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개청

이름정개청(鄭介淸)
생몰년1529 ~ 1590
본관고성정씨(固城鄭氏)
곤재(困齋)
의백(義伯)
배우자밀양박씨(密陽朴氏), 측실(側室)
자녀정민복(鄭敏復), 정민행(鄭敏行)정민덕(鄭敏德)
부친정세웅
모친금성 나씨 나영(羅英)의 13世孫
링크정개청

1 생애

조선 중기의 학자, 관리. 호는 곤재.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고 그의 사후에는 노론과 남인의 격렬한 갈등에 휘말린 보기 드문 유형의 인물.

1529년 나주 금성산 아래 대곡동에서 봉산 훈도 정세웅과 어머니 금성 나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세웅은 훈도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집안은 매우 가난했고 정개청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불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학문을 좋아해 열심히 학문에 정진했는데 화담 서경덕에게서도 배운바가 있었고[1] 학문에 심취해 결국 금강산의 한 절로 들어가서 학문을 열심히 파고들었다. 단순히 유학만 공부한게 아니라 역사,천문지리,의학,복서[2],산수,병법,가무등도 익혀서 학문에 깊이를 더했다.

1574년 전라감사 박민헌, 1583년에는 호남출신의 영의정 박순이 그를 천거했으나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 나주에서 학문정진과 후학양성에만 힘썼다. 여러번의 천거로 관직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북부참봉,나주훈도,전생서주부를 거쳐 그의 나이 60에 이산해의 천거로 곡성현감을 한것 정도가 그의 관직생활의 전부였다.

만년에는 전라도 함평 엄다면의 제동[3]으로 옮겨 윤암에 집을 짓고 거기서 살았다.

여기까지는 별다를게 없는 그의 생애였으나...

1589년, 정여립이 난을 일으켰다는 정여립의 난이 터지면서 정개청은 말년에 엄청난 고초를 받게 된다.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잡혀가 국문장에서 엄청난 고문을 받던 상황에서 정개청 또한 한양으로 끌려가 국문을 받게 된다. 정개청은 정여립과 약간의 교유가 있었고 집터를 봐준 일이 있었는데 그것때문에 정여립과 반역을 획책했다는 혐의를 받은것.

조사를 거쳐 정개청의 모반 연루는 풀렸으나 다른데서 문제가 터졌다. 정개청이 압송되면서 그의 집에 있던 모든 저서와 문서들도 압수되었는데 이것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나온 정개청의 논설문 "동한절의진송청담설"이 배절의[4] 논설이라고 지목된것. 이 논설의 내용은 동한 즉, 후한때 절의를 숭상하고 진송 즉, 서진과 남송때 청담사상이 유행한것을 비판했다. 절의는 지나치게 독선적이며 청담은 예가 없다고 주장한것. 이를 두고 정철은 정개청이 절의를 배격했다고 주장했고[5] 또한 겸허설과 논명수유이종 또한 반역적 사상이라 공격받아 선조까지도 여립은 반역한 개청이요, 개청은 반역하지 않은 여립이로다라면서 정개청에 대한 엄벌 의지를 드러냈다.

결국 정개청은 함경도 경원의 아산보[6]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서 고문으로 인한 상처가 악화되어 1590년 6월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1.1 사상

사실 정개청은 조선 후기의 송시열 만큼이나 주자의 사상에 매우 철저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처럼 극단적으로 주자를 숭상한 인물은 아니었고 주자 사상의 전후기가 다른 부분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주자를 받아들였다고 볼수 있다. 꼴통스런 성리학자는 아니었다는 이야기.

불교나 노장사상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유생들이 절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절의 물건을 맘대로 훔쳐오는 행태에 대해서는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의 만년의 거처이던 엄동 근처에 빈 암자가 있어서 제자들이 그에게 그 암자를 학교삼자고 제안하자 정개청은 "남의 것을 빼앗는것은 옳지 않다. 거기서 어린 아이들에게 도학을 가르칠것인데 남의 것을 빼앗는 불의한 모습을 보이면 어찌 되겠느냐"라면서 반대한 일화도 있다.

