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中國史 | ||||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 | 기원전 206 ~ 907년 | |||
907년 ~ 1644년 | 1616년 ~ 현재 |
중국의 역사 907년 ~ 1644년 | ||||
907 ~ 1279 | 오대십국(五代十國) | 카라 키탄/대거란, 대요(大契丹, 大遼) | 당항(黨項) | |
송(宋) ,대리국(大理國), | 북송(北宋) | 백고대하/서하(西夏) | ||
남송(南宋) | 안춘 구룬/대금(大金) | |||
1270 ~ 1368 | 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大元) | |||
1368 ~ 1644 | 대명(大明) ,남명(南明), ,대순(大順), ,대서(大西), ,명정(明鄭), |
중국의 역사 | ||||||
송/금/서하 | ||||||
북송 | → | 12 ~ 13세기 | → | 원 | ||
남송 |
南宋
1 개요
금나라와 영토 협상을 끝낸 1141년의 지도(분홍색)금나라 영토가 이상해보이는건 기분탓이다
1127~1279년까지 152년간 존속한 송나라의 후신, 수도는 임안(臨安, 오늘날의 항저우)
2 건국
1126년 11월~1127년, 요(916~1125)를 멸망시킨 금은 송나라로 진격해 수도 개봉을 점령하고 황제인 흠종과 상황 휘종을 포함한 황족과 신하들을 포로로 잡아간다.
이로써 북송은 멸망하였으며 금은 송나라의 신하 장방창(張邦昌)을 초제(楚帝)로 내세운 괴뢰국가 대초(大楚)를 세우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금군이 물러나자 곧 송의 군신들은 장방창에게 맹반발하며 제위를 포기하도록 권했고 장방창은 이를 받아들여 휘종의 아들 중 유일하게 포로로 잡혀가지 않은 흠종의 동생 강왕(康王) 조구(趙構)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내고 황제에 등극한지 32일만에 스스로 퇴위한다.[1]
새로운 황제로 옹립된 조구는 1127년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허난성 상추시)에서 송고종으로 즉위하며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고치고 송나라를 재건하였다.
3 계속되는 금과의 전쟁
황제로 즉위한 송고종은 곧 주전파 관료들을 기용하여 군사를 소집하는 등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이런 행위는 금을 크게 자극시켰고 마침내 '초나라를 무너뜨리고 초황제 장방창을 죽였다.'라는 명분하에 다시 대규모 남하를 시작했다.
한참 기세가 오른 금이 이런 고종을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금의 공격이 맹렬하여지자 고종은 응천부를 버리고 양저우(楊州), 항저우(杭州), 원저우(溫州) 등으로 고종은 계속해서 달아나고 급기야 1129년에는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가기까지 한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129년 남송 정부는 수세에 몰리자 수도를 남경에서 남쪽 끝 임안(항저우)으로(...) 옮겨 끝까지 저항할 뜻을 밝힌다. 그런데 남경을 함락시킨 딱 3달 후 금나라 군대는 임안까지 함락시킨다(...). 바로 이 때 고종이 바다로 달아난 것. 대륙의 남진은 급이 다르다! 여기까지는 송나라의 사망 플래그였다.[2]
양자강 이북을 점령한 금나라는 1130년 대제(大齊)라는 제2의 괴뢰국가를 세워 항장인 유예(劉豫)를 황제로 옹립했다.
남북조 시대 이후로 이토록 강남이 이민족에게 유린당한 적도 없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은 1130년 부터 갑자기 바뀌게 되는데, 남송의 명장 한세충이 1130년 4월 강중에서 최초로 금군을 대파하게 된다. (이 해 진회가 포로에서 탈출해 남송에 복귀한다.) 5월에는 악비가 금군을 대파하고, 다시 1131년에는 오린과 오개등이 화상원에서 금군을 대파한다. 1133년 악비는 강광의 군도를 평정했다. 다시 1134년에는 한세충이 다시 한번 금군을 대파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패배에 1135년 금의 태종이 죽자 금군은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진회의 협상(1142년)이 있었고, 그가 죽은 후(1155년) 해릉왕이 재침을 1162년 계획했으나 살해되고 금세종(완완옹)이 즉위하면서 다시 화평했다. 이로서 의외로 남송은 회수까지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1234년 몽골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는데 이것은 남송의 실수였다.[3] 이이제이를 무시하고 요나라를 멸망시켰다가 금나라에게 멸망한 북송처럼 남송도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의 침입을 받고 멸망하게 된다.
