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1 개요

고려문하시중에 해당하는 조선 시대 최고 관직. 뜻은 의정부(議政府)의 수장()이라는 의미이다. 갑오개혁의정부내각으로 개편하면서 내각총리대신으로 바뀌었다가, 내각이 다시 의정부라는 명칭으로 환원되면서 의정부수석대신이라는 뜻의 의정 또는 의정대신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07년에 다시 내각총리대신 바뀌었다가 경술국치로 소멸한다.

조선의 직제에서는 의정부가 최고 의결기관이었므로 결국 조정 신료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라는 의미이며 흔히 영상(領相)이라 불리었다. 의정부, 돈령부, 중추부 등의 정1품 아문과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등의 특수 관부에 존재했던 수장급 관직인 영사(領事)의 하나이며 따라서 품계를 포함한 정식 관직명은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이다. 이를 줄여서 부르는 약칭이 영의정.[1]

대개의 경우 원로대신이 예우로 임명되는 영중추부사와 왕비의 아버지들이 맡는 영돈령부사를 제외한 나머지 영사는 거의 다 영의정이 겸직하고, 마찬가지로 정1품 자문명예직인 도제조 또한 영의정이나 다른 좌우정승이 겸직하는 것이 관례였으니 영의정이란 자리가 가지는 상징성은 상당한 것이었다.

본래 조선은 고려말의 관직체계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지만 정종이 즉위하면서 고려때부터 내려온 최고 의결기관이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였다. 이때 의정부의 수장으로 영의정부사를 두고 그 밑에 좌의정우의정을 두었다.

일반적으로 영의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하여 임금 바로 아래의 최고위관직으로 실권도 대단했을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조선 시대에 영의정의 권력이 막강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애당초 의정부 자체가 경륜있는 노신들이 모여서 국정을 관장하고 자문하는 정도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의정부의 수장인 영의정은 신료들에게 원로로, 조정의 영수로서 존경은 받았지만 실권은 크지 않았다. 영의정의 입지는 왕권의 강약에 따라, 그리고 조정내 의정부의 권한의 변동에 따라 부침을 거듭한다.

이러한 현상은 좌의정이 판이조사, 우의정이 판병조사를 겸직했기 때문이다. 판사직은 판서의 업무를 감독하는게 주업무로 관리의 인사를 담당한 이조판서병권을 담당한 병조판서를 지휘, 견제하는 좌, 우의정의 권한이 영의정보다 강력했다. 이는 KBS의 드라마 징비록에서도 이조판서로 승진한 류성룡에게 좌의정 정철이 자신에게 업무를 보고할 필요가 없이 소신대로 하라는 대사로 좌의정의 막강한 파워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물론 영의정 이하 의정부 찬성 참찬들도 판사직을 겸하는 경우가 많지만 판이조와 판병조가 노른자 중 노른자기 때문에 좌의정과 우의정에 비해 떨어지는게 사실. 괜히 세종의 장인 심온이 불평하고 구성군이 구훈에게 쉽게 밀린것은 이때문이라 볼 수 있다.[2]

실제로 조선사의 권신들을 보면 영의정해먹었던 양반들은 얼마 안된다. 최강의 권신 김안로도 좌의정에 그쳤고 윤원형은 영의정이 되긴 했지만 정작 권력이 최강이던 시절에는 우의정이나 영중추부사같은 자리에 있었으며 영의정일 때는 오히려 또다른 권신 이량의 급부상으로 힘이 예전만 못했다. 이숙번도 직급상으론 낮은 직책에 있으면서 상관인 남재, 성석린 등에게 호령을 해댔다. 홍봉한도 그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좌의정에 있었다.

이로인해 영의정 자리는 권신들이 얼굴마담으로 그럴듯한 사람을 세워놓기 위해 비워두는 자리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중종조의 명재상 정광필의 경우에는 권신 이항, 심정, 이행, 김안로 등이 모두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기 위해 영의정으로 합의를 봤고 인조반정 이후에도 반정 4대장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등의 합의로 이원익이 영의정이 되었다. 왠지 지금 국무총리랑 똑같은거 같은데...

