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의 난

1 개요

조선 선조대에 일어난 기축옥사의 시발점

2 전개

그 발단은 1589년 황해 관찰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의 연명 상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정여립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쳐들어가 병조판서 신립과 조정 중신들을 죽이고, 어명을 위조하여 지방관들을 파직하거나 죽이는 등의 혼란을 야기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놀란 선조는 중신들을 불러모아 대책 회의를 하였다. 당시에는 동인들이 집권 중이었고 정여립은 동인에 속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언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들은 정여립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동인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정여립은 안악의 조구가 자신의 계획을 고변한 사실을 금구에서 변숭복에게 전해들었으며, 그 후 변숭복과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주했으나 진안현감이 추격하자 정여립이 변숭복과 옥남을 살해한 후 자신은 칼을 거꾸로 세운 다음 자살한 이후 동인들의 입지는 축소되어 버렸는데, 자살은 그의 반역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2.1 실제로 정여립이 반란을 꾀했나?

여기서 정여립이 정말 모반을 꾀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정여립의 행보와 정황적 증거들로 미루어 볼 때,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 우선 정여립이 정말 모반을 꾀한게 맞다면, 설령 도망치더라도 그 전에 모반과 관련된 모든 문서들을 소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집에서는 수많은 문서와 편지들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그의 도피는 변숭복의 급보로 이루어졌다는데, 그는 수사의 손길이 곧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면서도 집 안에 각종 편지와 문서들을 방치하여 후일 이 문서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연루자로 죽게 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 또한 정여립이 도망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의 대동계원들은 대체 어디 갔단 말인가. 게다가 그가 도망친 곳은 자신이 대동계원들과 함께 하던 연고지인 죽도였다. 또한 정여립은 죽도로 간다고 밝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급보를 받고 도망간다면 연고지가 아니라 지리산 같은 심산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며, 또 가족에게 행선지를 알려 관군의 손이 곧 미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여립이 도망치는 신세에 놓인 사람이었다고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 다른 정황적 증거들도 의구심을 더 부채질한다. 김장생(金長生)의 《송강행록》(정철의 행적을 기록한 책)에 의하면 "정여립 사건이 났을 때 공은 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는 정여립이 반드시 도망을 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극구 만류에도 불구하고 입궐을 서둘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만 놓고 본다면 정철은 정여립의 행적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이로 인해서 서인세력들이 이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실제로 《동소만록》과 같은 야사에서는 "정여립이 죽도로 놀러갔는데 선전관과 현감이 정여립을 습격하여 살해한 후 자결로 위장했다" 라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러한 의문점들로 인해 정여립의 난이 아예 날조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만약 자살이 아니라 살해설이 맞다면 모반의 주동자로 지목된 정여립 본인을 잡아다가 문초하지도 않았으며, 실제로 당시에는 정철이 서인의 모략가인 송익필(宋翼弼)[1] 형제와 짜고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조작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이 소문에 의하면 정철은 송익필 형제를 시켜 전라도에서 정여립이 모반을 꾀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또한 송한필은 황해도에 정여립에 대한 호의적인 소문을 내서 정여립으로 하여금 모반을 부추기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조작의 주체는 세력도 미미했던[2] 서인이 아니라 선조 본인이 상황을 기가 막히게 이용한 것 뿐일 가능성이 크다. 후술하겠지만 후일 선조는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 정철의 측근들과 양천회를 비롯한 당시의 고변자들을 혹독하게 심문하여 정철의 사주였다는 증언을 받아내긴 했는데 이거 자체도 그냥 고문으로 인한 허위 자백일 가능성이 크다. 역모 조작점이라는 정철을 처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여립 자신은 당파를 바꾼(...) 적도 있고 때에 따라서 정치적 목적으로 한때 자신의 스승이자 서인의 정신적 지주인 율곡 이이를 강하게 비판하였다.[3][4] 스승인 이이를 욕하고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파를 옮긴 행적 때문에 서인 뿐 아니라 동인에서도 비주류였다. 거기다 선조도 그를 매우 싫어했다.

파격적인 이론 제시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사실 '천하는 공물이니..'라는 말은 정여립이 먼저 한 건 아니고 이전부터 나와 있던 말이다.

3 후일담 - 기축옥사

정여립이 자결한 후 선조는 조정 중신들을 위관으로 임명하고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당초 정언신도 위관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입궐한 정철은 정언신이 정여립과 인척지간이므로 위관을 해서는 안된다고 선조에게 간언하여 정언신 대신 정철이 위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정언신은 "이게 다 이이의 제자 놈들의 짓이다. 정여립의 충성심은 해를 꿸 만한데 서인 놈들이 모함하니 이들을 다 죽여 마땅하다!"라고 주장하다가 나중에 정여립이 역적으로 확정되자 "걔 역적 맞음."이라고 꼬리를 내리지만 정여립과 주고 받은 서신이 잔뜩 발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유배로 감형된다.