4 몽골과의 40년 전쟁과 멸망
남송은 북송의 영토를 수복하고자 20만 대군을 통해 화북을 공격했고 이는 몽골의 분노를 부른다. 남송의 침입을 격퇴한 1235년 2월의 쿠릴타이에서 남송 공격에 대한 방침이 정해지고, 몽골군은 남송을 공격하기로 한다. 1235년 10월 성도가 떨어지고, 다음 해 3월 양양이 함락되었으며 1237년이 되자 몽골군은 동쪽으로 황주에 도달하였다. 사태가 급반전된 것은 명장 맹공 덕이었는데 맹공은 강릉에 대한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몽골군을 연전연파하면서 양양 일대를 다시 수복하고, 기주를 되찾았으며, 사천으로 가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영토를 수복하는 등 저력을 보여준다. 한편, 몽골군의 침입으로 엄청난 수의 주민과 군인들이 중원에서 남쪽으로 피난해 왔는데, 맹공은 그들을 수용하여 군대에 편재하고 둔전을 개척하여 단단하게 방어망을 정비했다. 결국 1241년 대칸 오고타이가 죽자 몽골군은 후퇴했고 남송은 맹공의 주도로 사천 지방에만 10여개의 성을 새로 쌓아 올리고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올 때를 대비했다.
1258년 몽골의 대칸이었던 몽케는 다시 군대를 나누어 대대적인 침공에 들어갔다. 몽케는 이미 1253년에 동생 쿠빌라이를 시켜 운남의 대리국을 점령하여 남송을 포위 공격할 기반을 다졌는데 이 공격으로 남송을 멸망시킬 작정을 했다. 몽케 본인이 이끄는 주력은 사천, 동생 쿠빌라이는 악주(오늘날의 호북성 무한시), 다른 별동대는 운남에서 담주(오늘날의 호남성 장사시)로 치고 들어갔다. 몽케는 사천의 성도를 공략하고 곧이어 사천 합주 조어성(오늘날의 사천성 중경시)를 공격했는데 사천의 다른 지역이 겁을 먹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던것과 달리 남송의 명장이자 맹공의 부장이었던 왕견은 주민 10만과 결사항전을 주장하여 저항했고 몽케는 5개월 동안 공성전을 펼치다가 철통같은 방어를 뚫지 못하고 진영에 돈 전염병[4]에 걸려 죽었다.[5] 이에 몽골군은 두번째 대규모 원정도 실패하여 모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 영웅이었던 가사도[6]가 1260년 이후 덜컥 재상이 된다. 도량형, 통화개혁, 부정부패 엄단, 긴축 재정 정책 등 평시 수상으로는 나쁜 인물은 아니었지만 군벌들을 중앙에서 밀어내어 군사력을 악화시켰다. 특히 남송의 마지막 재상이 된 충신 문천상을 박해한 것 때문에 더욱 욕먹는다. 들어싸지 뭐
이후 쿠빌라이가 대칸에 오른 몽골은 이전처럼 사천, 회수남쪽의 튼튼한 요새들을 나누어서 공략하려는 전략을 버리고 양양-번성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로 한다. 1268년 몽골은 전력을 다해 10만 대군으로 양양을 집중 공격했고 남송은 사실상 최후의 방어선인 양양에서 한수를 통해 물자를 지원하면서 끈질기게 6년을 항전했으나 결국 물자지원도 중단되어 1274년 3월 6년을 버틴 수비대장 여문환이 항복해 양양이 함락되고야 만다. 같은해 6월엔 20만 대군이 강주를 함락했으며 이에 남송은 15만 대군으로 맞서보려 했으나 두번의 누란지세를 이겨낸 명장 맹공, 왕견 같은 장수는 더 이상 없었고 이 군세를 이끈건 간신 가사도였다. 결국 이 군대마저 괴멸되어 남송의 운명은 정해졌고 1276년엔 수도 임안마저 함락되었다.
가사도가 죽은 뒤엔 마지막 재상 문천상이 최후의 4년을 분투했으나 결국 1279년, 쿠빌라이의 원에 의해 패배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남송은 멸망한다. 황족들과 신하들의 최후의 항전이 눈물없인 볼 수 없는데 마지막 송의 군대는 육군은 내륙, 나머지 해군은 800척 정도의 전함에 머물며 최후의 대결을 준비했고, 백성들과 관료 황족들은 몽골 지배하엔 살지 않겠다고 수십만이 그나마 안전한 바닷배에 있다가 최후의 결전에서 몽골군에게 패배 사실이 알려진 이후 8살의 마지막 천자와 황족들, 신하들이 다 바다에 빠져 자살해버린다. 몽골 기록에 다음날 떠오른 시체만 10만구였다고 한다. 아직까지 점령되지 않아 남아있던 마지막 송의 잔류병력들까지 천자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심점을 찾지 못해 무너지고 끝내 문천상까지 처형되어 부흥운동도 중단된다.