힘이 셌던 영의정으로는 한명회, 신숙주[3]의 경우가 있고,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수양대군과 중종반정의 삼대장인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 있다.[4] 그외에 숙종조의 영의정 허적이 좀 세도를 부려봤으며[5] 선조조의 이준경도 상당한 힘이 있었다.[6][7]

특히 태종은 의정부서사제 대신 육조직계제를 더 선호해서 태종때의 영의정은 그냥 외국에 보낼 외교문서를 점검하고 중죄인이나 사형수의 판결에 대해서 검토하는 정도의 수준의 일을 했다.

그러나 세종경륜있는 원로분들이 국정에 참여 못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라고 하여 육조직계제 대신 의정부서사제를 기조로 삼았다. 태종때는 육조, 즉 오늘날로 치면 각부처의 장관들이 왕에게 직접 보고하고 결재를 받는 시스템이었다면 세종은 이것을 각부처 장관들이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고 의정부에서 이를 조율해서 왕에게 올리는 시스템으로 바꾼것이다. 황희 정승이 이 시스템을 싫어합니다

사실 세종이 육조직계제 대신 의정부서사제로 돌린 이유 중에는 결재해야할 일이 육조직계제하에서는 너무 많은 탓에 과중한 업무를 좀 줄여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당시 세종은 어려서부터 소갈증(당뇨)에 시달렸기 때문에 육조직계제의 과도한 업무를 감당 할 수 없어서 의정부서사제로 체제를 돌렸다고도 한다. 이렇게 되면 상당히 훌륭한 재상이 필요한 법인데, 다행이 세종 시대에는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허조 같은 훌륭한 재상들이 있었기에 잘 돌아갔다.[8]

물론 세종이라고 해서 영의정에게 모든 권한을 준 건 아니다. 고위직 임명이나 군사권, 중죄인에 대한 처결 문제 등은 왕이 직접 처결했다. 하지만 세종이 집권 후반기에 들어가면서 건강이 악화되고 한글창제 등으로 업무를 줄일 필요성이 있게 됨에 따라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단종 시절까지 영의정 등 삼정승의 권력은 강해졌다. 이는 결국 수양대군이 김종서의 권세가 너무 커져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명분으로 계유정난을 일으키는데 빌미가 되었다.

당연히도 세조는 다시 의정부서사제에서 육조직계제로 시스템을 회귀시켰고 이후 조선에서는 다시는 의정부서사제가 부활하지 못했다. 이후 중종 12년 (1517년)에 국방문제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설립된 기구인 비변사가 점차 권력이 커지다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국정 전반을 담당하게 되자, 의정부와 6조는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고 삼정승도 비변사에 자문명예직인 도제조로밖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영의정은 조정신료들의 수장이라는 명목상의 지위만 남게 된다.

물론 조선시대의 모든 영의정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던 영의정은 1453~1455년까지 판이조사와 판병조사를 동시에 겸직해 재임했던 수이유(李瑈), 즉 수양대군이다.

