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鄭汝立
(1546~1589)

1 일생

조선시대의 체제비판적 사상가.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동래이고 전주에서 태어났다. 상당히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알려져있다. 1570년(선조 3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1584년에 수찬의 벼슬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흉포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생 설화에서는 고려 중반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인 정중부가 태몽에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고, 어린 시절 새를 잡아다가 갈가리 찢어 죽이고 여종이 이를 보고 여립의 아버지에게 알렸으나 여립이 이에 앙심을 품고 그 여종을 자는 틈을 타 배를 갈라 죽인 다음 다음날 "이 아이가 나의 잘못을 일러바쳤기에 내가 죽였다."고 태연하게 말했다는 일화가 써 있을 정도다. 게다가 방약무인한 성격은 그대로여서 어전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왕을 노려보았다는 야사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반체제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정여립의 이미지를 훼손하기 위해 꾸며냈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인조 대에 조선 전기의 야사들을 모아서 편찬된 대동야승에서는 “정여립은 넓게 보고 잘 기억했으며 논의가 격렬하여 마치 거센 바람이 부는 듯했다.”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매우 총명하고 박학다식했다는 평가 역시 전해지므로 정여립은 다소 과격한 면은 있으나 매우 총명하고 박학다식한, 결론적으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는 인물이었다고 봐야 한다.

원래 자신의 입지 확보를 위해 율곡 이이와 성혼의 문하로 들어갔기 때문에 서인에 속해 있었지만, 이이가 죽은 후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는 물론 서인의 영수인 성혼, 박순 등을 비판했다. 이는 당대 사람들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이이가 신사임당 사후 잠시 불가에 몸을 담은 적이 있는데 이런 사실이 정여립의 입에서 나와 유학자 이이의 이미지를 엄청 깎아먹었다. 결국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1 정여립의 난(기축옥사)

그러나 인망이 높았던 정여립에게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정여립은 진안군의 죽도에 서실을 차리고 활쏘기 모임을 하는 등으로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었다. (유학에서는 이상사회를 가리켜서 대동(大同)이라 칭한다). 대동계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모임이었고 이는 정여립의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뛰어난 학식과 통솔력, 활솜씨를 겸비한 정여립을 추종하는 동인의 무리가 매우 많았으며,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그의 명망이 높았다. 정여립의 난 당시 연루되어 죽거나 귀양간 선비가 호남에는 1000명, 영남에도 수백명이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때 세상에 1000명이면 오늘날 지역의 과학고, 외국어고 4~5기수를 한꺼번에 쓸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이 기축옥사를 기점으로 하여 호남 출신의 과거급제자 수는 크게 줄어든다.[1]

1587년,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정여립은 대동계원들을 이끌고 손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했다. 이를 볼때 대동계는 관군에 버금가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1589년, 황해 관찰사 한준 등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정여립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진격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을 하였다. 이에 선조는 군대를 보내 정여립을 체포하도록 지시했고 정여립은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쳤다가 관군이 포위하자 자살했다...라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그러나 정여립 모반 사건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정여립이 도망친 곳이 죽도인데, 정여립은 이미 죽도에서 대동계를 이끌고 있었고 이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죽도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죽도로 도망쳐서 관군에게 포위되어 자결했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정여립이 과연 모반을 꾀했는가 하는 것도 의문이다. 물론 그의 대동계가 무력을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불과 2년 전에 관에서 왜구를 토벌하는데 동참해 달라고 의뢰할 정도라면 이미 관아에서도 용인한 집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정여립의 행동은 모반을 꾀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하다.[2]

일련의 의문들로 인해 정여립의 난은 조작된 모반 사건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실제로 동인 측에서는 정여립이 죽도에서 대동계원들과 잔치를 벌이다가 관군의 기습을 받아 죽었다고 기록된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정여립은 시대를 앞선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켰는데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 즉,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리요"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훗날 부각되어 반체제적인 인사로 낙인 찍혔다. 이 말 앞에는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에는 위나라가 정통임을 주장하는데, 주자는 이를 부정하니 참 신기한 일이다."란 말이 붙어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이미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정도전 이후로 정씨 가문에 대담한 혁명가 또 등장

그의 천하공물론은 라틴어에서 공화국을 가리키는 용어 "res publica"와 그 의미가 놀랍도록 일치한다. 'res publica'는 직역하면 공공의 것. 공중의 것이란 의미이다. 말 그대로 국가는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 게다가 그는 "누구든 임금으로 모시고 섬길 수 있다"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이 정여립이 직접 만든 것이 아닌 과거의 사상을 가져온 것에 가깝기는 하지만[3] 어찌 보면 정여립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시대를 앞서가도 너무 앞서나간 비운의 인재[4]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정여립 모반 사건'이 동인남인북인으로 갈라진 하나의 계기로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상 서인이 동인의 씨를 말리려 한 구실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 때 가장 앞장서서 동인을 몰아내려 했던 인물이 서인의 정철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조종한 것은 사실상 선조였다. 정여립의 난 참조.