전쟁이 끝난 이후 몽골은 송이 하도 저항이 심해서 빡친 나머지 전쟁이 끝난후 송나라인들을 모두 노예에 준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저항이 적었던 여타 국가의 백성들은 2급 시민 취급했던 것과는 다른 행보였고 결국 이 지역은 몽골에 강한 저항정신을 가져 후일 원나라가 붕괴하자 한족 반격의 중심지가 되었다. [7]
5 평가
남송의 역사는 사실 사실상 황제의 역사라기보다도 군약신강 재상의 역사[8]일 것이다. (+ 상황 정치) 유명한 진회를 시작으로, 그나마 멀쩡했던 효종 이후로는 광종을 폐위시킨 조여우, 한탁주의 권력투쟁(5년), 한탁주 독점(12년), 한탁주 죽고는 사미원(26년, 이때 금나라가 멸망했다) 그리고는 몽골의 침공 등으로 어수선했던지라 좀 조용한가 했는데 끝판왕 가사도가 나타나서...그래도 문천상이라는 남송 최후의 재상이 분전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원나라에 대항해 합주 조어성(중경) 등의 사천지역이나 강릉, 양양 등의 형주 지역에서 훌륭한 방어를 자랑했던 시절도 있었고 금나라를 역으로 위협하던 시절도 있었다. 또 근대화 전까지 막을 나라가 없었다던,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의 주공격을 두번이나 격퇴했고 10여년이나 몽골과 전면전을 한 전무후무한 나라였다. 경제력도 매우 융성하여 남방과 사천지역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물자,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세워진 요새들은 몽골군의 침공을 막는데 큰 역할을 했다.[9] 송나라 군대가 약했다는 상식과는 다르게 남송의 군사력은 매우 놀라운 수준이어서 결사적으로 몽골의 주력과 싸워 버텨냈는데 진작에 송이 아주 독한 결단을 내려 배수진의 마음으로 가진힘을 총동원 했다면 서하와 금에게 그 서러움은 안당했을지도 모르겠다.남송의 군사력, 참조. 뭐 당시 송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포와 로켓을 날리던 국가였으니...
6 남송의 역대 황제
1130년, 고종의 굴욕적인 대금정책에 반발한 이강 등의 무단파가 반현비(潘賢妃) 소생으로 고종의 유일한 아들인 조부(趙旉)를 황제로 옹립하고 연호를 명수(明受)라 정했으나 진회와 장준 등 문치파의 격렬한 반대로 3일만에 황태자로 원위치 되었다. 조부는 이때의 충격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니 향년 3세였다. 고종은 크게 비통해 하며 원의태자(元懿太子)라는 시호를 추증했고, 고종의 직계가 단절됨에 따라 태조의 셋째 아들 조덕방의 6세손인 조신을 양자로 삼아 제위를 물려주니 그가 바로 효종이다.
북송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왕조이므로 10대부터 표기한다. 즉 송은 960년에 건국해 1279년에 멸망했다고 볼 수 있다.