우연히 주자서를 읽다가 주자가 "심하다 사람의 어질지 못함이여! 소가 젊어서는 부려먹고 늙어서는 잡아먹는구나"라는 구절을 접하고 이후 일생동안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소고기 사묵겠제는 어질지 못하구나

그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으로 우득록이 있다. "어리석어서 늦게 얻은 학문을 정리한 책"이라는 의미의 우득록은 선조도 읽어본뒤에 "이것은 옛 사람의 학문을 말하는 책이니 돌려주어라"라고 명했다고 한다. 주자 사상에 충실했다는것을 선조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정개청의 몇몇 논설을 트집잡아서 그를 반역적인 사고를 가진 소유자라고 몰아부쳐 죽인것도 정철과 선조이다. "동한절의진송청담설"은 주자의 책을 읽고서 동한의 절의와 진송의 청담이 가진 폐단을 지적했을뿐인데도 정철은 이것이 군주에 대한 절의를 배격한것이라고 주장했고 무슨 약을 하셨길래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선조 또한 배절의라고 몰아부쳤던것. 또한 겸허설은 군자의 겸손을 강조했을 뿐인데 신분제도를 파괴하려 든다고 몰아부쳤다. 사실 정개청은 학문이 높은 사람이면 그가 비록 나이 어린 사람이라도 배우고 존경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이런것을 엮어서 정개청이 역성혁명을 꿈꾼다고 몰아부친것. 사실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아들뻘인 기대승과 이기론을 논한 이황도 역성혁명을 꾀한자가 돼버린다. 정철과 선조가 얼마나 어거지를 부렸는지 알수 있는 대목.

사실 정철이 정개청을 죽이는데 앞장선것은 정철 본인의 원한 때문이었다는 뒷이야기가 무성하다. 정철은 알콜중독자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정개청이 그런 정철에게 "그렇게 술을 좋아하면 나이 어린 후학들이 뭘보고 배우겠나"라고 충고해서 원한을 품고 그랬다는것. 배절의 운운에서도 볼수 있듯이 사실 정개청과 정철은 성향이 서로 달랐다. 정개청 입장에선 노세노세 좋아하고 풍류꾼인 정철이 청담에 빠져있는것으로 보였을수도 있다.

다만 정개청이 꾸중했기에 정철이 정개청에게 원한을 가져 죽였다는건 정개청의 제자들의 주장이고 사실 그보다는 정개청도 정여립같은 철새였기 때문이다. 원래 정개청은 서인의 영수인 박순이 거두어서 가르치고 키운 인물인데 박순이 실각한 이후에 그를 배신하고 동인들과 어울렸고 이에 정철이 그를 비루한 인물이란 이유로 혹독하게 심문했고 결국 고문치사한것이다.

1.2 사후의 수난

정개청은 사후에도 수난을 겪게 되는데 그의 위패를 모신 사액서원인 자산서원이 노론과 남인의 정쟁에 휘말려서 철거되고 복구되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수난을 겪게 된것.

광해군때 사액을 받은 자산서원은 환국정치가 판을 치던 숙종때 철거와 복구를 반복했다. 남인이 집권했을때는 복구되었다가 노론이 집권하면 파괴되는 행태가 반복된것. 숙종은 정개청을 기리는 제문까지 직접 지은바가 있으나 노론이 집권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산서원 철거를 명했다.개같은 숙종 성깔에 죽어서 피본 정개청?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남인의 중요 정치인이었던 윤선도가 이발의 조카였다는 점이 작용했다. 윤선도는 기축옥사때 죽은 인물들을 높이면서 정개청도 높이게 되었고 생전에 동서분당과 전혀 무관했던 정개청은 죽어서 남인의 중요한 현인(...)이 돼버렸던것. 아마 정개청이 죽어서 저 모양을 봤다면 한심하다고 혀를 끌끌 찼을지도 모른다(...)
  1. 그러나 그의 학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역시 박순이라 봐야 할듯 하다.
  2. 점을 치는것을 말한다.권투선수가 아니다
  3. 당시는 무안에 속해있었다
  4. 절의를 배격한다라는 의미.
  5. 절의를 배격하는것은 바로 왕에 대한 불충=반역이라는 논리였다.
  6. 오늘날의 바로 그 아오지 탄광이 있는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