동인 측은 이것을 서인을 몰아낼 구실로 삼았고 이 때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타격을 많이 받은 쪽)들을 북인,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사람(이자 동시에 옥사에서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은 쪽)들을 남인으로 교과서에는 규정하고 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문이 많다. 선조수정실록을 포함하여 대체적으로 그가 자결한 이후, 시신이 한양으로 이송되어 육시를 당하였다고 나온다. 그러나 영조 시기에 작성된 봉사말록이나 남하정이 쓴 동인 계열 당론서인 동소만록에서는 죽도로 놀러간 정여립을 진안 현감 등이 꾀어내 살해하고, 이후 자결한 것으로 꾸며 상소를 올렸다고 전한다.

2 정여립 사망 이후

하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정철이 선조의 비위를 상하게 하고 만다. 이에 대해서 정철이 선조의 총애를 받던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 대신 광해군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나, 정철이 투옥된 이유는 건저(建儲) 문제, 즉 선조에게 왕세자 책봉을 건의하는 문제의 총대를 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동인과 함께 건의하려다가 동인 측이 빠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혼자 제기한 셈이 되어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산해 항목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건저(建儲)의 당시 조정 상황은 정철이 당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선조가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서 건저를 의논하고자 삼 정승을 불렀는데 당시 영의정이 이산해, 좌의정이 정철, 우의정이 류성룡이었다. 이산해와 류성룡의 당색을 고려할 때 이건 그냥 정철의 개망 플래그... 정철 정도면 거기서 "신성군이 가한 줄로 아뢰오."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자리에서 꿋꿋이 광해군을 지지한 그도 책임이 없진 않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유배 크리를 맞고 귀양 가면서 선조한테 징징댄 게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그래도 정철은 류성룡 덕분에 약사발 안 먹고 살아남을 순 있었다. 이산해는 당장 갈아버리자고 했으니까...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은 이 시기에 쓰인 작품이 아니다. 왕세자 건저 문제로 귀양간 것은 1591년 2월이고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은 1585년과 1589년 사이에 쓰여진 작품이다.

3 매체 속에서의 인물

여러 매체 속에서는 임진왜란의 전초 이벤트 정도의 비중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여립은 그다지 큰 비중은 없으며, 정여립의 난으로 인한 붕당정치가 묘사될 뿐이다.

  • 2009년판 전설의 고향 8월 11일자 방송인 ' 죽도의 한 ' 에서도 나오는데, 김갑수 씨가 정여립의 역할을 맡아 열연을 하였다. 애초에 역모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묘사하며 자살설 대신 살해설을 택하여, 김규철이 맡은 토벌군 총사 윤흥국의 칼에 찔려 폭포 아래로 떨어진것으로 나온다.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안내상씨가 잠깐 나와서 역할을 맡았다. 류성룡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류성룡과 언쟁을 벌인 이후에 사라진다. 이후 대동계를 조직해 그들을 이끌고 왜구와 싸우는 장면도 나오기도 하지만 역사대로 점차 조정에 의해 역도로 몰리기 시작한다. 그 상황에서 정여립은 자신의 사상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점에 절망하고, 자신이 시대를 잘못 탔다는 한탄을 한 이후, 시점이 조정으로 바뀌어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사실상 퇴장한다.
  • 왕의 얼굴에서 최철호씨가 역할을 맡았다. 선조가 선조를 죽임. 역시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에서도 초반에 하차하지만, 정여립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계속해서 활동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 징비록(드라마)에서도 초반부에 등장했지만, 대사 한 마디 없이 그저 기축옥사를 묘사하기 위해 등장한 것에 그쳤다. 대동계의 사람들을 단련시키는 장면과, 이후 모반으로 오인받자 칼 위에 엎드려 자결한 채 왕의 선전관이 발견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 웹툰 포천에서는 정사의 기록을 따라 잔혹하고 음험한 인물로 그려진다. 같은 작가의 오성X한음에도 등장. 이이가 이항복을 총애하는 걸 질투해 일을 벌이는데, 이런 행적이나 훗날의 대동계 조직과 모반이 모두 선조의 의도대로 놀아난 것으로 나온다.
  • 이두호 화백의 만화 파문에서는 주인공인 임차손이 축적한 거대한 부를 바탕으로 동쪽(=일본?)과 결탁한 거대한 조직의 수장으로 묘사된다. 작중에서 이순신이 그 실체가 지어낸게 아니냐는 질문에 사실 더한게 있다는 말로 처리. 다만 연재 중단으로 이후 행보는 미지수
  • 홍국영의 삶을 그린 대하드라마 왕도에서 홍국영의 가문의 주요한 비밀인 대동계 명단을 보관한 사람으로 나온다. 드라마판에서는 유동근이 역을 맡았는데 나레이션으로 정여립 모반사건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사 한 마디 없이 폼을 잡다가 칼에 맞아 죽는 걸로 퇴장.
  • 전라북도 혁신도시(전북 완주군 이서면-전주시 인접지역 혁신도시)에는 정여립의 이름을 딴 길 정여립로가 있다.
  1. 후술하겠지만, 호남사림이 완전히 씨가 마른 것은 아니었다. 주로 피해를 입은 호남사림은 전주 일대의 동인 계열 사림들이었고, 무엇보다 옥사를 확대시킨 세력 중에는 서인 계열 호남사림도 있었다.
  2. 만약 정여립이 진정 모반을 꾀했다면 자신의 계원들을 이끌고 싸워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3. 역성혁명 등이 얼마나 과격한지 생각해 보자
  4. 이런 면에서 신채호가 그를 많이 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