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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역대 심양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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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없음 | |
시호 | 충선헌효대왕 (忠宣憲孝大王) | |
능묘 | 덕릉(德陵) | |
성 | 왕(王) | |
휘 | 원(謜)/장(璋) | |
자 | 중앙(仲昻) | |
몽골식 이름 | 이지르부카 (益知禮普花) | |
배우자 |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의비(懿妃) 야속진(也速眞) | |
아버지 | 충렬왕 | |
어머니 |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 |
생몰년도 | 음력 | 1275년 9월 30일 ~ 1325년 5월 13일 |
양력 | 1275년 10월 20일 ~ 1325년 6월 23일 (51세) | |
재위기간 | 음력 | 1298년 1월 병오일 ~ 1298년 8월 임신일(8개월) |
양력 | ||
재위기간 (복위후) | 음력 | 1308년 8월 갑인일[1] ~ 1313년 3월 갑인일(5년) |
양력 |
고려의 제26대 왕. 왕위에 오르기 전 이름은 원(謜)이었으나 즉위 후 장(璋)으로 고쳤다. 자는 중앙(仲昻).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맏아들[2]로,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다. 원나라의 첫 심(양)왕이기도 하다. 고려왕과 심왕이라는 두 왕작을 동시에 가졌었기 때문에 고려심왕(高麗瀋王)이라고 불린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보면 알겠지만 고려의 왕인데도 원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기간이 고려에 있었던 기간[3]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다. 어려서부터 원나라에서 자란 덕분에 고려에 대한 애착이 없어 원나라 황실에서 고려에서 통치하라고 압력을 넣었음에도 끝까지 대도에 붙어있었고, 왕위를 물려준 이후 대도에서 죽었기에 직설적으로 적자면 몽골인이나 마찬가지였다.
1 생애
1277년 세자로 책봉되고 이듬해 원나라에 갔으며, 쿠빌라이 칸의 증손녀 계국대장공주를 정비로 맞았다.[4]카다안의 침입 당시에는 쿠빌라이 칸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1297년 돌아왔는데 학문을 좋아했는지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책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충선왕이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죽었기 때문인데 충선왕은 어머니가 죽은 이유가 당시 충렬왕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으며 날뛰던 무비(無比)의 소행이라 생각하여 그와 관련된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버렸다. 이 때문에 부자 간에는 틈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치에 뜻을 잃은 부왕 충렬왕이 양위 의사를 밝히자 1298년 즉위했다.
2 개혁을 추진하다
즉위한 이후 혈기 넘치는 젊은 국왕은 원나라 간섭의 영향으로 인한 폐단을 개혁하고 구습을 철폐하거나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무엇보다 원의 밑에서 권세를 누리던 권문세가의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주목할 만한 개혁정책을 의욕적으로 실시해 나갔다. 그러나 권문세가의 힘은 막강해서 일련의 개혁정책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5]와 권문세가의 모략으로 인해 결국 충선왕은 즉위 7개월 만에 원에 의해 폐위당하고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이후에도 충선왕에게 원한을 품은 왕유소 등은 충선왕을 계속 모함하여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 사이를 이간질했으며 충선왕을 아주 폐하려 하기도 했다.
1307년 원의 성종 테무르 칸이 죽고 황제 자리를 둔 정쟁이 발생했는데 충선왕은 여기에 적극 개입했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라 열손가락 안에 드는 황족의 가까운 인척이었기에[6] 황위 분쟁에서 상당한 발언력을 가질 수 있었다. 카이샨(훗날의 원 무종)과 그 동생인 아유르바르와다(훗날의 원 인종)를 지지하여 그의 즉위에 도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원나라 황실과 친분을 맺게 되었고 자신을 모략한 왕유소 일당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듬해(1308) 심양왕에 봉해졌다. 그래서 일단 형식상으로는 혼자서 한반도와 만주 양쪽의 통치자였다! 그러나 같은 해 아버지 충렬왕이 죽자 고려로 돌아와서 다시 한번 고려의 국왕이 되었다.
다시 왕이 되어서 일시적으로 즉위했을 때처럼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그다지 적극적으로 정치를 펼치지는 않았고 왕족 제안대군 왕숙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자신은 원나라로 가서 일종의 원격통치를 했다. 이 와중에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도 있었는데 바로 권문세가와 사원의 소금의 전매 독점을 금지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은 것. 신진사대부가 이 사람을 통해 성장했다는 주장도 있다.[7]충선왕이 해마다 많은 물품을 원나라로 가져가고 계속 원나라에 머물길 원하자 왕의 귀국 운동이 있었으나 충선왕은 번번히 거절하였다. 나라 밖에서 국왕이 머물며 통치함이 부당하다는 이야기가 계속 들리자 왕위를 강릉대군 왕도(江陵大君 王燾)에게 넘겨주면서까지 귀국을 싫어했다.