2 주요 영의정 역임 인물

  • 배극렴 : 조선의 첫 최고재상, 태조와는 왜구 퇴치와 위화도 회군을 같이한 공신으로 나이와 공로가 높아서 조선 최초의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영의정이란 관직명이 등장한 건 태종 1년 의정부 설치와 함께이기 때문에 태조 1년에 졸한 배극렴은 생전에 영의정으로 불릴 일은 없었으며, 당시 배극렴의 정식 관직명은 문하좌시중이었다.
  • 이서 : 태종 1년 7월 13일 영의정부사 직책에 최초로 임명된 인물이다.
  • 조준 : 이전에 최초의 영의정이라 하였으나 위의 이서가 최초의 영의정이다. 이서 이후에도 이거이-성석린이 이 자리에 올랐으며 조준은 그 다음에 올랐다. 물론 조준의 경우 태조시절 때 배극렴에 이어 문하좌시중에 올랐던 경력이 있다.
  • 의안대군 이화 : 태조의 이복동생. 태종 때 영의정 역임.
  • 하륜
  • 심온 : 세종의 장인이나 외척을 경계한 태종에 의해 개발살난다.
  • 황희: 조선 역사상 최장기 영의정 재임자. 무려 18년. 1431년 69살때 영의정으로 재임하기 시작하여 1449년 87세로 노령을 이유로 물러날 때까지였다.
  • 하연
  • 황보인
  • 수양대군 이유 : 계유정난 직후 즉위할 때까지 영의정이었다.
  • 정인지
  • 한명회
  • 신숙주 : 10년 넘게 영의정을 하면서 최장기 재임 영의정 중 하나에 속한다. 여담으로 신숙주는 최단임 영의정 기록을 세운바가 있는데 자그마치 4일이다. 세조의 변덕 때문인데 자세한 정황은 세조항목 참조.
  • 구치관 : 세조의 공신이며, 성종 초반기 원상으로 훈구파였으며, 청렴결백한 영의정으로 이름이 높았다.
  • 황수신 : 영의정 황희의 아들이고, 세조의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치부를 많이 하여 욕을 먹기도 했지만, 나름대로의 능력은 있었다.
  • 심회 : 영의정 심온의 아들로, 세조의 공신에 성종 때 원상이고 또 성종 때의 원로대신에 외척이기도 했다.
  • 최항 : 세조의 공신 중 한 명으로, 뛰어난 학자이자 명신이었다. 또 좌의정 역시 2번이나 한 적이 있다.
  • 구성군 이준 : 조선 역사상 최연소 영의정 역임자. 27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이는 종친 측근 세력을 기용해서 왕권을 보호하려는 세조의 의도가 있었다.
  • 윤자운 : 신숙주의 처남으로, 세조의 공신으로 성종 때 원상이기도 했다.
  • 조석문 : 세조의 공신이며, 성종 때의 원상으로 영의정 1번에 좌의정 2번을 했고 훈구파 노신 중 한 명이다.
  • 정창손 : 세조의 공신으로, 세조 때 2번 했고 성종 때 10년이나 하며 훈구파 원로로 군림했다.
  • 윤필상 : 세조의 공신이고, 문무를 겸한 외척 출신 원로대신이지만,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 이극배 : 세조의 공신이고, 성종 때 원상이며, 원로대신으로 연산군 때까지 원로로 대접받은 영의정이다. 그리고 이세좌 등과도 일족 관계를 형성했다.
  • 노사신 : 세조의 공신이고, 성종 때 원상이었으며 또 성종과 연산군 때의 원로대신으로 뛰어난 학문과 능력을 가졌지만 대간들에게 자주 탄핵을 받았다. 그래도 대승적 차원에서 사화를 줄이려고 노력한 재상이다.
  • 신승선 : 공신 출신이며, 왕실과도 일족 관계를 형성, 또한 연산군의 장인으로 원만하고 중후한 인품으로 조정의 봉합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대간들에 의해 죽반승이라고 조롱을 받기도 하였다.
  • 한치형 : 인수대비의 사촌오라버니로, 왕실과도 인척을 형성해 높은 영의정의 자리에 올라서 연산군에게 시폐10조를 올리는 등 충언을 했다.
  • 성준 : 세조와 성종, 연산군 때의 신하로 연산군 때 원로대신이었지만, 시폐10조를 올리는 등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였지만 갑자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교살당했다.