대수 | 묘호 | 이름 | 연호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재위기간 | 능호 |
10 | 고종(高宗) | 조구(趙構) | 건염(建炎, 1127.5~1130) 소흥(紹興, 1131~1162) | 1127.6.12 | 1130 | 3년 | 영사릉(永思陵) |
임시 | - | 조부(趙旉) | 명수(明受, 1130) | 1130 | 1130 | 3일 | - |
복위 | 고종(高宗) | 조구(趙構) | 건염(建炎, 1127.5~1130) 소흥(紹興, 1131~1162) | 1130 | 1162.7.4 | 32년 | 영사릉(永思陵) |
11 | 효종(孝宗) | 조신(趙昚) | 융흥(隆興, 1163~1164) 건도(乾道, 1165~1173) 순희(淳熙, 1174~1189) | 1162.7.24 | 1189.2.18 | 26년 209일 | 영부릉(永阜陵) |
12 | 광종(光宗) | 조돈(趙惇) | 소희(紹熙, 1190~1194 | 1189.2.18 | 1194.7.24 | 5년 157일 | 영숭릉(永崇陵) |
13 | 영종(寧宗) | 조확(趙擴) | 경원(慶元, 1195~1201) 가태(嘉泰, 1201~1205) 개희(開禧, 1205~1208) 가정(嘉定, 1208~1225) | 1194.7.24 | 1224.9.17 | 30년 55일 | 영무릉(永茂陵) |
14 | 이종(理宗) | 조윤(趙昀) | 보경(寶慶, 1225~1227) 소정(紹定, 1228~1233) 단평(端平, 1234~1236) 가희(嘉熙, 1237~1240) 순우(淳祐, 1241~1252) 보우(寶祐, 1253~1258) 개경(開慶, 1259) 경정(景定, 1260~1264) | 1224.9.17 | 1264.11.16 | 40년 60일 | 영목릉(永穆陵) |
15 | 도종(度宗) | 조기(趙祺) | 함순(咸淳, 1265~1274) | 1264.11.16 | 1274.8.12 | 9년 269일 | 영소릉(永紹陵) |
16 | 공제(恭帝) | 조현(趙顯) | 덕우(德祐, 1275~1276.4) | 1274.8.12 | 1276.2.4 | 1년 176일 | 위치미상 |
17 | 단종(端宗) | 조하(趙昰) | 경염(景炎, 1276.5~1278.4) | 1276.6.14 | 1278.5.8 | 1년 328일 | 영복릉(永福陵) |
18 | 소제(少帝)[10] | 조병(趙昺) | 상흥(祥興, 1278.5~1279.2) | 1278.5.10 | 1279.3.19 | 313일 | 홍콩부근추정 |
7 계보
추존황제 선조 조홍은 | |||||||||||||||||||||||||||||||||||||||||||||||||||||||||||
1.태조 | 2. 태종 | ||||||||||||||||||||||||||||||||||||||||||||||||||||||||||
3. 진종 | |||||||||||||||||||||||||||||||||||||||||||||||||||||||||||
4. 인종 | |||||||||||||||||||||||||||||||||||||||||||||||||||||||||||
5. 영종 | |||||||||||||||||||||||||||||||||||||||||||||||||||||||||||
6. 신종 | |||||||||||||||||||||||||||||||||||||||||||||||||||||||||||
7. 철종 | 8. 휘종 | ||||||||||||||||||||||||||||||||||||||||||||||||||||||||||
9. 흠종 | 10.고종 | ||||||||||||||||||||||||||||||||||||||||||||||||||||||||||
11.효종 | 원의태자 | ||||||||||||||||||||||||||||||||||||||||||||||||||||||||||
12.광종 | |||||||||||||||||||||||||||||||||||||||||||||||||||||||||||
13.영종 | |||||||||||||||||||||||||||||||||||||||||||||||||||||||||||
14.이종 | |||||||||||||||||||||||||||||||||||||||||||||||||||||||||||
15.도종 | |||||||||||||||||||||||||||||||||||||||||||||||||||||||||||
16.공종 | 17.단종 | 18.소제 |
- ↑ 후에 장방창은 담주(潭州)로 유배당한 뒤, '불충'한 죄로 사약을 받게 된다.
- ↑ 실제로 이 사망 플래그는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 때 재반복 되는데, 이번에는 악비고 의병이고 협상이고 그딴건 없고 그대로 남송 황족 전원이 바다로 몸을 던져야했다.
- ↑ 근데 당시 상황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몽골에게 밀리는 상황에서도 금은 꾸준히 남송을 공격해왔기 때문. 이전의 원한도 있는데 이렇게 하는 상대를 누가 믿겠는가? 금이 남송에게 동맹 제의를 한 건 금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상황까지 온 뒤였다.
- ↑ 몽케 본인이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
- ↑ 이 지역은 1279년 남송이 멸망할때까지 버티다가 항복한다.
- ↑ 말이 전쟁 영웅이지 사실 짜고친 고스톱(...) 항목 참고
- ↑ 100년도 안되어 결국 원나라는 강남일대에서 일어난 한족의 명나라에게 중원과 강남을 빼앗기고 몽골로 달아나고만다
- ↑ 원래 한족들은 왕이나 황제라고 해서 절대 충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한비자와 같은 법가 사상가들이 신하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하는 게 당연시되는 이유가 있던 셈이다.
- ↑ 앞서 언급한 사천 지방의 조어성이 이런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세워진 튼튼한 요새의 대표적 예였는데 이 곳은 또 물자가 풍부하게 준비된 곳이여서 송의 수비군이 물고기와 밀가루를 몽골군에게 던지며 우린 10년도 더 버틸수 있다고 조롱했다고 한다.
- ↑ 원에서 마지막 황제를 송공제 조현으로 간주하고 조병에게는 정식 시호나 묘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흥제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자세한 건 소제 항목을 참고.