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행성

征東行中書省(정동행중서성)
/征東行省(정동행성)


1 개요

대몽항쟁이 종결되고 고려가 원나라에게 복속된 이후 원나라가 고려 내부에 설치한 기관.

흔히들 정동행성이라고 많이 알고있지만 공식명칭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으로, 정동이란 단어는 '일본을 정복한다일본을 공격한다'는 의미이며 행중서성은 원나라 중앙의 행정기관이었던 중서성[1]의 지방 파견 기관을 의미하며 보통 행성이라 줄여 부르기도 한다..

2 내용

70여년에 걸친 전쟁 끝에 고려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 쿠빌라이 칸남송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한 정복 전쟁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당시 일본의 정권을 장악한 가마쿠라 막부에게도 자신들에게 복속할 것을 종용했다. 이에 대하여 가마쿠라 막부가 순순히 응할리가 없었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일본을 정복할 것을 결정하고 1274년의 1차 원정을 진행하였으나 무위에 그친다.

하지만 의지의 쿠빌라이 칸은 포기하지 않고 7년뒤인 1281년 2차 원정을 기획하고 이 과정에서 정동행성이라는 조직이 처음으로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 2차 원정은 망했어요로 끝나버렸고 결국 1282년 정동행성은 다시 폐지된다. 그렇지만 의지 하나는 끝내주는 원은 이듬해 3차 원정을 계획했고 정동행성 역시 이 과정에서 1285년 다시 설립된다. 하지만 3차 원정은 계획으로만 끝났고 '일본 원정'이라는 목표가 사라져버린 이후 정동행성은 일반적인 행정기구로 성격이 변모하게 된다. 뭐 그렇다고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차지했던 것은 아니고, 기껏해야 하정사(賀正使)[2]를 파견하는 것과 같은 부수적인 일을 담당하는게 전부였던 정도. 원이 고려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남긴 기관이지만 큰 효율이 없었던게 정동행성의 관리인은 고려인으로 뽑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원나라에 매를 바치는 응방의 영향력이 더 컸을정도. 1285년쯤에 잠시 행상서성(行尙書省)으로 이름이 바뀐 적이 있었다.

그러다 1299년(충렬왕 25)에 한희유(韓希愈)의 반역 시도를 계기로 종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고려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여하여 시작했다. 당시 충렬왕과 충선왕의 부자 사이에 분쟁이 있었고 신하들 또한 두 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정쟁 중이었는데 이 대립이 원나라의 제실(帝室)에까지 얽혀 있었기 때문. 원래 정동행성의 승상은 고려국왕이 맡았는데 이 사건 이후 원나라의 야율희일(耶律希逸)와 활리길사(濶里吉思)가 내려와 직접 고려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때 고려의 상급관리들의 처벌은 반드시 원나라에 보고하도록 하며, 관리수를 줄이고, 노비제도를 원나라의 법식대로 고치도록 했다.

이따금[3] 원나라가 정동행성의 힘을 키워서 고려에 내정에 좀 더 강하게 간섭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고려가 강하게 반발했던 탓에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고 이후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반원운동을 펼침에 따라 1356년 정동행성은 철폐된다. 그러나 홍건적의 개경 침입 이후 1361년 정동행성이 다시 설치되고 다음해에는 관제(官制)가 원나라 간섭기의 것으로 복구된다.
  1. 물론 중서성이라는 조직은 고려에도 있었지만 원간섭기에는 당연히 '속국 따위가 어디 우리랑 맞먹으려 드느냐'라는 원나라의 일갈 때문에 원간섭기 내내 명칭이 격하됐다.
  2. 신년과 같은 기념일을 맞이해서 조공과 함께 파견하는 사신을 지칭한다.
  3. 대표적인 경우로 충렬왕충선왕 부자 사이에 왕위를 계승 중입니다 왕좌를 둘러싼 격렬한 다툼이 있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