  • 유순 : 연산군 때 영의정으로,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지만 연산군에게 아부하였고, 또 반정 이후에는 공신들과 친하게 지내서 사림과 대간의 지탄을 받았지만 탐학하지는 않았다.
  •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중종반정삼대장. 반정 이후 슬슬 벼슬이 올라가다 셋이서 차례로 사이좋게 영의정을 진짜 조금씩 해 보았다. 왜 조금씩 해 보았냐면은 영의정 몇달 해보기도 전에 죄다 병으로 죽었기 때문(...) 이들이 연산이 거느린 미녀들을 취하고 전국에서 뇌물을 받아 창고가 모자랄 정도였다는데 이에 선비들은 하도 저딴 식으로 굴다가 천벌을 받았다고 비웃었다고 한다.
  • 김수동 : 중종 때 영의정으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사림들의 비판을 받았지만 굽은 소나무 충신으로써 연산군 때 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 송질 : 중종 초반기 영의정으로, 연산군의 총신 전력과 탐욕하다는 비판으로 사직하지만 사위와 외손자가 영의정을 지냈고, 왕실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 또 남곤과도 인척 관계가 되어 영화를 누린 재상이다.
  • 남곤
  • 정광필 : 11년 이상 영의정으로 재임한 중종조의 명재상. 조광조의 독주 시절에는 그를 제일 강력히 저지했고 조광조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누구보다도 열렬히 그를 변호했다. 김안로의 미움을 사서 유배되자 도성의 백성들이 통곡했고 그가 귀환하자 환영 행렬이 길거리를 메웠다한다.
  • 장순손 : 김안로의 측근으로, 김안로에 의해 영의정까지 되었다. 그러나 편히 죽는다.
  • 한효원 : 김안로와 이웃한 영의정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능력과 실력은 뛰어났다.
  • 김근사 : 김안로의 일파로,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김안로의 실각 후 유배되었지만 죄가 김안로보다 덜해 편히 죽는다.
  • 윤은보 : 중종 때 영의정 역임.
  • 홍언필 : 좌의정과 영의정을 각각 2번 했으며, 청렴하여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다. 참고로 장인 송질도 영의정이고, 아들 홍섬도 영의정이다.
  • 윤인경 : 명종 때 영의정으로 을사사화에 가담해서 실록에서 그의 졸기에 안 좋은 예기가 쓰이지만 그가 을사사화 때 처음에는 유배나 좌천으로 끝내려 했지만, 결국 사약으로 상소를 돌린 이유는 좌의정 이기의 권세에 짓눌렸던 것으로 판단된다.
  • 이기 : 을사사화를 주도했던 정승이며, 소윤 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해 영의정 시절에도 대윤세력과 소윤 온건 세력을 모두 제거했다.
  • 윤원형
  • 이준경
  • 심연원 : 명종 때 영의정으로, 명종의 외척이며 심의겸의 할아버지이다.
  • 상진 : 명종 때 영의정이며, 윤원형과 친해 그에게 이용당했지만, 청렴한 명재상이다.
  • 권철 : 아래에 기술된 이항복의 장인인 권율의 아버지, 즉 이항복의 처조부로 1571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좌의정 당시 많이들 알고 있는 문지방에 손을 넣고 "이 손이 누구꺼요?"하고 물은 사건에서 이항복의 기개를 보고 손자사위 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홍섬 : 아버지 홍언필과 외할아버지 송질도 영의정으로 유명하다.
  • 박순 : 선조 초반기 서인의 영수 중 한 명이며, 명재상이기도 하다.
  • 노수신 : 선조 때 동인 중립 세력으로, 탕평정치를 펴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 유전 : 기축옥사정철 등을 도와 옥사를 확대시키기도 했지만, 청렴한 정승이었다.
  • 이산해
  • 류성룡
  • 윤두수
  • 유영경 : 소북파의 실세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다 광해군 즉위로 부패혐의에 걸려 죽는다.