3 양위
결국 1313년 재위 5년 만에 충숙왕(즉위 직후 왕만으로 개명)에게 고려 국왕 자리를 양위하고, 심양왕 자리를 이복형 강양공의 차남 연안군 왕고(군대 고참이 아니다!)에게 물려주었고(1316)[8] 자신은 연경으로 가서 '만권당'을 설립하여 고려와 원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술을 교류하고 고전 연구에 힘썼다.
4 양위 이후
그렇게 평화롭게 사나 싶었지만 이 왕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1320년 원나라의 인종 아유르바르와다가 죽자 환관 임백안과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토번까지 유배를 갔다가 이제현의 간절한 상소가 먹혀 3년 후에 돌아왔다. 그 후 원나라 수도 대도에서 소일하다 1325년 5월에 죽었다. 향년 51세. 정식 시호는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으로 원에서 내려준 시호를 불러주기 싫어하는 쪽은 '헌효왕' 혹은 '헌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5 평가
충선왕은 성품이 현인을 좋아하고 악인을 미워했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보고 들은 일은 끝까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늘 선비들을 데려다가 역사상 국가들의 흥망과 군신의 잘잘못에 대해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토론했다. 특히 송나라 시대의 옛 일들에 큰 흥미를 가진 나머지, 자신의 막료를 시켜 『동도사략(東都事略)』을 읽게 하면서 왕단(王旦), 이항(李沆), 부필(富弼), 한기(韓琦), 범중엄(范仲淹), 구양수(歐陽脩), 사마광(司馬光) 등 명신들의 전기에 이르면 반드시 손을 들어 이마에 댐으로써 존경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정위(丁謂), 채경(蔡京),장돈(章惇) 등 간신의 전기를 들을 때면 반드시 이를 갈면서 통분해 하곤 했다.
《고려사》충선왕 총서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충선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 조정에 입시해 요수(姚燧)·조맹부(趙孟頫) 같은 명유들과 교유했으며 간혹 그 나라 정치에 관여해 썩 훌륭한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후 상국의 관직 제도와 겹치는 것을 피해 관직 명칭을 바꾼 것은 제후로서의 법도에 충실한 조치였으며, 전부(田賦)를 올바르게 고치고 염법(鹽法)을 제정한 것은 정치의 요체를 안 행동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자리는 온 백성들이 우러르며 모든 정무가 집중되는 자리라 단 하루라도 비워서는 안되는 것인데도, 왕은 황제의 분부로 복위한 뒤 부녀자들과 내시들의 꾐에 빠져 다섯 해나 연경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필요한 물자를 대느라 고통을 겪었고 시종하는 신하들은 오랜 객지 생활에 지친 나머지 귀국할 생각만 하면서 마침내 서로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원나라도 또한 그에게 염증을 느껴 2차례나 귀국을 종용해오자, 왕은 회피할 구실이 없어 아들 왕도(王燾)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또 조카 왕고(王暠)를 세자(世子)로 삼았다. 때문에 부자와 형제 사이에 온갖 시기 질투가 일어나 결국 그 화(禍)가 여러 대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았다. 장래에 대한 계획이 이처럼 불성실했으니 그가 토번(吐蕃)에 유배간 것도 기실 우연이 아닌 것이다.”
[9]
원 강점기의 '충'자 돌림 군주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군주.
실제로도 이들 중 가장 능력 있던 군주였고 나름대로 개혁정책을 펼쳐서 약간의 성과를 거둔 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 대상이었던 권문세가의 힘이 여전히 막강했고, 더더욱 그 배후인 원의 영향력 또한 굳건했기에 그의 개혁은 의지 실종과 함께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개혁의 좌절은 후계자 충숙왕의 앞날을 가로막으며 훗날 공민왕이 원명 교체기를 이용해 독립운동을 펼칠 때까지 개혁이 이루어지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이 시기 충자 돌림 왕들이 꼭두각시 노릇이 싫어 정치를 내팽개친 것 때문에 멀리서나마 문서로 형식적으로 정무를 본 충선왕이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것이지,[10] 그의 정치 역시 따져보면 문제투성이였다. 스마트폰 등 통신수단이 매우 발달한 현대에서도 문서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 대통령과 장관이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회의하며 결정을 내리는데, 통신이 불편했던 전근대에서 멀리서 '문서만으로 통치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이었으며 수많은 문제점을 불러왔다.