다른 중신들도 위관이었지만 사실상 정여립 사건 수사는 정철이 주도했다.[5] 정철은 정여립의 집에서 압수한 문서와 편지들을 샅샅이 검토하여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교류가 있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들이게 했다. 일차로 정여립과 모반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이기, 황언윤, 신여성 등이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조카 이진길은 집을 수색해보니 "지금 임금의 어두움이 날로 심하다"라고 쓴 편지가 발견되어 장형 끝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정철 등 서인들의 진정한 목표는 이발을 위시한 동인 세력들의 제거였다. 서인 측 유생들은 동인 측 인사들이 정여립과 모반을 꾸몄다며 이들을 처벌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결국 이발을 위시한 동인의 중요 인물들은 원지로 귀양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12월 12일, 교생 선홍복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다시 이발 등을 위시한 동인 중요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자 이들은 다시 끌려와 국문을 받게 되었고 국문 과정 중 장을 맞다 죽고 만다. 선홍복은 죽는 와중에 이발 등의 이름을 대면 살려 주겠다고 했으면서 왜 이렇게 하느냐고 울부짖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

정여립의 난은 실로 임진왜란 직전까지 조선 정계를 뒤흔들었다. 천 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여립과 단지 시국을 논했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와 참혹한 고문 끝에 희생되었다. 가장 처절했던 죽음으로는 멸문당한 이발의 가족들일 것이다.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본인 뿐만 아니라 일가가 모조리 붙잡혀 선조 앞에서 국문을 당했다. 이때 선조는 이발의 어린 아들에게 "너는 네 아비에게 무엇을 배웠느냐"라고 묻자 이발의 어린 아들은 "저는 아버지께 충, 효 외에는 배운 것이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 이 말에 선조는 길길이 날뛰며 "역적의 자식놈이 저런 참람한 말을 하다니!" 라며 이발의 어린 아들을 고문했다. 이발의 아들은 압슬형[6]을 받고 사망했으며, 이발의 노모는 장형으로 사망, 즉 맞아 죽었다. 이런 엄청난 비극 때문에 오늘날 겨우 살아남은 이발의 후손들은 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마다 고기를 다지며 "정철! 정철!"을 외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한다. 하지만 후술하겠지만 정철이 이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나서긴 했지만 결국 최종적 지휘자는 선조였다.

또한 호남 출신의 유학자로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가지고 있던 정개청도 정여립의 집터를 봐주었다는 이유로 붙잡혀와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정여립은 정개청의 저서인 <우득록>을 보고선 절의를 배격했다며 그를 맹비난했다.[7] 심지어 "개청은 반역하지 않은 여립이요, 여립은 반역한 개청이다" 라고 까지 할 정도였다. 사실상 정개청을 정여립급으로 다루어서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말인데 정개청의 제자들은 이를 정철이 젊을 적에 정개청이 '정철처럼 술마시고 노는 걸 어린애들이 보고 배운다'라고 말한것에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야사가 있다. 사실 그보다는 정개청도 정여립 같은 철새였기 때문이다. 원래 정개청은 서인의 영수인 박순이 거두어서 가르치고 키운 인물인데 박순이 실각한 이후에 그를 배신하고 동인들과 어울렸고 이에 정철이 그를 비루한 인물이란 이유로 혹독하게 심문했고 결국 고문치사한다. 후일 그의 사당 건립 문제는 숙종조까지 이어지는 조선의 뜨거운 감자였다.

또한 남명 조식의 제자인 진주의 최영경은 정여립 본인으로 추정되는 부두목 '정팔룡'의 수괴인 '길삼봉'(吉三峯)이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 길삼봉은 조선시대 역사서에 등장하는 최대의 미스테리 인물이다. 신분도 불명이고, 연령도 불명. 초기에는 나이 많은 어느 집 노비라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나중에는 연령도 20대에서 70대까지, 신분도 사대부에서 노비까지, 반역에 있어서도 일개 수하에서 심지어 정여립보다도 상위 위치('길삼봉이 상장, 정팔룡과 정여립이 차장')를 커버하게 되면서 정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등장하는 길삼봉의 기록만 해도 밑도 끝도 없다. 그래서 길삼봉이라는 이름은 가져다 붙이기만 하면 사람이 죽어나가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말처럼 사용되었다. 길삼봉으로 엮여서 죽은 사람만 1천여 명에 이른다. 이 때문에 길삼봉에 대해 정여립 본인 혹은 옥사를 주도한 인물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란 해석도 있다.