  • 이순신 : 우리가 아는 충무공 이순신 맞다. "뭔 헛소리야? 그땐 류성룡이 영의정 아니였어?" 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사후 200년 가까이 되서 정조 시절에 1793년에 영의정으로 사후 추존된 사례이다. 종전 후 얼마 안된 1604년에는 좌의정으로 사후 추증되었고 한참 후인 인조 시대가 되어서야 충무공 시호를 받았으며, 정조 시대가 되어서야 영의정으로 예우가 올라간 것이다.
  • 이항복
  • 이덕형 : 위의 이준, 수양대군을 제외하고 '정상적으로' 임명된 영의정 중에선 최연소이다. 임명 당시 43세.
  • 이원익
  • 윤방 : 아버지 윤두수와 함께 부자 영의정으로 유명하다.
  • 김류
  • 신흠
  • 오윤겸
  • 심열 : 청국과의 물물교환을 건의했던 영의정이었다.
  • 홍서봉
  • 김자점
  • 이경석
  • 최명길 : 그의 손자인 최석정은 영의정에 가장 많이 임명되었는데 무려 9번이나 영의정을 역임했다.
  • 김육 대동법의 확장과 화폐 사용을 강력히 역설한 효종조의 명재상.
  • 이시백 : 인조반정 공신 이귀의 아들이며, 대동법에 찬성했다.
  • 정태화 : 영의정 정광필의 후손으로, 영의정을 5번이나 한 것으로 유명하며, 또 37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렸다.
  • 홍명하
  • 김수흥 : 형인 김수항과 함께 형제 영의정으로 유명하다.
  • 허적 : 탁남의 영수이자 영의정 중에서 그나마 세도를 좀 부려본 양반, 절제된 처신으로 효종, 현종의 신임을 받았고 숙종도 그를 중용했으나 서자인 허견의 역모로 죽고 만다. 야사에서는 그가 유악(기름먹인 천막)을 멋대로 가져다 써서 숙종의 미움을 샀다는 얘기가 있으나 실록 어디에도 관련 기록이 없다.
  • 김수항 : 송시열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자 효종, 현종, 숙종 초의 중신, 호포제를 주장한 바가 있으며 환국 때 사사된다.
  • 권대운 : 숙종 시기 기사환국 이후 영의정이 되어 송시열의 사사를 주장하는 등, 과격하게 활동했다.
  • 남구만 : 숙종 시기 소론의 영수
  • 김창집 :숙종 말, 경종 초의 권신이자 김상헌의 직계 후손이며 김수항의 아들. 노론의 영수인 4대신의 필두였으나 삼수의 옥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다. 이후 영조 대에 신원되었다.
  • 조태구: 소론 완론의 수장. 경종 때 대리소동 당시에 우의정으로 재임하며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는 데 앞장섰고 노론의 자폭으로 환국이 있자 영의정이 되었다. 소론이지만 온건파인 완론이라서 형식적으로나마 영조를 옹호했고 경종이 죽기 직전에 죽었다. 죽은 후에는 노론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관작이 추탈되지만 정미환국으로 복권되었고 뒷날 영조 31년의 소론 준론 집단 자살의 와중에 역률로 추죄된다.
  • 정호 : 노론 강경파의 수장으로, 노론 준론 세력이며 소론과 격렬히 대립했지만 본인은 청렴한 재상이었다.
  • 홍치중 : 노론 온건파 수장이며, 탕평책에 앞장섰던 영의정이었다.
  • 이광좌: 소론 완론의 강경파. 삼수의 옥 사건 때 노론을 공격하는데 앞장섰고 영조 즉위 후에 수세에 몰린 소론 대신들이 죄다 노론과의 타협을 꾀하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노론 놈들이 삼수의 옥 때 반역한 게 아니면 뭡니까?라고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여 노론들의 공공의 적으로 몰렸다. 영의정에 여러번 제수되었으나 노론의 공격으로 번번이 낙향했고 실제로 영의정 노릇은 얼마 못 해보았다고 한다. 영조 31년의 나주궤서사건과 소론 준론의 집단 자살 쑈 때문에 직첩이 거두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 김재로 : 노론의 영수 중에 한 명이며 권신으로 9년동안 영의정을 지냈고, 이후에도 영의정을 몇 번 하며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고, 청렴한 명재상이기도 했다.
