리그의 특성 상 월급을 많이 받는 선수는 드물다.
- ↑ 이 세 선수가 모두 대만 원주민 출신이라서 그렇게 부른다고...
- ↑ 2006년 5월 4일에는 162개 째 홈런을 기록하여 당시 최고이던 린중치우(林仲秋)의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고, 바로 이틀 후 163호를 때려내면서 타이완 최고의 기록을 세운다.
- ↑ 자세한 내용은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항목 참조, 당시 대만 대표팀이 승부조작을 했다는 의혹도 있다.
- ↑ 陳致遠:슝디 엘리펀츠의 외야수이자 국가대표 선수
- ↑ 陳致鵬:슝디 엘리펀츠의 외야수
- ↑ 高豐年:전 중신 웨일즈와 싱농 불스 팀의 선수
- ↑ 陳勇順:예전 TML 당시 니엔다이띠엔공 팀(年代雷公隊)의 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