그간 최영경은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거두들이 소인이니 모두 죽여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일삼아 서인 세력의 미움을 사고 있었는데 정여립이 잔치를 열면서 최영경을 극진히 모셨다는 진술이 나오면서 잡혀들어갔다. 이에 최영경은 자신이 서울에 있을 때 인연이 있었지 편지 왕래도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주장했으나 편지가 하나 나오긴 했다. 이에 최영경은 나이가 들어서 헷갈렸다고 했고 이에 정철을 비롯한 수사관들은 아무래도 이 양반은 깨끗한 것 같으니 풀어주는 것이 맞다고 선조에게 진언했으나 대간이 그럴 수 없다고 결사반대하는 통에 선조가 풀어주려다가 입장을 번복했고 결국 옥사하고 만다.

정여립의 난으로 일어난 일련의 옥사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기축옥사로 동인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정철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다시 집권에 성공했다.[8] 그러나 정철이 지나치게 동인계 인사들을 잡아들여 죽인 탓에 말썽이 일었고, 서인의 권력이 너무 커졌다고 우려한 선조는 정철이 광해군의 조속한 세자 책봉을 주장한 것을 빌미로 그를 파직시켜버렸다. 또한 윤근수는 삭탈관직, 양천경 등 최영경 등 무고한 자들도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심지어 선조는 최영경을 복권시키면서 정철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는 결국 정여립의 난의 참혹한 옥사의 배후에는 선조가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나치게 세력이 커진 동인을 정철을 내세워서 제거한 다음 그 죄는 모두 정철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었다. 후일 기축옥사의 고변자들이었던 양천회 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정철이 건저 사건으로 몰락한 이후에 잡혀와서 정철의 사주를 받아 그랬다고 자복하곤 곤장을 맞다 죽었는데 정작 정철에겐 죄가 더해지지 않았다. 정철은 그냥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반증이다.

게다가 저 당시 당대의 고승인 휴정, 유정이 연루되었다. 정여립과 가까이 지냈던 승려 중 무업(無業)이란 자가 고문을 받고 휴정과 유정이 역모와 연관이 있다고 무고를 한 것. 이 때문에 휴정과 유정 모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선조가 두 사람을 신임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훗날 구국의 명장으로 칭송될 이순신도 연루된 일이 있다. 당시 이순신의 친구인 조대중이란 사람은 기생과 헤어져 눈물을 흘렀는데, 이것을 보고 역신 여립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고 해석해 조대중은 끔살. 한편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의 행장록에 따르면 이때 하급 관리인 이순신이 정언신을 면회할 겸 의금부에 방문했다가 의금부 관리들이 술판을 벌이는 것을 보고 어진 선비[9]가 하옥되었는데 무슨 짓이냐고 일갈했다고 한다. 당시에도 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여론이 있었다는 걸 반증한다는 설부터 이순신의 의기를 강조하는 설 혹은 행장록에 적힌 미화된 이야기라는 설 등 의견이 여러가지로 나뉜다.

이순신과는 다른 면으로도 연결되는 점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부하들 중 한 명인 안위[10]의 경우 정여립의 오촌 조카라는 이유로 투옥되어 조사를 받았고, 전공을 세워서 승진한 이후에도 역적의 친척이라며 몇 차례 파직을 당했다.

안습한 사례는 김빙이라는 사람의 이야기. 그는 평소에 찬 바람을 쐬면 눈물이 나는 눈병을 가지고 있었는데[11] 정여립의 시신에 한 번 더 형을 가하는 자리에서 하필 찬바람이 불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역적 놈이랑 무슨 관계이길래 눈물을 쏟는 거야!"라며 붙들리고 결국 처형당해 버렸다.[12]글자 그대로 안습이 안습한 죽음을 부른 예. 안습.

정여립의 난이 과연 정말로 모반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주체가 누구던 간에) 조작된 정치적 사건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연루되어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면모를 볼 때 조작된 사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러나 기축옥사의 공초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불 타 없어져 버렸고, 그 때문에 더 자세한 연구가 어렵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기존의 서인 주도론은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 법에 따라 여자와 아이는 고문할 수 없다는 서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발 가문을 개발살내고 아이와 노인까지 고문해서 죽인 장본인이 선조이고, 최영경도 정철이 풀어주자고 한 것을 선조가 거부했다.[13] 후일 정철을 팽해버린 과정을 볼 때 강경파 정철을 희생양으로 삼고 조정의 절대 다수였던 동인의 세력을 축소하기 위해 선조가 술수를 부린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인들 중 류성룡을 비롯한 남인들이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도 지나치게 서인 세력의 힘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선조가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해석이 강하다.

4 미디어 매체 및 기타

정여립은 어른의 사정으로 은근히 미화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 영화판은 이몽학의 난과 이 사건을 결부시켜서 그리고 있다.