  • 이천보 : 사도세자를 가르치고 교육을 했던 영의정으로 사도세자의 광증을 막으려고 했지만 평양 원유 사건이 일어나자 음독자결을 한다.
  • 홍봉한 : 영조의 외척이며,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실제로 홍봉한좌의정에 있을 때 실권이 강했다.
  • 채제공: 정조의 충신, 정조의 탕평책의 핵심에 있었던 남인의 수장. 금난전권의 폐지를 건의하는 등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펴며 개혁군주를 도운 명재상.
  • 김좌근 : 철종 시대 안동 김씨의 수장.
  • 흥인군
  • 김홍집 :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
  1. 이상의 관부에는 정1품 영사(領事) 1명, 종1품 판사(判事) 2명, 정2품 지사(知事) 2명, 종2품 동지사(同知事) 7명, 정3품 첨지사(僉知事) 8명으로 각각 정원이 정해져 있었다. 이런 경우 ○+관부+사의 형식으로 관직명이 정해진다. 예를 들어 본 항목의 영의정은 영+의정부+사로 조합된 것이다.
  2. 이러한 판사제도는 고려시대때 부터 내려오던 제도로 중서문하성의 장관들이 상서성의 판사를 겸직하며 상서성을 의미없는 기구로 만들고 철저한 재추 중심의 정치를 시행하는데 악용 되었다 이에 조선은 고려 문하시중이 겸직하던 판이부사를 no.2인 좌의정에게 넘기고 영의정의 권한을 약화시키면서 좌의정이 no.1인 영의정의 눈치를 보게하는 환경을 조성해 6조가 소신껏 일할 수 있게한 것이다. 실제로 6부가 유명무실했던 고려에 비해 조선은 철저한 6조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 졌다.
  3. 세조 앞테서는 깨갱했지만 세조가 죽기직전 원상으로 지목되면서 권력을 누리게 된다 패도에 가까운 왕권을 누린 세조에 의해 원상으로 지목되어 권력을 누린걸 보면 아이러니....
  4. 막말로 왕이 될 자격이 없던 중종 입장에선 무서운 사람들....
  5. 당시 남인이 청남과 탁남 정확히는 윤휴 권대운이 치열하게 갈등하던 상황이고, 청남은 서인을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상황이라, 온건파 탁남인 허적이 중재를 서야 청남, 탁남, 서인이 혼합되어 있었던 국정이 돌아갔다 자연스럽게 결정은 허적이 아니면 못이루어질 정도로 됐으며 이로인해 조정의 인사가 허적의 사랑채에서 행해진다는 말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사실 그나마 왕권에 우호적이었던 남인들을 기용하려 했던 숙종의 의사에 따른 것이었고, 허적의 역할은 숙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남인 주도의 정국을 유지하는 중재자 였다. 하지만 남인의 권력이 너무 강해졌다고 판단한 숙종은, 온건파인 허적을 시작으로 남인을 제거하는 경신환국을 일으킨다.
  6. 선조 즉위초의 원상으로 문정왕후를 반면교사로 삼은 인순왕후는 수렴첨정을 하는 듯 마는 듯하며 모든 결정권을 이준경에게 넘겼다. 물론 이준경이 단지 영의정이라 결정권을 넘긴건 아니고 명종 사후 후계가 완벽히 정해지지 않는 상황서 총대를 매고 인순왕후를 압박한 공이 어느정도 있기도 하고 당시 조정의 신망을 받고 있던 인사이기도 했다
  7. 원상제란 세조가 죽기 직전 왕이 어리거나 왕이 상중에 공무를 볼 수 없기 대문에 이를 대신 처리할 인사를 지명한 사람들을 뜻한다 정상적인 루트일 때는 상이 끝나면 바로 철폐되었으나 비정상적인 루트로(왕이 어리거나 방계 즉위) 계승이 이루어 질때는 몇년이상 이루어지기도 했다. 당연히 이 기간 동안 정승들의 권세가 오르는건 당연. 단 세조말 영의정이던 구성군은 나이가 어려 (20대 후반으로 추정 예종 즉위 당시 비슷한 연배다...) 원상에 끼지 못한 안습한 기록도 있다....
  8. 실제로 이 3인이 동시에 정승에 재직하지 않았다. 맹사성이 사직을 하고 나서야 허조가 겨우 정승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