당장 고려사를 편찬했던 사신의 평가만 봐도 위와 같이 '이 사람 능력이 있었던 건 확실한데 통치가 어찌 이러한가? 원격통치한답시고 대도에 눌러앉은 덕분에 물자낭비에 신하들 관리가 안 되는 등 정무가 불량하며, 원제국에서도 보다 못해 가서 통치하라고 했더니 가기 싫어 자기 아들에게 왕자리를 떠넘겼으니 책임감도 없고....티베트로 귀양간 것이 자업자득이다'라는 식으로 혹평을 하고 있다.
또한 심양왕 문제로 훗날 심양왕에 임명된 자들은 고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고 이 때문에 분란이 생겨 정치 문제로 비화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거기다가 1310년 원나라에서 자신을 폐하고 큰아들 왕감을 고려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움직임이 있어 측근들이 이를 포착하자 자신의 장남을 죽여버리는 비정한 면모도 있었다. 자신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3대가 부자간의 악연으로 얽혀버린 막장 드라마를 리얼로 찍은 셈.[11]
고려국을 폐하고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편입해 달라는 입성론이 불거진 요인을 제공한 것이 충선왕이기도 하다. 첫째로 권문세족과 척을 지면서도 누르지 못했고, 둘째로 고려 밖에서 원격 통치를 했고, 셋째로 심양왕 작위를 고려왕이 아닌 조카에게 물려줘서 적절히 훗날 입성책동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12]
5.1 책벌레
왕 개인적으로는 학문을 좋아해서 책벌레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고[13] 예술감각도 뛰어나서 특히 그림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군주답게 여성관계도 제법 복잡한 편이었는지 정사인 고려사도 그렇고 야사에도 여성들과 얽힌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하여튼 여러 가지로 정말 드라마틱한 삶을 산 임금.
6 매체
여성 편력이나 부자 갈등, 개인적 기질과 개혁 군주의 이미지 등을 생각하면 이 왕도 나름대로 사극의 소재거리로는 충분한 요소를 꽤 가지고 있는데 묘하게도 사극에 등장한 적이 없다.
드라마 외로는 만화가 김은희씨가 충선왕과 무종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더 칸'을 연재한 적은 있다.
소설로는 충선왕을 서브 주인공으로 '왕은 사랑한다'가 있는데, 여기선 초반엔 고려의 개혁을 꿈꾸는 세자로 아버지와 권문세족과 갈등한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여주와 자신의 절친인 남주가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점차 얀데레화 되어 간다. 아들을 낳은 비도 좋아하는 여자를 닮았다고 여겨 술에 취해 강간한 후 혼인하고, 이후로도 사랑은 없이 성욕만을 푸는 관계로 아들 둘을 낳은 것으로 나온다. 이러니 자식에 대한 애정도 없어 자기가 아버지와 갈등을 빚어봣으니 심상찮아 보이는 세자를 죽이는 것도 꺼리낌이 없던 것. 서브 남주이기에 결국 여주와 맺어지진 않는다. 이 소설은 2012년 경 드라마화 이야기가 나왔지만 2016년 현재까지 구체적인 제작 소식은 없다.
사실 원강점기 특히 충선왕을 사극화하려면 배우들이 몽골식 변발을 하고 배경의 90% 이상이 원나라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나간 일인 역사를 다루는 사극의 특성상 작가가 창작을 한다 해도 실제 역사의 흐름을 어느정도 따라가야 하는데, 주인공 격인 충선왕 자체가 사실상 몽골인이었기 때문에 외국인의 입장에서 고려를 보는 스토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에서 이런 사극이 곱게 보일 리도 없고 시청률 역시 저조할 것이 분명하니 방송사에서 의욕적으로 할 동기가 없는 것이다.
7 기타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충선왕은 목종이나 공민왕 등과 마찬가지로 동성연애를 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고려의 국왕 중 한 사람이다. 충선왕의 여성편력이 상당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꽤 재미있는 사실이다. 충선왕의 동성연인은 원충(元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18세가 되던 해에 연나라 수도에 머물고 있던 충선왕을 모시기 위해 파견되었고 이후 그의 측근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충선왕은 원충을 남색으로 총애하여 그가 채 20세가 되기도 전에 왕씨성을 내려주고 벼슬도 높여주었는데, 성격이 강직했던 원충은 이를 부담스러워하며 사양했다. 그러자 충선왕은 단단히 삐쳤는지(…) 그에게 내려주었던 왕씨 성을 거두어가고 벼슬도 강등시켜 버렸다. 그러나 후에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에 압록강까지 자신을 마중나온 원충을 보고는 화가 풀렸는지 그를 다시 특별히 우대하고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원충은 이후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까지 섬기다가 죽었는데, 본래 왕의 동성연인이 뒷배경을 믿고 오만방자한 짓을 일삼는 것은 역사상에서 꽤 자주 있었던 일인데, 원충은 예외적으로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다가 죽었다.
