柳洵
1441(세종 23년) ~ 1517(중종 12년)
조선의 역대 영의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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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 중기의 문신 · 문장가. 본관은 문화(文化).
자(字)는 희명(希明), 호는 노포당(老圃堂)이며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다.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유원지(柳原之)의 증손자이자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유종(柳淙)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세마(洗馬) 유사공(柳思恭), 어머니는 종성절제사(鍾城節制使) 홍상직(洪尙直)의 딸이다.
조선 전기 문화의 전성기였던 세종 치세에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에 재능을 보였다. 어린 시절에 금릉사(金陵詞)라는 글을 지었는데, 문체가 아름답고 의미가 장중하여 세상에 화제가 되었다.
1459년(세조 5년) 사마시에 장원급제한 것을 시작으로, 3년 뒤인 1462년(세조 8년)에는 식년 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갔다. 1466년(세조 12년) 문과 중시에 다시 급제하고, 이어서 같은 해에 열린 발영시(拔英試)에서도 급제를 했다.[1] 이렇게 7년동안 네번의 과거급제를 한 끝에 이조정랑에 올랐다.
1470년(성종 1년) 홍문관 부제학에 올라 경연 시강관으로 활약했는데, 그 유려한 문체로 성종으로부터 큰 총애를 받았다. 1484년(성종 15년) 공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으며, 관기확립에 힘을 쏟았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다. 1487년(성종 18년) 명나라에 천추사로 다녀온 뒤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형조참판과 공조참판을 또다시 지낸 뒤 병조참판을 지내고[2] 또 한번 대사헌이 되었다.
대사헌을 지낸 뒤 개성부유수에 임명되었고 다시 개성유수로 승차되었으며, 이후 공조판서 자리에 오른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자 왕릉과 산역을 담당하는 산릉도감제조가 되었다.
1495년(연산군 1년) 형조판서로 자리를 옮겼으며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했다. 이후 이조판서·도총관을 거쳐 1498년(연산군 4년)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이 해에 성종실록의 찬수작업에 참여하였다. 이듬해인 1499년(연산군 5년)에 다시 형조판서가 되어, 압록강 연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야인에 대한 정벌 계획이 있자 신수근(愼守勤)[3]과 함께 때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논해 중단시켰다.
그 뒤 좌참찬·호조판서를 역임했으며, 1502년(연산군 8년)에는 시문에 능한 10인에 선발되어 시수상(詩首相)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으나 허락되지 않은 채,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05년(연산군 11년)에 예순다섯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해인 1506년(연산군 12년·중종 원년) 박원종(朴元宗)[4]·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이 중종반정을 단행하자, 정승으로서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녹훈되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을 봉작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차 사임을 요청했지만 번번히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509년(중종 4년) 도리어 연산군 때의 총신이었다는 대간들의 탄핵을 받게 되자 관직을 극구 사양하고 마침내 은퇴하였다.
1514년(중종 9년) 다시 영의정을 제수받아 국정을 총괄하다가 3년 뒤인 1517년(중종 12년)에 77세로 죽었다. 자학(字學)에 매우 정밀하고 의학·지리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그러나 실록의 졸기에 따르면, 우유부단하고 나약하여 연산군이 묻는 일에 항상 윤당하다는 답변만 했다 하여 '윤당 재상'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고, 반정 때에도 어쩔 줄 몰라하며 박원종이나 성희안이 왕이 되느냐고 물었다고도 한다.
2011년 ~ 2012년에 걸쳐서 방송된 JTBC의 대하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강영구[5]씨가 유순 역을 맡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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