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영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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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종재위기의 최장기 정승[1]
본관 동래. 자 사훈. 호 수부. 시호 문익. 생몰년 1462~1538
2 중종 이전
1492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부제학 ·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나 1504년 갑자사화때 왕에게 간하여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3 중종시기
1506년 중종반정으로 부제학에 복직, 이조참판 ·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510년 우참찬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을 수습한 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조광조의 득세를 가장 많이 막았지만[2] 1519년 기묘사화때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파직되고[3] 1527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4] '작서의 변'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로 훗날 경빈 박씨에 이어 복성군이 사사되자 "진성군을 죽일때는 조정이 안정되지 않아 어쩔수 없었지만 지금은 안그래도 됩니다," 라고 했다가 영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5] 1537년 총호사로서 장경왕후의 희릉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의 무고로 김해에 유배되었으나,[6] 이듬해 김안로의 사사로 풀려났다. 이때 영의정 윤은보, 좌의정 홍언필 등이 영의정에 추천했으나, 과거 영의정 때의 실정을 이유로 중종이 거절하였다.[7] 중추부영사로 이듬해에 77세의 나이로 죽었다. 중종의 묘정과 회덕의 숭현서원, 용궁의 완담향사에 배향되었다. 문집 《정문익공유고》가 있다.
4 여담
중종 대 몇없던 강직하고 융통성있는 신하. 목이 달아날만한 충언을 몇번이고 아끼지 않았고 이로인해 좌천되기도 했다. 때문에 박시백은 굉장히 고평가하는 인물. 사상적으로도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조광조와 그 개혁파들과 달리 현실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현량과에 적극적으로 반대입장을 표명한 것이 예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소격서 혁파등에 찬성한 걸로 보아 유학자로서의 기본은 갖추되 야인을 습격하자는 일이나 현량과 실시 반대, 향약 반대로 보아 현실적인 유연함도 갖추고 있고 강직하다고 하면서 조광조에게 몰아준 힘의 일부를 정광필에게 주어 조광조를 개혁의 엔진으로 정광필로 하여금 그것을 적절히 제어했으면 성공했을것이라고 했다.[8]- ↑ 정승기간이 14년이며 영의정만 두번에 걸쳐 11년을 했다.
- ↑ 현량과 실시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가 남곤과 정광필이다.
- ↑ 이때 정광필은 조광조의 죄를 적어놓은 문안에 딴지도 걸고(가장 크게 딴지를 건게 조광조의 죄안은 대신들이 죄를 알고 써놓은양 했는데 이에 정광필은 "우린 부른 뒤에 알았는데요?" 라고 했다. 어쨌든 정광필 덕에 죄안의 일부가 고쳐지기도 했으며 기묘사화 가담자들도 처벌의 수위를 낮췄고 조광조의 목숨도 조금 연장되었으며 처벌 대상자들의 처벌도 조금 낮춰졌다 그 중에 일부는 얼마 안가 죽게 되었지만.) "조광조의 죄는 파직이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붕당은 큰 죄인데 함부로 할 수 없고 조광조를 앉힌건 전하잖아요." 하며 눈물을 흘리며 빌어도 봤지만 실패했다.
- ↑ 이때는 심정,이행,이항등이 영의정엔 명망가를 앉히는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앉게 되었다.
- ↑ 이 직은 그냥 명예직이다.
- ↑ 이에 백성들은 다들 슬퍼했다고 한다.
- ↑ 근데 실권이 없었기에 실정이랄것도 없다.
- ↑ 실제로 정광필은 실권이 없었다. 중종은 그의 의견을 존중하고 들어줄뿐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중대한 일일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