별 상관없지만 조선의 17대 국왕인 효종도 청으로부터 '충선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한자까지 고려의 충선왕과 같다. 다만 조선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멸시해서, 청나라에 보내는 국서 등에만 이걸 쓰고 내부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효종이라는 묘호는 중국 몰래 쓴 것이다.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이 왕의 이름을 딴 도로인 충선로가 있다. 부평이란 지명이 정해진게 충선왕 때라는걸 감안한 듯. 부평의 본래 지명은 길주목이었으나, 충선왕 2년(1310)에 부평부로 바꾸었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편 인천이라는 지명은 조선의 태종 13년(1413)부터 사용되었다.
어진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는 왕이다. 공민왕대에 왜구에 의해서 흥천사에 소장된 충선왕과 한국공주의 영정이 탈취되었기 때문이다. 왜구들 입장에서는 어진은 상당히 고가품으로 거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남아있다면 고려시대 유물이 많은 일본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 ↑ 충렬왕이 죽은건 7월 기사일이지만 준비과정을 거치느라 한달 늦게 왕위에 올랐다.
- ↑ 충렬왕의 장남은 아니다. 그러나 제국대장공주가 정비가 되었기 때문에 세자가 되었다. 충렬왕의 장남은 강양공(연안군의 아버지이며, 공양왕의 조상이 된다.)인데, 순수 고려인이라서 배제되었다. 안습.
- ↑ 1년도 되지 않는다.
- ↑ 이 혼인 이전에 서원후 왕영, 홍문계, 조인규의 딸을 이미 아내로 맞은 상태였다. 그리고 충숙왕의 생모인 의비와 결혼했던 시기가 계국대장공주보다 더 이전이라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일찍히 충선왕과 결혼한 고려인 3명은 몽골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국대장공주와 의비보다 서열이 뒤로 밀렸다. 참고로 계국대장공주는 무종과 인종의 사촌이고, 후에 원나라의 황제가 되는 태정제의 누이다.
- ↑ 충선왕이 세자 시절에 맞아들인 아내를 총애하자 투기하였다 한다.
- ↑ 충선왕은 고려왕 중에서 유일하게 황제를 외할아버지로 둔 왕이다. 충선왕 이후로는 친왕의 딸과 결혼했다.
- ↑ 이기남(1971),'충선왕의 개혁과 사림원의 설치',역사학보,52호
- ↑ 사실 1310년부터는 심왕(瀋王)이라고 불리었다. 이건 꽤 의미있는 일인데, 왜냐하면 원 제국 하에서 2자왕(왕명이 두글자)보다 1자왕(왕명이 1글자)가 더 높기 때문. 일단 형식상으론 만주 최대의 실력자들인 칭기스칸 동생 가문들(동방 3왕가)과 대등했던 것. 그러나 왕고가 즉위하면서부터는 이런 실권이 사라지고 단지 고려 왕실을 이이제이하는 역할만 남았다고 평가받는다.
동군연합으로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부활할 수도 있었을 텐데... - ↑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 ↑ 일단 미성년자였던 충목왕과 충정왕은 차치하더라도 충혜왕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수준의 개막장 군주였으며 충숙왕과 충렬왕 역시 원의 간섭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좋은 군주였다고 하기는 힘들다.
- ↑ 따지고 보면 자기 아버지(충렬왕), 자기 아내(계국대장공주), 자기 아들(세자 감)이 적이었거나 적이 되어버린 셈. 온 가족이 적 ??
- ↑ 부원배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된 입성책동 움직임은 권문세족들이 '세조구제'를 내세워 저지했다.
- ↑ 아버지(충렬왕)의 애첩, 내시, 관료들 더 나아가 자기 자식까지 죽이는 비정함을 가진 군주임에도 호학군주였다! 학문수준도 상당했으며, 당대 고려 제일의 유학자로 일컬어지던 이제현을 총애했다. 비정하면서도 상당한 학식을 갖춘 호학군주였다는 측면에선 조선 영조와 비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