전설의 고향 2009판에서는 '죽도의 한'이라는 제목으로 정여립의 난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나왔다. 전설의 고향이라 전체적으로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심었다. 정여립 역할은 공교롭게도 사극에서 죽는 역할로 자주 나오는 중견배우 김갑수.

이두호의 작품 '파행'에서는 주인공인 임차손[14]이 모종의 일로 모은 재물을 가지고 이 쪽과 결탁했다는 암시를 풍겼다. 오래된 친구 이순신[15]에게 말하는 대사로 길삼봉이라는 자가 동쪽에서 온... 으로 암시하지만 작품 자체가 어른의 사정으로 연중되는 바람에 실체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웹툰 오성X한음에서는 사건이 나기 5년전부터 선조가 배후에서 일부러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게 유도하여 장기적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미끼로 쓰는 것으로 나온다.

징비록에서는 초반부를 장식하는 사건으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이 주도하는 것으로 나이지만 배후에 선조가 있는것 같다는 이산해의 언급으로 선조 배후설도 같이 채택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딱 기축옥사때까지만 평가가 좋았다.

5 관련 항목

  1. 정철의 절친한 친구로, 학식이 뛰어난 선비였지만 그 부친이 본래 노비였는데 협잡으로 양반 신분을 얻은 것이 동인에게 들통나 졸지에 선비에서 노비로 신분이 떨어질 판이 되자 정철과 짜고 동인을 몰락시킬 꾀를 내었다. 하루아침에 존경받는 선비에서 전혀 생각도 못했던 노비로 떨어지게 된 송익필의 신세는 동정이 가지만 그것이 다른 무고한 선비들을 죽음의 길로 보낸 것에 대한 면죄부는 아닐 것이다.
  2. 동서 분당 초기에는 동인이 압도적인 집권 세력이었다.
  3. 이이는 서모와 싸우고 한때 불교에 심취하였던 패륜아성균관에 모실 필요도 없다거나 하는 류의 이야기가 정여립에게서 나왔다.
  4. 정여립이 한때 자신의 스승인 이이에게 이런 패드립을 친 것은 이이가 자신이 이조전랑에 추천받은 걸 반대했기 때문이다.
  5. 물론 정철의 뒤에는 선조가 있었다.
  6. 무릎에 무거운 걸 짓누르는 형벌. 원래 건강한 장정들에게는 무릎에 무거운 걸 올려놓고 짓누르는 것이 고문의 용도였지만 어린이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7. 반면 선조는 정철이 압수한 천여권의 책중 <우득록>을 보고 "이 책은 옛글을 읽은 사람의 저술이다. 모두 돌려주도록 하라."라고 했으나 돌아온 건 우득록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나머진 다 어디로 갔을까?
  8. 하지만 서경덕계(=북인 온건파)인 이산해가 영의정을 하고, 남인의 경우엔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다.
  9. 당시 정언신은 정여립의 친척으로서 원래 정여립의 반란 음모를 듣고 비웃은 사람이었으며 원래 사건 조사관이었으나 여립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자리에서 쫒겨나고 수감되었다. 이 때 선전관이었던 무신 이응표는 정여립의 집에서 나온 문서 중 정언신 관련 편지들을 몰래 처분했으나 문인들의 멋부리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 17장이나 문서가 남았다.
  10. 명량해전 때 이순신에게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 같으냐?"며 호되게 꾸중을 들은 그 장수이다. 명량해전 당시의 이미지를 앞뒤 이해없이 본다면 느낄 선입견과는 달리 실제로는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침투해 진영을 홀라당 불태워 버리는 등의 작전을 수행한 인물이고 명량해전 때도 가장 먼저 복귀해 싸워서 이순신의 추천으로 파격 승진한 사람이다. 애초 부산 왜영화공사건에서 이원익이 이를 거짓으로 모는 듯한 행동을 취한 덕에 나중에 억지로 이순신을 곤경에 처하는 선조가 써먹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되었는데, 정작 역적의 5촌이란 안위는 제외된 것이라 선조의 제정신 나간 토사구팽도 모르는 인간말종 및 정신병 환자임이 들어났고, 이 두 사건으로 성웅의 남자란 평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김경진이 쓴 격류를 포함한 임진왜란 작품이나 슈타인호프가 쓴 이순신의 나라에서 그러한 설정들을 차용. 최측근으로 나타난다.
  11. 안구건조증의 증상이다
  12. 선조수정실록 권24 선조 23년 3월 1일 임인 4번째 기사
  13. 하지만 왕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던 동인은 정철이 어차피 선조가 최영경 죽일 것을 알고 일부러 멋부린 것이라고 평가하며 정철을 탄핵했다.
  14. 임꺽정의 아들로서 생존했다.
  15. 이순신은 임꺽정 원작에서도 까메오로 나왔다. 파행에서는 아예 임차손과 이순신의 평생에 걸친 우정이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